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최송설당

[소설 최송설당] 제1장 가문의 몰락

보리숭이 2017. 3. 30. 11:20

 

최동현 송설총동창회장이 10년 간 준비해 온 '소설 최송설당' 초고가 선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번 읽어 보십시오.
앞으로 2년동안 24회로 발표할 예정입니다.
블로그에 의한 발표가 끝나면 할머니 80주기가 되는 2019년에 책으로 출판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1부 출생과 유년 시절


0. 가문의 몰락


평안도 지방은 겨울이 빨리 왔다. 동짓달에 첫눈이 내리더니 섣달이 되어서는 온 산천이 흰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정조임금이 갑자기 승하하고 11살의 순조가 즉위하였으나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였다. 그해는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려 바깥출입하기도 쉽지 않았다. 촌락들은 고즈넉하고 세상 민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러기 떼는 하늘 높이 날고 있었다.
최봉관은 모처럼 쉬는 날이라 노루사냥이나 할까하고 아침 햇살을 받으며 활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때 기침소리가 나더니 할아버지의 외가 쪽으로 6촌 동생이 되는 유문제가 들어왔다.
“성님! 사냥이라도 가시게요?”
‘어서 와, 오래 만이야, 그래 한양 간일은 어떻게 되었나? “
이미 소문을 들어 문제가 과거시험에 세 번째 낙방한 것은 알고 있지만 인사차 던진 말이었다.
“물어보시나 마나지요. 한양에서는 평안도 사람은 사람취급이나 하나요.”
“미안하이. 자네 심기만 건드린 것 같네.”
“망할 놈의 세상, 난리가 나든지, 세상이 뒤집어져야 평안도 사람에게도 벼슬자리가 돌아오겠지요.”
“그런 말 말게, 난리가 나면 죽어나는 건 배성들이야. 임진년 왜란도 그랬고, 병자년 호란도 백성들만 죽어났어.”
“하여튼 지방차별이 이렇게 심해서야 무슨 낙으로 살겠습니까?”
대화는 싱겁게 끝났다. 유문제는 답답한 심정을 풀어볼까 해서 최봉관을 찾아왔으나 돌아온 대답은 역시 체념뿐이었다. 눌리고 막힌 가슴이 풀리지 않자 점심만 얻어먹고는 대문을 나섰다.
최봉관은 문제가 돌아가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울화통이 터지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이틀 전 퇴근길에 주막에 들렸을 때 백성들이 부사영감 욕을 하던 것이 떠올랐다.
“박서방, 요즈음 관에서는 보릿고개 때 군량미 한가마니를 빌려주면  가을에 두가마니로 받는 것 아는가?”
“그것뿐이 아닐세, 부사영감은 한술 더 떠서 죽은 사람한데 군포를 징수하는 것도 모자라 어린이에까지 군포를 징수하고 있다네.”
“그런 일도 있었는가?”
백성들의 바닥 민심이 어떠하든 이번에 부임한 선천부사 김익순은 온갖 나쁜 짓은 골라서 하고 있었다. 그러고도 출세의 가도를 달리고 있으니 세상이 너무나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해가 바뀌어 봄이 되었다. 아지랑이가 산 능성이 사이로 아른 거리고, 종달새는 제 세상을 만난 듯 하늘 높이 치솟았다. 보리밭에는 푸른색을 띄며 보리가 패기 시작했다. 이때가 농민들에게는 가장 힘든 시기였다. 최봉관은 관아에 출근하자마자 작심을 하고 선천부사 집무실로 갔다.
최봉관은 당시 53세 나이로 선천군의 부호군으로 무장이었다 최봉관은 최송설당의 증조부로 종4품의 무관직을 지냈다.
그의 11대 조상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인 수우당 최영경이었다. 11대 조상 최경영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 선조 때 대사헌에 추증되었다.
 부친 최천성은 함흥 중군을 지냈으며 조상대대로 서북지역에서 무관 출신으로 지내왔다.
“사또 영감님, 정말 이러시면 안 됩니다.”
“무엇이 안 된다는 말인가?”
“지금 관아에는 군량미가 이틀 치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나도 알고 있어요. 어디 전란이라도 일어날 조짐이라도 있소?”
“그건 아니지만 아무리 농민들이 어렵더라도 군량미를 구휼미로는 사용하는 것은 한도가 있지 않습니까.”
“나도 부호군만큼 백성을 사랑하오.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부호군은 군사들 조련이나 제대로 시키시오.”
김익순 선천부사는 농민들에게 봄에 벼 한 섬을 빌려주면 가을에 두 섬 을 받아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었다. 이자 수입은 고스란히 자신의 몫으로 착복했다. 탐관오리의 전형이었다. 김익순은 자신에게 입바른 소리하는 최봉관이 늘 목에 가시였다.
최봉관이 물러가자 김익순은 옆 사람이 알아듣지 못할 말로 중얼거렸다.
“어디 두고 보자. 네놈이 감히 내게 덤벼. 언젠가 본때를 보여 줄 꺼다.”


설상가상으로 가뭄으로 인한 흉년이 겹쳤다. 영양이 부실한 백성들에게 전염병이 일어 마을은 피폐해지고 민심은 흉흉해져갔다. 이러한 시기에 <정감록>이 나돌고 정부를 비방하는 벽보가 사방에 나붙었다. 민심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이때에 평안도 사람 홍경래(洪景來)는 과거에 계속 낙방한 것은 자신의 출신지가 평안도라서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흉흉한 민심을 이용해 홍경래는 반란을 일으킬 동지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서북인 들은 조선 초기부터 중앙정부로부터 무시를 당해 왔다. 홍경래가 불을 지피자 봄바람에 산불 번지듯 삽시간에 군사가 불어났다.
홍경래는 반란을 주도하기 위해 평안도 가산의 다복동 깊은 골짜기 아래 근거지를 마련했다. 가산 사람으로 몰락한 양반 서자 출신의 우군칙(禹君則)과 역노 출신으로 돈을 모아 양반을 산 이희저(李禧著)를 영입했다. 곽산의 양반 지식인 김창시(金昌始)를 참모로 삼아 지도층을 형성하였다. 농민 출신이지만 힘이 장사인 태천의 김사용(金士用)과 개천의 홍총각(洪總角)을 장수로 영입하였다. 이들에게는 농민군을 조련시키는 일을 담당하도록 했다. 농민군은 영세농민, 광산촌민, 중소상인 등 3,000여 명이 모였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오합지졸일 수도 있었지만 사기만큼은 충천했다.
농민군에게 힘을 보태주는 지원 세력도 점차 늘어갔다. 정주의 정진교(鄭振喬)는 촛대와 탄환을 실어 보냈고, 철산의 정복일은 여러 가지 깃발을 만들어 배에 실어 보냈다. 선천의 계형대는 군량 100석을 보내왔다. 최봉관의 외가 6촌인 유문제도 무기를 실어 보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전투에 필요한 물자가 다복동으로 몰려왔다. 10여 년간 마음먹고 준비를 했다.
전국에 큰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해지자 1811년 12월 18일 홍경래는 관서지방의 각 고을에 격문을 돌렸다.


“서북 인으로 태어나서 받는 부당한 처사에 분노하며 세도정권에 항거하기 위해 난을 일으키게 되었으니 서북 인들은 동참하라.”

 

홍경래는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칭하고 군대를 남군과 북군으로 둘로 나누었다. 남군은 근거지를 다복동으로 하고 자신과 우군칙을 참모로 남진하였다. 북군은 근거지를 곽산으로 정하고 김사용을 부원수, 김창시를 참모장로 하여 북진하게 하였다.
12월 20일을 거사일로 정했으나 변고가 생겼다. 평양으로 보낸 10여명의 장졸들이 그간 내응해왔던 동지들과 12월 15일에 객사에 불을 지르고 평양감사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12월 17일에는 선천부사 김익순에게 부호군 최봉관의 외가 육촌 유문제가 반란군과 내통을 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갔다.

평소에 최봉관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김익순은 즉시 최봉관을 붙잡아오도록 했다. 그날도 군사들 조련을 시키고 있던 최봉관은 부사 앞에 붙잡혀왔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사또 영감! 무슨 말씀이신지요?”
“너의 외가 유문제가 반란군에 가담하였고, 너 또한 반란군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이냐.”
“사또 영감, 유문제는 저의 조부의 외가이기는 하나 반란에 가담한 사실은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네놈이 정녕 모른다고 발뺌할 것인가”
“소장의 나이 이미 오십이 넘었고, 조만간 관직을 물러날 나이입니다. 지난 30년 동안 국록을 먹었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반란군에 가담하겠습니까?”
선천부사는 최봉관의 진술에 딱히 반박할 증거가 부족했다. 그때까지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풍문은 있었으나 어디에도 행동으로 나타난 것은 없었으므로 잠시 난감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저놈을 형틀에 묶고 바른 말을 할 때까지 매우 처라.”
최봉관은 형틀에 묶이는 신세가 되고 볼기에 피가 고이도록 맞았다. 그래도 반란과는 무관하다는 답변만 나왔다.
“네놈과 유문제 둘이서 반란에 가담할 수는 없을 터, 동조자가 있을 것 이다. 네놈과 평소 친한 친구가 누구냐.”
최봉관은 친구의 이름을 묻는 질문에는 답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 중에는 철산에 사는 정복일과 곽산에 사는 김창시, 박성신이 있습니다.”
“김창시라면 진사 벼슬을 한 사람이 아니냐?”
“예 그렇습니다.”
“저놈을 옥에 처넣도록 하고, 곽산의 김창시와 박성신을 당장 잡아오너라.”
그날부터 최봉관은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만약 반란이 일어나면 부하들과 함께 반란을 토벌해야할 무장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병졸들도 누구를 믿고 싸움을 할지 의심스러웠다.
선천부사는 반란의 조짐이 있다는 내용을 곽산군수한테 통지하고 포졸 두 명을 곽산으로 보내 김창시와 박성신을 잡아오게 했다. 포졸들이 곽산에 도착하여 김창시의 집에 갔을 때 김창시는 이미 농민군에 가담한 상태였으므로 그의 아버지를 포박하였다. 그리고 박성신의 집에 들려 집안일을 하고 있던 박성신을 잡아 선천으로 압송 중이었다.

홍경래 군의 남군은 제일 먼저 가산군을 쳐들어가 하루 밤 사이에 관아를 장악하고 가산군수 정시를 죽였다. 하루 만에 반란군의 근거지가 확보되었다. 북군도 18일 점심나절에 곽산에 도착했다. 눈을 피하기 위해 걸인행세를 하거나, 붓 장수 행색을 해가지고 몰래 숨어들었다. 북군대장 김사용이 곽산에 도착했을 때 급보가 들어왔다.
“선천부사가 포졸을 보내 김창시의 부친과 박성신을 붙들어 갔답니다.
“붙들어 간지 얼마나 되었다느냐?”
“반나절이 채 못 되었답니다.”
“그렇다면 아직 신현 고개를 넘지 못했을 것이다.”
“날랜 병사를 보내 그들을 데려 오도록 하자.”
북군 대장 김사용은 날랜 병사 두 명을 신현 고개로 달려가게 했다. 고갯마루에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자, 포졸이 두 사람을 압송하고 고갯마루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잠시 휴식하는 틈을 노려 포졸 두 명을 죽여 버렸다. 그리고는 김창시의 아버지와 박성신을 데리고 곽산으로 돌아갔다.

선천부사는 다음날 아침에 보고를 받았다.
“김창시를 압송하러 간 포졸을 반란군이 덮쳤답니다. 포졸은 죽고 죄인들은 도망갔다고 합니다.”
“뭐라고! 감히 포졸을 죽여!”
“그리고 지난밤에 곽산 군수님은 술에 취하여 자다가 반란군에게 포로가 되었답니다. 다행히 옥리를 유인하여 죽이고는 소를 타고 안주로 도망갔답니다.”
불길한 소식을 전해들은 선천부사는 다음은 반란군이 선천군으로 쳐들어올 차례라 생각하니 안절부절못하였다. 홧김에 최봉관이 반란군에 가입했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최봉관을 불러내 다시 문초를 했다.
“김창시와 박성신을 압송하러 간 포졸이 반란군에게 죽었다. 이래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겠느냐?”
“백번 물어도 소장은 모르는 일입니다.”
“나는 변란이 나도 이 고을을 사수할 것이다.”
“저놈은 반란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곤장을 쳐라.”
뼈가 부러지도록 심한 매질을 하였으나 시원한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최봉관을 다시 옥에 가두었다.


 

정주목사 이근주는 19일 아침에 곽산과 가산의 변보를 듣고 안절부절못했다. 농민군이 쳐들어온다는 말만 듣고도 22일에는 혼비백산하여 정주성을 내주고 안주로 향해 도망갔다. 홍총각 부대와 김사용 부대가 동시에 정주성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무혈입성이었다.
19일 저녁 가산을 출발한 홍경래 부대는 이미 내부 동조자를 상당수 확보하고 있었으므로 20일 새벽 박천읍을 단번에 함락했다. 박천군수 임성고는 버선발 차림으로 서운사라는 절에 숨었다.
24일에는 홍경래군의 북군도 북행하여 선천을 공격하게 되었다. 선천부사 김익순은 각 고을의 변고를 들었다. 특히 가산군수 정시는 농민군이 쳐들어오자 벽장 속으로 숨었다가 홍총각의 칼날에 죽었고, 고을 수령들이 하나같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거나, 도망갔다는 소식뿐이었다.
날이 저물어 어두워졌다. 동헌이 환하도록 불을 켜놓았다. 인적이 끊어지고 바람소리만 들려도 김익순은 무서운 생각이 치밀었다. 잠시 후 멀리서 북 치는 소리, 징 치는 소리, 와 하는 군중소리가 다가왔다. 밤이 꽤 깊어갈 무렵, 김사용의 군사들이 관문을 깨치고 들어오며 “부사를 잡아라!, 김가 놈을 놓치지 마라!”하는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목숨을 걸고 관아를 지키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최봉관이 구속 된 이후 부하 장졸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장졸들 중에는 반란군과 내응 자가 있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겁에 질린 김익순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검산산성 방비를 검열하겠다고 핑계대고 도망가 버렸다.
북쪽 용천도 이를 전후하여 함락되었다. 용천부사 권수는 전열이 수세에 몰리자 이레 만에 의주로 도망갔다. 초기 전투에서는 각 고을의 수령들이 농민군의 사기에 눌려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파죽지세로 공격을 감행하던 반란군에도 문제가 생겼다. 안주성은 청천강의 남쪽에 있는 성으로 천연 요새였다. 안주성이 장악되어야 평양과 한양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김대린은 관군이 전열을 정비하기 전에 안주성 공격을 즉각 시행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군칙은 안주성 공격으로 농민군의 피해가 커지면 사기저하가 우려된다며 반대했다. 홍경래는 우군칙 편을 들었다. 그러자 김대린이 변심을 품었다. 홍경래가 잠이 들었을 때 막사로 숨어들어 오른팔을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혔다. 홍경래는 들것에 실려 정주성으로 철수 하였다. 홍총각 역시 안주를 치자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총참모 우군칙의 반대로 정주로 불러들이게 되었다.


한편 부사가 도망간 선천군 관아는 적막에 쌓였다. 청천 강변에서 부는 매서운 겨울바람 소리만 세찰뿐 온 세상은 갑자기 숨을 멈춘 듯 조용했다. 최봉관을 감시하던 옥졸도 겁이 났던지 옥문 열쇄를 던지고는 어디론가 도망을 가버렸다. 잠시 후 형방의 이원이 최봉관을 찾아왔다.
“나리, 조만간 반란군이 우리 선천군에 들이닥칠 것이오.”
“상황이 그렇게 급박하게 변했소.”
“반란군이 쳐들어오자 부사는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갔다오.”
“그렇게 큰 소리 치던 부사영감이 도망을 갔소?”
“반란군이 쳐들어오면 나리가 절 구해줄 수 있겠소?”
“나는 옥에 있는 사람이고 당신은 나를 감시하는 사람인데 내가 무어라고 말할 수 있겠나. 나와 반란군하고는 관련이 없으니 알아서 하시오.”
형방의 이원은 최봉관이 실제 농민군과 연계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최봉관한데 심하게 매질하도록 한 것이 두려웠다.
“이건 부호군을 취조했던 형방의 기록이오. 나는 부호군이 진술한대로 기록했을 뿐 내 잘못은 없소.”하면서 최봉관의 머리맡에 형부의 취조기록을 던지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최봉관은 별 싱거운 녀석도 다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형방에서는 자신의 취조내용을 어떻게 기록해 놓았는지 궁금했다. 기록 내용을 펼쳐보았다.
‘최봉관의 외가 육촌 유문제가 홍경래 무리에 가담한 정황이 있어 최봉관도 연루되었는지 문초하였다. 본인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므로 곤장 백대로 다스렸다.’ 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정오 무렵이 되자 농민군이 관아를 점령하게 되었다. 농민군이 선천을 점령하게 되자 최봉관은 옥사에서 풀려났다. 농민군은 최봉관을 자신들의 동조자로 생각했는지 집에다 데려다 주었다. 최봉관은 장독으로 거동도 할 수도 없는 상황인데 꼼짝없이 농민군의 동조자로 낙인 찍히는 신세가 되었다.

선천을 점령한 김사용이 격서를 보내어 선천부사 김익순은 위협했다. 김익순은 스스로 새끼로 목을 매고 와서 항복한 다음 항복문서를 써냈다. 농민군들은 그를 죽이자고 하였으나 김사용의 생각은 달랐다.
“그대는 이미 죽은 몸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우리와 함께 일을 도모하는 것이 어떤가?”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김익순은 농민군에 합류하여 유영장(留營將)으로 임명되었다. 자신을 옥에 가두었던 김익순이 농민군에 항복했다는 소식은 최봉관에게도 들려왔다. 최봉관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하는 김익순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선천군이 점령되고 불과 일주일 만에 전세가 역전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때 유문제가 최봉관을 찾아왔다.
“형님! 관군이 조만간 다시 선천으로 몰려 올 것 같습니다. 어차피 역적으로 몰렸으니 저와 함께 정주성으로 가시지요.”
“아닐세. 나는 몸도 성치 않고, 국록을 먹은 무장이 농민군에 가담할 수는 없네.”
“형님, 여기 계시면 농민군 토벌에 나서지 않았다고 하여 진짜 역적으로 몰려 죽습니다.”
“농민군에게 죽거나 관군에게 죽거나, 죽기는 매 한가지 아닌가.”최봉관의 완고한 거절에 유문제는 돌아갔다.
소문대로 며칠이 지나자 전세의 역전은 현실화되었다. 의주로 진출했던 농민군은 조선의 거상 임상옥이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의병들을 만나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가장 난처하게 된 것은 선천부사 김익순이었다. 난감한 처지에 몰려 있을 때 유혹의 손길이 뻗쳐왔다. 조문형이 찾아왔다.
“나리, 제가 김창시의 목을 가지고 오면 얼마를 주시겠습니까?”
“뭐라고! 네놈이 어떻게 반란군의 서열 세 번째인 김창시의 목을 가지고 올 수 있단 말이냐?”
“어느 안전이라고 자신 없는 일에 큰 소리 치겠습니까?”
“자신이 있느냐?”
“목을 가지고 오면 천 냥을 주시지요.”
“고얀 놈이구나. 오냐, 목만 가지고 온다면 천 냥을 주마.”
김익순이 약조를 하자. 조문형은 자신이 들고 있던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김창시의 목이었다. 간밤에 김창시가 잠든 사이 막사로 숨어들어 칼로 찌른 다음 목을 베어 온 것이었다. 김창시는 홍경래 군에서 가장 학식과 덕망이 높았다. 반란을 일으킬 당시 격문은 그가 작성한 것이었다.
비록 시체에 불과하지만 홍경래 군에서 서열 세 번째인 김창시의 목을 보자 김익순의 생각은 달라졌다. 반란이 일어나고 어느 고을에서도 반란군의 핵심 우두머리를 잡은 사람이 없었다. 김창시를 자신이 죽였다고 한다면 대단한 전공을 세운 셈이었다. 더구나 부사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 반란군에 빌붙어 목숨이나 유지해야할 처지는 아니지 않는가.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흥정한대로 주고 김창시의 목을 넘겨받았다. 그리고는 자신은 이제 농민군의 토벌에 나섰다는 징표로 김창시의 목을 성문 위에 매달아 놓았다. 그러나 농민군이 처음 선천관아를 쳐들어왔을 때 관아를 지키지 못한 부분은 찜찜했다. 김익순 부사는 자신이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명분이 필요했다. 그때 떠오른 인물이 최봉관이었다. 부하 무장인 최봉관이 농민군과 내통하고 있어 부하들을 통솔할 수 없었다는 명분을 살려야 했다.


최봉관의 귀에도 김익순이 다시 관군이 되어 농민군을 토벌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심한 부사를 상사로 모신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한편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직감했다. 조용히 상문, 학문, 영문, 필문 아들 4형제를 불렀다. 이때 맏아들 상문은 문과와 무과 모두에 급제를 한 상태였다.
“조만간 부사영감이 다시 날 부를 것이다. 관아로 가게 되면 너희들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구나. 부사영감은 자신이 관아를 버리고 도망갔고, 반란군에 협조한 일을 은폐하기 위해서 나를 제물로 삼을 것이다. 조만간 내가 역적으로 몰리게 되면 너희 4형제의 앞날이 고달플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서로 자중자애하길 바란다.”
“아버님!”
4형제는 목메어 아버지를 불렀다.
“지금은 반란의 초기라 농민군이 우세해 보이지만 한양에서 진압군이 파견되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너희 형제는 경거망동하여 농민군에는 가담하지 마라. 알겠느냐?”
“예, 아버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조정에서는 민심을 달래려 하지 않고 반란 진압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니 앞으로도 곳곳에서 민란은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관군이 아니어도 의병이 일어나 농민군은 진압될 것이다. 백성이 주인인 세상, 양반과 상민이 차별이 없는 세상이 보고 싶구나.”
유언을 마치기가 무섭게 포졸이 최봉관을 잡으러 왔다. 최봉관은 아들의 등에 업혀서 관아로 갔다.

선천부사 김익순은 최봉관을 보자 다짜고짜 죄를 뒤집어 씌었다.
“네놈은 무장으로서 반란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내가 선천군을 지킬 수 없도록 하였다.”
어차피 살아남지 못할 것을 감지한 최봉관도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사또 무슨 말씀입니까? 반란군이 오기도 전에 사또가 저를 옥에 가두지 않았습니까. 제가 관군을 선동하였다는 말은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아직도 입은 살아있구나. 또한 네놈은 반란군이 관아에 쳐들어 왔으면 무장으로서 당연히 토벌에 나서야 하는 몸이거늘 집안에 숨어있었다.”
“사또, 당연한 말씀이오나 소장은 장독이 풀리지 않아 여기까지 오는 데에도 아들의 등에 업혀 왔습니다.”
“말이 많다. 저놈의 죄상을 내가 말한 대로 기록하고 심하게 곤장을 처서 옥에 다시 가두어라.”
최봉관은 장독이 풀리지 않아 조금만 매질을 하여도 볼기 살이 터져나갔다. 최봉관이 살아 있는 한 부사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죽기 직전까지 심한 매질을 하고 옥에 가두었다. 그날도 밤하늘의 별빛은 찬란했건만 죽음을 앞둔 최봉관의 마음은 심란했다. 무인으로 살아온 30여 년 동안 오랑캐가 쳐들어오면 목숨을 걸고 싸웠었다. 그런데 차가운 옥사에서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맞이하는 현실 앞에 울분이 끌어 올랐다. 뼈가 부러지도록 매질을 당했으니 움직일 힘도 없었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최봉관은 가족도 곁에 없는 가운데 숨을 몇 번 몰아쉬더니 저승으로 가벼렸다. 달빛은 억울한 죽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옥사의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김사용이 의주에서 의병에게 쫓겨 선천으로 내려오다가 성루에 김창시의 목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김사용은 당장 선천부사 집무실을 공격하여 김익순을 잡아들였다.
“네 스스로 항복해 왔을 때 나는 너를 살려 주었다. 그런데 너는 배신했다. 네 스스로 죽겠느냐, 내 칼에 죽겠느냐?”
“제발 스스로 죽게 해주시오.”
“그럼 그렇게 해라.”
김익순은 스스로 새끼줄에 목을 매고 자살하였다. 김사용은 김익순의 시체를 말에 메어 끌고 다니게 했다. 그러다가 김창시의 목이 걸려있던 그 자리에 대신 걸었다.
홍경래 군은 초기 전투에서는 전투 범위가 좁아 가산, 박천, 정주, 태천, 곽산, 선천, 철산, 용천의 여덟 읍을 쉽게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투지역이 넓어짐에 따라 지휘관과 병졸들도 분산되었다. 부대 간에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도 없게 되었다.
반면 퇴각을 거듭하던 관군은 시일이 지날수록 전열이 정비되었다. 영변, 의주, 구성은 성벽을 보수하고 전투 장비를 속속 갖추게 되었다.
비록 썩어빠진 조정이지만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충성심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의주에는 조선의 거상 임상옥이 전투물자를 지원하는 가운데 허항, 김견신의 의병이 일어났다.
농민군은 당초 청천강 이북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여 배후에서 공격받는 일은 없도록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의주지방에서 강력한 의병과 관군의 저항을 받게 되었다. 안주와 평양으로 진격하려던 계획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의주의 관군과 의병들이 선천으로 몰려오자 김사용은 더 버티지 못하고 정주성으로 철수하였다.


최봉관의 장례는 난리 통이었으므로 간소하게 치렀다. 장남 최상문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했다. 막내 동생 필문을 정주로 보냈다. 이틀 후 야심한 밤에 막내가 돌아왔을 때 모든 가족이 모였다.
“그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더냐.”
“홍경래 군이 안주를 공격하기 위해 박천의 송림리에 모였는데요. 그때 안주에 있던 병마절도사 이해우와 목사 조종영이 공격해 왔답니다. 강변 모래사장에서 전면전이 붙었는데 결국은 농민군이 졌답니다.”
“그리고, 다른 소식은?”
“조정에서는 병조참판 정안석이 양서위무사로 한양을 출발했고요.”
“그리고?”
“인근 군수들이 병력을 모으자 관군은 삽시간에 2천여 명이 넘게 되어 농민군 숫자보다 많아 졌답니다.”
“관군이 주도권을 잡았단 말이지”
“예, 이제는 농민군은 정주성으로 쫓겨 갔고, 다른 고을은 모두 관군이 들어갔답니다.”
“알았다. 먼 길에 수고했다. 일찍 자거라”

먼 길을 다녀온 동생을 위로하고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논의 했으나 아무도 적절한 대책을 말 할 수 없었다. 그저 상황을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홍경래군은 정주성에서 계속 저항을 하게 되었다. 정주성은 완전히 고립되고 성안의 식량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불만을 토로하거나 도둑질을 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하였다. 그만큼 농민군은 조정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오갈 데 없는 상황이다. 투항해봐야 목숨을 건진다는 보장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관군이 몇 차례 정주성을 공격했으나 결사항전하는 농민군을 당할 수는 없었다. 성안에 고립된 농민군을 진압하는데 시간이 길어질수록 관군은 초조해졌다. 초조해진 관군은 땅굴을 파기로 했다. 굴을 파기 시작한지 16일 만에 정주성의 성벽에 도달하였다. 땅굴 속에 1,800근의 화약을 폭파시켜 성벽을 무너뜨렸다. 성벽이 무너지자 일제히 공격을 시도하여 배고픔과 피로에 지친 농민군을 제압하였다. 이로써 홍경래의 농민군은 정주성에서 농성을 시작한지 100여일, 거병한지 5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난이 평정되자 양서위무사 정안석은 반란의 전모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주모자에는 홍경래, 홍총각, 이휘저, 우군칙, 김창시, 김사용 등이 올랐으며 경중에 따라 죄상을 적어 넣어 한양으로 보냈다. 농민군이 점령하여 다스렸던 정주성에는 모두 2,983명이 있었다. 관군은 이들 중 여자 842명과 10세 이하 어린이 224명만을 남기고 나머지 1,917명은 즉결 처형했다.

최봉관에게는 ‘외가와 함께 거사 전에 반란군과 내통하였고, 반란이 일어나자 관군을 선동하였고, 반란군이 쳐들어오자 적극적으로 반란군을 토벌하지 않았다.’는 죄목이 붙었다. 최봉관의 아들 4형제는 반란군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므로 목숨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전라도 고부의 관비로 보내지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장남 최상문은 부친이 남기고 간 형방의 취조기록을 가지고 갔다.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선천을 떠나자 눈물이 길을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