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마스테! 영혼의 여정

인도성지순례 기행문 6일째/마한타사원, 바라나시

보리숭이 2006. 2. 2. 22:30

2006년 1월 15일 일요일(인도 여행 6일째)

여행지: 마한타 사원, 바라나시                                글쓴이: 김창순

 

마하보디 대탑 참배를 마치고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걸어서 부다가야대탑 발굴 이전의 불교 유물을 전시해놓은, 지금은 힌두교 사원인 마한타 사원으로 갔다.
    힌두교 사원이라 들어갈 때는 촬영이 금지되어있고 신발을 벗고 덧신으로 갈아 신어야했다.     규모가 별로 크진 않았고 마당 가운데에는 힌두교의 최대의 신인 비쉬누신이 호랑이를 발밑에 놓고 있었고 인도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있는 금송화 꽃목걸이와 조금의 꽃공양이 있어서 누군가 예배를 드린 흔적이 보였다.
 

구석 벽쪽으로 길다란 창고 비슷한 곳이 유물을 보관한 방이였는데 들어가보니 거의가 불상이었으며 몇 점 되지도 않았고 보관상태가 아주 허술하여 質에 상관없이 다소 실망스러웠다.
   양식은 마투라양식과 간다라양식이 저마다 특징적으로 혹은, 이중적으로 섞여있었는데 마투라 양식은 마투라 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한 인도 고유의 양식으로 약간 투박한 얼굴에 두눈은 부릅뜨고 있으며 복장은 목선에만 띠를 둘러서 거의 맨몸으로 보이는 것이 특색이라 한다.

 

간다라 양식은 간다라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는데 이 지방의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 異國과의 길목으로의 역할로 타국과의 교역이 잦았으며 더구나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침입으로 그리스 헬레니즘 영향을 복합적으로 받아 얼굴은 서양인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은 약간 아래로 비스듬이 내려다보며 머리카락은 물결모양의 장발이고 옷은 그리스여신의 옷처럼 주름이 길고 깊게 새겨져 흘러내린 모습을 특징으로 한단다.
 

우리나라도 간다라미술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대표적 불상이 저 유명한 석굴암이란다.
다른 날, 댈리 박물관에서 그 많은 불상을 보면서 다시 설명을 들으니 구별이 확연해졌다.
대충 보고 나오자니 마당 한쪽에 두레박 달린 깊은 우물이 있었다.

 

몇몇 회원들이 우물로 가서 추억에 잠시 젖어 두레박으로 동심을 길어 올려 손을 씻으며, 웃으며, 장난치며 즐거워했다.
   버스에 오르기 전에 오랜 시간을 차를 타고 가자면 회원들이 과일이 필요할 것같다고 해서 과일을 사기 위해 가는 길목에 있는 시장엘 들렀다.
   시장에 들어서니 인도가 어딜가나 그렇듯 칙칙하고 지저분했다.
   과일 장사와 흥정을 하는데 재미있는것은 아직도 막대 저울을 사용하고 있는거였다.
   줄기채로 딴 바나나 두뭉치(?)와 포도 1박스를 샀는데 전부 13불이라니!

 

값은 그저였지만 먹어 보니 포도는 그런대로 괜찮았고 바나나는 떫어서 맛이 별로였다.
팀장님 말씀이 계절이 겨울이라 그렇단다.
   인도가 열대지방이라 과일은 풍성해서 얼마던지 먹겠구나 기대했었는데 사과는 작고 푸석거려 우리 입맛에 안 맞았고 ,바나나는 떫어 단맛이 약했으며, 종류도 다양하지도 않았고 호텔에서 나오는 이름 모를 과일조차도 별 맛이 없어 과일이 무지 고팠다.
    배 불러서 못 먹었던 캄보디아의 열대과일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이제 바라나시로 간다.
 

경운기만큼이나 시끄럽고 털털거리는 버스에 올라 무늬만 아스팔트인 길을 따라 하루 종일 차를 탔다.

차창으로 스치는 풍경이 우리나라 가을처럼 황량한건 절기가 겨울인 탓이란다.
   아래 지방으로 내려 갈수록 푸르렀고 따뜻한 나라답게 바나나 나무와 야자와 키가 유난히 큰 나무들이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쓴채 제 자리에 서 있었다.


   인도에서는 시계가 필요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도 3시간 반이라는 시차 때문에 저절로 눈이 뜨여졌으며
   차는 출발하는 시간이 제 시간이고 도착해 보아야 아는게 우리의 시간이었다.
   가끔씩 나타나는 마을은 집은 작고 흙벽돌에 갈대같은것으로 지붕을 이었으며 거의가 소나 개가 마당에 있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 바깥벽에는 소똥을 반죽해서 만든 덩어리를 붙혀 놓은 곳이 많았다.
   산이 없어 연료가 부족해 땔감으로 사용되며 도시에 가까워 올수록 모양이 반듯한 것이 파는것 같았다.


   이 마을 저 마을을 지날 때마다 규모는 작지만 신당을 모셔 놓고 지저분한 일반 건물과는 달리 울긋불긋하고 깨끗하게 꾸며놓았다.
    종교의 천국이라는 인도, 온갖 것이 신이 되는 나라, 어느 산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내를 이루며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물조차도 성수가 되는 나라, 어머니의 젖줄이라는 갠지스강에 온 몸을 의탁해서 망연해진 눈빛도 왠지 명상가같은 느낌이 묻어 나는듯한 나라.
    일 달러를 구걸하는 아이들의 눈이 너무 예뻐 들여다보면 먹먹함 밖에 읽을 수 없어 왠지 기대가 머쓱해지는 내 자신..
    그래, 우리와 색갈만 약간 다른 인도는 인도일 뿐이었다.

내 머리 속에서, 내 가슴 속에서 순간순간 솟아오르는 그 감정은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일상의 현상이지 않은가?
  언제나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한 번 깨우쳐 준 흥선 스님의 법문 "순간의 해탈이 계속 연결되면 열반" 이라는 것.
  나에게 주어진 찰라에 몰입하는 것,
  그러면서 여타의 파랑에 내 맘을 평온하게 하는 것.
  참으로 주어 진 이런 시간이 감사할 따름이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갠지스강의 일몰은 늦은 것 같다는 팀장님의 말씀에 가벼운 실망감을 느껴지만 호텔에 여장을 풀고 숨 돌릴 사이도 없이 갠지스강으로 가기 위해 릭샤를 타러 갔다.
  인도에 들어서면서 보게 된 릭샤를 그 동안 얼마나 타고 싶었던가?
  오토릭샤와 바이릭샤가 있는데 우리 일행은 바이릭샤를 탔다.

 

 내 짝꿍과 안쪽으로 향해진 한쪽 발로만 발 딛는 곳에 균형을 잡고 한쪽 팔로는 등받이 걸이를 꼭 붙들고 출발하는데 먼지만 아니라면 "야~호!"하고 싶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거리를 나서니 왠 사람들이 어찌 그리 많은지.

도로포장 상태가 안 좋아 먼지는 풀썩거리고 좁은 도로에 자동차와 릭샤와 어슬렁거리는 소와 영앙실조 걸려 힘없는 개와 소리치는 사람들.. 정신없이 복잡한데도 그 사이사이로 쏜살같이 달려 용케 걸리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릭샤는 잘도 빠져나갔다.
  나란히 줄지어 가는 우리의 금강회원들을 보니 왠 무장강도(?) 매캐하고 혼탁한 공기때문에 손수건으로 즉석 마스크를 하였다.

대한민국, 우리 국민의 두뇌의 순발력! 감탄스러울 따름이었다.
가는 도중에 그 유명한 바라나시 시장을 스쳐 가는데 내려서 천천히 구경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한 일이라 눈요기만 했다.

바리나시는 2500여년전에 조성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도시로 바루나강과 아시강이 갠지스강과 만나는 지점으로 이 두 강 이름의 머리 글자를 따서 지었다한다.
  인도인들은 바리나시를 "카시"라고 부르며 갠지스강(=강가강)이 있어 마음의 고향이라 불리운단다.

갠지스강에 도착하였더니 해는 이미 져서 사방이 캄캄하였다.
  우리 일행은 보트를 한 척 빌려 타고 강 안쪽으로 조용히 노를 저어갔다.
  가트(강과 육지가 만나는 부분에 강에 쉽게 들어 가기위해 인공적으로 설치해 놓은 계단)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배를 정지 시켜 가트쪽을 바라보니 굿판(?)을 벌리고 있었다.
  얼마간의 돈을 주면 액수에 맞게 축원도하고 기원을 해주는 곳이라는데 많은 사람들이 계단에 앉아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제단을 똑 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7개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 제단마다 제주가 있고 장단을 담당하는 사람이 옆에 악기를 가지고 있으며 그 옆에는 보조까지 있어 알 수 없는 인도말로 마이크로 계속 외쳐 되니 우리 나라 굿판과 매우 흡사하였다. .
   머리위 공중에는 우산 모양의 네온으로 장식하였으며 주변도 오색의 전기등으로 휘황찬란하게 꾸몄는데 주문을 외우면서 손으로 불을 사용하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우리가 구경하는 사이에 어느듯 시간이 되었는지 제가 끝이 났다.
   조금 더 노를 저어 가니 화장 중인 화장터가 불길에 휩싸여있었다.
   인도는 죽음이 임박하면 갠지스강으로 몸을 누이려 전국에서 온단다.
   갠지스강에 목욕을 하면 죄업이 소멸되고 죽어 화장하여 재를 이 강에 뿌리면 윤회의 틀에서 벗어 난다하여 빨래하고 몸을 씻고 양치하고 죽은 시신의 화장한 가루까지 뿌린 이 탁한 강이 성수로 받들어져 오늘도 강물에 몸을 적시고자 오는 행렬이 끝이 없다.
    귀를 따갑게 하던 제는 끝나고 사방은 적막한데 강 언덕 쪽에는 시신을 태우는 불길이 하염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죽음과 삶의 묘한 공존이었다.

 

눈을 돌려 맞은 편 하늘을 보니 낮으막히 떠 있는 둥근 달이 유난히 커 보였다.
   인도의 달은 산이 없어 그런지 천천히 둥글게 떠 오르면서 오랫동안 떠 있는거 같았다.
   캄캄하고 고요한 사방에 강물 위로는 꽃파는 소녀가 주고 간 꽃불이 물길 따라 흘러 가고
달은 넉넉한 모습으로 우리를 비추었다.
  인도 사람들은 태어나서 주어 진 환경이 인과의 업이라 절대적으로 순응하며 현실을 불만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우리는 곳곳에서 신당을 보며 가끔씩은 예배드리는 젊은이를 보았다.
   무엇이 지워진 운명에서 기도케 하는가?
   지금이라도 來生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면 운명의 굴레가 좀 더 가벼워진다고 여기는걸까?
   우리의 눈으로 본다면 더러워 탁류로 밖에 보이지않는 갠지스강을 신성시하는 이네들의 핏속엔 신앙심이 태생적으로 흐르지 않을까?
   그 많고 많은 나라중에 부처님이 탄생한 나라가 돠어 몇 천년 뒤를 이어 그 발자취를 더듬어 나도 여기 오지 않았는가?

직지사에 앉아서 경전 속에서 읽는 부처님보다 설법하시며 다녔던 그 발자국자국마다 같은 땅을 딛으며 느껴 보는것이 얼마나 다른지.
   구걸하는 저 아이들을 부처님은 어떻게 대했을까?

나 같이 탐,진,치 몽환에 빠져 헤매는 중생을 보아도 분별심없는 마음으로 부끄러워하지않게 따뜻하게 일깨워 주셨을까?

이 밝은 달은 그 때 그 달일진데.
   그 많은 시간을 거스려 돌아가 그 깨우치는 말씀 한마디가 무척 간절하였다.
   눈에는 남은게 없지만 몇 일이 지난 지금도 내 개인적인 느낌으로 마음에 심지가 되어 무언가 조금 남아 있다.
   그래서 인도는 그냥 인도일 뿐이며 역시 인도였다.
  

제법무아, 제행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