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상경(上京)
1894년의 봄철은 유난히 가뭄이 극심했다. 농민들은 눈만 뜨면 하늘을 쳐다보았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결국 모내기를 포기하는 농가가 많았다. 때마침 전국적으로 민심이 흉흉하였다. 고부댁은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보부상을 통해 다른 지역의 민심동향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는 편이었다. 점심을 먹고 쉬려던 참에 충청도 지역을 돌고 온 금석이가 인사차 고부댁을 찾아왔다.
“장사 다니느라 고생이 많았소. 충청도 지방은 민심이 어떠하던가?”
“네 마님 덕분에 장사는 잘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민심이 흉흉한 것을 보고 왔습니다.”
“난리라도 났던가?”
“예 지난 3월에 전라도 지역에서 동학도들이 중심이 되어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난리가 났었답니다. 삽시간에 농민군이 전주 감영을 점령하였다가 감사와 협상을 하고 자진해서 물러나는 일이 있었답니다.”
“농민군이 얼마나 세력이 커서 감영을 점령했는가?”
“전라도 지역에는 관리들이 부패해서 농민들이 견딜 수가 없었답니다. 이 지경이 되다보니 삽시간에 농민군이 불어났고, 포졸들은 제대로 싸워보지 않고 도망가기에 바빴답니다.”
“허. 그런 일이 있었구나. 세상이 어지러워 큰일이네.”
“전라도에서 난리가 있고난 후에는 충청도 곳곳에서도 동학도들이 접을 설치하고 세력을 뻗쳐 가고 있답니다. 조만간 경상도 지방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 알았네. 오늘은 피곤할 터이니 푹 쉬도록 하게”
조정은 썩을 대로 썩었고 민심은 의지할 곳이 없는데 동학은 농민들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고부댁은 조만간 김천지역에도 동학의 불길은 번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부댁의 걱정이 채 가시지도 않았을 즈음이었다. 김천장이 열리던 6월 5일 정오였다. 장터 한가운데 연단을 설치하고 건장한 사나이가 올라섰다.
“나는 동학 농민군 편보언(片甫彦)입니다.”
“김산군민 여러분! 지금 성환에서는 일본군이 청나라 군대와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자기네 땅도 아닌 남의 나라 땅에서 청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한다니 말이 됩니까? 김산군민 모두는 대동단결하여 외국 군대를 이 땅에서 몰아냅시다.”
“옳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힘을 모아야 합니다. 내 뜻에 동조하는 분들은 오늘부터 동학 농민군에 가담하시기 바랍니다.”
편보언의 일장연설에 장사꾼과 농민들은 감동을 받았다. 많은 무리가 편보언을 따라 도소(都所) 안으로 들어갔다. 이날 이후 편보언은 스스로를 도집강이라고 칭했다. 곧바로 입도자를 늘리는 일에 착수하였다. 김천에서 활동한 농민군 중에는 전봉준과 이념을 같이하여 전라도에서 폐정 개혁을 주도하던 전천순(全千順)과 김원창(金元昌)도 있었다. 그들은 김천의 동학도들에게 좀 더 강경한 투쟁을 요구하고 무장활동을 주도했다.
농민군은 숫자가 많아질수록 무기 마련이나 군량미 확보 등의 문제가 현실적인 문제로 등장하였다. 민간과 관아에 있는 총포, 창, 칼 등 무기를 최대한 모았다. 부농과 지주층의 재물을 헌납 받아 군량미와 전쟁 경비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돈과 재물을 헌납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관아에서는 무장한 농민군이 대정부투쟁으로 변질 될 경우를 우려했다. 대정부투쟁은 걷잡을 수 없는 후유증을 유발하기 때문에 농민군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 더구나 조정에서는 동학 세력을 진압할 능력이 없어 청나라 군대까지 끌어들인바 있는데 농민군의 세력 강화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부농과 지주층은 관아의 눈치를 보고 있어 동학 쪽의 군량미 확보는 여의치 않았다.
이러한 때에 김천에서 상업 활동으로 기반을 잡고 있는 고부댁에게 농민군이 찾아왔다. 고부댁 공장에서 일꾼으로 있던 칠복이가 앞장서서 고부댁 사랑채에 들이닥쳤다.
“저분인 이집 마님이십니다.”칠복이가 고부댁을 가리키며 편보언에게 알려주었다.
“나, 편보언이외다. 지금 일본군이 이 나라를 강탈하기 위해 2천명이 들어왔소. 우리 동학 농민군은 그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기위해 분연히 일어섰소이다. 주인장께서 농민군 지원을 해 주시지요.”
“글쎄요, 마음 같아서는 도와드리고 싶지만 관아의 눈치를 보아야 하니 여의치 않네요.”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설 편보언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다소 억압적으로 고부댁의 말문을 막았다.
“고부댁이 우릴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으로 알겠소이다.”
농민군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다소 강압적이라 하더라도 정당화 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오늘은 다섯 가마니만 후원해 주시오.”
고부댁이 무어라고 답변하기도 전에 농민군은 창고에서 쌀 두 가마니와 보리 세 가마니를 들고 나왔다. 고부댁은 평소 쌀 한 톨을 아끼면서 살아왔는데 자신의 동의도 없이 가져가는 농민군이 야속했다. 그러나 살기등등한 그들의 위세에 눌려 말 한 마디 할 수 없었다.
매미도 더위에 지쳤는지 우는 소리마저 힘겹게 들려오던 늦여름이 되었다. 고부댁이 저녁상을 물릴 즈음에 상주로 장사 나갔던 명덕이와 성주로 장사 나갔던 상수가 돌아왔다. 그들은 등목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는 고부 댁에게 보고하기 위해 안방으로 들어왔다.
“먼 길 다녀오느라 수고들 많았소?”
“아닙니다. 마님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고부댁은 원행 장사 다녀오는 보부상들로부터 그 지방 세상인심을 듣는 것이 습관화 되었다.
“그래 상주 쪽 민심은 어떠하던가?”
나이가 많은 명덕이가 입을 열었다.
“지금 상주의 낙동, 함창의 태봉에는 일본군의 병참기지가 설치되었습니다. 일본군이 설치한 병참기지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부산서 한양으로 침략했던 통로 상에 있답니다. 일본은 다시 한 번 조선을 침공하려고 한답니다.”
“일본 군인들은 얼마나 된다는가?”
“병참기지 마다 기껏해야 20여명에 불과하답니다.”
“동학군하고 조만간 싸움이 있겠네.”
“예, 그럴 듯합니다.”
“그리고 성주 쪽은 어떤가?”
“성주관아는 농민군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성주 인근의 농민들을 규합하여 관아를 점거하고 민가에는 불을 질렀습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 읍내 전체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저런, 난리가 났구먼.”
“농민군에 피해를 본 양반층과 양민들이 세력을 규합하여 민보군을 조직했습니다.”
“수고들 했네. 피곤할 테니 편히 쉬게.”
명덕이와 상수가 나가자 고부댁은 생각이 깊어졌다. 민보군이 조직되었다는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무력 강화를 위해 진력하던 농민군은 커다란 반발에 부딪치게 되었다. 농민군은 부농과 지주에게 강요해서 혁명 경비를 거두어 들였다. 그 과정에서 곤욕을 치르던 지배층이 자위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보수 세력이 민보군을 결성해서 농민군을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수 세력의 중심은 신분 면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에 위협을 받던 양반과 향리들이었고, 경제면에서 볼 때 스스로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돈과 곡식을 동학농민군에게 빼앗겨 왔던 부농과 지주층이었다. 양반 위주의 향촌사회의 질서를 지켜야 했던 지방관들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했다.
여름이 가실 즈음 김천 인근지역의 곳곳에서 전직 관리를 중심으로 민보군이 결성되었다. 문제는 이들도 동학도와 대결하기에는 무장이 필요했고 군량미가 필요했다. 이는 결국 유지들의 몫이었다. 상공업을 하고 있는 고부 댁도 여기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보군 대장은 보부상을 통해 사발통문을 돌렸고 며칠 후에는 그들도 고부댁에게서 다섯 가마니의 곡식을 거두어 갔다.
추석을 앞두고 김산군에서 군수영감이 고부댁을 비롯한 지주와 상단을 이끌고 있는 객주 열 명을 관아로 불렀다.
“듣자하니 최근에 동학도에 협조하는 상인과 지주들이 있다고 하는데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요.”
“영감님, 우리는 눈뜨고 당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백주에 동학군이 몰려와서 일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자신들이 나선 것이므로 협조를 해달라며 곡식을 가져갔습니다.”
“이런 나쁜 놈들이 있나.”
“그러니 영감님께서 우리의 재산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셔야지요.”
실력으로 농민군을 제압할 수 없는 군수영감은 허풍만 떨었다.
“하여튼, 관아에서는 재물 헌납자는 동학군 가담자로 처벌할 것이니 각별히 유념하시오.”
군수영감 스스로도 동학도의 위세에 눌려 제대로 치안유지를 못하면서 지주들 앞에서는 허세만 부리고 있었다.
“앞으로 나도 적극 나설 터이니 여러분은 절대 협조하지 마시오. 그리고 나도 동학군을 소탕하기 위해서는 군량미가 필요하니 각자 알아서 부담하시오.”
군수영감의 당부를 듣고 관아를 나서기는 했으나 불려간 사람 모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군수영감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고부댁은 벼 다섯 가마니를 군량미에 보태 쓰라고 갔다 바쳤다.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었다. 고부댁이 민보군에도 관아에도 군량미를 바쳤다는 소문이 동학군에 들어갔다. 밤낮 없이 후텁지근한 날씨가 계속되던 어느 날 동학군이 작심을 하고 고부댁의 점포에 들이닥쳤다. 곡식은 말할 것도 없고 간장, 된장, 고추장 등 식량이 될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거두어 갔다. 남의 집 식량을 거덜 내고서도 미안해하는 기색은 없이 으름장을 놓았다.
“한번만 더 민보군에 재물을 상납하면 목숨까지 내 놓아야 할 것이요.”
고부댁은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입추가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냉기를 느끼지 시작할 즈음이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오위장 출신 이용교가 찾아왔다.
“고부댁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나 계시오?”
“난들 어찌 알겠습니까?”
“지금 고부댁은 동학농민군한테도 군량미를 대주고, 민보군한테도 마찬가지고, 관아에도 바치고 있질 않소.”
“내가 주고 싶어 주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주고 싶어 주던, 빼앗기든 결과는 마찬가지요.”
“조만간 동학 농민군이 일본군한데 당하고, 민보군한데 당해서 어려움에 처할 듯싶소. 그렇게 되면 농민군에게 군량미를 지원했던 고부댁은 안전하리라 생각하시오?”
그때서야 고부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 같습니까?”
“지금은 이미 늦었고, 빨리 도망가시오. 그게 사는 길이요.”
고부댁으로서는 기가 막힐 일이었다. 동학농민군은 일본 놈을 이 땅에서 몰아 내야한다고 곡식을 가져갔고, 민보군과 관군은 농민군을 토벌해야 한다며 곡식을 마음대로 가져가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어느 누구도 백성들의 살림은 지켜주는 세력은 없었다.
고부댁은 밤이면 잠이 오질 않았다. 뒤척뒤척하다 겨우 잠이 들자 증조할아버지 최봉관이 꿈에 나타났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농민군에는 가담하지 마라. 결국은 관아에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 가문이 파멸하지 않았느냐.”
잠에서 깨어난 고부댁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증조할아버지의 유언을 돌이켜 보았다. 홍경래난 당시 증조부 최봉관이 당한 입장을 떠올렸다. 농민군에 가담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난이 평정되고 나서는 역적으로 몰려 가문이 몰락했는데, 70여년 만에 똑 같은 현상이 되풀이 되고 있었다. 고부댁은 이번에는 자신이 몰락할 수도 있다는 현실에 가슴이 떨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현재와 같이 장사를 계속하는 한 재물은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재물을 빼앗기고서도 후원을 했다고 죄를 씌우면 반란군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현실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해결 방법이 없었다. 이미 집안 곡식은 물론 장사 밑천인 유기그릇마저 빼앗기고 있는 상황에서는 사업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고부댁은 결단을 내렸다. 자신의 마름으로 있는 김서방을 불렀다.
“도저히 이런 상태로는 장사를 할 수 없으니 사업을 접고자 하오.”
“주인님! 이렇게 사업을 접기에는 너무나 억울합니다.”
“이 난세에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빠른 시일 내에 재고물품을 처분하고, 더 이상은 원재료를 구입하지 말도록 하시오. 그리고 외상 못 받은 것은 김서방이 가지도록 하시오.”
“예 주인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날부터 김서방은 고부 댁의 지시대로 유기그릇의 재고정리에 들어갔다. 3일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재고상품은 정리가 되었다. 1만 원의 현금이 확보되었다. 양제 광익을 불렀다. 그동안 고부댁이 모은 전답은 양제가 관리하도록 했다.
목적지는 한양으로 정했다. 아녀자의 몸으로 어떻게 한양까지 가느냐가 문제였다. 고부댁은 이용교 오위장을 찾았다.
“오위장 나리, 날 한양까지만 데려다 주시오.”
“일이 잘 풀리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이용교 앞에 은자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40대 할머니가 은혜를 갚을 날이 돌아올까요?”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그러면서도 눈앞에 보이는 은자에 눈길이 갔다. 당시는 십오륙세 나이면 결혼을 했으므로 40대 여인은 할머니로 인식되고도 족할 나이였다.
“좋소, 한양까지만 이요. 한양에 도착하면 각자 갈 길을 가는 거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고부댁은 놋그릇으로 상단을 꾸리고 보부상 2명과 이용교 오위장을 앞세우고 김천을 떠났다. 김천을 떠나자마자 추풍령 험준한 준령이 가로 막았다. 낮에도 호랑이가 출몰할만한 산림이었다. 화적패라도 만나는 날에는 꼼짝없이 당할 것 같았다.
고부댁 일행이 김천을 떠나 영동의 주막에서 저녁을 먹으려는 순간이었다. 김천에서 관군에게 패한 동학군 세 명이 들어왔다. 그들 중에는 구레나룻부터 턱밑에까지 수염이 난 털보는 면식이 있었다. 패잔병들이라 돈이 있을 리도 없었다. 고부댁은 주모에게 뒷방으로 불러 국밥을 먹이도록 했다. 상을 물리자 고부댁은 조용히 문고리를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농민군은 긴장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털보는 고부댁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이내 마음을 놓았다.
“안녕들 하시오. 일본군과 싸움은 해보았소?”
“물론이지요.”
“어떻게 싸웠나요?”
“북접 교단에서는 편보언 대장에게 먼저 선산 관아를 점령하라는 명이 떨어졌지요. 그리고는 해평의 일본군 병참기지를 점령한 후, 여세를 몰아 공주 쪽으로 진출하라는 기포령이 떨어졌지요.”
“그래 출정은 했나요?”
“기포령이 떨어지자 편보언 대장은 기군령을 내려 상주, 선산 예천의 농민군을 김천으로 모았답니다. 감천의 모래밭에서 출정식을 하고 선산 관아를 공격했지요. 선산 관아는 힘들이지 않고 접수했답니다.”
“그러고는요?”
“우리는 승리에 도취되어 술을 흠뻑 마셨답니다. 새벽녘에 일본군이 기습을 해 왔지요. 모두들 술에 취해 있던 상태라 혼란에 빠졌답니다. 일본군의 총에 맞아 수백 명이 쓰러지거나, 성을 넘어 도망치려다가 떨어져 죽은 자도 태반이었답니다.”
“편대장을 어떻게 되었나요?”
“편대장은 김천 장터로 돌아와 재기를 도모하려는 찰나에 이번에는 대구감영의 남영병이 농민군 토벌에 나섰답니다. 남영병이 김천 장터에 들이닥치자 편대장과 우리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간신히 도망쳤답니다.”
그때 옆에 있던 이용교가 ‘자신의 말을 듣기를 잘했지 않았느냐’는 표시로 고부댁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 눈을 찡긋했다. 고부댁은 농민군의 술값은 물론 노자까지 쥐어주며 빨리 도망가도록 했다.
고부댁은 천안-평택을 지나 보름 만에 한양에 당도했다. 반포나루에 여장을 풀자 이용교는 자신의 임무는 다했다는 듯이
“앞으로 일이 잘 풀리면 꼭 은혜 갚으시오.”
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고부댁은 막막한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홀몸이 되고 보니 처신하기는 편했다. 먼저 보부상이 가지고 온 유기를 처분했다. 그런 뒤에 보무상들은 김천으로 내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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