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최송설당

[소설 최송설당] 제7장 영친왕의 보모편

보리숭이 2017. 7. 27. 12:32

소설 최송설당의 제7장 영친왕의 보모편을 올립니다
최송설당은 영친왕의 보모가 되면서 신뢰를 얻게되고 신분상승의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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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0월 20일. 
고종이 황제국을 선포한 후 황제 즉위일로부터 여드레가 되는 날이었다. 청명한 가을하늘에 북악산 기슭의 단풍은 곱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으아앙…….”
대궐이 떠나갈 정도로 아기의 울음은 맑고 또렷했다. 해산을 도와주던 상궁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왕자님이시옵니다. 마마!”
그 순간 엄상궁의 눈가에는 눈물이 흘렀다. 산모 엄상궁이 만 44세의 나이로 출산했다. 해산이 어려울 것이라고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다행히도 순산을 했다. 태어난 장소는 경운궁(=덕수궁)이다.
“내 나이에 왕자를 낳다니”
“마마님! 왕자님의 손발이 단풍잎 같고, 이목구비가 분명하나이다.”
“어디보자 우리 아가, 내 아가야”
고종황제로서는 일곱 번째 아들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동등한 궁녀로만 보았던 궁인들도 왕자 아기씨를 보는 순간 말씨부터 달라졌다.
“마마님! 참으로 경사이옵니다. 감축 드리옵니다.” 
나이가 많은 상궁들도 엄상궁에게 극존칭을 쓰고 있다.


어린 왕자 이은을 품에 안은 고종황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종황제는 일곱 명의 여인으로부터 12명의 자식을 낳았다. 그러나 대부분 어릴 때 죽고 성인이 된 자녀는 이척(훗날 순종), 이강(의친왕), 이은(영친왕)과 훗날 낳은 덕혜옹주 네 명뿐이었다.
엄상궁은 왕자를 낳고 이틀 만에 내명부 종5품 ‘상궁’의 지위에서 종1품‘귀인’직첩과 동시에 ‘경선당’이라는 궁호를 받았다. 같은 해 정1품 ‘순빈’칭호를 받았다. 그로부터 1년 후에는 왕비와 동급인 ‘순비’로 책봉됨에 따라 ‘엄비’로 불리고, ‘경선궁’이라는 궁호로 바뀌었다.

엄상궁이 출산을 했다는 소식이 엄상궁의 친정에도 전해졌다. 친정 동생은 최나인이 이미 마련해 준 산후조리 용품을 가지고 궁으로 들어왔다.
“언니, 한 달 전부터 최나인이 언니의 출산을 위해 미국 제품으로 산후 용품을 준비해 두었다오,”
최나인이 보내준 산후 용품을 내 놓았다. 모두 미국 제품이라 상표가 영어로 되어 있었다. 당시 조선에는 산후 용품을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곳은 없었고 수건도 없었다. 무명천으로 몸을 닦는 시대였다. 최나인이 마련한 용품들은 모두가 진귀하여 엄상궁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당시 궁중에는 삼칠일 생후 21일
은 생모가 젖을 먹였다. 이후는 유모가 젖을 먹이고 보모가 아기 돌보는 일을 관장하는 것이 법도였다. 당장 필요한 것은 왕자를 돌보아 줄 유모와 보모가 필요했다.
“아우야, 유모 좀 알아봐 주렴.”
“언니, 그렇지 않아도 우리 동네에 아기를 낳은 지 6개월 되는 산모가 있답니다. 젖도 많이 나와 아기도 토실토실 잘 크고 있어요. 인심도 좋아 동네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답니다.”
“참으로 다행이구나. 그러면 당장 유모로 데려 올 수 있도록 주선해 보아라.”
“알았어요. 그건 그렇고, 보모상궁은 누구를 하려우.”
“특별히 마음에 둔 사람은 없는데 좋은 사람 있니?”
“언니! 최나인이 어때요.”
“그래 그것도 좋겠네.”
왕자의 산후 용품을 미국에까지 주문을 해서 준비를 할 정도였고, 학식도 풍부했다. 엄상궁을 대신하여 매월 두 번씩 불공도 드려 주었으니 최나인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기에는 최나인 나름대로 친정 동생에게 적당히 선물을 해 주었던 것도 작용했다.
엄귀인은 바로 최나인을 불렀다.
“오늘부터 최나인이 우리 황자님의 보모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본인 생각은 어때요?”
최나인으로서는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있을 수 없었다. 황자님이 잘만 커 준다면 장차 임금님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마마님의 분부라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날부로 엄귀인은 임금님께 최나인을 보모로 천거하였다. 이때는 고종이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선포한 이후였으므로 ‘황제 폐하’로 존칭이 바뀌어 있었다.
“폐하, 지난 날 신첩이 사가를 떠돌 때 최나인이 세한(歲寒)의 눈 덮인 소나무를 말하면서 병약한 제게 힘을 주었나이다.”
그러면서 최나인이 선물한 세한송을 펼쳐보였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황제는 기쁜 얼굴로 말했다.
“허허, 그랬는가. 최나인이야 말로 최송설당(松雪堂)이라 할 만하구나. 짐이 ‘최송설당’이라고 부르도록 윤허하노라.” 
그녀가 최송설당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그때부터이다. 아울러 출산 용품을 바치려 한다는 최나인의 갸륵한 뜻도 전했다. 고종 역시 기뻐하며 최나인이 바치려는 출산 용품을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윤허했다. 그날부로 최나인은 최상궁으로 격상되었다.
 
유모와 함께 왕실의 신생아를 돌보는 궁녀가 보모상궁이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유모의 교육적 기능을 중시한 만큼 보모상궁의 역할도 막중했다. 보모상궁을 선정할 때는 정성을 쏟았다. 왕비, 세자빈, 후궁은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상궁을 보모상궁으로 삼았다. 장차 왕이 될 원자(元子) 아직 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임금의 맏아들.
 의 보모를 뽑을 때는 신하들이 상소를 올려 고르기도 했다. 보모상궁에게 요구되는 기본 심성이나 자질은 유모에 못지않았다. 궁궐의 입장에서는 나라의 장래가 달린 일이므로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보모상궁은 직접 젖을 주는 일 말고는 모든 양육을 책임 졌다. 아이를 재우고 놀리는 일, 씻기는 일, 책을 읽어주는 일 등이 보모상궁의 책임 하에 이루어 졌다. 그러다 보니 왕실 아이들이 자랐을 때 가장 친근한 사람은 유모와 보모상궁이었다. 따라서 왕자들이 출궁을 하게 되면 의례히 유모와 보모상궁은 따라서 출궁했다. 출궁을 하더라도 궁녀의 신분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고 궁방에 소속된 궁녀로 바뀔 뿐이었다. 따라서 원자의 유모나 보모는 출궁하지 않고 계속 궁궐에 있으면서 원자 주변에 머물렀다. 이런 이유로 훗날 원자가 잘못 되었을 경우는 그 책임을 보모상궁에게 돌리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 왕의 유모나 보모상궁에게 최고의 명예와 현실적 실리를 준 이유는 자명하다. 젖을 먹여 키우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이다.

왕비와 동급이 된 엄상궁은 엄비가 되어 자신의 미래 운명을 영친왕 왕자 이은
에게 걸었다. 영친왕이 잘 자라주어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당면한 과제는 ‘영친왕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시대가 바뀌어 선대왕들과 같이 천자문, 동몽선습, 사서삼경, 시경이나 학습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학습이 필요했다.
엄비는 사숙을 열고 있는 친정 동생 엄준원을 부르고 왕자의 보모인 최상궁을 동석시켰다.
“어서 오시오 아우! 사숙은 잘 되어 가고 있소?”
“예, 마마님의 덕분에 잘 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아우를 부른 이유는 영친왕 교육 때문이오.”
“예, 그러십니까.”
“황제께서는 아펜젤러의 교습소에 ‘배재학당’이라는 현판을 내려주시었지요. 요즈음 거기서는 무엇을 가르친 다오?”
“예, 배재학당은 1885년에 설립된 이래 한문, 영어, 천문, 지리, 생리, 수학, 수공, 성경을 가르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의 제도를 가지고 왔으니 그렇겠지요. 우리 조선에서는 1886년에 영어교육을 목적으로 ‘육영공원’이 설립되었고, 성균관에서도 경학원을 설립해서 새로운 학문도입을 시도했지요. 하지만 아직 기반이 잡힌 것 같지는 않아요.”
“예, 그렇습니다. 최근에 생긴 한성사범학교에서는 수신, 국문, 한문, 교육, 역사, 지리, 수학, 물리, 박물, 화학, 습자, 체조를 교육과목으로 하고 있나이다.”
“그렇다면 영친왕 전하도 신학문을 배우도록 해야겠지요?”
“당연히 그러하옵니다.”
“그건 그렇고 신학문의 뿌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나요?”
“신학문의 뿌리는 선조대왕 때부터입니다. 북경에 갔던 이광세가 정교한 유럽지도를 가지고 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천리경, 화포, 자명종 등 서양문물이 들어왔습니다. 마테오리치의 천문서, 이승훈이 가지고 온 ‘기하원본’‘수리정온’등이 실학사상을 일으켰습니다. 이이명, 김만중, 이익, 박지원, 홍양호, 정약용 등의 학자들이 배출되면서 학문적이 체계가 잡혔습니다.”
“학문적으로는 그렇게 시작되었겠지요. 영친왕이 신학문을 공부한다면 대신들이 반대하지 않을까?”
“대신들도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군함 앞에 청나라 군대가 여지없이 무너졌지 않습니까. 동학란 때는 동학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신식소총 앞에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조선은 중국을 수천 년 동안 상국으로 섬겨왔습니다. 그러나 이 두 번의 전투에서 신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대국도 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대신들도 신학문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인식할 것입니다.”
그랬다. 조선은 중국 외에는 모두 오랑캐라고 보아왔는데 이들 두 사건은 사대사상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1876년에는 한․일수호조약, 1882년에는 한․미조약과 한․영조약, 한․독조약이 맺어지고, 1884년에는 한․러조약, 1886년에는 한․불조약, 1891년에는 한․오스트리아 조약이 맺어졌다. 따라서 각국의 외교관이 한양에 오고 조선도 각국으로 외교관을 파견하였다. 조선도 새로운 인재와 새로운 지식이 필요하게 되었다.
“조선이 바뀌는 데에는 기독교도 일조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나요?”
“예 기독교도 이 땅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큽니다. 특히 남녀평등, 계급타파, 일부일처제 주장은 조선이 변하도록 만들었나이다.”
“신교육이 받아들여지는 데는 왜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지요?”
“어느 사회나 과거부터 내려오는 관행이 있습니다. 수천 년 내려온 관습을 하루아침에 타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아우에게 많은 것을 배웠네요.”
“황공하옵니다.”

영친왕이 교육받을 시기가 되자 엄비는 엄귀비로 승격되어 있었다. 엄귀비는 황제에게 교육기관을 설치해 달라고 졸랐다. 황제는 학부대신에게 영친왕의 교육계획을 세워 보고하도록 했다. 얼마 후 어전회의가 열렸다.
“학부대신은 그동안 준비한 영친왕의 교육계획을 발표하라.”
“조선의 법도에는 대궐 안에서 자라는 왕세자나 왕자들은 ‘시강원’이나 ‘종학’에서 학문을 연마해왔습니다. 최근에는 ‘종인학교’를 세워 황실과 종실 집안 자제들을 교육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변하고 있으므로 별도의 ‘수학원’만들어 신학문을 닦도록 하고자 하옵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당연히 그래야지.”
“재학인원은 20명 내외로 하고 교육대상은 황족과 귀족 가문의 자제들로 구성하고자 하옵니다. 영친왕을 중심으로 나머지 학생은 배독하도록 하겠나이다.”
“교육받을 장소는?”
“영친왕의 거처를 창덕궁 낙선제로 하고 공부하는 장소도 낙선제로 정하고자 하옵니다.”
“교육과목을 어떻게 할 것인가?”
“수학원 과목은 수신, 국어, 한문, 외국어, 수학, 역사, 이과, 도서, 음악, 체조로 할 것입니다. 매일 두 시간에서 다섯 시간에 걸쳐 수업하도록 하겠나이다.”
“그렇게 하라.”
대신들도 반대가 없었다. 이렇게 하여 수학원 문을 연지 두 달 만에 영친왕은 만9세의 나이로 공부를 시작했다. 영친왕과 함께 수학원에 들어간 자제는 19명이었다. 이들은 배독(背讀)이라고 하여 영친왕을 모시고 함께 공부했다. 따라서 교관들이나 학생들은 영친왕에게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최상궁은 영친왕 전하가 공부하러 가면 항상 함께 다녔다. 호위무사나 생각시 들이 소홀히 하는 일은 없는지 살피고, 항상 그들을 감독하는 일이 일과였다. 여관(女官)들은 영친왕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겠다며 담 너머로 얼굴을 내미는가 하면, 점심시간이 늦어지면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로 빨리 끝내달라는 신호를 보내곤 했다. 수학원을 다녀온 영친왕에게 생모인 엄귀비는 그날의 수업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 즐거운 일과였다.
“황자 전하, 오늘 공부는 어떠했나요? 재미있었나요?”
“네, 어마마마! 아주 즐거웠어요.”
생기가 넘치는 소년의 대답에 엄귀비는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영친왕이 물러가고 나면 엄귀비는 최상궁을 별도로 불러 오늘 수업에 무엇을 배웠는지? 영친왕의 태도는 어떠했는지? 또래들과는 잘 어울리고 있는지? 낱낱이 보고를 받았다.
“최상궁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나요?”
“예, 마마, 오늘은 월종시험 발표가 있는 날인데 전하께서는 결과가 궁금하여 아침 수라도 거르고 수학원으로 갔나이다.”
“그래!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황공하옵게도, 전하께서 장원을 하였나이다.”
“그래요. 그러면 저녁 수라는 잘 드시겠군.”
월종시험은 매월 시험결과에 따라 상을 주거나 열등생은 강좌라고 하여 아랫자리로 내려앉도록 하는 것이었다. 영친왕은 승부욕이 강해 매월 월종시험 결과 발표가 나는 날이면 아침밥도 먹지 않고 수학원에 나왔다. 이런 날이면 영친왕을 모시는 사람들은 혼비백산하게 된다. 액정
(掖庭), 근시(近侍), 여관(女官)이 항상 수행을 하게 되는데 전하께서 수라를 드시지 않았다며 도시락을 두 개씩 싸들고 따라가곤 했다.
최상궁은 자신의 가슴 속에 품은 욕망을 풀어놓기에는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황제와 엄귀비로부터 철저한 신임을 받고나서 오래도록 품어온 생각을 실현하기로 마음먹었다. 최상궁은 자신의 야망을 영친왕을 통해 관철시키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영친왕이 수학을 시작하고 1년이 지난 후에 최상궁은 엄귀비의 속내를 떠보고 싶었다.
“마마, 이제 영친왕 전하께서 황제 수업을 받으셔야 하지 않겠나이까?”
“뭐요! 황제교육이라고.”
엄귀비는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싫지는 않은 기색이었다. 그러나 엄연히 황태자가 있는 상태에서는 그 말은 함부로 꺼낼 수도 없었다. 일이 잘못되면 역모로 몰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엄귀비의 의중을 알아차린 최상궁은 새로운 준비를 하였다. 집현전 학사를 통해 ‘제왕학’책을 구했다.
“마마, 제가 제왕학 책을 구했나이다.”
엄귀비로부터 책망이나 싫어하는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최상궁, 이 책은 우리의 목숨이 달린 것이니 잘 보관하도록 하세요.”
“예, 알겠나이다.”
엄귀비는 야망이 큰 사람이었다. 수학원 교수 안왕거를 조용히 내전으로 불렀다. 수학원의 어려움이 있으면 자신에게 직접 요청하도록 했다. 아울러 영친왕을 위해 별도의 제왕학을 수업해 줄 것도 요청했다.
안왕거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왕학은 훗날 임금이 될 사람에게만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황태자가 아닌 다른 황자가 제왕학을 수학하게 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마, 그 분부만은 받들기 민망하옵니다.”
영친왕이 서열상으로는 황태자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는 있으나 권력의 부침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그렇다면 제가 실수를 한 것이군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리다.”
그러나 눈치 빠른 안왕거는 즉시 자신의 말을 수정하였다. 현실적인 권력 앞에서는 자신의 영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타협에 의해 다음 날부터 영친왕의 제왕학 학습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여기에는 최상궁의 역할도 필요했다. 영친왕이 수학하는 ‘제왕학’책자는 서제에 두고 공공연히 가르칠 수가 없었다. 따라서 항상 최상궁이 품속에 품고 다니며 학습을 할 때만 펼쳐놓았다.
영친왕은 음악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서양 악기에 대해 흥미를 가지자 엄귀비는 영친왕을 위해 피아노를 수입하여 강습을 시켰다. 당시는 신학문과 더불어 외국의 문물이 밀려오던 시대였다. 과거의 왕자들이 배우지 못했던 외국어도 신학문의 대열에 필수 과목이었다.
“전하, 앞으로의 시대는 외국과 교류를 활발히 해야 하옵니다. 따라서 서양인들의 말에 대해 아셔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나라 말부터 알아야 하나요?”
“여러 나라 말을 알 수 있으면 좋겠지만 외국어를 하나만 학습하는 것도 벅찬 일입니다. 그 중에서도 영국과 미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영어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요. 저도 열심히 할게요.”
이렇게 하여 영친왕은 일찍부터 영어를 접하게 되었다. 나중에 일본에 가서도 영어는 즐거운 과목이 되었다.
수학원을 다녀온 영친왕은 최상궁을 유난히도 잘 따랐다. 어느 날 영친왕이 독감에 걸려 며칠 고통스러운 날을 보냈다. 최상궁은 지극 정성으로 잠을 자지 않으면서 영친왕을 간호하였다. 감기가 낳고 나자 영친왕은 자신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최상궁의 치맛자락을 놓지 않았다. 이러한 소문은 궁녀들을 통해 엄귀비의 귀에도 들어가게 마련이었다. 그럴수록 엄귀비의 최상궁에 대한 신뢰는 쌓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