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탑의 땅 미얀마

미얀마 기행문 3일째/ 만달레이 2 - 권오웅

보리숭이 2011. 2. 12. 23:47

2011년 1월 25일 화요일/ 글쓴이권오웅/만달레이

 

다음에는 미얀마 삼대 성지(聖地) 중 한 곳인 마하무니 황금 사원에 들렀다. 미얀마의 3대 성지는 이 외에 쉐다곤 사원, 우리나라 설악산 봉정암과 비슷한 짜익티요라고 한다. 짜익티요에는 산 정상 언덕 위에 설악산 울산 바위 10배 정도 되는 황금 바위가 있다고 한다. 마하무니 황금 사원 부처님은 여왕이 자기 몸무게만큼의 황금을 하사하여 조성한 황금 부처인데 그 뒤 여기에 질세라 후세의 왕들이 더욱 많은 황금을 보시하여 불상을 키우고, 지금도 끊임없이 금박을 붙여 불상을 황금으로 계속 키우고 있는 곳이다. 성스러운 곳으로 알려져 지금도 끊임없는 사람이 참배하고 있다고 한다. 위는 삼각뿔 모양의 큰 탑이 중심에 있고, 이 탑이 있는 윗층 둘레에는 작은 삼각뿔 모양의 탑이 조성되어 있고 당초 문양인 나뭇잎 모습의 조각이 덧붙여져 있었다.

 

마하무니 황금 사원

 

건물 내부는 많은 기둥 사이로 공간을 만들어 통행로를 내고 불전(佛殿)으로 통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주 건물 사방에는 주 건물 보다는 작지만, 비슷한 모양의 탑을 세워 주 건물을 호위하듯 서 있었다. 만든 방식은 주 건물의 탑과 그 둘레 모습을 축소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불전은 높게 마련되어 있고, 예배하는 사람들은, 남자들은 불상 앞부분까지 가서 예배할 수 있으나, 여자들은 불상에서 일정한 거리 떨어진 곳에서 예배할 수 있게 하였다. 미얀마에서 사원에서 볼 수 있는 남녀 차별 모습이 여기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남자들은 계단을 올라가 직접 불상으로 가서 금박을 붙이거나 관람도 할 수 있었다. 황금으로 불상을 만들고, 끊임없이 금박을 붙이고 끊임없이 예배하는 사람들 모습에서 부처님을 공경하는 모습과 아울러 인간들의 무한한 소망을 읽을 수 있었다.

 

황금 불상

 

주 건물 안마당에 가서 사진들을 찍고, 작은 건물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보시로 만들어진, 여신 둘이 어깨에 맨 간타(우리나라 운판에 해당한다고 한다.)를 구경하고, 다른 방에 있는, 캄보디아 앙코르에 있다가 앙코르를 점령한 태국인들이 약탈한 것을, 싸움에서 이긴 미얀마 바인나웅 왕이 1564년 바고로 가져왔고, 1663년 라카잉의 라자지 왕이 이곳으로 옮긴, 사자상, 쉬바상, 코끼리로 구성된 여섯 개의 청동상을 구경하였다. 언제부턴가 자신의 아픈 부위와 같은 곳을 만지면 병이 낫는다고 하여 무수한 사람들이 청동상을 만져 반들반들하였다. 이어 건물 뒤편으로 가서 다나까와 전단향을 갈아 매일 새벽 3시(안내서엔 4시)에 불상의 얼굴을 세안(洗顔)하는 데 쓸 수 있게, 다나까와 전단향을 준비된 재료와 기구로 가는 복덕 짓는 일을 하였다. 나는 잠시 갈아 보고는 곧 다시 사원 안으로 들어와 아까 덜 본 난타와 마하무니 사원 모습을 열심히 관람하였다. 아름다운 모습에 몇 번이고 볼 수 밖에 없었다. 한 번 일행이 있는 곳에 갔으나 여전히 갈고 있어서 다시 사원 안으로 들어와 사원을 구경하고 다시 일행 있는 곳으로 오니, 이제 다나까와 전단향을 갈던 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같이 사원을 거쳐 나오면서도 못내 아쉬워 불전 둘레의 모습을 몇 번이고 다시 둘러보았다. 다음에는 금박을 만드는 공방으로 갔다. 대나무 펄프를 우리나라 한지(韓紙) 만드는 것처럼 해서 종이를 만들고, 종이에 즉각 삶은 물 넣어 기름종이 만드는 얘기도 들었고, 금을 두드려 금박을 만들 때 금박이 너무 얇아져 금박에 구멍이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간단한 물시계를 만들어 금박을 두드린다는 설명도 듣고 간단한 물시계도 구경하였다.

 

 

금박공방

 

그 외 금박 관련 사실이나 금박으로, 기름종이로 만들어진 물건들을 구경하고 만달레이에서 오직 한 사람의 한국인이 경영한다는 한식점을 방문하여 배추로 쌈 싸 먹으면서 이국에서 한국의 풍정을 맛볼 수 있었다.

이어 호텔로 가면서 성벽 위에 깎은 연필 단면(斷面)같은 성벽이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성벽이 보였다(높이 8m라고 한다). 밖은 폭 50m, 깊이 3m 정도의 해자가 둘러싸고 있었다. 만달레이 왕궁의 성벽이다. 이렇게 튼튼한 성도 영국군의 왕궁에 대한 폭격으로 쉽게 함락되고 말았다 한다. 1885년 영국이 여기를 점령한 뒤 이곳을 듀퍼린 요새로 이름을 바꾸고 식민지 정부와 영국 클럽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5년 3월 20일 영국, 인도 연합군과 일본군의 격렬한 전투로 요새 안에 있던 왕궁이 전부 불타버렸다 한다. 지금 있는 것은 복원된 것이라 하는데 우리들은 이곳을 구경하지는 못했다. 호텔에서 잠시 쉬었다. 미얀마에서는 아침 일찍 일과가 시작되는 대신에 오후 1시부터 3시 정도까지 쉬는 풍토가 정착되어 있었다. 뜨거운 낮을 피해 사는 현명한 방법 같았다.

오후에는 이라와디 강가로 차를 타고 가서 전세 낸 배를 타고 민곤 대탑으로 향하였다. 이라와디 강에는 돌고래가 살고 있다고 한다. 돌고래와 어부가 협력하여 고기를 잡기도 한다고 한다. 돌고래 부르면 고래가 고기를 몰고 온다고 한다. 강 건너 삼각주에는 대나무 집도 보이는데 모래 채취해 팔고, 대나무 자재 싣고 바간 거쳐 양곤으로 간다고 한다. 이 대나무 집들은 간단하게 짓고 홍수 시에는 철거한다고 한다. 옛날에는 여자들이 배 윗층에 올라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남자를 높이고 여자를 낮추어 보는 풍속 때문이라고 한다. 옷을 얇게 입어 때로는 조금은 차가운 느낌을 느끼게 시원하면서도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항해하며 개산 거사의 얘기와 이라와디 강과 주변의 풍광을 즐기며 두 시간 반 정도 배를 타고 갔다. 이라와디 강은 널찍하고 수량도 풍부했는데 넓은 곳은 폭이 족히 2㎞는 되는 듯했다. 이 강은 미얀마의 젖줄 구실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저 멀리 큼지막한 탑이 보이니 민곤 대탑이다. 이 탑은 1791 만달레이 곤파웅 왕조의 보도페이 왕(1782~1819)이 곤파웅 왕조의 최초 수도였던 쉐보에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조성을 시작했으나 기단부만 완성하고 중단되었다. 노동자들이 혹독한 노역을 견디지 못하고 영국령 인도(지금의 방글라데시)로 도망갔기 때문이다. 화가 난 보도페이 왕은 이 도망간 포로들을 잡아왔고 침략의 구실을 찾고 있던 영국은 기회가 오자 이 왕국을 침공하여 세 번 싸워 세 번 패하여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고 개산 거사는 언급하였다. 안내서와 개산 거사의 말을 종합하여 보니 1885년 민돈 왕의 다음 왕인 티보민 왕과 왕비가 유배되면서 이 왕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그런데 왕은 유배지에서 죽었고 왕비는 나중에 돌아왔다고 한다. 이 탑의 공사로 빚어진 노동자 도망 사건이 나라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배를 내려 조금 올라가니 다람쥐처럼 생긴 큼직한 돌이 민곤 대탑에서 비록 꽤 떨어졌지만 탑 입구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곳에 보인다. 민곤 대탑의 입구에 세워진 사자 모습의 엉덩이 부분이란다. 전체가 다 있으면 20m 높이는 족히 된다고 한다. 이 민곤 대탑은 사각형 모양의 기단부만 있는데 한 변이 140m, 높이가 70m(안내서엔 50m), 면적이 450㎡ 라고 한다. 다 쌓았으면 높이가 150m가 족히 되었으리라고 한다. 그런데 1838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인하여 벽이 갈라지는 손상이 있었지만, 오늘날까지 벽돌로 만든 건축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건축물로 꼽히고 있다 한다. 이 탑도 사방으로 연필 단면 같은 모습의 아치 형태로 만든 문틀에 문을 내는 방식의 문이 사방으로 나 있었다.

 

민군대탑

 

사자 엉덩이 있는 곳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니 비교적 넓은 탑 앞 공간이 나타나고, 오른쪽으로 계단을 만들어 탑으로 연결시키고 탑도 계단을 따라 오른쪽 탑 기단 부분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다른 사원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맨발로 계단을 올라가다 보니 지진으로 무너진 탑의 일부분을 볼 수 있었다. 탑 오른 쪽 부분 속으로 계단을 따라 오르는 길은 꽤 가팔랐다. 손잡이는 여행객의 안전을 위하여 마련되어 있었다. 오른쪽 기단 위에 오르니 30명 정도는 넉넉히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거기서 보니 앞쪽은 이라와디 강이 흐르는 모습이 펼쳐져 있었고, 왼쪽 아래쪽엔 민곤(민군) 기념홀과 대종각과 흰 고깔 모습을 한 산퓨메 사원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계단 건너 넓은 기단 모습이 벽돌을 쌓은 속살을 드러내고 윗부분을 드러내고 있었다. 민곤(민군) 대탑은 벽돌 틈에 회를 많이 채워 바간 탑에 비해 질 많이 떨어진다는 개산 거사의 설명이 덧붙여졌다. 여기서 이필임 법우의 제안으로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독송(讀誦)하게 되었다. 또 다른 감회를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니 엉덩이 부분만 남은 사자 모습이 조그마하게 보여 이 탑의 기단부가 참으로 높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조망되는 이라와디 강과 그 둘레 풍경도 아름다웠고, 탑 주변의 산들의 풍경도 보기에 좋았다. 다음에는 민군 대탑 옆에 있는 민군 기념홀을 방문하였다. 경률론(經律論) 삼장(三藏)을 다 외운 민군 스님의 젊은 시절부터 만년(晩年)까지의 사진과 행적에 대한 설명이 홀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다음에는 그 옆에 있는 민군 종을 보러 갔다. 보도파야 왕이 민군 사원 건립과 함께 청동으로 만든 이 거대한 종을 이 사원에 헌납한 것이라 한다. 1808년에 만든 이 종은 무게가 87톤, 높이 3.65m, 둘레 5m, 두께 60㎝로, 칠 수 있는 세계 최대의 종이라 한다. 이 종을 쳐 보아도 비교적 맑은 소리가 났다. 이 종 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하고, 일행 중 일부는 종 속에서 밖으로 내다보며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종 속에 들어가 있을 때 밖에서 종을 쳐도 별로 충격을 받지 않고 비교적 맑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민군종

 

웅장한 종과 비교적 맑은 종소리를 뒤로 하고 조금 더 걸어 신퓨메 사원으로 향하였다. 이 사원은 사랑하는 신퓨메 부인이 그가 왕이 되기 전에 죽자 그녀를 그리워한 바지도 왕이 자신이 왕이 오르기 3년 전인 1816년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 사원의 물결 모양을 한 7개의 계단(테라스)은 메루산을 둘러싸고 있는 7개의 산을 의미하고, 그 중앙 탑의 단은 메루산을, 그리고 중앙 탑은 석가가 출가할 때 깎은 부처 머리카락을 모아 놓았다는 술라마니를 상징한다고 한다. 중앙 탑의 불살을 모신 곳의 입구는 동쪽으로 나 있는데, 앞뒤로 두 개의 불상이 있었다. 뒤쪽 것이 원래의 불상이고, 동쪽을 향해 있는 것은 2001년에 새로 모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원래 있던 부처는 파불(破佛)할 수 없어 그대로 두었다 한다. 뒤에 있는 부처는 선정(禪定)에 들어 선정(禪定)의 즐거움을 누리는 모습이 비교적 잘 표현 되었고, 앞에 있는 불상 모습은 무표정한 듯한 모습이나 인자함이 약간은 비치는 듯했다. 신퓨메 사원 역시 1838년에 지진으로 손상을 입었으나 민돈 왕이 1874년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이 사원은 연필 단면 속에 문을 낸 듯한, 네 방향의 큰 문들 속 층층 계단을 거쳐 불상을 안치한 곳에 이르게 만들어져 있고, 올라가는 층층 문 연필 단면보다는, 작은 연필 단면 같은 모습 속에 감실(龕室)과 비슷하게 만들고 그 속에 불상을 안치한 곳을 많이 배치하여 위에서도 아래서도 그 불상을 보고 경배(敬拜)할 수 있게 하였다. 탑 정상부 불상을 안치한 곳에서 옆으로 돌아가면 난간이 둘러져 있어 밖을 조망할 수 있었다. 문을 통한 층층 계단 밖으로도 밑으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있었고, 그 길을 따라 내려가면 옆길로 나가 감실 같이 만들어진 곳에 배치한 불상을 경배할 수 있는 공간이 빙 둘러 마련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거기서 살펴보고 나중에 사진을 보고 자세히 관찰하고 얻은 결론이다. 아쉬운 것은 이러한 여러 상황을 출발 시간이 급하게 느껴지고, 거기다 지쳐 좀 더 확인하면서 구경하지 못한 것이다. 사원을 내려오니 일행들은 저 멀리 가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백 선생님이 사원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었다 한다. 그것을 알았다면 조금은 더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왠지 이 사원은 여러 층계로 점점 높아지면서 높은 곳에 불상을 모시고, 그 위에 탑이 배치되었고, 그 층계마다 갈매기가 날개를 펴고 앉았고 그 날개 사이에도 불상을 안치한 듯한 느낌이 든다. 흰 색의 이 사원에서, 사원 층계에 앉은 많은 갈매기가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신퓨메 사원

 

부리나케 일행을 뒤따라오면서도 신퓨메 사원을 몇 번이고 뒤돌아보며 왔다. 물건 사라고 보채는 아이들을 내 몰라라하고 바삐 길을 재촉하고 오는 심정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민군대탑을 다시 한 번 더 보고, 민군 대탑 입구에 있는 사자 엉덩이 부분 조각을 다시 보고 배에 올랐다. 드디어 일행을 태운 배가 다시 우리가 묵는 호텔이 있는 곳을 향하여 떠났다. 늦은 오후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어느 부부의 사랑 얘기, 어느 분의 지난 세월 지난 얘기 등등을 들으며, 배를 타고 오며 이라와디 강과 둘레의 풍경을 보고 오는 모습도 참으로 정겹게 느껴졌다. 아쉬운 것은 출발 시간이 조금 일러 낙조(落照)의 찬란한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