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백제의 흔적

광개토왕비와 태왕릉

보리숭이 2006. 7. 8. 20:09

MBC 드라마 ‘주몽(朱蒙)’이 고구려사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 5월 15일 첫 방송을 시작해 방송 시작 8회 만에 시청률 30%를 돌파하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 드라마는 고구려의 건국 시조인 주몽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총 제작비 300억원, 60회 장편으로 기획된 ‘블록버스터 사극’이라는 방송국의 선전대로 매회 볼거리와 극적인 재미를 선사하며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고 있다.

 

드라마 ‘주몽’의 홈페이지에는 주몽과 동명왕의 명칭을 둘러싸고도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일단 ‘왜 중국식 이름인 주몽을 그대로 쓰고 있느냐’는 비판이 있다. 사실 주몽은 중국식 이름이라는 주장이 일찍부터 있어왔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주몽이란 이름이 중국 문헌에 기록된 것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기 때문에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추모’로 쓰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시조 동명성왕이 성은 고(高)씨요, 휘(諱)는 주몽’이라고 돼 있지만 주몽은 추모(鄒牟)라는 본명의 중국식 표기라는 것이다. 또 ‘위서’에 ‘주몽은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일컫는다’고 풀이돼 있는 것을 감안하면 주몽은 별명이지 이름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위에 지적된 광개토대왕비를 박선생님이 최근 방문하여 실감이 더 나는 것 같다. 1999년 갔을 때는 비석을 바로 볼 수 있었는데, 방탄유리로 막을 가린 사진이 보여 의아했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이다.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현재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을 광개토왕의 능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부근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비는 커다란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으로 된 불규칙한 직4각형의 기둥 모양으로 된 4면비로, 남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서 세워져 있다. 비는 발견된 이후부터 주목을 받아, 지안 현 지사였던 유천성(劉天成) 등의 모금으로 비바람의 침식을 막기 위해 1928년에 2층으로 된 비각을 설치했다. 이 비각은 1976년에 낡아서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철거되고, 1982년에는 중국 당국에 의해 대형 비각이 세워져 지금에 이른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높이는 6.39m로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부분이 약간 좁다.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m, 제2면이 1.35m, 제3면이 2m, 제4면이 1.46m이다. 아래에 화강암의 받침대를 만들었는데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4각형이고, 두께는 약 20cm이나 고르지 않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해 비면에 가로·세로의 선을 긋고 문자를 새겼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내용은 크게, ① 서언(序言)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②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③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한·일 고대사학계의 최대 쟁점이 되어 온 구절은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以爲臣)"로서, 여기에서 문맥과 전혀 관계없이 왜(倭)가 나온다.

 

이를 근거로 일제의 학자는, 4세기에 한반도 남단에 일본의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그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런 해석은 1884년 일본군 대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1889년 《회여록(會餘錄)》 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 등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즉, 압록강 북쪽에 큰 비가 있다는 사실은 〈용비어천가〉를 비롯해 조선 전기의 문헌에서 간혹 언급한 경우가 있으나 비문을 확인한 적은 없었다. 17세기 이후 청(淸)에서 이 지역을 만주족의 발상지로 간주하여 봉금제도(封禁制度 : 거주금지 조치)를 시행하자 인적이 뜸해져 잊혀진 상태로 있다가, 봉금제도가 해제되고 회인현(懷仁縣)이 설치된 뒤 1880년을 전후해서 재발견되었다. 당시 비가 재발견된 경위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 비 발견의 소식이 알려지자 당시 회인현의 지현(知縣)이던 장월(章)이 관월산(關月山)을 보내어 탁본을 만들게 했고, 그 후 중국의 서예가나 금석학자들에 의해 많은 탁본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비문의 내용을 자료로 구체적인 역사연구를 한 것은 아니었고, 초기의 탁본은 대개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었다. 비가 재발견된 초기에 탁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불을 질러 비면의 일부가 탈락되었고,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해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킴으로써 이후 연구에 논란을 일으켰다.

 

비문을 해독하고 연구를 독점한 것은 일본인이었다. 일본에서 처음 입수한 비문은 만주지역에서 정보수집활동을 수행하던 포병중위 사쿠오[酒句景信]가 1883년에 가져온 쌍구가묵본이었다. 이를 기초로 참모본부에서 해독작업을 진행했고, 1888년에 그 내용이 아세아협회의 기관지인 〈회여록 會餘錄〉 5집에 실려 일반에게 알려졌다. 이후 속속 연구물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나, 그 대부분은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와 〈니혼쇼키 日本書記〉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을 정벌했다는 전설적 내용을 관련지어 그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연구 속에서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정설로 정착되었다. 그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고 나서는 본격적인 현지조사가 이루어져, 1913년에는 세키노[關野貞]·이마니시[今西龍]가 자세한 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만주사변 이후 1935년에는 이케우치[池內宏]를 비롯한 조사단이 현지에 가서 고분을 비롯한 유적을 자세히 조사했다.

 

  일본인에 의해 연구가 독점되고 있는 동안 한국인들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08년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에 비문이 수록되었고, 1909년에 박은식신채호가 언론에 간단히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신채호가 1914년 현지에 가서 직접 확인하고, 〈조선상고사〉에서 비문의 "결자(缺字)에 석회를 발라 첨작(添作)한 곳이 있으므로 학자가 그 진(眞)을 실(失)함을 한(恨)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도구가 없어 비를 실측하지도 못했고 탁본을 자료로 연구에 이용하지도 못했다. 해방 전 한국인에 의한 비문연구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정인보의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 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이라 할 수 있다. 이는 1930년대말 무렵에 집필된 것으로, 신묘년기사에 대해 일본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즉 기존의 일본인은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을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그는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고구려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전혀 상반되는 견해를 제시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 일본에서는 1959년 데이지로[水谷悌二郞]가 여러 탁본들을 대조하여 각각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고, 석회를 바르기 전의 탁본과 바른 뒤의 탁본을 구별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그동안 일본에서 진행된 연구에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하는 문제제기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1963년에 중국과 합동으로 능비가 있는 현지를 찾아가서 조사를 실시했고, 1966년에는박시형의 〈광개토왕릉비〉가 간행되었다. 여기서는 능비에 관한 우리쪽 문헌을 거의 망라하여 찾아내고, 또 비의 재발견 경로를 상세히 검토했다. 또 문제가 되는 '신묘년기사'에 대해서는 정인보의 해석법을 받아들여 기존에 일본인들이 주장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연구의 일환으로 1966년에 김석형이 〈초기 조·일관계사 연구〉를 간행하여 일본 식민주의 사학자들이 주장해온 임나일본부설을 전면 부정했다. 그리고 정반대로 삼한 삼국의 이주민들이 일본열도로 이주해 분국(分國)을 수립했다는 새로운 학설을 주장해, 이후 북한 학계의 정설로 굳어졌다. 그는 신묘년기사에 대해 "왜가 신묘년에 와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제를 깨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한 박시형과는 약간 해석을 달리했다. 그러나 북한의 연구가 국내에 전면적으로 소개된 것은 1980년대 후반으로 남한의 연구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1970년대초에 재일 연구자 이진희(李進熙)는 1900년 전후해 참모본부에 의해 비문의 문자가 석회로 조작되었다는, 이른바 '석회도부작전설'(石灰塗付作戰說)을 주장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일본 학계의 일부는 근대 일본 역사학의 체질문제를 거론하여 자기반성을 행하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반론을 펴기도 했으나 자체적으로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즈음부터 국내에서 비로소 정밀한 검토가 이루어지기 시작해, 80년대 들어 다수의 정밀한 연구가 나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신묘년기사가 왜를 주체로 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주체가 된 것이라는 전제 아래, 비문 속의 왜는 백제나 가야의 활동에 종속적 역할을 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1984년에는 왕젠췬이 장기간의 실지조사를 토대로 〈호태왕비연구〉를 발표해 다시 한번 활발한 논의가 이어졌다. 왕젠췬은 현지조사의 이점을 살려 기왕의 잘못 읽은 부분은 시정하고 탈락된 문자를 복원했으며, 문자의 총수를 1,775자로 확정했다. 그리고 비문의 왜를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의 해적집단으로 보아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한편 이진희의 석회조작설도 비판한 점에서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여 다시금 논의가 활기를 띠었다.

 

이어 1981년 이 비문을 연구해 온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되어, 이 주장이 공인을 받으면, 일본 사학계의 '고대남조선경영론'이 근거를 잃게 된다.

 

한편, 비문은 그 내용에 의해 대체로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鄒牟王)·유류왕(儒留王)·대주류왕(大朱留王) 등의 세계(世系)와 광개토왕의 행장(行狀)을 쓴 부분이다.

둘째는 광개토왕 때 이루어진 정복활동을 연도에 따라 적고 그 성과를 적은 부분이다.

그리고 셋째는 광개토왕 생시의 명령에 근거하여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연호의 수와 차출방식, 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을 적은 부분이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둘째 부분으로,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특히 신묘년기사가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여기에는 모두 8개의 정복기사가 적혀 있는데, 연대에 따라 간단히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영락(永樂) 5년(395)조는 비려(稗麗) 정벌에 관한 것이다. 그해에 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염수(鹽水)까지 가서 그 부락 600~700영(營)을 깨뜨리고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우마군양(牛馬群羊)을 노획하여 북풍(北豊) 등지를 거쳐 돌아왔다. 이 비려는 시라무렌강 방면의 유목민인 거란[契丹]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영락 6년(396)조는 백제정벌에 관한 것이다. 왕은 직접 수군을 끌고 백제를 쳐서 58성(城)과 700촌을 공파하고,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낸 뒤 왕제(王弟)와 대신(大臣) 10인을 비롯한 포로 1,000명을 얻어 돌아왔다. 이 작전의 대상지역은 대개 임진강 하류, 한강 하류 일대로 비정된다. 비문은 여기서 영락 6년조를 적기 전에 그간의 경위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이 신묘년 기사로서 영락 6년에 이루어진 작전의 배경을 설명한 것이다. 다음 영락 8년(398)에 왕은 소규모 군사를 보내 식신토곡(息愼土谷)을 관(觀)하고 부근의 가태라곡(加太羅谷) 등에서 남녀 300명을 얻었고, 이후 이 지역으로 하여금 조공하게 했다. 이 식신은 숙신(肅愼)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그 지역은 만주의 영안(寧安) 부근으로 비정된다. 그러나 이를 2개의 작전으로 나누어보고 강원도 일대의 예(濊) 및 신라와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영락 10년(400)조는 문자의 탈락이 심하여 이설이 많으나, 신라 구원을 위해 보기(步騎) 5만을 파견해 임나가라(任那加羅)까지 가서 왜를 토멸한 것이 주내용이다. 여기서도 영락 10년 작전의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즉 영락 9년에 백제가 이전의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여 왕이 평양에 내려왔을 때 신라 사신이 구원을 요청하여 밀계(密計)를 약속했다. 따라서 영락 10년의 작전은 그 밀계에 따른 것이었고, 신라왕은 이를 계기로 직접 고구려에 조공했다. 영락 14년(404)조는 백제군을 따라 대방계(帶方界:황해도)에 침입한 왜를 궤멸시킨 기사이다. 고구려의 왕당(王幢 : 친위군)이 길을 끊고 사방에서 추격하여 무수한 적을 참살하여 궤멸시켰다. 영락 17년(407)조는 문자의 탈락이 심해 구체적인 실상을 알기 힘들다. 고구려군은 적군을 섬멸하여 개갑(鎧甲) 1만여 개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군수품을 얻었고, 돌아오는 길에도 많은 성을 격파했다. 이 작전을 보기(步騎) 5만을 보내 후연(後燕)의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백제를 공격한 내용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영락 20년(401)조는 동부여(東夫餘) 정벌기사이다. 비문에 따르면 동부여는 이전에 추모왕(鄒牟王)의 속민(屬民)이었는데 조공을 끊어버리고 반항한 것에 대해 왕이 직접 토벌하자 곧 투항하고 말았다. 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은택(恩澤)을 베풀었다고 한다. 이 동부여는 두만강 하류에 있는 부여족의 일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훈적을 적은 끝부분에서 비문은 왕이 공파한 성이 64개, 촌이 1,400개였다고 적고 있다.

 

수묘인 관계기사는 비문의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는데, 수묘인들의 출신지, 각 지역별 호수 배당, 수묘인의 매매금지조항 등의 내용이다.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구민(舊民)이 약해질까 우려해 직접 약탈해온 신래한예(新來韓濊)로 하여금 수묘토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장수왕은 구민 110가(家), 한예 220가를 차출하여 국연(國烟) 30, 간연(看烟) 300으로 모두 330가의 수묘가를 책정해 능을 관리하도록 했다. 그리고 선왕(先王) 이래 묘 위에 비를 세우지 않아 수묘인 연호의 관리에 차질을 빚었는데, 이제 묘비를 세우고 수묘연호를 새겨 착오가 없게 함과 아울러 수묘인의 매매를 금지시키고 위반자를 처벌하게 했다. 이 부분은 고구려 수묘제의 실상과 함께 수묘인의 신분적 성격 등 사회사연구에 중요하다.

--원문--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 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 浮龜. 應聲卽爲]連 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 , [履]]龍頁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紹承基業. [遝]至十七世孫國 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二九登祚, 號爲永樂大王. 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掃除□□,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有九, 寔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 其詞曰.]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人], 躬率往討. 過富山[負]山, 至鹽水上, 破其三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城, 力城, 北豊, 五備□, 遊觀土境, 田獵而還.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古利城, □]利城, 雜珍城, 奧利城, 勾牟城, 古[模]耶羅城, [頁]□□□□城, □而耶羅[城 ], [ ]城, 於[利]城, □□城, 豆奴城, 沸□□]利城, 彌鄒城, 也利城, 太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灰]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穰]城, [曾]□[城], □□盧城, 仇天城, □□□□, □其國城.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歸穴]□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太王恩赦□]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新[羅]城□城, 倭[寇大]潰.城□]#□□盡□□□安羅人戍兵[新]□□□□[其]□□□□□□□言]□□□□□□□□□□□□□□□□□□□□□□□□□□辭□□□□□□□□□□□□□潰]□□□□安羅人戍兵.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 □[國 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勾]□□□□朝貢.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石城□連船□□□, [王躬]率□□, [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 刺, 倭寇潰敗. 斬煞無數.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師]□□合戰, 斬煞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住]城, □城, □□□□□]□城.卄年庚戌,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國駭□□□□□□□]□□王恩普覆. 於是旋還. 又其慕化隨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社婁鴨盧, 肅斯舍[鴨盧], □□□]鴨盧.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守墓人烟戶. 賣句余民國烟二看烟三, 東海賈國烟三看烟五, 敦城]民四家盡爲看烟, 于城一家爲看烟, 碑利城二家爲國烟, 平穰城民國烟一看烟十, 連二家爲看烟, 俳婁]人國烟一看烟 三, 梁谷二家爲看烟, 梁城二家爲看烟, 安夫連卄二家爲看烟, [改]谷三家爲看烟, 新城三]家爲看烟, 南蘇城一家爲國烟. 新來韓穢, 沙水城國烟一看烟一, 牟婁城二家爲看烟, 豆比鴨岑韓五家爲]看烟, 勾牟客頭二家爲看烟, 求底韓一家爲看烟, 舍城韓穢國烟三看烟卄一, 古[模]耶羅城一家爲看烟,] [炅]古城國烟一看烟三, 客賢韓一家爲看烟, 阿旦城, 雜珍城合十家爲看烟, 巴奴城韓九家爲看烟, 臼模盧]城四家爲看烟, 各模盧城二家爲看烟, 牟水城三家爲看烟, 幹 利城國烟一看烟三, 彌[鄒*]城國烟一看烟,]# 七 也利城三家爲看烟, 豆奴城國烟一看烟二, 奧利城國烟一看烟八, 須鄒城國烟二看烟五, 百]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 太山韓城六家爲看烟, 農賣城國烟一看烟七, 閏奴城國烟二看烟卄二, 古牟婁]城國烟二看烟八, 城國烟一看烟八, 味城六家爲看烟, 就咨城五家爲看烟, 穰城卄四家爲看烟, 散那]城一家爲國烟, 那旦城一家爲看烟, 勾牟城一家爲看烟, 於利城八家爲看烟, 比利城三家爲看烟, 細城三]家爲看烟.國 上廣開土境好太王, 存時敎言, 祖王先王, 但敎取遠近舊民, 守墓掃, 吾慮舊民轉當羸劣.] 若吾萬年之後, 安守墓者, 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 令備 掃. 言敎如此, 是以如敎令, 取韓穢二百卄家. 慮]其不知法則, 復取舊民一百十家. 合新舊守墓戶, 國烟 看烟三百, 都合三百 家.自上祖先王以來, 墓上]不安石碑, 致使守墓人烟戶差錯. 唯國 上廣開土境好太王, 盡爲祖先王, 墓上立碑, 銘其烟戶, 不令差錯.] 又制, 守墓人, 自今以後, 不得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 亦不得擅買, 其有違令, 賣者刑之, 買人制令守墓之.

 

 백잔(百殘)과 신라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에 건너와 백잔을 파하고 신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영락 6년(396) 병신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하여 영팔성(寧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등을 공취하고, 그 수도를 하였다. 백잔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百]殘主)가 인핍(因逼)해져, 남녀 생구 1천명과 세포 천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주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城) 700촌(村)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8년(398) 무술년에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숙신(肅愼) 토곡(土谷)을 관찰 순시하였으며 그 때에 [이 지역에 살던 저항적인] 막 나성(莫 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삼백여 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숙신은 고구려 조정에] 조공을 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 하며 [고구려의] 명을 받았다.

  영락 9년(399) 기해년에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 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년(400) 경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그 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戌兵) 신라성 성(新羅城 城)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廳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

  14년(404) 갑진년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지역에 침입하였다.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 연선(連船)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17년(407) 정미년에 왕의 명령으로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파견하여 합전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누성(婁城) 주성( 佳城), 성( 城) 성(城)을 파하였다.

20년(410) 경술년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鄒牟王)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 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여성(餘城)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 이 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개선군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시마압로(卑斯麻鴨盧), 타사루압로( 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다. 무릇 공파한 성(城)이 64, 촌(村)이 1,400이었다.(하략)

<두산대백과사전>참고

<브리태니커백과사전>
[2003. 6. 24자 기사]
참고

 

일본의 역사조작 사례(광개토대왕비와 삼국유사)

 



일본의 조작기술은 정말 대단하군요. 고대사 그전의 구석기 문명 조작부터해서 조작하지 않은 역사가 과연있는지 의문스럽군요

아래 변조과정을 잘 보시면  일본인의 역사왜곡이 얼마나 치밀한 가를 알수있습니다 .



광개토 대왕비문의 변조과정
 

                  

광개토대왕비문 변조  일본 참모부가 밀파한 군사 스파이 사꼬오 가케노부 중위에의해 광개토대왕비의 주요 글자가 변조되고 지워지게 되었다.


우리 상고사를 말살시키는데는 한 글자를 고침으로 충분했다


『삼국유사』「정덕본」과 「동경제대 영인본」‘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고치고 동경제대 영인본으로 출판

광개토대왕비문을 조작하여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임마일본부설을 정당화하려고 하였다면 우리 상고사를 왜곡하는데 있어서는 삼국유사의 단 한글자 조작으로 충분했다

"삼국유사" 정덕본의 "고조선기"에는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석유환국)"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초기의 원동중씨가 쓴 "삼성기 하편"에는 환국은 시베리아의 중앙고원(파내류산=천산=파미르고원)과 바이칼호를 포함한 시베리아 전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북이 5만리, 동서가 2만리의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이 환국의 지도자의 관직명은 환인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환국이 있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고,

신화속 인물로서의 환인만 알고 있다. 이것은 어찌된 영문인가?

이것은 일제시대에 일제 식민사학자 이마니시류(금서용)가 이 환국의 "국"를 "인"자로 변조하여, 환국이란 나라의 존재를 없애고 환인을 신화의 인물로 변조 시켰기 때문이다(환국뿐 아니라 뒤에서 설명할 배달국의 환웅, 고조선의 단군도 모두 신화의 인물로 왜곡시켜 한민족의 뿌리를 송두리째 없앴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무력정치로는 안되겠다고 판단하여
문화정치라는 미명하에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얼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는 시책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고대 역사서를 뒤져내어 없애버리고, 유일한 역사기록으로 남겨놓은 "삼국유사"의 첫머리에 나오는 환국의 건국사실 마저도 고쳐 버렸다.

"석유환국"을 "석유환인"으로 바꾼 것이다.

"옛날에 환국이 있었다"란 말을 "옛날에 환인이 있었다"로 고쳐 버린 것이다.

"환국"이란 나라를 "환인"이란 사람 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일제로부터 독립한 지가 54년이나 되었고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되었으면 무엇하는가?

아직도 한국사람 대부분은 환인, 환웅, 단군을 신화의 인물로만 알고 있고 제 올바른 역사를 모르고 있으니 일제의 한국인 뿌리말살작전은 진정 성공한 것이 아닌가?

환국과 배달국의 존재 등 우리 민족의 고대사에 관한 자료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조선시대 왕조실록 등에 엄연히 존재하며, 일제에 의해 없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일본 황실문고에 대량으로 소장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환단고기의 내용을 인정하고 국사교과서에 사료로서 반영하고 일본에 건너간 다른 사서들을 다시 찾아와서 우리의 진실된 왜곡되지 않은 고대사를 배울날을 기다려본다



<환국시대 >

http://blog.naver.com/key3664/20023383290 에서 퍼옴

 

 

태왕릉

고구려의 위대한 왕이었던 광개토 대왕이 돌아가신 후, 고구려 사람들은 그분을 못 잊어 했습니다. 그래서 거대한 무덤과 비석을 세웠으며, 무덤의 동쪽에는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해마다 대왕이 돌아가신 날, 또는 특별한 기념일에 무덤 곁 제단에 모여 성대하게 제사를 올렸을 것입니다.

제단에는 금박으로 장식된 상이 놓여지고, 그 위에는 여러 제기에 음식물이 올려졌습니다. 대왕의 후손인 왕실 가족과 여러 대신이 모두 모여 절을 했습니다. 이 행사를 위해 수묘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정성껏 무덤 주변을 청소하고, 경비를 담당하고, 제사 음식을 준비했을 테지요. 대왕은 천신의 후예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결코 작은 소홀함도 없었을 것입니다.

2003년 중국은 고구려 왕릉들을 세계 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해 여러 왕릉 주변의 민가를 옮기고 발굴했습니다. 그 결과 중국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12 기의 왕릉 가운데 9 기에서 제단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제단은 대체로 무덤의 동쪽에서 많이 발견됐는데, 시신을 넣어 두는 널방 입구가 남서쪽인 경우가 많아 무덤 뒤쪽에 제단이 있는 셈이 됩니다.

특히 광개토 대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태왕릉 동쪽 50∼68 m에 있는 제단은 1.5 m 간격으로 2 개의 제단이 이어져 있습니다. 또 길이만 60 m가 넘어 제단이 매우 컸음을 알게 해 줍니다. 제단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금박 입힌 상다리 4 개도 발굴됐는데, 현재 집안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요.

제단에서 다시 동쪽으로 200 m 떨어진 곳에는 태왕릉비가 우뚝 서있습니다.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비문을 낭독한 후에 제단에 가서 제의를 올리고, 무덤을 돌아보며 돌아가신 임금님을 회상했을 것입니다.

태왕릉은 한 변의 길이가 66 m에 이르는 거대한 무덤이며, 높이도 14 m가 넘습니다. 현재는 원래 모습에서 꽤 허물어진 모습을 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마치 산처럼 보였을 것이고, 그 산(山)에 묻힌 사람(人)은 곧 신선(仙)이 되어 하늘로 올라갈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태왕릉과 광개토 대왕릉비는 2003년 이후 잘 정비돼 광개토 대왕을 좋아하는 한국인이 중국 집안시를 방문할 때 가장 많이 찾는 유적지가 되었습니다.

 

 

고구려 태왕릉 출토 전돌 탁본 자료집 공개 2004/11/21


1889년 광개토왕비 탁본 작업 중 발견
순천향대 박현규 교수, 초기 탁본집 열람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광개토왕비와 인접하고 있어 일각에서는 광개토왕릉이라고도 하는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소재 고구려  태왕릉(太王陵)에서 명문(銘文) 전돌이 발견된 시기와 과정 등이 소상하게 밝혀졌다.

이런 사실은 한중문화교류사 전공인 순천향대 중문학과 박현규(朴現圭.46) 교수가 최근 중국 베이징 국가도서관에서 태왕릉 출토 명문 전돌 초기 탁본 자료집인  `호태왕릉전'(好太王陵塼)을 열람하고 분석한 결과를 21일 공개함으로써 밝혀졌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고구려 태왕릉 출토 전돌 탁본 자료집 공개 순천향대 중문과 박현규 교수가 중국 베이징 소재 국가도서관에서 찾아낸 고구려 태왕릉 초기 탁본집. 1889-90년 무렵 태왕릉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명문 전돌을 탁본한 자료를 싣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이 전돌에서는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원컨대 태왕릉이 산악처럼 안정되고 견고하기를)”이라는 글씨가 확인됐다. (왼쪽 사진) 이런 문구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태왕릉 출토 명문(맨왼쪽)과 같다./
 
  
이에 의하면, 태왕릉 전돌은 청 광서(光緖) 15ㆍ16년(1889ㆍ90)에 탁본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던 이운종(李雲從)에 의해 처음 발견됐으며 그것을 탁본으로 제작하는 데는 청 황실 종실인 성욱(盛昱.1850-1899)이라는 사람이 깊이 관여했다.

이 탁본집 기록에 의하면, 이운종은 당시 회인현(懷仁縣. 현재의 지안)에  소재하는 광개토왕비를 탁본해 오라는 성욱의 명령을 받고 현지에서 능비  탁본  작업을 하던 중에 태왕릉 주변에서 명문 전돌 3개를 발견했다.

이운종은 이들 전돌을 베이징으로 가져와 그 중 하나를 성욱에게 넘겼으며,  이에 성욱은 친구인 서방(徐坊)에게 부탁해 그 탁본과 탁본집을 제작하게 했다.

이 탁본집에 수록된 태왕릉 출토 전돌 명문은 "願太王陵, 安如山, 固如岳"(원컨대 태왕릉이 산악처럼 안정되고 견고하기를)으로 확인됐다.

이런 명문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태왕릉 출토 명문과 똑같다. 따라서 태왕릉에는 이런 문구가 적힌 명문 전돌이 꽤 많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박 교수가 열람한 `호태왕릉전'(好太王陵塼)이라는 탁본 자료집(청구번호 軸556號)은 권축본(卷軸本)이며, 전체 크기는 105.0 ×51.1㎝이다.

겉표지에는 `好大王陵專(호태왕릉전), 伯羲祭酒題(백희제주제).  庚申九月五日(경신9월5일), 芒父記(망부기)'라는 전체 제목이 적혀 있으며 성욱이 친구  서방에게 부탁해 제작한 명문 탁본 실물이 수록돼 있다.

박 교수에 의하면, 제목에 보이는 백희(白羲)는 이 탁본을 최초로 소장한 성욱(盛昱)의 호. 그는 성(姓)이 애신각라(愛新覺羅)인 사람으로 청 황실의 종친이다.

망부(茫父)란 민국 초에 이 탁본을 입수한 요화(姚華.1876-1930)라는 사람이 쓴 호로 밝혀졌다. 요화는 베이징 지역에서 활약한 장서가이자 서예가. '경신'은  1920년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 탁본집은 여기에 수록된 다른 기록 내용을 종합할 때 중국 공산당 정부 시기에 국가도서관 전신인 베이징도서관(北京圖書館)이 베이징 전문(前門)에  있던 고예술품 전문점에서 구매한 소장품임을 알 수 있다고 박 교수는 말했다.

박 교수는 "지금까지 국내외 학계에서 태왕릉 전돌에 대해 개략적인 사실만  알고 있었으나, 이번 자료집을 통해 전돌 발견시기와 발견자, 탁본 제작 과정  및  그 유통 과정을 상세하게 알게 됐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taeshi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