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서당
최창환은 아버지 최상문이 사망하자 3년 상을 치룬 뒤 홀로된 모친 해주 노씨를 모시고 1849년에 고부에서 김천으로 이주했다. 이때는 이미 김천으로 숙부와 사촌들이 이주해 있어 더불어 살기 위해서였다. 김천으로 이주한 최창환은 경주 정씨 가문의 정옥경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농토가 없는 창환의 생활은 궁핍 그 자체였다. 정씨부인이 삯바느질로 생계를 연명해 나갔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바람까지 잠이든 한 낮에 정씨부인은 깜박 잠이 들었다. 좀 특이한 꿈을 꾸었다. 한 노인이 누런 학을 타고 붉은 그림을 품에 안겨 주는 꿈이었다. 그날부터 태기가 있었다. 열 달이지나 1855년 8월 29일 경상북도 김산군 군내면 문산리(지금의 김천시 문당동)에서 첫딸을 낳았다. 창환은 딸의 이름을 효도할 효(孝)에 착할 선(善) 효선으로 지었다. 이후 두 명의 딸을 더 낳았다.
최창환이 사대부 집안이라면 과거에 진출하여 가문을 일으키는 것이 순서였을 것이다. 멸문의 화를 당한 입장에서 멀고먼 타향에서 전답을 마련하는 일은 까마득한 일이었다. 형편이 이러하니 효선의 어린 시절은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효선은 남다른 품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단정하고 엄숙하였으며, 말을 배울 나이에 이미 글을 깨치고 있었다. 부모님을 모시는 일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맛난 것을 먼저 입에 대는 일이 없었으며 과일을 보면 품어가 맛보시게 하였다.
창환은 이미 고부에서 서당 일을 보면서 접장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그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서당 훈장이었다. 당시 서당은 사립의 초등교육기관이다. 설립에 필요한 기본재산이나 법적인 인가를 요하는 것이 아니었다. 설립이나 폐지가 자유로워 뜻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서당을 열 수 있었다. 훈장 집에서 자영서당(自營書堂)을 개설한 경우는 자연히 학동의 수에 의해 생계를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학동 수가 적으면 입에 풀칠을 하는 정도의 생계를 꾸려갈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농촌 마을이 집안 친척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최창환의 서당도 화순최씨 문중의 학동들로 구성되어 열렸다.
화순최씨 문중에서 서당을 열기로 의견이 모아진 후 자연스럽게 창환이 훈장으로 추대되었다. 서당을 열기 전에 창환으로부터 서당 운영방침에 대한 설명회가 개최되었다. 일종의 훈장 테스트인 셈이었다.
“훈장은 어떤 내용으로 학도들을 가르칠 셈이요?”
“예, 먼저 <천자문>을 가르치고, 다음은 <동몽선습>, <계몽편>, <격몽요결>, <명심보감>순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러면 몇 살 아이들부터 시작해서 언제까지 가르쳐야 하오?”
“다른 서당에서는 6∼7세에 입학해서 15∼16세에 마칩니다.”
“여자 아이도 가르쳐야 하오?”
“대부분 사내아이들만 가르칩니다. 여자 아이들은 별도로 가숙(家塾)의 형태로 따로 설립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문중은 형편이 어려우니 사내아이들만 가르치도록 하세.”
“어떤 방식으로 가르치게 되오?”
“서당 교육은 강독(講讀)·제술(製述)·습자(習字)의 세 가지로 이루어 집니다. ‘강’이란 이미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그 뜻을 훈장이 묻고 학동이 답하는 방식입니다.”
“진도는 어떻게 나가는가?”
“매일 그날 배운 것을 백번 읽도록 합니다. 백번 읽고 이튿날 훈장 앞에서 배송(背誦)합니다. 여기서 합격하면 새로운 학습으로 나갑니다.”
“아이들마다 실력 차이가 있을 텐데.”
“완전히 이해 할 때까지 반복하기 때문에 학동들마다 진도 차이는 나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하여 훈장에 대한 교수 평가가 완료되고, 다음 달부터 창환의 집에서 서당을 열었다. 또한 매년 보리타작을 하면 보리 한 말, 가을에는 쌀 한 말씩을 훈장에게 수업료로 지불하기로 했다.
근대이전의 교육은 서당, 향교, 서원, 성균관 등의 기관에서 이루어지는 통합적 교육이었다. 근대의 학교교육으로 들어오면서 초등-중등-대학으로 이어지는 계단식 학제와 분과(分科)제로 바뀌었다. 서당교육은 몸을 흔들면서 소리 내어 책을 읽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그 과정에서 리듬을 통해 문장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문장 전체를 외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결국 책 한권을 통째로 외웠다.
점심나절이 지나고 학동들이 다 돌아갔다. 갑자기 하늘이 내려않고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황소 눈망울만 한 장대비가 쏟아졌다. 삽시간에 개울이 황토 물로 바뀌고 온 동네를 삼키려는 듯이 굽이쳐 흘렀다. 한 시간여 내리던 소나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은 하늘 사이로 햇빛이 쏟아졌다.
이때 김진사가 팔자 눈에 수염을 곤두세우고 서당 안으로 들어섰다.
“훈장 선생, 학동들을 가르치는 거요, 놀기만 하는 거요”
하며 목에 핏줄을 세우며 시비를 걸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가 듣자하니 훈장 선생 실력이 없어 학습 진도가 나가질 않고 배우는 것이 없다고 합디다.”
이 무슨 소리인가! 훈장으로서는 어안이 벙벙해질 뿐이었다. 김진사의 아들은 결석도 많이 하고 숙제도 하지 않아 실력이 향상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훈장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김진사는 한 술 더 떴다.
“내가 듣자 하니 훈장선생이 전라도 사투리를 많이 써는 것으로 보아 전라도에서 도망 나온 노비라는 애기도 돕니다.”
창환은 ‘노비’라는 말에 신경이 곤두섰다. 자신의 신분을 걸고넘어지자 피가 거꾸로 솟아올랐다. 사실 당시에는 벽촌의 훈장 가운데는 한자문의 활용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자도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도망노비가 법망을 피하는 수단으로 훈장 노릇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창환은 무어라고 할 말이 없었다. 마침 그 때 효선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진사님께 제 실력을 보여드릴 수는 없고 마침 제 여식도 제 밑에서 글을 배우고 있으니 제 여식의 실력을 한번 보시지요.”
그러고는 효선에게 사서삼경 중 논어를 가지고 오도록 하였다. 효선이 책을 가지고 오자 책의 중간 아무 곳이나 펼치고 효선에게 읽게 하고 그 뜻을 새겨보도록 했다. 효선은 분부대로 책의 중간부분을 펼치고 펼쳐진 부분을 읽었다.
“자왈 학여불급이오 유공실지니라(子曰 學如不及 猶恐失之)”
그리고는 뜻을 새겼다.
“배움이란 도달할 수 없는 것 같이 하고 배운 것은 잃어버릴까 두려운 듯이 해야 한다.”
“그만 되었다.”
효선은 계속하려고 하였으나 김진사가 제지하였다. 효선은 방문을 조용히 닫고 나왔다.
“제 여식아이 올해 열 살입니다. 학문은 훈장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우치는 것입니다.”
효선은 세 살 때 글자를 익혔고, 일곱 살에 한시를 짓는 재주를 보였다. 이렇듯 효선의 학문은 나날이 깊어만 갔던 것이다.
그때서야 김진사도 자신의 경솔함을 사과하고 물러갔다. 그러나 훈장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훈장의 자격은 천차만별이었으며 학식의 표준도 일정하지 않았다. 경(經)·사(史)·자(子)·집(集)에 두루 통하는 자는 드물었다. 또한 훈장에 대한 사회적이나 경제적 지위는 열악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일반적인 훈장의 이미지는 멸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경전의 주석과 언해(諺解)를 보고 그 글의 대강의 뜻을 해득한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서당에서의 글공부는 대부분 초급 수준에 불과했다. 글짓기[製述]로는 표(表)·책(策)·기(記)·명(銘)을 짓고, 시(詩)와 율(律)을 이해해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사율(四律)을 빌려 옮기거나 십팔구시(十八句詩) 따위를 한 두 마디 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효선은 천자문이나 동몽선습, 자치통감 등 기초 지식은 당연히 터득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당송문(唐宋文), 당률(唐律)을 넘어 통감(痛鑑)까지 깨쳤고,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다다랐다.
효선의 학문이 깊어질수록 창환은 딸에게 직접 주입하여 가르쳐주지 않았다.
“나에게서 답을 구하려고 하지 마라. 읽고 또 읽어라. 그러다 보면 언젠가 깨달음이 올 것이다. 그것이 네 것이다.”
효선은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였다. 그러나 몸은 마음과 달리 천근만금 무겁고 눈꺼풀은 자꾸만 내려앉았다. 어느 날 효선은 <자조(自嘲)>라는 시를 지어 마음가짐을 다잡았다.
배불리 먹고 자고 석양까지 산보하니1)
눈과 귀는 텅텅 비어 견문이 모자라네
문득 강산 유람할 생각 있어
한 번 유쾌히 자장문을 읽네
飽眠견步抵斜嚑
耳目空空芝見聞
정有江山遊覽意
一遍快讀子長文
자장문(子長文)이란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말한다. 효선의 학문은 사기를 인용할 정도로 깊어만 갔다. 효선의 학문이 깊어질수록 창환은 자신의 어렸을 적의 처지를 돌이켜 보았다.
“아버님! 왜 저는 과거에 나갈 수 없습니까?”
하고 부친 상문에게 항의하였을 때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먼 산만 응시하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며칠 후 아버지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듣게 되었다.
“창환아! 우리 집안은 정주와 선천 일대에서 살았단다. 무신의 집안으로 너의 조부께서는 부호군을 지내셨단다. 당시 홍경래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적극적으로 반란군을 진압하지 않았고, 조부님의 외가가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멸문의 화를 입은 것이란다.”
“그래서 저희가 노비의 신세가 된 것입니까?”
“그렇단다.”
“그럼 저는 영원히 과거에 나갈 수 없겠네요.”
“그렇단다.”
그날 이후 창환은 학문을 게을리 하고 폐인처럼 지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비 중에도 학문이 깊어 존경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문의 진정한 의미는 벼슬에 있지 않다는 것도 깨우쳤다. 이후 최창환은 더욱 학문에 정진하였다.
효선이 겨우 철이 들어갈 무렵 조정에서는 크나큰 변화가 일었다. 철종 임금이 죽고 안동김씨 60년 세도정치가 막을 내렸다. 대원군이 12살 고종의 아버지로서 섭정을 시작하였다. 비변사를 혁파하고 서원을 철폐하였다. 그리고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고자 토지조사를 실시하여 양전제를 시행하였다. 또한 호포제를 실시하여 양반도 군포를 내게 하였고, 환곡제도는 사창제로 바꾸었다. 조선에는 새로운 개혁정치가 시작되었다.
미녀의 눈썹만한 초닷새 초승달 달빛이지만 호롱불 꺼진 방안 탓인지 달빛은 밝게 빛났다. 봄바람에 실려 온 수수꽃다리 향기가 방안 가득히 흘렀다. 효선이 아버지를 찾아왔다.
“아버님! 요즈음 잠도 못 주무시고 한숨만 쉬고 계시는 날이 많으십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지요?”
그랬다. 당시 창환은 조무래기들이나 모아 글이나 가르치고, 실력은 있어도 벼슬길에 나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럽기만 했었다. 그래서 밤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식이 눈치를 챈 것이다.
“아니다. 요즈음 달빛이 고우니 잠이 오질 않는구나.”
효선의 질문은 이어졌다.
“아버님은 학식이 높으신데 왜 과거에 나가지 않으셨습니까?”
딸로부터 언젠가는 이러한 질문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창환은 더디어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고부에 살 때 자신이 부친께 했던 질문을 떠 올렸다. 창환은 부친으로부터 들은 가문의 내력에 대해 효선에게 설명했다. 효선은 말없이 조용히 물러갔다. 며칠 후 효선이 아버지 앞에 꿇어앉았다.
“아버님! 사내가 아니면 아버지의 한을 풀 수 없습니까? 조상의 신원(伸寃)은 제가 꼭 풀어드리겠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꿈을 이루고 말겠다는 효선의 비장한 표정에 창환은 울분이 북받쳐 올랐다.
“그래 네 뜻이 기특하구나. 고맙다.”
자신도 이루지 못한 한을 딸이 이루겠다고 하니 창환으로서는 기특할 뿐이었다. 그날부터 효선은 공부를 접고 장사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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