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최송설당

[소설 최송설당] 제6장 만남

보리숭이 2017. 7. 3. 19:19


소설 최송설당 제6장 만남을 올립니다.

이 장에서는 최송설당이 엄상궁을 만남으로서 인생의 대 전환을 하게됩니다.

6장 만남

 

 

비는 언제 오느냐에 따라 사람의 마음은 달라진다. 곰팡이 냄새가 나도록 지루하게 내리는 장맛비는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폭풍을 몰고 오는 태풍은 공포에 떨게 한다. 추수를 앞두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짜증나게 만든다. 그러나 겨울가뭄 끝에 내리는 봄비는 비를 맞으면서도 농부들을 들판으로 나가게 한다. 한양에 도착한 고부댁은 적선동에 자리를 잡았다. 석 달이 지나자 해가 바뀌어 새봄이 왔다. 그날도 봄비가 내렸다. 농부들은 비를 맞으면서도 들판으로 나가 고랑을 내거나 물고를 텄다. 고부댁은 막연하지만 올해는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대문만 나서면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지만 일가친척 하나 없는 한양은 무료한 곳이었다. 유일한 일과가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는 일이었다. 한양에도 크고 작은 절은 여러 곳이 있다. 어느 절을 다닐까 고심을 하다가 봉은사로 정했다. 봉은사로 향하는 길에는 산비탈 곳곳에 연분홍자태를 뽐내며 진달래가 피어있었다. 봄처녀가 된 기분에 절로 향하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고부댁이 열심히 백팔 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옆에도 아주 정중한 자세로 불공을 드리는 아낙이 있었다. 불공을 마치고 땀도 식힐 겸 느티나무 그늘을 찾았다. 함께 불공을 드리던 아낙은 먼저 나와 쉬고 있었다. 고부댁은 무심결에 인사를 건넸다.

이 절에는 자주 오시나 보지요?”

갑자기 여인은 사방을 둘러보고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말꼬리를 흐렸다.

저를... 아시...나요?”

아닙니다. 아까 너무나 열심히 불공을 드리시기에 여쭈어 본 것입니다.”

그래도 미덥지 않았는지 여인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절을 빠져나갔다. 고부댁은 기분이 나빴다. 깊은 사연이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리기로 했다. 보름 후에 고부댁이 봉은사에 들렸을 때 전에 만났던 여인을 또 만나게 되었다. 이번에는 그 여인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또 만났네요.”

, 불가의 인연인가 보지요.”

보살님은 전에는 못 뵈었던 분인 것 같은데요?”

저는 경상도 김천에서 이사 왔습니다. 특별히 할 일도 없어 절에나 다니고 있습니다.”

그제야 여인은 긴장을 풀고 고부댁에게 다가왔다.

이 절의 내력은 알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모릅니다.”

세종 임금님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께서는 부스럼 병으로 20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답니다. 애석하게도 젊은 과부댁 신씨는 아들 영순군 마저도 27살의 나이에 잃었지요. 신씨는 일찌감치 머리를 깎았는데, 생과부가 된 영순군의 아내는 시어머니를 따라 비구니가 되었답니다. 그들에게는 재산은 의미가 없어 땅 20만 평과 노비 930명을 견성사에 희사했답니다. 그랬더니 견성사를 헐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는데 정현왕후가 지켜냈답니다. 연산군 때는 절을 크게 중창하고 봉은사(奉恩寺)로 바꾸었지요. 나라에서는 소금을 지원해주고, 가까운 고을에서 전세(田稅)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답니다.”

보살님은 궁중의 일이나 절의 사정에 박식하시네요.”

, 그런 사연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얼굴을 익혔다. 그날도 해가 인왕산 고개에 걸리고 노을이 물들자 헤어졌다. 집에 돌아 온 고부댁은 낮에 만났던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예의 바른 태도로 보아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만나면 서로의 흉금을 털어 놓아도 좋을 듯싶었다.

보름 후 봉은사에 들렸을 때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번에는 옛 친구를 만난 듯이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만남이 잦아지면서 고부댁은 그 여인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였다. 고부댁으로 초대받은 사람은 엄상궁이었다. 6년 전에 궁궐에서 민왕후의 미움을 사 쫓겨났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부산 동래의 어느 절에 숨어 지내기도 했다. 남의 집 삯바느질은 물론 갖은 고생을 하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외로운 처지였다. 고부댁은 엄상궁에게 편안한 말동무요 큰 위로가 되었다. 엄상궁은 궁중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한문을 깨치고 궁중 법도에 익숙해 있었다. 훈장 아버지 밑에서 학문을 익힌 고부댁과 어울리기에는 제격이었다. 두 사람은 가솔이 없고 엄상궁은 마흔두 살, 고부댁은 마흔한 살 동년배이었다. 자연스럽게 엄상궁은 언니가 되고 고부댁이 아우가 되었다. 고부댁은 엄상궁의 과거를 알고 나서부터는 궁중 생활이 궁금했다. 삭풍이 몰아치는 긴긴 겨울밤 두 사람은 이부자리를 깔고 함께 누웠다. 문틈을 파고드는 위풍으로 쉽게 잠이 들 수가 없었다. 고부댁은 엄상궁에게 궁중생활에 대해 물었다.

언니는 언제 궁에 들어갔우?”

집안이 어려워 다섯 살 때 아기 궁녀로 입궁했지. 지금 임금님도 나보다 4년 후에 궁에 들어왔고, 왕비님은 임금님보다 3년 후에 들어왔지.”

궁에서는 무슨 일을 했어요?”

처음에는 큰 상궁들의 잔심부름을 도왔지. 나이가 들어서는 왕비님을 측근에서 모시는 지밀상궁으로 일했단다. 자연히 왕비님이 하시는 일을 배우고 익힐 수 있었지.”

왕비님은 몇 명의 자식을 두었어요?”

왕비님은 임금님이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열다섯의 나이로 시집을 왔어. 그때 임금님은 나긋나긋한 궁인 이씨에게 빠져 있었단다. 영민한 왕비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지. 간절한 치성 끝에 궁에 들어 온지 5년 만에 몸을 풀었단다.”

왕자님을 낳고는 난리가 났겠네요.”

물론이지, 왕비님이 왕자님을 낳자 야단법석이 났단다. 하지만 왕자님은 날 때부터 대변을 볼 수 없었단다. 결국 태어 난지 닷새 만에 하늘나라로 가버렸어.”

왕비님께서 상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네요.”

왕비님은 워낙 배포가 크신 분이었어. 각고의 노력 끝에 2년 후에 또 왕자님을 낳았지. 왕비님의 성화로 왕자님은 한 살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단다.”

엄상궁의 궁중 애기는 끝이 없었다. 새벽닭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창호지 밖이 희붐해졌다. 그때서야 두 사람을 눈을 붙였다.

 

남풍이 불더니 겨울 가지에는 새순이 움트고 봄나물이 대지를 뚫고 올라왔다.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자 하루는 엄상궁이 먼저 말을 걸었다.

아우는 내가 왜 궁에서 나왔는지 궁금하지 않니?”

너무나 궁금했어요. 언니 자존심이 상할까 못 물어 봤을 뿐이지요.”

내가 왕비님의 내전 상궁으로 일할 때였어. 어느 날 대전 상궁이 자리를 비웠단다. 그래서 임금님의 잠자리를 보살펴 주러 들어갔지. 그런데 그날따라 임금님께서는 잠자리를 지키라고 하시지 않겠니. 임금님이 잠자리를 같이하자는 것을 안 순간 얼굴이 화끈 거렸지. 동시에 임금님과 잠자리를 같이 했던 궁녀들의 모습도 떠올랐단다. 대부분 왕비님으로부터 심한 고문을 받고는 궁 밖으로 쫓겨난 신세가 되었거든. 그런데 몸은 마음과는 반대로 움직이더라. 상궁의 신분은 평생을 생각시로 살아가는 처지이지 않니? 임금님으로부터 성은을 입는 것만큼 큰 영광이 어디 있겠니? 임금님이 이끄는 대로 잠자리에 들었단다.”

그리고는 어떻게 되었어요?”

고부댁은 침을 꿀꺽 삼기고 엄상궁 팔을 껴안았다.

임금님이 새벽녘에 너는 정녕 모과 같구나.’ 하시더라. 내 몸매는 볼품이 없지만 향기는 일품이었나 보지.”

이 대목에서 엄상궁도 그날 밤을 잊을 수 없는 듯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언니도 좋았겠네요.”

좋은 건 그때까지였지.”

궁중의 법도는 임금님과 동침을 한 궁녀는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오게 되어 있단다. 나도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왔지. 이를 본 시녀들의 입소문에 의해 곧바로 왕비님에게 전달되었단다.”

왕비님은 어떻게 하셨어요?”

왕비님은 나를 형틀에 묶고 고문이 시작되었지. 측근 상궁에게 잠자리를 빼앗겼으니 왕비님으로서는 자존심이 너무나 상했겠지.”

임금님은 가만히 계셨나요?”

내전의 일에 대해 임금님은 간섭하지 않는 것이 법도란다. 웬일인지 임금님은 나에 대해서만은 왕비님에게 비굴할 정도로 관용을 빌었단다.”

임금님의 간곡한 청에 의해 왕비님도 차마 더 이상 고문을 할 수 없었단다. 그러고는 나를 궁 밖으로 쫓은 것이란다.”

고부댁은 엄상궁의 몸매가 남자를 유혹하기에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방중술에 능했으면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미루어 집작해보았다.

 

볼에 스치는 바람은 아직 찬 기운이 가시지 않았으나 들 언덕에는 개나리가 지천으로 피어있었다. 고부 댁은 엄상궁과 함께 봉원사 대웅전 법당에서 내려오는 찰나에 낯선 스님 한분과 마주쳤다. 스님도 옷깃을 스치고 몇 발자국 가다가 되돌아섰다. 스님의 눈에는 광채가 돌았고 머리에는 후광이 비쳤다. 스님은 엄상궁을 가리키며 한 말씀 툭 던졌다.

조만간 귀하게 되실 몸입니다. 자중자애 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두 여인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한동안 얼떨떨하였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아까 그 스님이 어떤 분인지 주지스님에게 물어보았다.

스님, 얼굴에 광채가 나시는 스님이 어떤 분입니까?”

, 그 스님은 경허스님입니다. 수월, 해월, 만공, 청담, 성철스님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승이십니다.”

, 그러세요!”

스님이 무슨 말씀을 하신지 알 수 없으나 깊이 새겨 두세요.”

두 사람은 일주문을 나설 때까지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언니, 경허스님이 귀인이 된다고 하던데 좋은 일이 있는 것 아니우

이젠 나도 지쳤단다.”

그게 무슨 말이우.”

내가 궁궐을 나오던 날 내시 한분이 임금님이 다시 찾을 것이요. 친정으로 가면 죽을 것이오.’라는 쪽지를 주었지.”

그래서요

그길로 절로 숨어들어 지금까지 숨어 살고 있단다.”

친정집으로 안 간 것은 정말 잘했네요.”

최근에야 친정집에 기별을 넣어 보았지. 처음에는 자객들이 한 달에 세 번 정도 찾아왔었데, 3년이 지나고부터는 발길이 뜸해 졌다고 하더군.”

지금도 조심하셔요.”

이제는 궁궐에서도 잊힌 사람이 되었겠지. 왕비님이 매사를 좌지우지하고 있는데 나 같은 사람이야 생각이나 나시겠어?”

그래도 사람 일을 누가 안답니까?”

말은 위로하는 뜻에서 했다. 하지만 날아가는 새도 잡는 민왕후가 버젓이 살아있지 않는가. 궁에서 쫓겨난 일개 상궁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기대였다. 그러나 고명하신 스님의 말씀이라 친분관계는 돈독히 해두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날 고부 댁은 엄상궁에게 자신이 한 땀 한 땀 수놓아 만든 세한송(歲寒松)’자수 한 폭을 선물로 주었다.

언니, 눈 맞은 소나무처럼 시절을 담담히 견디시면 곧 겨울이 지날 것입니다.”

고마워, 아우야. 내 영원히 간직하도록 할게.”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는 가운데 두 사람의 친분은 더욱 돈독해져 갔다.

 

1895 8 20

민왕후가 궁 안에서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벌어졌다. 이어서 왕후는 이틀 만에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고종은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왕후가 시해된 후의 궁궐은 왕비의 원혼이 떠나질 않았다. 왜인들에게 피살된 대신들과 수비대 병사들, 궁녀들이 흘린 피 냄새가 궁궐을 떠돌고 있었다. 고종을 호위하던 시위대는 훈련대에 편입되어 일본군의 지휘아래 들어갔다. 훈련대의 칼날은 궁궐 밖을 향하지 않고 늘 궁궐 안을 향하고 있었다. 지근거리에 있는 내관과 궁녀 어느 누구도 믿을 사람이 없었다. 임금의 곁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지켜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바로 그때 임금의 뇌리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궁에서 쫓겨난 엄상궁이었다. 고종은 민비가 시해된 후 5일 만에 엄상궁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대군주 폐하 엄상궁 현신이오.”

장지문 뒤에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라 하라.”

남색치마에 옥색 저고리를 입은 한 여인이 폐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왔느냐!”

, 폐하, 폐하의 용안을 다시 뵈오니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그래 얼마만이냐?”

“10년 만에 용안을 다시 뵈옵나이다.”

그래,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구나.”

아니옵니다. 폐하

요즈음 궐 안이 몹시 어지럽구나.”

예 들었나이다.”

오늘부터 내 곁을 지켜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 한 목숨 바쳐 폐하를 보필하겠나이다.”

엄상궁의 비장한 목소리에 고종은 마음이 놓였다. 첫날부터 엄 상궁은 대전궁녀로 일하게 되었다. 고종과 잠자리도 같이하는 성은을 입었다. 왕비가 없는 궁궐에서 성은을 입은 궁녀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을미사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김홍집 내각은 양력 사용을 발표하였다. 음력 1895 11 17일이 양력 1896 1 1일이 되었다. 단발령을 강행하자 전국적인 반발이 일어났다. 지방에서는 의병이 봉기하여 맹렬히 저항하였다. 어지러운 국내외 정세로 물가는 폭등하였다. 그런 가운데 민왕후 살해를 주동한 일본 공사 미우라가 석방되었다. 민심은 극도로 흉흉하였다. 한편 엄상궁은 궁에 입궐한지 열흘도 안 되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민왕후의 후임 왕후를 간택한다는 것이었다. 10년 전 성은을 입을 때 민왕후의 질투에 의해 궁 밖으로 쫓겨나지 않았던가. 다시 입궐함으로써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었다. 새로운 왕후의 간택은 자신의 운명이 달려있는 가장 절박한 문제였다. 고종이 처음 궁에 들어와 잠자리를 같이했던 궁인 이씨가 있었다. 민왕후가 들어온 후에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미 내각에서는 후임 왕후로 안동김씨의 규수를 간택까지 했다. 고종의 허가를 받아 놓은 상태였다. 엄상궁으로서는 고종이 야속했다. 하지만 아직은 자신을 돌봐줄 세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엄상궁의 신분은 상궁에 불과하지만 임금님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처지였다. 적어도 임금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은 있었다. 엄상궁은 자신을 돌봐줄 최소한의 측근이 필요했다. 지근거리에서 자신을 지켜줄 사람으로는 가족이 없는 고부댁이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종에게는 자신이 믿고 심부름을 시킬 나인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고종은 쉽게 허락하였다. 즉시 고부댁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이때부터 고부댁은 본방나인과 비슷한 신분이 되었다. 혼인을 통해 대궐로 들어온 왕비나 세자빈, 후궁 등의 경우 몸종과 유모, 보모도 함께 들어왔다. 이들을 본방나인이라고 불렀다. 본방나인은 자신이 모시던 상전과 운명을 같이했다. 상전의 즐거움은 본방나인의 즐거움이었고 상전의 슬픔은 본방나인의 슬픔이 되었다. 엄상궁은 본방나인을 데리고 올 신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왕후가 없는 왕실에서 성은을 입은 대전 상궁이었다. 그녀는 실세로 떠오르고 있었다.

입궐하게 된 고부댁은 이제 최나인이 되었다. 그녀는 엄상궁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였다. 자연스럽게 엄상궁이 다루는 국사의 중요한 일은 알게 되었다. 매일 밤 고종은 불면증에 시달려 잠을 못 잔다는 것과, 사람을 믿을 수 없어 수라도 마음대로 못 드시는 것도 알았다. 최나인이 처음 한 일은 매일 밤 고종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운반하는 것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외국인 선교사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고종의 곁에서 잠을 자도록 하는 것이었다. 선교사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언더우드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고종이 잠자리에 들면 옆방에서 최나인이 펼쳐주는 이불을 덮고 잤다. 최나인은 외국인 선교사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은 빵을 주식으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전파하고 있는 하나님과 예수를 믿는 종교에 대해서도 듣게 되었다. 한의학에서는 볼 수 없었던 외과적 시술방법에 의한 신 의료기술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최나인은 나날이 새로운 지식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었다.

 

엄상궁이 후임 왕후 간택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구원의 손길이 왔다. 엄상궁의 고민을 알기라도 한 듯 친러파인 이범진으로부터 엄청난 제안을 받게 되었다.

엄상궁 마마 우리 큰일 한번 합시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대군주 폐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모시는 일입니다.”

! 그 일은 두 달 전에 춘생문 사건으로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그랬다. 친러파 대신들과 종친이 규합하여 대군주 폐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모시려고 하였다. 결국 친일 내각에 발각되어 주모자들은 귀양을 가거나 즉결 처분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이일이 실패하면 목숨을 내 놓아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일을 하실 분은 엄상궁 뿐이십니다.”

어째서 제가 해야 되나요?”

허허실실(虛虛實實)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친일 내각은 대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들의 관심 밖에 있는 사람이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제게는 어떤 도움이 되는 가요?”

이 일이 성사만 된다면 마마님은 왕비님 못지않은 권력을 가지게 될 겁니다. 또한 왕후의 간택도 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엄상궁은 왕후의 간택을 저지할 수도 있다는 말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가슴에 고종의 총애를 차지하고 싶은 감정은 어느 것으로도 대치할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은 힘을 모으기로 했다.이범진으로부터 거사 자금 3만 냥도 전달되었다. 목숨을 거는 모험만이 그녀의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상궁은 남몰래 최나인을 불렀다. 그나마 자신의 심정을 알아줄 사람은 최나인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나인 나를 도와주겠소?”

마마님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야지요.”

전하를 궐 밖으로 모시는 일이요.”

! 두 달 전에 그 일로 낭패를 본 일이 있지 않습니까?”

최나인은 엄청난 제안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엄상궁의 비장한 결심에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바로 동조했다.

마마님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그날부터 최나인은 엄상궁의 지시를 받고 이범진을 만나 거사 날짜와 방법을 들었다. 임금님과 세자를 가마에 태워 러시아 공사관으로 모시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엄상궁은 최나인과 함께 친정나들이를 했다.

최나인은 뒤 가마를 타세요.”

거사를 앞두고 엄상궁은 두 대의 가마를 타고 자신의 사가에 들렸다.

궁궐 문을 나설 때에는 일부러 가마 문을 열었다. 얼굴을 내밀면서 궁궐 호위대장을 불렀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몇 푼 안 됩니다 만 술이나 한잔 하세요.”

저희들은 당연히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인 걸요.”

호위대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엄상궁이 찔러주는 돈을 받아 넣었다.

세 번째 나들이에서 돌아오든 날 엄상궁은 최나인에게 물었다.

궁궐 호위 군사들의 모습이 달라진 것이 보이는가?”

, 처음에는 병사들이 깐깐히 얼굴을 확인했었지요. 이제는 마마님 행차라는 것을 알면 적당히 검문을 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문제는 꼭두새벽에 바깥나들이를 갈 명분이 부족하단 말이야.”

최나인은 엄상궁의 고민을 알아차렸다.

마마님! 대군주 폐하 찬거리 마련을 위해 꼭두새벽 나들이를 하면 어떨까요?”

찬거리 마련이라……. 그래! 바로 그거야. 최나인이 살길을 열어 주는군.”

엄상궁은 무릎을 치며 동감했다. 다음 날부터 행동에 들어갔다. 엄상궁은 꼭두새벽에 대군주 폐하 찬거리 마련을 한다며 궁궐을 빠져나왔다. 30여 분간 돌아다니다가 찬거리를 들고 궁궐로 들어왔다. 한편으로는 폐하께서는 궁인들을 믿을 수 없어 수라도 깡통 연유나 생달걀을 드시고, 외국인 선교사들이 만들어 주는 음식을 드신다고 소문을 퍼트렸다.

이뿐만 아니었다. 엄상궁은 매일 밤마다 황제에게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언제 일본 낭인들이 궁을 다시 습격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빠트리지 않았다.

폐하, 일본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사옵니다.”

뭐라고!”

일본군이 무슨 일을 저지를 조짐이 있습니다.”

어찌할꼬!”

임금은 왕후가 시해된 후 경복궁의 크나큰 집채들이 더 크게 보이고 끝없는 불안에 시달렸다. 밤이면 잠을 잘 수가 없어 오찬을 들고난 후에야 낮잠을 이루는 형편이 계속되었다. 이때부터 밤낮이 바뀌었다는 말도 생겨났다. 폐하의 깊은 한숨이 꺼지기도 전에 엄상궁은 폐하를 안심시켰다.

폐하, 러시아 공사관으로 내일 새벽에 피신을 하시도록 만반의 준비가 되었나이다.”

그게 사실인가?”

이번에는 실패가 없을 것입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1986 2 11일 여명, 고종과 세자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 안개가 궁궐에도 자욱이 잦아들었다. 새벽달은 구름에 가려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다.

대군주 폐하, 어서 가마에 오르시옵소서.”

임금은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피신 간다는 사실에 비통함을 금할 수 없었다. 거사가 실패할 경우 자신의 자리까지 내놓아야 한다는 불안감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폐하, 안심하시옵소서. 여인들이 타는 가마는 검문을 하지 않사옵니다. 목숨을 걸고 보필하겠나이다.”

엄상궁은 주먹을 쥐고 허리 굽혀 폐하를 안심시켰다. 고종의 마음에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명성왕후가 시해 당한 후 경복궁의 큰 뜰이 얼마나 두려웠던가. 생전 타 본 적이 없는 가마에 천천히 올랐다. 경복궁에서 정동까지 가는 길은 천리를 가는 듯했다. 다행히 러시아 공사관에 무사히 도착해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러시아 공사관은 조선 최초로 유럽풍의 서양식 2층 건물이었다. 이로써 뒷날아관파천이라 부르는 역사적 사건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새로운 내각이라고 할 수 있는 신 의정부를 설치했다. 외교적으로는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군사적으로 조선의 군대를 재무장했다. 재정적으로 외국 자본을 유치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외국 공관에서 생활이라 궁녀들이 보필을 할 수도 없었다. 고종의 수라상은 여전히 엄상궁이 차렸다. 엄상궁이 바쁜 것만큼 최나인도 할 일이 많았다. 대신들의 고종 알현도 엄상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거사의 성공으로 엄상궁은 최고의 실세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고종은 웨베르 러시아 공사의 처형인 안토니에트 손탁(Antoniet Sontag)이라는 여성을 만나게 되었다. 손탁은 독일이 고향이었는데 웨베르의 부임과 함께 9년 전에 조선에 왔었다. 손탁은 독일어, 불어, 영어는 물론 우리말까지 유창하게 했다. 서양 요리를 좋아한 고종은 미혼인 손탁이 만들어 주는 양식을 자주 즐겼다. 마흔 살의 손탁은 훤칠한 키에 서양식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다갈색 머리 사이로 희끗 희끗한 머리카락은 보일 때면 고종도 마음이 설레곤 했다. 또한 손탁은 고종에게 커피를 맛보게 한 인물이었다. 커피 맛에 매료된 고종은 커피를 마시며 외국 공사들과 연회를 갖기도 할 정도였다. 식사 수발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고종은 덕수궁 건너편 정동 400여 평에 회색벽돌로 2층 양옥집을 지어 손탁에게 선물했다. 손탁은 1897년부터 이집을 구한말 외국인들의 사교장이었던 손탁호텔로 운영했다. 1층에는 레스토랑 겸 커피숍으로, 2층은 외교관이나 정객들의 숙소로 운영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사람들도 커피 맛을 알게 되었다.

 

아침 조반을 물리고 최나인이 엄상궁을 찾아서 꿈 이야기를 하였다.

지난밤 꿈자리에서 하늘의 월궁(月宮)에서 부른다기에 따라 올라갔었답니다. 금전(金殿)이 즐비하고 옥루가 높이 솟아 있었습니다. 옥황상제를 모신 선관(仙官)들이 시립해 있었습니다. 그때 서늘한 봄바람이 불어오기에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중화전(中和殿)이 보였습니다. 황금으로 경선궁이라 새겨져 있었습니다. 마마 그 꿈은 확실히 생남하실 꿈입니다.”

며칠 후 엄상궁은 실제 수태를 하게 되었다. 엄상궁은 이러한 사실을 고종 임금께도 고해바쳤다. 고종은 피신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식을 생산한다는 마음에 기쁨이 넘쳤다.

러시아 공사관 뜰에 목련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임금도 아지랑이에 취해 오찬을 드시고는 낮잠에 들어갔다. 이 때 엄상궁이 최나인에게

우리도 커피한잔 합시다.”

, 마마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이제는 임신을 했다는 것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배가 불러오고 있었다.

마마님! 뱃속의 아기씨를 위해 불공을 드려야 하지 않겠나이까?”

뱃속의 아기가 반드시 사내아이여야 할 텐데, 걱정이야.”

열심히 불공을 드리다 보면 반드시 사내아이가 태어날 것입니다.”

남녀의 구별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건만 사내아이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은 상식을 벗어나고 있었다.

마마님 대신에 제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불공을 드리면 어떨까요?”

그렇게 해 주겠는가!”

마마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이렇게 하여 최나인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러시아 공사관을 나왔다. 봉은사 법당에 가서 태어날 왕자님을 위해 치성을 드렸다. 물론 엄상궁은 그때마다 넉넉한 은자를 시주로 내 놓았다.

최나인은 자신과 엄상궁의 위치를 비교해 보았다. 1년 전만해도 두 사람은 별 볼일 없는 아낙이었다. 조만간 왕자를 낳게 되면 천하의 권력을 휘두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일개 궁녀로 남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아닌가. 궁궐 내의 모든 궁녀들이 성은을 입고자 하는 이유를 알 듯했다. 엄상궁은 태어날 아기에게 자신의 운명을 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최나인도 그 아기를 통해 새로운 도약을 도모하기로 마음먹었다.

엄상궁이 산달을 4개월 앞두고 있었다. 그날도 최나인은 절에서 불공을 드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언더우드 여사를 만나기 위해 들렸다. 언더우드 여사와는 식사 심부름을 여러 차례 다녔기 때문에 잘 아는 사이였다.

최나인 오랜만입니다. 웬일로 찾아 오셨나요?”

오늘은 여사님께 청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무슨 부탁이신가요?”

우리 엄상궁 마마님께서 조만간 왕자 아기씨를 출산하게 됩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축하합니다. 그래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요?”

여사님께서 왕자님을 위한 산후 용품을 구해 주셨으면 합니다.”

미국 제품으로 말씀하시는 거지요. 지금 부탁하셔도 3개월은 걸릴 텐데요.”

“3개월 후면 적절합니다. 이 용품은 제가 마마님께 개인적인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하여 왕자님의 산후 용품은 미국산으로 준비했다. 물품은 도착하였으나 출산은 하지 않았다. 엄상궁의 누이동생 집으로 용품을 배달해 두었다.

처음 아관파천을 했을 때는 백성들이 환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일국의 대군주 폐하가 외국 공사관에 머문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았다. 외국 공사들도 러시아 공사를 통해야만 고종을 알현할 수 있는 불편을 토로하기 시작하였다. 뒤따라 독립협회 등이 중심이 된 환궁청원운동도 있었다. 고종은 아관파천 1년 만에 1897 2 20일 경운궁(=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