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이 만들어진 지 올해로 2003년 째 되는 해에 박선생님이 방문
국내성은 환도산성과 함께 우리 역사상 축성연대가 확실한 최초의 도성(都城) 이다. 삼국사기에 유리왕 22년(단기 2336, 서기 3년) 겨울 10월 고구려가 졸본으로 부터 여기로 서울을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고고학자들의 발굴조사에 따르 면 돌로 성을 쌓기 이전에 이미 흙으로 쌓은 성이 있었다고 한다.
그 토성에서 발 굴된 돌도끼, 돌칼, 원형석기 등을 감정한 결과 BC 5-3세기 때의 것이라는 것이라 고 하니 부여나 그 이전인 (고)조선 때부터 이미 우리 조상들이 살고 있었던 터전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초기 유리왕이 졸본성에서 여기로 수도를 옮긴 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 도할 때까지 425년이란 긴 세월 동안 고구려 정치경제의 중심지였던 국내성이기 때문에 우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대단히 크다.
국내성은 일제시대 때 대대적 인 개축공사를 하지 전까지도 원형의 모습이 잘 남아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심하 게 파괴되어 있다. 총 길이는 2,686m이었던 것이 지금은 북쪽 성벽만 남고 모두 사 라져 버린 것이다. 현존하는 성벽의 너비는 약 7∼10m로 평지에 세운 성이기 때문 에 산성에 비해 넓다.
성벽의 높이가5-6m 이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2m 정도만 남 아 있다. 필자가 1990년 처음 갔을 때만 하더라도 3∼4m 정도 높이의 석축 위에는 20여 년생 쯤으로 보이는 곧게 자란 미루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아파트 촌 옆에 관광객을 위해 살려놓은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다. 일본의 밀정이 처음 광개토태왕비 탁본을 떠갔던 100여 년 전만 해도 20여 호 정도밖에 살지 않았던 이곳이 이제는 인구 20만이 넘는 집안시 소재지로서 위용을 갖추게 되었으나, 이에 따라 새로 지은 건물들 밑으로 고구려의 유적들은 사라져 가고 있다.
-1999년 서길수 저 [고구려역사유적답사](사계절출판사) 에서 옮김
국내성 주춧돌엔 함부로 된 낙서만 가득
세계문화유산 지정 기념으로 이 곳의 아파트를 조만간 철거 할 예정 당연히 주민들은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다. 1999년 방문했을 때 국내성의 성축이 인가의 담장으로 사용되고 이곳 저곳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얼마잖아 국내성 흔적이 없어지겠다고 걱정하였는데.. 그나마 세계문화유산 지정으로 보존은 되게 되어 다행이다.
국내성 서쪽 벽은 온전하게 남아 있음
수도 방어의 요지 환도산성(丸都山城)
주변국들의 위협에 대한 고구려의 전략은 국내성에서 북쪽으로 2.5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환도산성의 존재에서도 확인된다. 고구려의 성은 대개 이성(二城)체제다. 즉 이 성은 국내성의 군사 방어선으로 평상시에는 무기, 식량 등 군수품을 비축하였고, 전시에는 국왕이 피신하는 성으로 이용되었는 이중구조다. 국내성이 평지성이라면 환도산성은 전시성인 것이다. 평지성이 아무리 방어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적의 집중 공격을 받게 되면 견뎌낼 수 없는 비상 상황을 위해 수도 방위성을 쌓은 것이다.
큰 전쟁이 일어나면 왕과 군대뿐만 아니라 도성안의 모든 백성들이 산성으로 올라가 침입한 적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실제로 고구려는 국내성 천도 이후 두 번에 걸쳐 환도산성에서 큰 전투를 벌였다. 고구려 11대왕 동천왕 20년(246년)에 위나라 관구검이 1만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와 처절한 전투를 벌였지만 환도성이 함락 당하는 비운을 겪었으며, 16대 고국원왕 12년(342년)에 연나라의 모용황의 침입시에도 치열한 전투를 치뤘던 기록이 있다.
환도산성에는 북쪽, 동쪽, 남쪽 세 방향에 5개의 출입구가 있지만 실제로 남문 길 외에는 산성을 오를 만한 곳이 없어 보였다. 북쪽과 동쪽의 문은 모두 산마루 위에서 절벽으로 연결되어 계단으로 통해서만 산 밑으로 내려갈 수 있기 때문에 남문만이 정상적인 통로였을 것이다.
환도산성의 지형지세만 보아도 고구려인들의 뛰어난 전략전술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자연지세를 활용해 적들이 공격해 들어 올수 있는 방향을 단순화 시켜 방어력을 최대한 높였다.
동천왕 20년에 위나라 관구검이 침략해 환도산성을 함락시켰을 때도 가장 험난한 서북면을 야습했기에 성공했다고 한다. 전쟁 초기에 승리를 거둔 동천왕이 자만에 빠져 성의 유일한 진입로인 남쪽에만 병력을 집중시키고 지형이 험난한 곳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를 간파한 관구검은 힘 쎄고 빠른 병사들에게 밧줄을 메고 서북쪽 벼랑을 오르게 한 뒤 야습을 했기에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동천왕이 자만에 빠지지만 않았더라도 성이 함락되는 비운을 겪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집안지역과 그 주위에 확인된 고분만 1만 2천여기가 있음
'고구려와 백제의 흔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문화 비교-자금성(紫禁城, Forbidden City ) (0) | 2006.07.09 |
---|---|
중국 문화 비교-천안문 (0) | 2006.07.09 |
광개토왕비와 태왕릉 (0) | 2006.07.08 |
세계문화 유산으로 선정된 장군총 (0) | 2006.07.08 |
동북공정에 휩싸인 지안박물관과 고구려 고분벽화 (0) | 2006.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