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백제의 흔적

동북공정에 휩싸인 지안박물관과 고구려 고분벽화

보리숭이 2006. 7. 8.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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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박물관과 고구려 고분벽화

 

1999년의 경우 우리를 빼면 이곳을 찾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현재는 한국인 관광객보다 중국인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 지안박물관을 찾은 관광객 중 한국인이 6,700여 명으로 중국인 4,000여 명보다 많았으나 올해 들어선 7월 말 현재 한국인 1만5000여 명 대 중국인 2만여 명으로 역전됐다. 이들 중국인 관광객 중 30%가량은 남방지역 등 동북 3성 외 지역에서 찾아오고 있다.

 

이들 유적을 답사하는 관광객들이 빠지지 않고 방문하는 곳이 오녀산성 사적진열관과 지안박물관이다.

 

2003년 8월에 세워진 오녀산성 사적진열관의 경우 안내판의 머리말(전언·前言)과 맺는말(결속어·結束語)에서 ‘고구려는 중국 동북지구 고대 소수민족이 세운 국가’라고 못을 박고 있다. 또 ‘고구려 건국’과 ‘현토군과 고구려’라는 두 설명문에서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설치한 현토군에 고구려가 세워졌다’고 강조함으로써 중국 땅에 세워진 중국 국가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현토군이 세워진 연도는 기원전 107년이 정확하며 그 영역은 고조선의 영토였다. 게다가 당시 세워진 것은 고구려라는 국가가 아니라 고구려현이었으며 고구려가 건국된 기원전 37년 당시의 영토는 졸본부여 또는 원(原)고구려 세력의 영토였다. 역사적 사실을 외면한 채 정치적 목적 아래 쓰인 설명문임을 알 수 있다.

 

2003년 전시물의 90%가 바뀔 정도로 새 단장을 한 지안박물관의 안내문들은 더욱 심하다. 박물관 내 5개의 안내판 중 ‘고구려는 중국 동북 소수민족이며 지방정권 중 하나’라고 밝힌 머리말과 ‘고구려 역사 중요기술’, ‘고구려 조공책봉 조견표’, ‘고구려 유민의 정착 현황’ 등 4개의 안내판이 고구려가 중국사의 일부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중국은 지린 성 퉁화(通化) 시 완파보쯔(萬發撥子)의 대형 고구려 유적지에서 발굴한 70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할 박물관을 올해 말 개관할 계획이다. 여기에 선양에 새로 세워진 랴오닝성박물관 3층의 고대관 정비가 끝나고 현재 새로 건립 중인 창춘(長春)의 지린성박물관에 고구려관이 들어설 경우 중국의 고구려사 침공이 ‘박물관을 동원한 게릴라전’처럼 전개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벽화는 지안현[集安縣] 장천(長川) 1호분, 지안 4호분, 5호분의 벽면에 그려져 있는 채색화로서, 한폭 한폭에 생동감이 넘치고 수려한 채색이 완벽에 가깝게 보존되어 찬란했던 고구려예술의 정화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각저총

중국 지린성[吉林省(길림성)] 지안현[輯安縣(집안현)] 여산(如山)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벽화고분. 1935년 발견되어 일본인 이케우치[池內宏(지내굉)] 등에 의해 조사되었다. 무용총(舞踊塚)과 나란히 위치하는 봉토분(封土墳)으로, 돌을 쌓아올린 위에 흙을 덮은 것이며, 묘실구조는 전실(前室)과 현실(玄室)을 갖춘 <呂>자형 양실분(兩室墳)이다. 천장구조는 전실은 단면 아치형 천장이고 현실은 네 벽 위에 2단의 평행굄돌을 놓고, 다시 그 위에 4단의 삼각굄돌을 올려 팔각형으로 보인다. 전실·현실의 네 벽과 천장 등 묘실 내부 벽화는 잘 발라진 회벽(灰壁) 위에 그려져 있으며, 채색은 먹선과 황(黃)·적(赤)·적갈(赤褐)·녹청(綠靑) 등을 사용하였고 이전의 고분벽화에 비하여 한층 밝은 화면을 이루고 있다. 벽화는 인물화(人物畵) 중심의 풍속도(風俗圖)이며 이 고분을 각저총이라 이름짓게 한 현실 동쪽 벽면의 <씨름도>가 널리 알려져 있다. 전실과 통로에는 나무와 맹견, 현실의 북벽에는 주인의 실내생활 장면, 동벽에 <씨름도>와 주방, 서벽에 나무와 수레, 남벽에 나무가 그려져 있다. 현실 네 벽 모서리에는 굽받침이 달린 주두(柱頭)·소루(小累)가 있는 나무기둥을 그려 목조건물처럼 보이게 하였다. 현실 천장에는 당초문(唐草紋) 형태의 괴운문(怪雲紋)을 가득 채워 넣었고, 동서에 해와 달을 그리고 북쪽에 북두칠성을 비롯하여 7개의 별자리와 2개의 독립된 별을 배치하여 하늘세계를 집약한 소우주를 표현하였다. 이 고분의 벽화를 대표하는 <씨름도>의 씨름 장면은 샅바를 두른 모습이나 자세가 현재의 씨름과 흡사하며, 씨름하는 두 장사와 심판격인 노인, 나무 위의 새와 밑에 웅크린 개 등을 그려넣어 한적한 분위기를 잘 그려낸 풍속화이다. 북벽의 묘 주인 그림은 안악 3 호분(安岳三號墳)·덕흥리벽화고분(德興里壁畵古墳)·감신총(龕神塚) 등의 초상화적(肖像畵的)인 성격과는 달리 실제 실내생활 장면을 나타냈다. 이 외에 전실과 현실에 그려진 여러 그루의 나무 그림은 대칭형의 도안적인 표현이나 초보적인 고대 산수화(山水畵) 발달의 일면을 보여준다.

 

 

 

 

지안 4호분 일신도

역시 지안 4호분의 신선도의 하나. 월신도와 대칭을 이루는 해의 신선이며 남신이다. 청룡을 타고 있는 듯한, 반인반수(半人半獸)로 보이는 형상의 남신이 삼족오(三足烏:不死烏)가 들어 있는 해를 이고 구름에 싸여 비상하는 내용이다. 생동감 있는 구도는 고구려인의 기상을 강조하고 있고, 선조 또한 유동성이 넘치며, 색채 역시 화려하여 중국의 둔황[敦煌]벽화보다 더 수려하다.

 

 

지안4호분 월신도

왕족의 묘로 추정되는 지안 4호분의 널방[玄室]에 그려진 신선도. 선녀신(仙女神)인 월신이 달을 이고 나는 용을 타고 비상하는 형상인데 달 속에는 두꺼비가 있다. 생동감 넘치는 구도에 수려한 색채, 선조가 유동하고 변화가 있는, 6세기경의 원숙미를 보여주는 벽화이다.

 

무용총

현재는 중국 길림성 집안현의 여산 남쪽 언덕에 보존되어 전한다.  즉, <광개토왕릉비> 북서쪽 약 1km 지점에 위치하며 <각저총>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이 고분의 <널방>의 동쪽 벽에는 남녀가 대열을 짓고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으로 하여, 이 무덤의 이름을 <무용총>이라 부르게 되었다.

 

무용총 수렵도의 화살촉은 둥그렇다. 무용총 수렵도의 주인공이 멋지게 화살을 날린다. 그것도 그냥 날리는 것이 아닌, 스쳐 지나가는 척 하면서 몸을 180도로 돌려서 화살을 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주위의 사냥꾼들이 등장하여 이러한 사냥물을 공격한다. 이게 바로 당시 사냥의 모습이다. 그러나 주인공을 크게 부각시키기 위하여 그러한 사람들이 생략된 것이다.

실제로 고구려 벽화의 주요 특징은 주인공이 크게 부각된다는 점 이다.

 

즉 수렵도에서 쓰이는 둥근 화살촉은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참고로 오늘날에도 효시라는 단어가 쓰이는데, 이는 어떠한 일이나 업적을 제일 먼저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어원도 바로 사냥에서 나온 효시의 쓰임새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효시는 사냥에서 뿐만아니라 전투에서도 자주 쓰인다. 주로 공격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말이다.

 

 

 

http://www.goguryeo.org/main/main.php 고구려역사연대 - 고구려 소개, 광개토, 연개소문, 동북공정고분벽화에 관한 자료를 볼 수 있는 사이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