아스카 문화 (飛鳥)
7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당시 정치의 중심이 나라분지 남쪽 아스카(飛鳥)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제도, 문물 등을 수입하여 일본 국내의 제반 체제를 혁신하고 아스카 문화를 개화 시킨 시대이다. 그 시대적 구분에는 여러 가지 설(說)이 있으나 쇼토쿠 태자(聖德太子)의 섭정시대를 중심으로 한 시대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반도에서 일본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해지던 시기를 전후하여, 야마토 조정 내에서는 오오미 소가(蘇我)씨와 오무라지 모노노베(物部)씨가 조정에서의 지도권을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소가씨는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노노베씨는 80인의 우지비토(八十氏人)을 거느리고 씨족제적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는 보수파였으므로, 양씨는 국내와 대외정책에서 매사에 충돌 대립하였다.
불교 수용의 가부에 대해서도 이 두 씨족은 당연히 다른 입장을 취하였다. 소가씨는 숭불, 모노노베씨는 배불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배불파의 세력이 강했으나, 점차 숭불파에게 유리한 정세로 변하여 갔다. 이에 초조해진 오코시의 아들 모리야는 587년 요메이 천황의 후사 결정에 즈음하여 아나호베 황자를 추대함으로써 일거에 소가씨를 타도하려 하였으나 이나메의 아들 우마코와 그를 지지하는 여러 황자와 호족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되고 말았다.
모리야가 제거 된 뒤 천황이 된 것은 아나호베황자의 동생 핫세베 황자 즉 스꽅 천황이다. 그러나, 천황과 우마코 사이에 균열이 생겨 592년 결국 천황은 우마코의 부하 야마토노아야노 아타에코마에게 암살되며, 일본 최초의 여제(女帝) 스이코 천황이 즉위 하지만, 천황은 조카인 쇼토쿠 태자(聖德太子)가 섭정으로 임명되어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쇼토쿠 태자(聖德太子)는 중신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의 협력을 얻어 조정의 중앙 집권을 강화하고 관료제를 확립시켜 관위 12계층을 제정 이어 유교사상과 불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헌법 17조를 만들어 지방의 호족이 나아갈 바를 명시하였고, 불교를 공식적으로 후원했다.
그리고, 수(隋)나라에도 사신(遣隋使)을 보내어 선진문화를 받아 들여 왕권이 강화된 중국적 정치 체제를 골격으로 율령(律令)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이 시대의 문화인 아스카 문화는 백제 문명의 연장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우리나라로부터 많은 제도, 문물이 수입되었다. 유교, 불교를 비롯하여 건축, 조각, 회화 등의 대부분이 우리나라의 학자, 승려, 백제유민 등에 의해 전수 되었다.
아스카사(법흥사)는 소가노마코의 발원으로 건립되기 시작, 9년 만인 596년에 준공되었다. 이 절을 건립하기 위해 백제에서 혜총을 비롯 여러 명의 승려와 사찰 전문 기술자가 파견 되었으며 고구려의 설계기술이 도입되기도 했다. 이 절의 완성으로 아스카에 수도가 세워지면서 아스카문화가 시작됐던 것이다.
그러나 아스카사는 1천4백여년이 흘러오는 동안 당초의 건물은 소실되고 전원과 민가(民家)로 변해버렸다. 그러다 발굴조사단의 노력으로 사찰규모가 탑을 중심으로 동, 서 , 북쪽에 3개의 금당이 배치된 일본 최고의 가람이었으며,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리고 그 외측에는 강당이 있는 장대한 사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스카사에 안치된 본존 아스카대불은 일본 최초의 석가여래상으로 사찰이 완성된 지 10여년 후인 609년에 완성되었다. 당시 스이코(推古)천황이 성덕태자(聖德太子), 소가노마코 대신들과 함께 서약을 맺어 백제 도래인인 시바타토(司馬達等)의 손자 구라즈쿠리(鞍作)라는 불사(佛師)에게 명하여 만든 일본 최고의 불상이다. 당초에는 금동 불상으로 양측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거느린 석가삼존이었는데 12세기 후반 대화재로 전신에 상처를 입었고 그후 보수를 받아 오늘날까지 내려왔다.
아스카사(법흥사) 복원도
아스카사(법흥사) 가람 배치도를 들고 있는 스님이 너무나 애때다.
절의 금당안에는 백제인 사마지리(司馬止利)가 주조한 아스카대불로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금동불이 안치되어 있다. 1196년에
번개에 맞아 불타 버려 그 후 현제 안거인(安居院)이라는 불당만이 남아 있다.
아스카사(법흥사) 대불
아스카사(법흥사) 대불은 석가여래 부처님으로 철로 된 부처님이다.
부처님의 왼쪽에 있는 쇼오토구 나이시상
(聖德太子 573-621)
일본 요메이왕의 둘째 아들로 우마야도
왕자․도요토미미왕자․우에노미야노미코 등으로 불리웠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문에 능통하였고 불교에 깊이 귀의하였다. 아버지가
죽고 596년 숙모인 스이코왕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어 섭정으로 정치를 맡아 과위 12계와 헌법 17조 등을 제정하였다. 595년(고구려
영양왕 5년, 백제 위덕왕 42년) 고구려의 승려 혜자와 백제의 승려 혜총이 일본으로 건너가자, 혜자를 스승으로 삼아 불교를 보급하였다.
596년 완성된 호코사 창건에는 고구려로부터 많은 기술자를 초빙하였고, 607년 호류지(法隆寺)를 창건하는 등 불교의 흥륭에 힘썼다. 호류지에
전해 오던 백제 아좌태자가 그린 쇼토쿠태자 초상은 일본의 제실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서에 <삼경의소>가
있다.
만엽문화관은 만엽집을 토대로 생활상과 의복, 놀이모습 등을 테마로 인형들을 이용하여 꾸며 놓은 곳이다.
만엽집이라 하면, 서기 5세기 전반부터 8세기 중반에 이르는 동안에 일본의 시가를 약 4천5백수 가량 모아놓은 20권에 이르는 일본내 가장오래된 시가집이다.
그당시의 일본은 문맹에 가까웠던 시대라고 보는데, 이 만엽집의 저자는 대부분 천황이나 귀족들같은 지배계급의 작품이라는 정설이고, 오늘날의 학자들은 "만엽집"을 쓴 계층을 한반도 출신으로 주정하고 있다 한다. 그리고 그 중 만엽집 내에서도 가장 뛰어난 3대 가인인 궁정가인 누가다(액전왕), 산상억량 산부적인등은 모두 한반도 계통이라고 한다.
내용은 고대 일본의 생활모습, 사랑, 기쁨과 슬픔, 꽃 이름 등 자연을 노래한 것,그리고 신앙등를 담은 것들이다.
피장자가 백제계의 소가노마코(蘇我馬子)라고 알려진 석무대(石舞台) 고분
이 일대의 여기 저기 고분이 598개나 널려 있다.
【백제문화의 일본 전파】 근초고왕 때 최초로 일본에 한학을 전하고, 근구수왕 때 왕인박사가 논어(論 語)와 천자문(千字文)을 전했으며, 무령왕 때 단양이·고안무, 성왕 때 유귀(柳貴) 등은 오경박사(五經博 士)로서 한학과 유학 등을 전하였다. 그리고 무왕 때 관륵(觀勒)은 천문·역법·지리 등을 전하고, 성왕 때(552) 노리사치계는 최초로 불교를 전했으며, 혜총은 쇼토쿠태자의 스승이 되고, 도장은 성실론(成實論) 을 저술하였다. 아좌태자는 쇼토쿠태자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그 밖에도 화공(畵工)·와공(瓦工)과 경사 (經師)·율사(律士)·의사들을 보냈다. 이와 같이 삼국 중 백제문화는 일본의 문화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 였다.
나라시대(奈良時代)
710년에, 조정은 중국의 당왕조의 수도인 장안(지금의 서안)을 모델로 삼아, 나라에 헤에죠오교오(平城京)라는 도읍을 건설했다. 가로 세로로 넓은 도로를 만들고, 천황의 궁전, 귀족들의 저택, 절 등이 늘어서 있었다. 푸른 기와지붕에 빨간 기둥, 흰 벽의 당나라풍의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는 나라의 도읍지는 마치 아름다운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있는 것 같다고 노래 불려졌다.
平城京은 약 70년간 수도로서 번창했는데, 이 동안을 나라시대라고한다. 나라시대는 大寶율령에 근거하여 천황에 의한 정치(율령정치)가 행해지고, 도읍지는 번창하고 귀족들은 화려한 생활을 즐겼다. 시장이 생겨나고, 708년에는 화폐도 사용되어졌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노역, 병역때문에 가난에 허덕여야만 했다. 그중에는 토지를 버리고 도망쳐버리는 자도 생겨났다. 그래서 조정은 새로이 초지를 간척하는 자에게는 그 토지를 영원히 소유하게 해 주는 법을 만들었다. 그러자 유력한 귀족이나, 신사나 절, 지방호족 등이 앞을 다투어 대규모적인 간척사업을 하여 자신들의 토지를 확장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생긴 사유지(=장원)는 그 후에도 점점 확장되어가서, 율령정치의 근본인 公地公民제도가 붕괴되어 버린다. 조정의 정치도 부패하여 넓은 토지를 가진 귀족이나 승려들이 정치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됐다.
나라시대 중반, 흉작이 계속되고 전염병이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귀족과 승려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불심이 깊었던 쇼오무 천황(聖武天皇)은 부처의 힘으로 사람들의 불안을 진정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나라에다 토오다이지(東大寺)를 건립하고, 그 안에 본존으로 높이가 16m나 되는 금동대불을 만들었다. 토오다이지 바로 옆에 쇼오소오잉(正倉院)이 있는데, 이것은 쇼오무 천황이 사용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지금도 수많은 보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그 중에는 중국이나 인도, 페르샤등으로 부터 수입된 진귀한 공예품도 섞여 있다. 그 유물들이 1200년 뒤인 오늘날에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은, 쇼오소오잉이 통풍이 잘되고, 습기를 막는 일본풍토에 적합한 목조 건축법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천황의 허가 없이는 절대로 열 수가 없는 창고이기 때문이다.
조정은 7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십수차례나 견당사를 파견, 당왕조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였다. 텐표오 문화(天平文化)라고 불려지는 이 시대의 문화는, 정치가 불교에 의한 진호국가를 이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문화가 고도의 발전을 보이고, 또한 문화전반에 걸쳐 당문화의 영향이 농후하다. 국가에 의한 당문화의 적극적인 섭취를 반영하여, 현란한 문화의 추진자는 귀족계급이었으며, 중앙편중의 문화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万葉集』와 같이 각계 각층 사람들의 적나라한 생활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도 생겨났으며, 천황 가문의 유서 깊음과 그 권력의 정통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사편찬이 국가적 사업으로 거행된 것은 당나라에 대한 일본의 국가 의식의 발전이라고도 생각되어진다.
平城京 :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모방한 것이지만, 규모는 그보다 작은 동서 4.2km 남북 4.7km의 크기였다. 북쪽 중앙에 천황의 궁궐이 있고, 주작대로를 경계로 左京, 右京으로 나누어진다. 또한 동서남북으로 뻗어진 도로에 의해 구획되어지고 남북은 條, 동서는 坊으로 위치를 표시했기 때문에 이런 도시형태를 조방제라고 한다.
견당사 : 630년 제 1회 견당사가 파견된 이래 894년 스가와라노 미찌자네(管原道眞)의 건의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13회 파견되었다. 8세기에는 그 조직도 대규모이었으며, 견당사 이외에도 유학생, 유학승등이 동행하여, 국제적으로도 앞선 당나라의 정치제도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입했다. 일본문화의 발달에 끼친 영향은 실로 다대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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