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백제의 흔적

중국 문화 비교-천안문

보리숭이 2006. 7. 9. 09:35

안문은 명나라 영락 15년(1417)에 건설되었다. 지어질 당시는 승천문이라고 불렸는데, 전화(戰火)로 소실되어 1961년에 재건되었다. 고궁의 남문에 해당하며, 지붕은 이중으로되어 있다. 기단에는 5개의 통로가 있고 황제는 중앙의 문으로 출입하였다. 명,청나라때에는 황제의 칙서를 발하는 의식이 이 천안문에서 행해지기도 했다.  

계에서 가장 큰 광장으로, 면적이 40만㎡이며 한꺼번에 최대 100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 또한 천안문 사태(1989.6.4)로 더욱 유명한 천안문은 현대 중국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TV를 통해서 익숙해진 천안문은 명영락(永樂)연간(1417년)에 지어졌으며, 옛날에는 황제가 사는 성의 정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승천문(承天門)이라고 불렸다가 청대에 개조된 후부터는 '천하를 편안하게 하다'라는 뜻의 '천안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천안문 다섯 개의 문 중앙에는 모택동 주석의 사진이 걸려져 있다. 문 앞에는 금수강(金水河)이 흐르는데, 강 위로 있는 5개의 백대리석 다리는 금수교(金水橋)라고 하는데 조각이 아름답다. 그 중 가운데 다리는 황제만이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돌다리 양쪽에는 두 개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다.


안문 광장은 베이징의 중심이다. 청나라 때까지만 해도 여기에 없었다. 천안문 앞 대로인 장안대도 없었다. 이것들이 생긴 것은 1959년의 일로 건국 10주년을 기념하여 정비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11만㎡ 정도였다. 그때의 정비로 넓이가 40만㎡로 확대되어 50만 명 정도의 집회가 가능하게 되었다.
천안문을 북으로 바라보고 있는 천안문 광장은 무엇보다도 그 넓이에 압도되지만 또 하나의 색다른 명물은 국기 게양하고 내리는 과정이다. 그 시간이 가까워 지면 국기 게양을 구경하려고 게양대 주변으로 많이 몰려든다. 특히 지방에서 베이징을 구경하려고 방문한 중국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그리고 국경일이라든지 메이데이에는 천안문과 그 사방의 건물지붕은 주명으로 장식되어 아름다운 야경을 즐길 수도 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선언이 이 문 위에서 이루어져 중국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깊은 장소이다.

북경우의회관

인민영웅기념비와 뒤에  모택동 기념당이 보인다. 

 

 

중국 역사/혁명 박물관

전국인민대표대회 청사인 인민대회당

 

 

 

모택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