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상로
효선이 16살이 되는 해였다. 새봄이 되자 효선의 집주변에는 민들레가 지천으로 피었다. 노란 민들레가 꽃을 피울 때는 꽃대가 바닥에서 조금만 올라와 피우더니 홀씨가 되어서는 가늘고 높이 자랐다. 탄탄하던 줄기는 실바람에도 흔들릴 정도로 연약한 모습을 보였다. 봄바람이 휘몰아치자 연약한 줄기는 홀씨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흔들렸다. 하얀 홀씨는 봄바람을 타고 두둥실 하늘높이 솟아올라 멀리멀리 날아갔다. 효선은 보잘 것 없는 꽃도 때가 되면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난다는 깨달음이 왔다.
효선이 결혼할 나이가 되었건만 집안 형편은 나아진 것이 없었다. 정식으로 결혼할 최소한의 비용마저 없었다. 그러던 차에 한 마을에 배씨 성을 가진 중늙은이가 있었다. 그는 병약하여 자신의 병수발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효선은 자신의 입이라도 들어주면 동생들이 굶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족 간의 합의에 의해 열여섯 나이에 배씨의 병수발을 위해 부모의 품을 떠났다. 그야말로 그냥 들어간 것이었다. 그러나 원체 병약했던 배씨는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죽었다. 이러한 연유로 먼 훗날 신문기자가 “결혼은 하셨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반면 효선의 둘째 동생은 문진원에게 출가하여 아들 남매를 두었고, 셋째 동생은 조우영에게 출가하여 아들을 두었다. 2년 만에 친정으로 다시 돌아온 효선은 스스로의 힘으로 가계를 꾸려가야 하는 형편이었다. 산업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로서는 여자의 몸으로 가계를 꾸려간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추위가 물러가지 않은 가운데 굶주림이 왔다. 굶주림이 계속되는 가운데 추위가 생활을 옭아매었다. 굶주림과 추위가 물러가지 않았는데 질병까지 왔다. 삶 자체가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효선은 경제적으로 독립하기로 결심했다. 스스로 장삿길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아버지의 고향을 따서 ‘고부댁’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당시로서는 처녀의 신분으로 장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효선’에서 ‘고부댁’으로 바뀐 스무 살 무렵의 조선에는 개방의 강풍이 불었다. 1866년에는 천주교도를 탄압한다는 명분으로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에 상륙했고, 1871년에는 제너럴셔먼호를 몰고 온 미국이 신미양요를 일으켰다. 1875년에는 운요호(運揚號) 사건으로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고부댁은 <자술>이라는 글을 지었다. 친정에서 부모를 모시며 가문의 부흥을 위해 재산을 모으기로 한 결심을 글에 담았다.
<중략>
침선(針線)으로 의지하야
주야(晝夜)가 상관없이
고생으로 지나갈제
악의악식(惡衣惡食) 꺼릴손가
지성이면 감천이라
부친모셔 상의(相議)하고
식산(殖産)으로 업(業)을 하니
티끌모아 태산이라
<중략>
고부댁은 본격적으로 생업 일선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스물두 살이 될 때까지 살림은 거의 굶어 죽을 정도로 어려운 형편이었다. 남의 집 바느질을 해주고 품삯을 받아 그것으로 손바닥만 한 밭뙈기를 장만했다. 다음은 마당만한 논뙈기로, 또 마당만한 논뙈기를 다시 한 마지기 논으로 늘려나갔다. 여자의 몸으로 재산을 불려나가는 과정은 피눈물이 나는 세월이었다. 그야말로 악의악식(惡衣惡食)을 가리지 않고 절약과 근검으로 돈을 늘려갔다. 밑바닥에서 일어나기 위해서는 밥 굶지 않고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푼돈이 한 냥이 되고 양돈이 관돈 열 냥이 되었다. 절약만으로 돈을 모으는 데에는 집념과 고집 없이는 불가능했다. 한번 독하게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이루고야 마는 굳은 심지가 그녀에게는 있었다.
처음에는 고부댁 스스로 숟가락을 봇짐에 싸서 장날마다 돌아다녔다. 초하루 엿새 열리는 선산장, 이틀과 이레로 열리는 성주장, 사흘과 여드레로 열리는 상주장, 나흘과 아흐레에 열리는 칠곡장, 닷새와 열흘에 열리는 김천장으로 떠돌면서 장사를 했다. 닭이 울고 동이 터 새벽빛을 받아 싱그러운 아침을 보면서 반드시 성공하고 말리라는 희망을 가지기도 했다. 시골 장날은 대개 날이 새기 전에 매매가 성립되어 아침 반나절만 되면 파장이 되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고부댁은 그 전날 저녁에 미리 가서 기다렸다가 새벽 장을 열기도 했다. 때로는 부지런히 장날에 들어가 남의 집 처마 밑에 서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먼동이 트면 좋은 목을 잡아 얼른 전을 벌이기도 했다. 따라서 밤길과 새벽길을 걸어야 했다. 행상 노릇은 봄과 가을은 서늘하여 쫓아다닐 만했지만 여름엔 덥고 겨울에는 몹시 추워 고생이었다. 겨울에는 비상을 싸라기만큼 먹고 걸으면 몸이 후끈후끈하였다.
제일 곤혹스러운 것은 아녀자의 몸으로 남자 장꾼들과 잠자리를 같이해야 하는 일이었다. 보부상들은 한 고을에 들어가면 그 고을 인방에서 먹고 자는 것이 통례였다. 인방은 고을에 들어온 보부상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숙소이자 연락 기관이었다. 장날을 따라 다녀야 하는 속성상 자연히 숙소 문제가 따랐다. 아녀자라도 예외 없이 총각과 홀아비와 늙은이가 함께 뒹구는 인방의 큰 방에서 혼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시집가서 새살림을 나려면 일단 그릇부터 장만했다. 혼인철인 가을만 되면 놋대야, 놋숟갈, 놋양푼, 놋요강 등 생활기구 일체를 장만하는 경우가 많았다. 혼인날짜나 환갑잔치 등 대사 있는 집을 수소문하여 물건을 대주었다. 어떤 물건을 가지고 어느 장에 가면 얼마를 받을 수 있다는 판단력도 생겼다. 가을에 쌀 얼마를 받기로 하고 외상을 줄 수 있는 안목도 생겼다. 어느 정도 장사의 기반이 잡히고 나서는 고부댁은 도매상 역할만 하고 실제 장사는 보상에게 맡겼다. 장사의 묘미를 깨우치게 되었다.
고부댁이 나이 서른을 앞둔 임오년(1882년) 이었다.
굶주림에 허덕이던 구식군인 오천 명이 선혜청에 불을 질렀다. 구식군인들은 여덟 달 동안 급료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급료를 곡식으로 받기로 했는데 어쩌다 받은 급료에는 쌀에 겨와 돌이 섞여 있었다. 구식군인들이 습격을 하자 숙직을 하던 당상관 김보현은 피신도 못하고 창에 찔려 죽었다. 풍악을 울리던 왕비는 한 사내의 등에 없어 한강에서 나룻배로 건너 충주로 피신했다. 한양에서는 왕비의 행방도 모르면서 시신도 없는 왕비의 장례식을 치렀다. 급한 고종은 대원군을 불러 드렸으나 청나라는 대원군을 볼모로 잡아갔다. 개화를 부르짖던 세력과 수구를 주장하던 세력 간의 다툼이었다. 왕비는 다시 왕궁으로 들어왔으나 두해가 지나 갑신년(1884년)에는 개화를 꿈꾸던 20대의 젊은 신하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이 우정국 낙성식을 기회로 정변을 도모했다. 식장에서는 서재필이 수구파 민영익을 칼로 찔렀으나 죽이지는 못했다. 다급해진 김옥균은 궁으로 가서 고종과 왕비를 경우궁으로 모신다음 왕명을 핑계로 신하들을 불러드렸으나 모두 죽이지는 못했다. 결국 개화파의 정변은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민중의 지지가 없었고 외세에 의존하여 정변을 도모하였기 때문이었다.
갑신정변 이후 10년간은 청나라와 민씨들의 폭압 속에서 임금은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었다. 겉으로는 평화로운 것 같았으나 안으로는 곪아 들어가고 있었다. 한양에서는 개화파와 수구파로 분열이 일어나 대신들이 죽고 죽이는 사태가 이어졌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민초들의 생활은 나아 질수가 없었다. 조선을 둘러싼 제국들은 침략의 더듬이를 들여 밀고 조선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청국과 일본, 러시아는 노골적으로 더듬이를 보였고 다른 나라들은 보이지 않게 빈틈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부댁이 부자의 운명에 다가갈 기회가 왔다. 일찍부터 김천에는 유기 산업이 발전하였다. 김천읍내에서도 약물래기를 중심으로 십여 개의 유기공장이 있었다. 고부댁은 어느 정도 자본이 마련되었던 28세 때 심각한 자금난에 허덕이는 유기공장 하나를 인수하였다. 당시 삼남지방은 3년째 흉년이 들었다. 여름 가뭄은 질길 대로 질겨 들판에 모를 심은 곳은 절반밖에 되질 못했다. 먹을 물조차 없어 전염병이 창궐했다.
유기공장 인수와 동시에 고부댁은 공장장인 박노인으로부터 열심히 공부했다.
“유기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지요?”
“예, 유기는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요, 구리에 아연을 합금한 주동과 주석을 섞은 황동이 있습니다."
“주동과 황동은 쓰임새 차이가 있나요?”
“주동은 합금 재료인 아연에 독이 있기 때문에 향로나 촛대, 재떨이 등을 만듭니다. 황동은 독이 없기 때문에 식기나 타악기를 만듭니다.
“유기를 다른 방식으로 나누기도 하나요?”
“예, 주물유기와 방짜유기로 나눕니다.”
“주물유기가 뭡니까?”
“주물유기는 불에 녹인 쇳물을 일정한 틀에 부어 만들어 내는 방법인데요, 먼저 고운 흙으로 본을 만들고 통쇠를 뜨거운 불에 녹여 액체상태가 되게 한 후 그 쇳물을 본에 부어 만듭니다. 겉에 있는 본을 깨치고 보면 모양은 그릇이 되어 있지만 검고 우둘투둘한 데가 많습니다. 이때 그릇의 안팎을 기계로 깎아줍니다. 잘 깎아내면 비로소 반짝반짝하고 평탄한 그릇이 됩니다.
“제품마다 차이가 있나요?”
“쇳물의 성분이나 배합비율에 따라 합금이 가능하지요. 합금한 재료의 배합비율과 성분에 따라 색깔과 품질이 달라집니다. 기술자의 기술력에 따라 섬세하고 다양한 형태의 제품이 만들어 집니다.”
“그럼 방짜유기는 어떻게 만듭니까?”
“방짜유기는 정확히 합금된 놋쇠를 불에 달구어 망치질을 되풀이해서 얇게 늘여가며 형태를 잡아가는 방법입니다.
“방짜유기와 주물유기 중 어느 것이 비싸지요?”
“방짜유기는 휘거나 잘 깨지지 않습니다. 비교적 색깔이 변하지 않고 쓸수록 윤기가 납니다. 울퉁불퉁한 메 자국은 수공예품으로서 은근한 멋과 품위를 풍겨줍니다.”
“유기로 만든 제품 중에 어떤 것들이 잘 팔리나요?”
“잘 팔리는 제품에는 놋대야, 놋양푼, 놋밥그릇, 놋대접, 놋종지, 손숫갈, 놋요강이 있습니다.”
“김천에는 주물유기와 방짜유기 모두 생산합니까?”
“예, 우리 김천지역에는 주물유기와 방짜유기가 함께 생산됩니다.”
“그래요!”
고부댁은 유기공장 인수와 동시에 유기에 대한 학습을 차근차근 해나갔다. 제조원가에 관한 공부도 착실히 진행했다. 공부를 할 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몰입했다. 놋쇠 몇 근을 넣으면 놋대야 몇 개가 나오고,통쇠는 몇 근을 녹여야 종지 몇 개를 만들며, 제조원가에 얼마의 이문을 붙여 행상들에게 넘길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고부댁의 몫이었다.
다음 단계는 유통시장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장날이 되면 사방에서 상인들이 물건을 가지고 와 장을 벌였다. 장거리에는 그곳에 상점을 차리고 앉아서 파는 좌상도 있고, 장날을 따라 다니면서 물건을 짊어지고 다니며 파는 행상도 있다. 행상들은 좌상들보다는 항상 싼값에 팔았다. 무거운 물건을 등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파는 새우젓장수, 나무장수, 도구통장수, 키장수 등은 부상이다. 숟가락장수, 방물장수, 필목장수 들처럼 보따리에 싸 짊어지고 다니면서 파는 것은 보상이다. 고부댁은 부상을 통해 유기그릇을 넘겨주었다. 이제는 이런 일이 그녀의 중요한 일과였다. 상인에서 생산자의 입장으로 바뀐 것이었다.
고부댁은 남녀의 성별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서른 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비교적 유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스물여덟 살이 된 고부댁은 6촌 동생 최광익을 부친의 양자로 입적했다. 후사를 걱정하던 부친의 한을 풀어드렸다. 부친의 나이 쉰여섯에 최광익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또한 고부댁은 병술년(1886년)에 부친이 별세하자 전라도 함평군 신광면 삼천동에 5백리 길을 운구하여 안장했다. 멸문의 화를 당하고 70년 가까이 고부와 김천을 떠돌던 최씨 집안으로서는 비로소 가문의 격을 갖춘 셈이었다. 세월을 돌아보면 격세지감이 아니 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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