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최송설당

[소설 최송설당] 제2장 '노비'

보리숭이 2017. 4. 5. 16:51

최동현 송설총동창회장이 10년 간 준비해 온 '소설 최송설당' 초고가 선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번 읽어 보십시오.
앞으로 2년동안 24회로 발표할 예정입니다.
블로그에 의한 발표가 끝나면 할머니 80주기가 되는 2019년에 책으로 출판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의 율법에는 역모 죄는 9족을 멸한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는 유형(流刑)이라 하여 3천 ~ 5천리 멀리 유배를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유배를 가기 전에 곤장 100대를 때려서 보냈기 때문에 유배를 가는 중에 숨진 사람도 더러 있었다.
최봉관이 홍경래 난에 연루되어 죄를 받게 되자, 아들 최상문은 27살의 나이에 4형제와 함께 양반에서 노비의 신분으로 전락하였다. 최상문을 비롯한 4형제는 가솔들을 이끌고 한 달이 걸려 전라도 고부군에 도착했다.
나지막한 산에는 푸름이 솟아났고 넓은 들판에서는 누런 보릿대가 바람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낫질하는 농부의 손길이 지날 때마다 보릿대는 바닥으로 줄지어 넘어졌다. 일찌감치 보리 수확을 마친 논에는 논갈이가 한창이었다. 선천은 겨울이 길어 보리와 벼를 한해에 지을 수 없었는데 남녘은 따듯한 날씨 탓에 그것이 가능했다. 그만큼 더 풍요로웠다.
최상문은 노비문서를 들고 고부 관아에 신고하러 들어갔다. 노비문서를 받아 든 이방은 잠시 물러가 있으라고 명했다. 관아의 구석진 곳에서 끼니도 그르고 한나절을 머물고 나서야 이방이 그들을 불러 들였다.
“자 오늘부터 너희들은 공노비로서 남자는 선상노비로 일하게 될 것이고 여자는 납공노비로 일하게 된다.”
“선상노비와 납공노비는 어떻게 다릅니까?”
“선상노비는 내일부터 관아에 출근해서 어른들이 시키는 일을 하면 된다. 대신 공물은 납부하지 않아도 된다.”
“부녀자들은 어떻게 되나요?”
“부녀자는 납공노비다. 납공노비 남자는 1년에 면포 한필 반, 여자 노비는 한필을 납부해야 한다.”
“저희 형제 모두는 공노비에 속하나요?”
“그렇다. 너희는 역모 죄로 노비가 되었으므로 오늘부터 고부군에 배속되는 것이다.”
“저희는 식솔이 많은데 먹을 것을 어떻게 마련합니까?”
“노비 주제에 말이 많구나. 관아에서 열심히 일하다보면 목구멍에 거미줄 칠 일은 없을 것이다.”
당시 관노비는 제도상 봉족을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실제는 급여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정한 급여가 없었으니 그들의 생활은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양민을 괴롭혀서 생계를 이어나가는 것이 다반사였다.
“너희들은 이곳 관아에서 5리 걸어가면 개울이 있고 개울 건너 폐가가 있다. 그 폐가가 너희들의 거처다. 거기서 숙식을 해결하도록 해라. 먹는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최상문 형제와 식솔들은 아전이 시키는 대로 폐가를 찾아들어 눈을 붙였다. 집이라고 해야 누워서 하늘이 보이고 벽에서는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울타리도 없어 어디까지가 마당인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최상문 일가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다음날 최상문은 고부군 관아로 출근을 했다. 아버님이 부호군으로 있었기 때문에 지방관아의 편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노비의 신분으로 전락한 상태에서는 모든 사람이 상전이었다. 이방이 이들을 불러 모았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라. 우리 관아에는 위로는 사또님이 계시고 관원이 있다. 관원은 양반들이시다. 양반을 잘 모셔야 한다.”
“예”
“관원 아래 이원이 있는데 이분들은 서리(書吏)와 아전(衙前)이 있다. 너희는 아전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알겠는가?”
“예”
최상문은 기가 막혔다. 두 달 전만해도 자신도 양반이었는데 이제는 천민의 신세가 되어 양반을 받들어야 했다.
조선시대 관리(官吏)는 관원과 이원으로 분류되었다. 관원이란  과거시험이나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사람이고, 이원은 관원 밑에 있는 서리와 아전을 가리키는데 서리는 주로 문서를 다루는 사람이고, 아전은 심부름꾼 수준의 일꾼들이었다. 관원과 이원의 지위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이원의 상당수는 노비였고 그들은 의무복무였다. 노비출신의 이원은 봉급을 받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부정부패만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지방민들을 괴롭히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없으면 행정이 돌아가지 않았다. 조선의 행정은 이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최상문이 고부로 이주하고 제일 먼저 부닥친 시련은 사투리였다. 조상 대대로 평안도 사투리를 써왔는데 전라도 지방으로 이주하고 나니 말이 너무 낯설었다. 이 지방에서는 무어라고 말을 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웃음꺼리가 되었다. 이름이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어이, 평치 이리와”하는 식으로 하대하여 불렀다.
최상문이 고부군에서 처음 배치를 받은 곳은 형방(刑房)이었다. 농사일이 한 참 바쁠 때 이었다. 고부 관아의 무등골에 사는 점박이 돌쇠가 주인을 살해하고 내장사 쪽으로 도망을 갔다. 노비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힘들어지자 도망가는 노비가 급증할 때였다. 당시에는 도망간 노비를 찾으러 다니느라 관아를 지킬 사람이 없을 정도이었다. 형방에 속한 최상문에게 돌쇠를 잡아오라는 명이 떨어졌다.
상문은 꼬박 하루를 걸어서 내장사 입구에 도착했다. 동네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느티나무 아래는 한 청년이 목을 매어 죽어 있었다.
“이 사람은 이 동네 사람입니까?”
“아니오, 어제 이 동네 들어올 때부터 눈이 충혈 되어 있었고, 횡설수설했는데 오늘 목매어 죽었다오.”
상문이 죽은 사람을 살펴보니 이마에는 커다란 점이 있고 건장한 젊은이였다. 도망간 돌쇠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길로 지게에 시체를 짊어지고 고을로 돌아오는 중에 밤이 되었다. 시체를 지고서 잠을 잘 곳도 마땅치 않아 정읍의 어느 동네 밖의 물레방아 간을 찾아들어갔다. 시체를 한쪽 구석에 놓고서는 잠을 청했으나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달빛도 고요한데 별빛은 그날따라 춤을 추며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자연히 어릴 때 뛰놀던 그 시절이 생각났다.
상문의 집에도 두 명의 사노비가 있었다. 한 사람은 덕순으로 여자 노비였고, 다른 한 사람은 덕순이가 동내 박서방의 씨를 받아 낳은 돌석이었다.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에 따라 돌석이는 어미의 소유주인 상문의 집에서 숙식을 같이하는 솔거노비가 되었다. 돌석이는 상문과 동갑이었으나 상문에게 존대 말을 썼고, 상문은 돌석에게 하대를 했었다.
달빛은 돌담 너머로 흘러들어오고 풀벌레 소리가 요란해 질수록 뒤척거리기만 했다. 자신의 지금 처지가 돌석이나 물레방앗간 밖에 시체로 누워있는 돌쇠나 다를 바가 없다. 별빛이 또렷해질수록 정신은 더 맑아지기만 했다. 새벽녘에 잠깐 눈을 붙이고 다시 고부로 향했다.
고부로 돌아오는 길에 상문은 아기를 낳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기를 낳게 되면 법에 따라 아기도 노비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사흘 만에 고부에 도착했다. 노비 주인이 돌쇠의 얼굴을 확인하고 난 후 돌쇠의 가족들에게 시체를 내주었다.
당시의 법률은 주인을 살해한 노비는 교수형에 처하도록 되어있었다. 돌쇠가 자살을 했으므로 더 이상 처벌할 것도 없었다. 조선 후기에는 노비들의 도망 사건은 수시로 발생하였다.

어느 해 정월 대보름 쥐불놀이를 하다가 동네 간에 패싸움이 벌어졌다. 서로 뒤엉켜 싸우다 보니 노비와 양민 간에 서로 구타는 일이 발생했다. 구타를 한 양민과 노비가 동시에 관아에 붙잡혀 와 사또 앞에서 재판이 벌어졌다. 이 노비들 중에는 상문의 셋째 동생 영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죄인들은 고개를 들라.”
“박서방은 노비 영문이의 허리뼈를 부러트린 것이 사실인가?”
“예 그렇기는 합니다만 영문이 녀석이 제 얼굴에 먼저 상처를 입혔습니다. 이것 좀 보십시오.”
박서방이 상처 난 부위를 치켜들었다.
“아주 나쁜 놈이군. 박서방은 죄가 없으니 방면하노라.”
양민 박서방은 무죄로 방면되었다. 이번에는 영문을 문초할 차례였다.
“영문이는 양민을 구타한 것이 사실인가?
“예, 서로 패싸움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감히 노비의 신분으로 양민에게 대들다니 아주 나쁜 놈이구나. 영문에게는 곤장 30대를 명하노라.”
“사또님 억울합니다.”
그러나 영문의 항변은 소용이 없었다. 노비가 양민과 싸우게 되면 항상 노비의 탓으로 돌아왔다. 그만큼 노비의 신분은 불안정한 것이었다.
이를 지켜본 상문은 동생이 억울하게 매 맞는 것을 보고서도 나설 수도 없었다. 그저 동생이 볼기에서 소리가 날 때마다 심장의 박동이 멈추고 서러운 마음이 절로 나왔다. 하루빨리 노비의 신분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마음이 솟구쳤다.

최상문이 고부로 이주한 후 15년이 지나 부인 해주 노씨가 아들 창환을 낳았다. 당시 상문은 서리로 승진한 상태였다.
“부인 아기 낳느라 고생 많았소. 난, 당신이 평생 아기를 낳지 않을 줄 알았소.”
“저도 우리 아기가 평생 노비로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그러나 서방님과의 정리를 생각하니 아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상문이 아기를 낳기까지는 부인의 인내심이 작용했다. 자신들의 신세도 처량한데 아들마저 노비의 신세로 평생을 살아 갈 것을 생각하고 임신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 부부는 일생동안 자식은 하나만 낳았다. 그렇게 마음을 먹게 한 것은 노비가 가져야 하는 의무가 너무나 짐이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창환이 소년이 되었다. 노씨 부인은 아들이 장래 어떠한 삶은 살도록 할 것인지 늘 걱정이 따라 다녔다.
“서방님, 창환이가 총기가 넘치는 것도 걱정입니다. 서당에 다니는 아이들 어깨너머로 배운 실력이 다른 아이들보다 앞지를 정도입니다.”
“과거도 못 볼 걸 글을 배우면 어쩌나. 난감한 일이네.”
상문 부부는 언젠가는 자식의 마음에 상처만 줄 것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과 천성을 일부러 망가뜨릴 수는 없었다. 일단 글을 가르치기로 했다.
19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수천 년간 지속되어온 조선의 노비제도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조선은 농경사회로 농토를 떠나서는 살길이 없는 사회였는데 상업이라는 새로운 직업이 점차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뿐 아니라 광산이나 부두 노동자라는 새로운 직업의 출현은 노비제도에 변화를 주었다. 농사일에 지칠 대로 지친 노비들이 도망을 하게 되고 도망노비를 잡으러 보냈던 노비마저 도망을 가버리는 형세가 되었다. 그만큼 도망노비들이 숨을 수 있는 일과 삶의 터전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동네에 노비의 숫자가 줄어들자 노비 주인은 노동력을 보충할 방법이 없었다. 노비들은 자신들이 없으면 주인은 농사를 지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태업이 증가하였다. 노비 주인은 처음에는 매질로 노비들을 닦달했으나 매질을 하면 할수록 태업은 더 증가했다. 노비제도가 가지는 가장 큰 문제점은 생산성이 낮다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에 노비와 주인 간에는 새로운 타협점이 나왔다. 사노비의 경우는 일정한 대가를 받고 면천시켜주는 경우도 생겼다. 신분은 노비였으나 어느 정도 자율권을 인정받는 머슴 제도도 나타났다. 일 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 보리타작과 벼 타작이 끝나면 새경이라고 하여 일정한 노임을 노비에게 지불하는 제도였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독립된 가정을 가지고 있었던 노비들은 소작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농사자체를 소작인 책임 하에 짓고 타작이 끝나면 소출의 50%를 주인에게 바치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물론 주인집에 결혼이나 사망이 있으면 노비들이 주인 일을 전적으로 거들었다. 이러한 과정이 몇 년씩 지속되는 가운데 과거에는 주인에게 생사의 모든 것을 맡겼던 노비들이 양민이나 다를 바 없는 생활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관노비에게도 변화는 있었다. 관노비도 납공의 의무를 이행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면포 한필은 약 10.5m로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논 한 마지기는 면포 3필과 교환할 정도이니 노비가 한 가정에 3명 있으면 1년에 논 1마지기를 세공으로 바친 셈이다. 면포 한필은 만들기 위해서는 노비 한 사람이 1년 동안 부지런히 일을 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가족이 중병에 걸리게 되면 병수발은 물론 병든 가족의 몫도 받쳐야 했다. 따라서 가난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노비의 신분에서 양민이 되는 면천은 법적으로 보면 축복이지만 실제는 직장을 상실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일종의 명예퇴직과 같았다. 면천이 실질적인 축복이 되려면 노비가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어야 했다. 면천은 국가의 정책적 차원에서 시행되었지 개인의 인권을 고려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가 비상사태, 재정 부족, 자연재해, 기근 등을 타개해야 할 경우에 면천을 베풀었다. 이런 경우 면천의 대가로 곡식을 헌납했다.
 관노비도 도망이 빈번해지자 조정에서는 재정에 고갈되기 시작했다. 이뿐만 아니었다. 홍수와 가뭄은 매년 되풀이 되었고 전염병이 창궐하여 인구가 줄어들게 되었다. 다급해진 조정은 부족한 재정을 채우기 위해 순조1년(1801년)에는 일정한 곡물을 납공한 노비 6만 6천명을 해방시키기도 했다. 이 조치는 공노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노씨 부인은 정말 열심히 일했다. 평소 관아에 바치는 납공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 먹는 쌀도 아껴서 비축했다. 피눈물 나는 노력의 결과 노비의 신분이지만 창환이 성년이 되었을 때는 땅 마지기도 장만할 형편이 되었다.
헌종이 즉위하여 풍양조씨가 세도정치를 할 때였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신부 김대건이 효수형을 당하던 시기였다. 3년 동안 흉년이 들고 극심한 가뭄의 연속이었다. 굶어 죽는 백성이 속출하게 되자 나라에서도 비상대책으로 노비들에게 쌀 열가마니를 헌납하면 면천을 시켜준다는 발표했다. 열 가마니를 헌납할 노비가 없자 나중에는 다섯 가마니로 줄여서 면천을 시켜주었다.
노씨 부인은 잠자리에서 남편을 나직이 불렀다.
“서방님, 우리는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창환 내외를 면천시켜 줍시다.”
“쌀을 다섯 가마니 헌납해야 할 텐데 그만한 여력이 되오?”
“제가 열심히 노력해서 모아둔 것이 그 정도는 됩니다.”
“그렇다면 해보시구려.”
노씨 부인은 자신이 평생을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팔아서 관아에 바쳤다. 아들 내외는 면천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제한이 풀어진 것은 아니었다. 조상이 역적의 처분을 받았으므로 아직은 과거를 보고 벼슬에 나갈 수는 없었다. 면천에 이어 불행이 따라왔다. 몇 년 후 창환의 부인은 아기를 가져보지도 못하고 심한 감기로 고생을 하다가 죽고 말았다.
면천이 된 창환은 서당의 접장(接長)이었다. 당시 서당은 부락에서 학교 역할을 한 셈인데 서당에는 가르치는 훈장과 접장이 있고 학생들이 있었다. 접장은 스스로 훈장에게 수업을 받는 한편 하급생들에게 있어서 학업담당교사이자 훈육담당이었다. 동문의 사형(師兄)이 되는 일종의 보조교사였다. 보수는 없으며 단지 학비가 면제되었다.
최상문에게 남은 과제는 노씨부인을 자신의 생전에 면천하는 것이었다. 면천을 받기위해서는 납공을 바치거나 전쟁에 나가 전공을 세워야 했다. 자신의 노력으로 납공할 재물을 마련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최상문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전공을 세우는 일이었다.
19세기 초반에도 조선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빈번하였다. 왜구는 10명 내외로 배를 타고 와서 마을을 급습하고 관군이 쫒아오면 도망가는 수법으로 백성을 괴롭혔다. 관아에 소속된 최상문은 무인 집안의 출신답게 왜구가 침범할 때마다 열심히 싸웠다. 이를 가상히 여긴 고부군수가 최상문을 면천시켜주겠다고 하였다. 최상문은 자신보다는 노씨 부인을 먼저 면천 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렇게 하여 노씨 부인은 생전에 면천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최상문은 자신의 고향 선천을 떠나 고부에 내려온 지 35년이 되었다. 이제는 절반은 전라도 사람이 다 되었다. 그런 가운데 기력이 쇠진하고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알게 되었다. 창환을 불렀다.
“나는 며칠 후 저 세상으로 갈 것 같구나.”
“아버님!”
“울지 말고 내말 잘 들어라. 내가 죽으면 너는 어머니를 모시고 경상도 김천으로 가거라. 거기에는 화순최씨 문중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고 숙부와 사촌들도 이주했다.”
“고부는 저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니다. 나는 고부에서 노비로 살아왔지만 너는 양민의 신분이 되었지 않느냐. 우리의 과거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멀리 멀리 떠나라.”
“그러나 아버님을 두고 떠날 수는 없습니다.”
“아니다. 너는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너의 길을 찾아가거라.”
“아버님! 감사합니다. 아버님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19세기 중엽 조선사회는 사실상 노비제도는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수천 년간 지속되어 온 제도가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1894년 갑오년에 이르러 ‘사민은 평등하고, 평민도 관리에 등용될 수 있으며, 노비(奴婢)의 전적(轉籍)2을 폐지하고, 인신매매를 금한다.’는 법이 만들어졌다. 이른바 갑오경장이 가져온 변화다. 그러나 이것이 일제의 간섭에 의해 만들어지다 보니 백성들의 호응이 미약했다. 제도가 관습을 뛰어 넘기 어려웠던 것이다. 다 떨어진 갓을 쓴 양반이라도 여전히 행세를 했다. 천민들은 여전히 허리를 굽히고 캥거루 마냥 껑충 껑충 특유의 걸음 거리로 뛰어다녔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 속에서도 조선의 근대화는 이때부터 점차 싹이 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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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안도 사람을 하대하여 부르는 말
2 학적, 호적, 병적을 딴 곳으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