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마스테! 영혼의 여정

인도 성지순례 기행문 4일째/쿠쉬나가라,바이샬리,파트나

보리숭이 2006. 2. 2.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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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월 13일 금요일(인도 여행 4일째)
여행지: 쿠쉬나가라/바이샬리/파트나         글쓴이: 이 금 미 

 

나마스테!!!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부처님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인도 여행 전에 우연히 읽었던 박범신의 소설 <나마스테>에서 알았던 '나마스테'란 말이 내 삶의 좌우명처럼 선명하게 각인된 채로 비일상의 인도 여행을 마치고 다시 일상의 현실로 돌아왔다.

 

인도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하니 선생님 한 분이 어디가 제일 좋았느냐고 묻기에,"부처님 열반의 땅, 쿠시나가라예요. 세계에서 제일로 예쁘다고 하는 타지마할은 3살 먹은 어린애도 아름답다고 느낄수 있는 건축이지만,쿠시나가라에서 제가 느낀 아름다움은 타지마할을 훨씬 뛰어넘는 아름다움이었요."'라고 말했다.

 

모든 위대한 건축물은 절대 권력자의 힘과 민중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하지만, 티벳의 포탈라궁같은 장엄한 건축은 그 불모의 척박한 땅에서 민중들 스스로의 종교적 열정으로 만들어졌기에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부처님 열반의 땅 쿠시나가라에는 아름다운 유적은 없지만 열반 당시 춘다와 아난이 부처님과나누었을 대화를 상상하면 복받쳐오르는 깊은 감동을 느낀다.그것은 내가 믿고 따르는 부처님의 무한한 지혜와 너무나도 인간적인 다정하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안도감과 기쁨이었다.부처님 열반 직전의 금속세공인 천민 춘다의 공양을 받으시고 심한 설사병이 나셨을 때, 비구들의 쑥덕거림과 춘다의 죄의식을 아시고는, " 부처님 성도 직전에 올린 공양과 열반 직전에 올린 공양이 최고의 공덕이 있다."고 말씀하심으로 춘다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춘다가 올린 공양 중 '스카라 맛다바'란 음식은 야생 토란의 일종으로 독성이 있어 익히지 않고 생것을 잘못 먹으면 탈이날 수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열반 직전의 아난과 부처님의 대화는 부처님의 일대기 중에서 가장 슬프면서 따뜻하고 감동스런 장면이라고 생각한다.---부처님이 열반에 들려고 할 때 시자인 아난은 사라수 가지를 붙들고 울고 있었다. 아난이 곁에 없는 것을 보고 부처님은 한 비구를 시켜 그를 불러오도록 해서 아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난아, 한탄하거나 슬퍼하지 말아라. 일찍부터 가르쳐주었 듯이,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한 사람 과는 언젠가 헤어지지 않을 수 없다. 태어난 모든 것은 반드시 죽게 마련이다. 죽지 말았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부질없는 생각이다. 더 한층 분발하고 정진하여 미혹을 떨쳐버리고 성자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여라. 내가 입멸한 후 가르침을 말할 스승이 이미 없으니 우리들의 스승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내가 지금까지 말하고 제정한 교법과 계율이 내 입멸 후에는 곧 너희들의 스승이다!” 한역으로는 '생자필멸 제행무상 불방일정진(生者必滅 諸行無常 不放逸精進)'이라고 한다.

 

인도 북부 오지의 한적한 땅, 쿠시나가라 니코 호텔에서 아침 5시 기상하여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7시 20분경 열반당으로 출발했다. 자욱한 안개가 인도 여행 4일째인 그 날도 온 세상을 덮어버렸다. 열반당 한 쪽 길에 정정하게 서 있는 사라수 나무(부처님이 두 그루 사라수 아래서 열반에 들었다는 사라수의 몇 대 손자뻘이 되는지 알 수 없지만)를 또렷이 보고싶었지만 안개 속에서 사라수 잎은 은빛으로 풀어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인도 소년의 끈질긴 상혼으로 사라수 열매 몇 개를 1달러에 사서 가지고 왔는데, 마치 작은 차나무 열매 같았다. 사라수로 만든 염주라며 사달라고 하는 소년에게 "노 마니!"라고 말하니, 그 소년이 "노 마니, 프리젠트!"라고 해서 그냥 염주를 받았는데 끝까지 따라와 "원 달러!" 해서 당황스러웠다.

 

인도 여행을 하기 전 부터 여러 책자를 통해서 알았던 인도, 그 인도에서 가장 많이 들었다는 "노 프라블럼!"은 딱 한 번 들었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원 달러!"였다. 갠지즈강으로 가는 릭샤를 타고 내려서 깡마른 할어버지 릭샤꾼에게 1달러를 주었었다. 그러자 그 주름진 얼굴 위로 번지는 기쁨의 물결을 보고 1달러의 위력에 나도 새삼 놀랐다.

 

인도인은 가난해도 행복하다는 책 속의 인도는 아니었다. 지독한 가난에서 떨쳐일어나 이제는 I.T강국으로, 핵무기 보유국으로, 적극적으로 부의 축적에 뛰어들어서 어딜가나 삶의 열기로 가득한 반짝이는 눈망울을 보았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거인같다고나 할까? 역사는 우리들 삶처럼 끝없이 유전하면서 흥망성쇠를 거듭하나 보다. 삶의 온갖 모순과 가난과 고통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품격을 이룰만큼의 부와 평온한 아름다움과 높은 문화로 다시 부흥되는 인도가 되기를 .....

 

인도 여행 중반까지 남편이 돈 관리를 다하고 또 나와 남편의 생각이 달라서 1달러를 주고 싶어도 못 줄 때가 많았다. 여행 중반 이후부터 돈을 내 작은 손가방에 넣어두고는 상황에 따라 주고 싶을 때 주었었다. 가장 미안한 일은 수자타집을 가는 도중, 소똥을 볏집과 이겨서 만든 둥그런 것(화력이 좋아서 겨우내 취사용 연료로 쓴다고 한다.)을 담벽에 붙여 놓은 풍경을 그 마을 소년 둘과 사진 찍었다.

 

그 두 소년이 계속 웃으며 뒤따라오면서 "원 달러!"라고 하는데, 나중에 줄려고 하다가 그 곳 마을 사람들과 뒤섞여 끝내 주지 못한 것이 얼마나 가슴에 걸리는지... 나중에 그 두 소년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우리가 타는 버스까지 따라왔다고 한다. 샛별같이 초롱초롱한 소년 얼굴들이 지금도 떠오른다.

(차마 기지에!---미안하다는 인도말이다.)

<열반당> 열반당은 1956년에 인도 정부가 지은 것으로 그 안에 열반상이 모셔져있다. 그 옛날 사라쌍수 아래 북으로 머리를 두고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사자처럼 발을 포개고 누운 부처님 모습을 그린 열반상은 한 덩어리의 붉은 사암으로 조성한 것이다. 그 길이가 6.1m로 5세기경 하리발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열반상 아래는 작은 조각상이 세 개가 있는데 왼쪽부터 말리부인, 하리발다, 아난 존자의 모습이라고 열반상 앞에서 만난 대한사 주지스님이 말씀하셨다. 백승환님은 왼쪽에 두 손을 땅바닥에 짚고 흡사 대죄하듯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는 사람은 부처님께 마지막 공양을 올렸던 춘다의 모습이라 하고, 침상 중간 부분에 뒷 모습을 하고 단정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사람은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인 수바드라이며, 오른쪽은 부처님의 열반을 슬퍼하는 아난 존자의 모습을 새겨 넣었다고 하는데 이 설명이 더 내 가슴을 적신다.

 

그리고는 다시 생각컨대 중앙에 단정히 앉아서 정진하고 있는 조각상은 우리들 금강 회원들 각자 성지 순례 후 더 한층 발심하여 정진하는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 일행은 수많은 참배객들과 함께 열반상을 세 바퀴 돌면서 '석가모니불'을 간절히 불렀고 반야심경을 독송했다. 부처님 품 안에서 "無"자로 무수히 이루어진 반야심경을 독송하니 번뇌의 불이 모조리 꺼진 저 피안의 세계에 가 닿은 듯 했다. 부처님 얼굴과 발 밑에다가 수 많은 금종이를 붙이면서 참배하는 사람들은 동남아시아나 티벳의 승려들 인데 그 극진한 공경과 절절한 발원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나중에 흥선 스님은 이 열반상의 조각을 보시고 굉장히 안타까와하셨다. 부처님 열반의 땅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데 거기에 품격 없는 콘크리트 건물인 열반당을 짓고 그 안에 조악한 열반상을 모신 것은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고 하시면서, 전 세계 불교도들이 힘을 합쳐 성스럽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어서 누가 보더라도 성스런 마음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고 하셨다.

 

즉 성별된 성소는 중생들의 간절한 원으로도 성스럽지만 그 성스러움은 아름다움과 만날 때 더욱 의미가 있다고 하셨다. 열반당 뒤쪽으로는 육중한 원형의 부처님 사리탑이 있고, 그 뒤쪽으로는 아난의 탑이있다고 하는데 확인을 못했다. 상층부가 허물어진 아주 작은 탑이라고 하는데 25년을 부처님 곁에서 시봉한 아난다는 죽은 후에도 충실하게 말없이 부처님 시자의 소임을 다하고 있으니 아난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열반당을 보고 나오면서 우리나라 스님이 지은 대한사에 잠깐 들렀다. 3,000여평에 자리잡은 대한사는 아직 미완성 건물이지만 우리나라 조계종에 등록되어있고 인도 청년이 행자 교육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 행자들이 아침에 300배, 저녁에 300배씩 1년을 하면 한국에 유학시켜주기로 했다 한다. 뜨거운 인도차 대접을 받고, 주지이신 성관스님이 우리에게 책받침대를 선물하고, 우리는 약간의 보시를 하고 다비장으로 갔다.

 

<다비장(라마바르총)> 부처님의 유해는 쿠쉬나가라의 교외 말라족의 사당이 있는 마쿠다반다나에서 화장된다. 이곳은 말라족 역대 왕들의 대관식이 행해지던 성지인데, 그들이 부처님을 존경하여 그 곳에서 화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 다비장은 쿠쉬나가라에서 동쪽으로 1.6km 떨어진 지점에 있다. 이 자리를 기념하여 라마바르탑을 세웠는데, 지금은 많이 허물어져 벽돌로 쌓은 언덕으로만 남아있다.

 

이 라마바르 총(塚)에 올라가 둘레를 바라보면 드넓은 평원이 한눈에 들어오고 곁에는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몸을 씻었다는 조그만 개울인 히라냐바티강이 흐르고 있다고한다. 다비가 끝나자 부처님의 색신은 8말 4되나 되는 많은 사리로 응결되었다. 그 소식을 접한 주변의 7나라에서는 각각 말라족에게 사리를 받아 큰 탑을 세우겠다고 사리를 나누어줄 것을 요구하자 말라족은 거부했다.

 

이에 마가다국과 바이샬리는 선전포고까지 하자 이에 부처님의 제자 도로나가 중재에 나서서 사리를 8분하게 되었다. 이것을 사리8분, 분사리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각각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탑을 세우게 되었는데 이 여덟 나라에서 세운 최초의 불탑을 근본 8탑이라고 한다. 그리고 8분된 사리는 인도를 통일하여 최초로 전륜성왕이 된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대왕(B.C 273~232)에 의하여 8만 4천 탑으로 세워지게 되었다한다.

 

이 라마바르총은 쉬라바스티의 기원정사와 함께 인도 성지 순례 중에서 가장 많은 영감을 주고 부처님 숨결을 생생히 느낄수 있는 곳 같았다. 여전히 가실줄 모르는 짙은 안개는 부처님 다비식 때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이 아직도 다비장을 떠나지 못하고 맴돌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샬리> 8시 45분경에 다비장을 출발하여 바이샬리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황혼이 붉게 내리고 동쪽에서 둥근 보름달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유적 정문 근처에서 새까만 인도 소녀, 소년들이 참새처럼 한 무리가 몰려와 열렬히 우리들을 환영해 주는데, 나누어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참 안타까왔다. 바이샬리는 북인도 일대의 교통, 문화, 경제의 중심지로 상업이 크게 발달하여 그 당시 가장 화려하고 부유했던 아름다운 도시였으며 자유로운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언론과 새로운 사상을 마음껏 누리던 인도 최초의 공화국이 있었다 한다.

 

유적 중 으뜸은 아쇼카 석주이다. 현재 30개의 아쇼카 석주가 남아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석주로서 평평한 사각 받침대 위에 사자 한 마리가 앉아있고 기둥에는 수많은 그림 문자들이 새겨져 있다. 기둥의 총길이는 4.6m이고 그 옆에 4.6m정도의 사리탑이 있으며, 부처님이 오셨을 때 원숭이가 꿀공양을 올렸다는 원후봉밀터가 석주 남쪽으로 약 2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그 옆에 연못은 원숭이들이 부처님 을 위해서 파놓은 연못이 있다.

 

 

 

 

 

 

 

 

 

 

 

 

 

 

 

 

 

 

 

 

 

 

 

바이샬리에는 이 외에도 대승불교의 시발점으로 유마거사의 고향이며, 최초의 비구니 암리팔리의 동산이 있으며, 자이나교의 창시자 마하비라가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곳이고, 부처님이 다섯 번째와 마지막 하안거를 보냈으며, 불교 교단의 2차 결집이 열렸던 곳이다.

 

어둠이 내리자 파트나로 와서 여장을 풀었다. "별들이 아름다운 것은 보이지 않는 꽃 때문이고,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디엔가 숨어있는 오아시스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쌩 떽쥐베리는 <어린왕자>란 책에서 말했다. '그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의미를 여기 쿠쉬나라가라에서 절절히 알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스러지고 부서진 세월의 더께와 무상함이고 한 줄기 바람뿐이었다. 하지만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부처님의 숨결을 느끼고 부처님의 음성을 생생히 들었다. 인도 여행은 지금까지 여섯 번째 해외 여행 중 가장 행복하고 충만한 영혼의 여정이었다. 하여, 내 가슴 가득히 크나큰 연등 하나 두둥실 떠올라 환히 비추고 있는 듯도 하고, 부처님 마지막 말씀---'생자필멸 제행무상 불방일정진(生者必滅 諸行無常 不放逸精進)'이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을 내 가슴 깊은 곳에 금강처럼 단단히 새겨진 듯도 하다.

다시 한 번 더 뜨겁고 간절하게 나마스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