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백제의 흔적

세계문화 유산으로 선정된 장군총

보리숭이 2006. 7. 8. 18:42

 http://www.koguryo.org/Frame.htm 사단법인 고려사연구회 자료 참조

 

 

세계 문화 유산을 기념하여 대규모의 민가를 철거하고 토끼풀을 엄청 심어 놓았다.

 

 

고구려 수도이었던 연변 집안 (中國 吉林省 集安)에 있는, 일명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이 장군총은 집안 지역에서 가장 특출하게 돗보이는 반듯한 피라미드로 인하여 만주 전역을 휘어잡은 고구려 (高句麗)의 광개토대왕의 무덤 (廣開土王陵)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이 무덤이 광개토대왕의 비석으로부터 1Km나 떨어져 있고, 광개토대왕의 비석에서 불과 500m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적석총에서 '태왕릉이 산처럼 굳건하고 평안하기를 바란다 ( 願太王陵 安如山 固如岳 )'라는 의미의 명문 (銘文) 벽돌이 출토되고, 무덤의 크기도 이 장군총에 비하여 4배나 되어 오히려 난잡하고 볼상 사나운 적석총을 광개토대왕의 무덤 (太王陵)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리고 이 장군총은 고구려 장수왕의 무덤이라 추정하는 학자도 있지만 아직 분명한 것은 아니다.

 

고구려는 졸본(환인 )의 오녀산성에서 나라를 세운 뒤 (BC 37), 유리왕 22년 (AD 3)에 집안 (국내성)으로 천도하여 장수왕 15년 (AD 427)까지 이 집안을 400여년간 고구려의 수도로 삼았다. 이 장군총은 대략 5세기 이전에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면은 국내성 (集安)을 바라보는 서남향이며 네 귀가 동서남북을 가르킨다.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석실 안 석관의 머리 방향이 53도로 북동쪽에 있는 백두산 천지 (白頭山 天池)를 향하고 있다한다. 즉 고구려의 근본이 백두산 천지에서 부터 시작되었다는 추정으로서 어느정도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백두산 천지와 함께 이 장군총이야 말로 한국인이면 누구나 보고싶은 명소이어서 필자가 직접 답사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지만 아직 기회가 없어 여기에는 주로 인용문을 적어놓는다.

"장군총은 잘 다듬은 화강석재로 7단의 방단 (方壇)을 계단형으로 쌓았고 분구의 정상은 절두방추형을 이루었으며 제1방단은 4단이지만 제2방단에서 부터 윗부분은 3단으로 되어있다. 높이는 12.4미터, 제1방단의 한 변은 약 31.58미터, 제일 위의 제7방단의 한 변은 약 15미터이고 각 변은 각각 방위선상 (方位線上)에 놓여있으며 제1방단의 각 변에는 각기 3개의 긴 자연석 (가장 큰 것의 너비는 약 2.7미터, 길이는 4.5미터 )이 기대어 세워져 있다. 그 내부 주체인 횡혈식 석실은 제3방단의 윗면이 현실 바닥이고 제5방단의 서남면에 연도가 달려있으며 평면은 정방형, 한 변의 길이는 약 5.5미터, 높이 또한 약 5.5미터이다. 현실의 네 벽은 다듬은 화강암을 사용하여 6단으로 쌓아올리고 네 벽의 윗부분에는 벽면과 평행으로 1단의 방주형 (方柱形) 평행 굄돌을 놓고 그 위에 커다란 판석 한 장을 덮어 구축한 평천장이다. 그리고 벽면, 천장에는 석회를 바르고 현실 입구에는 2장의 돌문이 있었으나 파괴되었다. 연도의 길이는 약 5.45미터, 너비 2.6미터, 높이 약 2.6미터이다. "
(인용 ; 김기웅, '고분', 빛깔있는 책들, 대원사, 1995)

 

 

"만주 지방에서 일어난 고구려가 선대의 돌무덤 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이 돌무지 무덤인데, 돌각담 무덤이라고도 하고 적석총이라고도 하는 바 고구려 전기 수도였던 만주 집안 지방에는 무려 1만 기 이상의 고구려 고분이 있다. 기원전 3,4세기 고구려 중기에 오면 돌무지무덤에 3단, 5단, 7단식으로 층 수가 증가하면서 마치 계단식 피라밋형의 돌무덤으로 축조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장군총과 태왕릉이다.

 

과거 일제시대에 장군총의 맨 위층인 제7층의 사방 변두리에서는 난간 구멍이 발견되었고 피라밋의 위와 주변에서 많은 양의 기와와 벽돌이 발견된 바 있다. 필자가 현지를 탐방하면서 장군총의 맨 위 정상부 동남쪽에서 여러 장의 판석을 확인하였는데, 아마 주춧돌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래서 필자는 피라밋 위에 원래는 어떤 건축물을 일종의 능묘 위에 세우는 사당 (陵上廟)과 같은 성격의 이른바 향당 (享堂)이라고 한다. 역시 제사를 지내는 종교적인 시설로서 옛날에 동이민족이 세운 나라에서 유행하던 묘제의 하나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청나라 때 (건륭 31년)의 '곡부현지 (曲阜縣志)'에 동이민족의 시조라고 하는 소호 김천씨 (少昊 金川氏)의 피라밋 능묘 위에 향당 건축과 같은 건축물이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김유신전에 보면 "신라 사람들이 스스로 소호 김천씨의 후손이라 일컬었다. ( 羅人自謂金川氏之後 故姓金 ...首露與新羅同性也 )"고 했다. " (인용 ; 이형구, 한국 고대문화의 기원, 도서출판 까치, 1991)

집안 주변에 널려져 있는 수많은 고분들 가운데 이 장군총이 유별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적석총을 둘러싼 12개의 자연석 (호석 ; 護石)과 주변에 배총 (陪塚)이라 하여 이집트 피라미드의 스핑크스처럼 이 장군총을 지켜주는 수호자가 있다는 점이다. 호석은 십이지신상의 기원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배총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분명한 학설이 제기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왼쪽 사진에서 보이는 고인돌과 같은 것이 바로 배총이다. 현재는 하나만 남아있으며, 과거에는 이 장군총의 네군데 모서리 방향에 배총이 있었다고 한다.
(1997년 1월 작성)
(인용 ; (1) 김기웅, '고분', 빛깔있는 책들, 대원사, 1995, (2)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조선일보사, 1993)

 

무덤 사방에서 굉장히 큰 돌을 3개씩 기대어 세워놓았는데 부쪽 맨 왼쪽 하나가 깨져 지금은 11개만서 있다. 11개 가운데서 가장 작은 것이라도 15톤이나 되고, 직접 서 보니 필자 키보다 두 배가 넘는 것도 있다.
이런 세운돌들은 '밑 기단 돌이 밀려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현지 학자들의 주장이지만 필자와 함께 간 건축가는 그 정도의 무게로는 무너지는 것을 막는 버팀돌 노릇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한 면에 3개식 12개를 세워 12지처럼 보호신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장군총 위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오른쪽, 그러니까 동북쪽을 보면 마치 고인돌 비슷한 돌더미가 보이는데 이것이 딸린무덤이란 것이다.
원래 장군총에는 5기의 딸린무덤이 있었는데 지금은 1기밖에 남지 않았다
장군총과는 모양도 판이하게 다르고 크기도 대단히 작다. 남은 한 기의 딸린무덤도 일찍이 도굴당하고 파괴되어 지금은 밑부분 3계단만 남아 있다. 밑변 길이 9.2m, 계단 높이 1.9m이다.
이러한 딸린무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에도 3개가 있다고 한다. 딸린 무덤은 왕의 첩들이라는 설이 있으나 아직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아 수수께끼인 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