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탑의 땅 미얀마

미얀마 기행문 3일째/ 만달레이 1 - 권오웅

보리숭이 2011. 2. 12. 23:48

2011년 1월 25일 화요일/ 글쓴이권오웅/만달레이

새벽 4시 반 기상(起床) 모닝콜이 있고, 5시 반에 호텔 방을 나와 호텔 식당에서 식사하고, 6시 반에 버스로 국내선 항공기를 타는 공항으로 출발하는 일정이 오늘도 이어졌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서 가이드인 개산(開山) 거사(居士) 박순호(朴淳鎬)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유익한 이야기를 들었다. 스님은 언제나 수행하는 학생이어야 한다. 그런데 스님이 성직자(聖職者)가 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간다라, 마투라, 굽타식 불상 변천사, 자기 속에 보석을 지닌 거지가 나중에 자신이 지닌 보물을 알게 되었다는 법화경 얘기를 하고, 차가잉 승가대 학장이 정부를 심하게 비판하자 정부에서 체포하기 전에 민군 종정에게 그 사실을 통보하자 민군 종정이 “속복(俗服) 갖다 달라.”고 하자 차가잉 학장을 체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예로 들면서 만달레이 승단 세력이 강하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는데, 계율을 엄격히 지킨 종정을 국민들이 깊이 존경하기 때문이란다. 청정 승가단을 이끌기 위한 규율을 언급하면서 규율의 시의(時宜) 적절성(適切性)을 언급하였다. 부처님 당시에도 맨발로 다니다가 삐쭉한 돌 문제로 밑창 한 겹의 신발을 허용한 사실(지금 스님들이 고무신 신는 것도 이 사실과 이어진다고 한다)과 어린 대나무잎으로 신발을 만들거나, 나무로 된 나막신은 금한 사실, 칠엽굴 입구에 있는 온천을 스님들이 애용하자 목욕을 좋아하는 빔비사라왕이 목욕탕에 가지 못하는 사연을 부처님께 하소연하자 부처님이 스님들이 15일마다 목욕하게 한 사실을 예로 들었다. 공항에서 국내선 비행기 타고 비행기 아래 펼쳐지는 미얀마 산야에 펼쳐지는 풍광을 감상하고, 오늘의 행선지인 만달레이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스님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가면서 개산 거사의 다음과 같은 좋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이 공항은 권력자에게 아부하려는 태도와 행정 착오가 겹쳐져 국제공항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공항은 국내선 일부와 국제선 일부만 운행되어 국제공항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데다 만달레이 시내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이익이 창출되지 않자 노선버스도 운행되지 않아, 비행기 승객들은 세내어 버스를 이용하는 단체 손님이 아니면 오직 비싼 택시만 이용해야하는 교통 불편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 만달레이는 곤파웅 왕조의 마지막 도시이며 미얀마 제2의 도시로 100만명이나 사는 경제 중심 도시이며 불교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도시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에 해당하는 도시라 한다. 화교(華僑)가 많이 살고 있고, 미국의 경제 제재로 미얀마가 중국과 가까워지자 화교의 역할을 더 증대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미얀마에 천연가스가 나고 지하자원이 풍부한 사실을 알고는 세계가 미얀마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한다. 우리나라도 포스코가 가스 개발에 본격 진출하고 있는 등 미얀마 개발에 적극 참여하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미얀마의 양곤의 전기 사정도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스님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가면서 개산 거사의 구수한 불교 관련 좋은 얘기들을 들었다. 부처님이 속세의 보살 유마힐이 살던 바이샬리에서 열반을 예언한 일, 바이샬리에 살던 나라비족이 부처님 열반을 지켜보려고 따라오려고 하자 따라오지 못하게 하니 깨사비에서 무릎 꿇고 통곡하고 뒤돌아가고, 그 자리에 뒷날 부처님을 기려 북인도 대탑(깨사비 탑)을 조성한 얘기, 파트라에서 불 족적(足跡)을 남긴 얘기, 부처님이 아쇼카 왕이 나서 불국토 통일 이루리라고 예언한 이야기, 부처님이 열반 전에 몹시 목이 마르다 하니 아난이 물을 떠러 쿠시나가르 강에 갔는데 마침 500마리 소가 강변을 지나가 물이 흐렸으나, 열반 전에 물 한 모금이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에 흐린 물을 떠다 드렸으나 뒷날 그 일을 비롯한 여러 가지로 아난의 잘못이 들추어지어 아난이 승단에서 쫓겨났다가, 피나는 수행을 하여 진리를 깨달아 돌아와 경전 결집에 참여한 얘기, 가섭에게 마음으로 법을 전했다는 삼처전심(三處傳心)(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나누어 준 일, 염화미소<拈花微笑>, 열반 일주일 뒤에 가섭이 오자 관 속에서 두 다리를 들어 보였다는 곽시쌍부<槨示雙趺>) 이야기, 500여년간 부처님 지시로 모양 없는 진리를 글자로 표시하지 못하게 하여 경전을 글자로 기록하여 편찬하지 못한 이야기, 5백 나한들에 의한 경전 1차 결집, 일차 결집 반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칠엽굴 반대쪽에서 대중부 경전 결집, 아소카 왕 때의 3차 경전 결집, 카니스카에서 브느나가 주관한 4차 경전 결집, 만달레이 5차 경전 결집, 스리랑카에서 바나나 잎에 경전을 기록한(패엽경) 경전 결집 이야기, 경률론(經律論) 삼장(三藏)을 다 외운 민군 스님 이야기, 5백 나한 조성 증명 법사가 될 정도로 대단히 민군 스님이 유명해지자 민군 스님 어머니에게 벤츠를 선물한 얘기, 자기 감각 넓혀가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라는 얘기 등을 버스룰 타고 가면서 한편으론 듣고 한편으론 주위의 풍광을 구경하는 동안 어느덧 스님들이 많이 사는 곳인, 만달레이에서 11㎞ 남쪽에 있는 도시인 아마라푸라 도시의 타웅타만 호수 가에 이르렀다. 이곳은 화교들이 많이 살아 화교들이 세운 절도 있다고 한다.

 

10시 15분에 시작되는 스님들의 공양 모습을 보기 전에 먼저 타웅타만 호수에 걸려 있는 우베인 다리를 관람하게 되었다. 이 다리를 건설한 우베인은 이전 수도인 인와에서 수도를 이전해 왔을 당시 아마라푸라 시장이었는데, 버려진 인와 왕궁의 목재를 이용해서 1.2㎞의 도보용 다리를 건설했다고 한다. 비록 원래 984개의 티크 나무로 된 기둥 가운데 일부가 콘크리트 기둥으로 교체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대부분 남아 있다고 한다. 2백년의 세월을 견딘 이 다리는 세계에서 가장 긴 티크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라고 한다. 우기(雨期) 때와 건기(乾期) 때가 수량의 차가 많아, 건기 때는 호숫가에 여러 농작물을 경작하고 가축도 기른다고 한다. 개산 가이드는 스님들이 탁발하기 쉽게 하기 위해 세웠다고 설명하였다. 그런 일면은 있겠지만 그것으로 온전한 설명은 못되는 것 같다. 스님들 공양 시간까진 여유가 있어 우베인 다리 위를 걸으며 주위의 풍광을 감상하게 되었다. 다리에 오르기 전 널찍한 호수 풍경이나 다리 위에서 본 주위의 넓은 호수 모습은 한없이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다리 위는 바닥은 기둥에서 기둥으로 가로 질러진 나무를 의지하여 세로로 서너 개의 긴 나무가 걸쳐져 있고, 가로로는 각목보다 조금 큰 나무들이 약간의 간격을 두고 죽 박혀져 있었다. 이곳은 많은 사람과 일부 자전거도 통행하고 있었고, 중간 중간에 비록 조금은 허술하기는 하지만 쉴 수 있는 의자가 있는, 속이 빈 집 여러 곳에 마련되어 있었고, 거기엔 간단한 과일이나 물품도 팔고 있었다. 우리가 간 때가 건기(乾期) 때라 물이 차지 않은 곳엔 채소와 농작물이 재배되는 모습이 보였고, 농부가 두 마리 소에 멍에를 얹어 밭을 갈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다리 아래에 팜나무 잎사귀로 지붕을 이은 집도 보였다. 이 다리 위를 걸으면서 주위의 풍광(風光)도 바라보니 평화로운 별세계(別世界)에 온 듯했다. 나는 이 평화로운 모습이 좋아 우리 일행이 먼저 들어가는 것을 보고도 나 혼자 더 멀리 걸어보고, 주변의 호수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호수에는 어선들도 무수히 떠 있었고, 저 멀리 도시 일부가 숲 위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 외 많은 모습들이 평화롭게 다가오고 있었다.

 

우베인 다리

갑자기 시간에 늦은 듯하여 티크 다리 위를 조금은 뛰면서 가는데, 사진을 열심히 찍고 계신, 우리 일행이면서 사진 전문가이고 우리 일행들의 사진을 무수히 찍어주시는 백선생님을 만났다. 몹시도 반가웠다. 그러자 조금은 여유가 생겨 조금 더 주변 풍경을 구경하고 버스에 돌아오니 가까이에 볼 만한 절이 있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별로 없다 하여 부리나케 주변에 있는 절에 달려가 신발 벗고 비스듬한 계단을 따라 법당으로 들어가니 법당 정면에 엄청나게 큰 대불이 압도하듯 앉아 계셨다. 법당엔 앞과 뒤 옆으로 32개 정도의 큰 유리 기둥이 서 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돌아오면서 유심히 보니 입구 양쪽에 문이 있는 미얀마 탑 형식이 있어 돌아와 개산 거사에게 물어보니 문이라고 했다. 절 이름도 물어보니 절 이름은 묘향사(妙香寺)로 번역할 수 있다고 했다.

 

불상

 

스님들 공양 시간이 다가와 ‘큰 향기로운 모임(수도원)’으로 번역되는 ‘마하간다용’ 사원으로 이동하였다.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개산 거사가 승복의 유래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처음에는 노인히 강변에서 시신(屍身)을 화장(火葬)하고 버린 옷을 주워 기워 만든, 분소의(糞掃衣)(인도어 판슈크라)로 승복(僧服) 만들었으나, 부처님의 주치의(主治醫)인 지빠 의사(醫師)가 왕의 병을 고치고 좋은 천을 얻게 되자, 부처님께 수행자가 숲속에서 수행하여 피부병과 추위 등으로 병을 많이 얻으니, 속가 천으로 승복을 만들 수 있게 청하니 부처님이 이를 허락하여 오늘날과 같은 승복을 만들어 입게 되었다 하였다. 승복을 논밭처럼 만든 것은 복전(福田)이 됨을 상징(象徵)하는 것이라 한다. 남방 스님들은 허리띠, 상의, 하의, 발우, 면도기 정도를 지닌다고 한다. 그 외 물건은 소지하지 않으며, 옛날의 불교 계율을 지키려 노력한다 한다. 소승불교(小乘佛敎)에서는 14비법(非法)으로 대승 불교를 나무라며 분리해 나왔던 터라 원래 돈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 스님들은 돈 보시는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받지 않고 계(戒) 안 받은 아이들에게 흰옷 입혀 받게 한다고 한다. 보통 절에서는 15세 이하 아이, 15세 사미계, 20살 이상 비구계를 받는다. 흰옷 입은 아이들이 돈을 받는 방식은 부처님이 사용한 축오(逐烏) 사미 전통을 활용한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 재세시(在世時)에 제자들이 탁발 나가 보니 콜레라 만연으로 위험에 빠진 아이들이 있어 그 사실을 부처님께 고하고, 거둬들일 것을 청하자 부처님이 그들을 승원(僧院)에 있게 하면서 보시(布施) 곡식 먹는 까마귀를 쫓는 소임을 맡겼다고 한다. 부처님은 승복 입고 받는 보시는 밥 한 톨도 외아들 살점 뜯는 심정으로 대하라고 엄하게 가르쳤다고 한다. 남방 스님들은 신도들이 돈 주면 아이들이 대신 받아 스님 은행 통장에 넣어 장부 처리 하고 대중에게 적립한 내용을 공포(公布)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받은 보시(布施) 돈은 여행 경비로 쓸 수 있고, 집에 계신 부모님께도 송금이 가능하다고 한다. 특기할 것은 미얀마에서는 스님들의 출가(出家)와 환속(還俗)이 자유롭다고 한다.

10시 15분 드디어 마하간다용 수도원에서 스님들의 공양이 있었다. 오늘은 탁발을 나가지 않고 신도들이 미리 준비해준 대중공양을 하였다. 원래 탁발을 나갈 때도 가는 장소가 미리 정해지고, 그곳에는 보시할 신도들이 미리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사원 앞 크지 않은 마당에 큰 철 밥통이 네 개씩 여덟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 밥통에는 밥이 가득 들어 있었고 철 발통 네 개씩마다 한 줄로 승려들이 줄을 서니 결국 두 줄로 승려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밥통마다 봉사하는 신도들이 밥을 퍼서 기다리고 있었다. 밥을 받고는 이어 반찬과 오늘은 노트까지 받게 준비되어 있었다. 공양이 시작되자 네 분씩 차례대로 밥을 공양 받고 이어 반찬을 받고 노트를 받고는 수도원 안 식당으로 들어가 식사하였다, 식당은 널찍하고 옆 건물도 식당으로 쓰고 있어 많은 수의 스님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스님들의 줄은 대열을 이루어 마당 밖 도로(道路) 멀리까지 이어져 장관(壯觀)을 이룬 모습을 수도원 식당 맞은편 건물에 올라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스님들은 하루 한 끼 식사를 해서인지 굉장히 많은 밥을 봉사자들이 스님들께 드리고 있었고, 스님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많은 밥을 큰 발우에 받고 있었다. 그 음식을 식당에 가서 드시는 것을 보고 한 끼에 우리가 먹는 세 끼를 다 먹는 것 같아 하루 한 끼 식사가 위장(胃臟)에 줄 부담을 생각하니 하루 한 끼 식사가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았다. 스님들은 비록 하루 한 끼를 먹으나 먹을 것은 다 먹는 분들도 있다 하니 왠지 하루 한 끼 식사의 그늘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움이 느껴졌고 우리가 미얀마 스님들이 발우 공양하는 모습에 대해 들은 것과는 왠지 거리가 있는 듯했다.

 

 

 

마하간다용사원 공양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