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이야기

[스크랩] 해인사 - 벽화 (2)

보리숭이 2009. 10. 6. 04:11

16) 원광법사

 신라 진평왕 때 모량부(牟梁部)에 귀산이라는 어진 선비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같은 마을에 사는 친구 취항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들이 사군자(士君子)들과 어울려 놀려면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근신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필경 욕을 당하는 것을 먼저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어진 사람을 찾아가서 도(道)를 묻지 않겠는가?」

두 청년은 가슬갑(嘉瑟岬)이라는 절에 계시는 원광법사(圓光法師)를 찾아가기로 작정했다.

원광법사는 중국에서 불법을 깊이 공부하고 교화활동 등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왕의 간청으로 고국에 돌아와 대승의 법문을 펴고 크게 교화하니

국왕을 비롯한 온 백성이 그를 성인으로 우러렀다.


귀산과 취항은 원광법사를 찾아 뵙고 공손하게 여쭈었다. 

 「저희들 세속 선비는 몹씨 어리석어서 아는 것이 없아오니,

    바라옵건대 평생의 교훈으로 삼을 가르침을 주십시오」

인정이 많은 원광법사는 그들의 물음을 갸륵하게 여겨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불교에는 열 가지의 보살계가 있지만

   너희들은 신하된 몸으로서 필경 이것을 지켜내지 못할 것이다.   

   다만 세속인으로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가 있으니(세속오계 世俗五戒),

          첫째,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것이요,

          둘째, 부모를 효도로 받드는 것이요,

          셋째, 벗을 신의로 사귀는 것이요,

          넷째, 전쟁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것이요,

          다섯째, 산 목숨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려서 한다는 것이다.

   너희들은 이 일을 실행함에 소홀히 하지 말라」

이것은 오랫동안 신라 사람들에게 내려오던 미덕들 중 젊은이들이 당연히 지켜야 할 일들을

원광법사가 덕목화(德目化)하여 그들로 하여금 평생을 지킬 교훈으로 삼게 한 것이었다.
그 다섯가지 중에서 마지막 것만은 원광법사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절대 살생을 금하고 있는데 원광법사는 여기서 살생은 하되 가려서 하라고 했으니

불교의 가르침과는 어긋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살생을 안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어쩔 수 없이 살생을 해야 할 때에는 가려서 하라는 것이다.

두 청년은 다섯 가지 중에서 네 가지는 잘 알 수가 있었으나, 다섯번째 것은 처음 듣는 말이므로 다시 물었다.

「다른 것은 모두 이미 들었읍니다만,

   마지막에 말씀하신 산 목숨을 죽이되 가리어서 하라는 뜻은 이해할 수가 없읍니다」

이에 원광법사는 살생을 가리는 데는 때를 가리는 것과 대상을 가리는 것의 두 가지가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6재일(六齊日)과 봄 여름에는 생물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시기를 가리는 것이요,

   집에서 기르던 말 · 소 · 닭 · 개 등을 죽이지 않고

   조그만 목숨 즉 고기 한 점도 되지 않는 것은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대상을 가리는 것이다.

   또 죽일 수 있는 것도 쓸 만큼만 죽이고 함부로 많이 죽이지 말라는 것이니,

   이것이 곧 세속에서 지켜야 할 올바른 길인 것이다」

「지금부터 이 오계를 받들어 실천하며 어김이 없도록 하겠읍니다」

두 청년은 기쁜 마음으로 공손하게 절을 하고 물러갔다.

그 뒤 두 사람은 전쟁에 나가서 모두 나라에 큰 공을 세웠고,

이 세속오계는 신라 화랑도의 기본 사상이 되었다.

이렇게 온 백성의 공경을 한 몸에 받았던 원광법사는

640년 황룡사에서 평안히 앉아서 세상을 마치니 세수 99세였다.

입적하실 때에 하늘에 음악소리가 가득하고 이상한 향기가 절 안에 가득차니,

모든 스님들과 신도들은 슬퍼하면서도 경사롭게 여기고 그것이 스님의 영감(靈感)임을 알았다.

나라에서는 우의(羽儀: 의식에 장식으로 쓰던 새의 깃)와 장구(葬具)를 내려 임금의 장례와 같이 모셨다. 


17) 소가 된 스님

 한산과 습득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으나, 당나라 정관(貞觀: 당 태종의 연호 627~649)년 간에 천태산 (天台山) 국청사(國淸寺)에 살았던 전설적인 인물들이다.

당시 국청사에는 풍간선사라는 도인도 계셨는데, 세상에서는 국청사에 숨어 산 세분의 성자라는 뜻에서 이들 세분을 국청삼은(團淸三隱)이라고 불렀다.

 이 분들을 성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세분이 모두 불보살(佛菩薩)의 화현이기 때문이다. 즉 풍간스님은 아미타불의 후신이요, 한산은 문수보살, 습득은 보현보살의 화현이라 한다. 
  이 세 분이 불보살의 화현이라고는 하지만,

이 분들과 같이 살던 사람들은 이들의 기이한 언행을 이해하지 못해 멸시, 천대하기 일쑤였었다.
 한산이란 이름은 국청사에서 좀 떨어진 한암(寒嚴)이란 굴속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늘 다 떨어진 옷에 커다란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때가되면 국청사에 와서 대중들이 먹다 남은 밥이나 나물따위를 얻어먹곤 했다. 가끔씩 회랑을 천천히 거닐기도 하고, 어떤 때는 소리를 지르거나 하늘을 쳐다보며 욕을 하곤 해서 절에 있는 스님들이 작대기를 들고 쫓으면 손벽을 치고 큰소리로 웃으며 가버리기도 했다.
 습득은 풍간스님이 길을 가다가 강보에 쌓여 울고 있는 것을 주워다 길렀다고 해서 그 이름을 습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부엌에서 그릇을 씻거나 불을 때주는 일을 했는데 설거지를 하고 난 뒤 남은 밥이나 음식 찌꺼기를 모아 두었다가 한산이 오면 내주곤 했다.

 한번은 주지스님이 출타했다가 돌아오다가 산아래 목장을 지나는데 한산과 습득이 소떼와 더불어 수작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먼저 한산이 소떼를 향하여

 「이 도반들아 소생활 맛이 어떤가? 시주밥을 먹고 놀더니 기어코 이 모양이 되었구나」 하더니 「오늘은 여러 도반들과 함께 무상법문을 나눌까해서 왔으니 내가 호명하는 대로 이쪽으로 나오라.  첫번째로 동화사 경진율사」하고 호명하니

검은 소 한마리가 ‘음매-에’ 하고 한산과 습득의 앞으로 나오더니 앞발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는 한산이 지적한 장소로 가는 것이었다.

「다음 천관사 형지법사」

이번에는 누런소가 또 ‘음매-에’ 하고 대답하더니 절을 하고는 첫번째 소가 간 곳으로 걸어가는게 아닌가 .

이렇게 하기를 30여회. 백여마리의 소떼중에 30마리는 스님들의 후신이다.

말하자면 시주밥 먹고 공부 않은 과보호 빚을 갚기 위해 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주지스님이 모골이 송연하여 쫓기듯 절로 올라가며 혼자 중얼거렸다.

「한산과 습득이 미치광이인줄 알았더니 성인의 화신이 분명하다」

 일찌기 여구륜(閒丘亂)이라는 벼슬아치가 이 고을의 자사로 부임했는데 병이 들어 앓게 되었다. 그런데 이 병이 무슨 병인지 좋은 약, 용한 의원이 모두 소용없는 이른바 백약이 무효였다.

이를 안 풍간스님이 찾아가 뵙기를 청하자, 여구륜은 자기의 병세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는 풍간스님이 깨끗한 그릇에 물을 받아 주문을 외면서 그에게 뿌리자 언제 아팠더냐 싶게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앉는 것이었다. 자사가 크게 사례하고 설법해 주기를 청하자 풍간스님은 굳이 사양하며

「나 보다는 문수, 보현께 물어 보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두 보살께서는 어디에 계시온지 ?」

「국청사에서 불 때 주고 그릇 씻는 이들이 그들입니다」라고 거듭 묻는 말에 대답하고는 유유히 사라져 가 버렸다.
이에 자사가 예물을 갖춰 국청사로 한산과 습득을 찾아 갔다. 마침 한산과 습득은 화로를 끼고 앉아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 가까이 간 자사가 절을 올리자 우턱대고 꾸짖는 것이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본 스님이 깜짝 놀라며

「대관(大官)께서 어찌 미치광이들에게 절을 하십니까?」

하고 말하자 한산이 자사의 손을 잡고 웃으며

「풍간이 실없는 소리를 지껄였군. 풍간이 아미타불인줄 모르고 우릴 찾으면 뭘하나?」라는 말을 남기고 문을 나선 뒤에는 다시 절에 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여구륜이 못내 아쉬워 옷과 약등의 예물을 갖추어 한암굴로 다시 찾아 갔다.

예배를 올리고 말씀을 기다리는데 「도적놈아! 도적놈아!」라는 말을 남기고

한산과 습득이 굴속으로 들어가자 돌문이 저절로 닫히면서,

「너희들에게 이르노니, 각각 노력하라」라는 말이 들리고는 돌문은 완전히 닫혀져 버렸다.
여구륜은 성인을 친견하고도 더 법문을 듣지 못한 것을 섭섭히 여기며, 숲속의 나뭇잎이나 석벽, 혹은 촌락의 벽등에 써놓은 세분의 시 (詩) 약 300수를 모아 책을 엮었다.

이 시집을 삼은집(三集)이라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도 「한산시」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전해오고 있다.

                                                                                                       (해인사 약수암 벽화) 

18) 혜능방아

혜능스님께서는 당 태종(太宗) 정관 12년 중국 최남부 지방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인 노씨인데 3세때 아버지를 잃고 소년시절부터 나무 장사를 하여 늙은 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했다.

교육은 별로 받지 못했지만 그 마음은 진실하였다.

어느 날 시장으로 나무를 팔러 가다가 탁발승의 독경하는 소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듣던 중 「응당히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應無所住而生其心)」라는 구절에 홀연히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었다.

독경한 스님에게 무슨 경이냐고 물으니 금강경(金剛經)이라하여 젊은이는 금강경 배우기를 간청하며 자기가 조금 전 듣고 느낀 바의 심경을 이야기 하니,

탁발승은 황매산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를 찾아가라고 소개해 주었다. 
 젊은이의 발심을 기특하게 생각한 탁발승은 금 열냥을 주면서 노모의 옷과 양식에 충당하여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젊은이는 어머니를 편히 모신 뒤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를 찾아가 뵈옵고 예배하니

 「네가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구하러 왔는가」라고 묻자

영남 신주에서 오직 깨달음의 법을 구하러 왔다 하니

영남인은 오랑캐인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는가 하였다. 이에 젊은이는

「사람은 남쪽 북쪽이 있지만 불성(佛性)에야 어찌 남북이 있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홍인대사는 이 몇마디 말로 비범한 큰그릇인 줄 알았지만, 다른 학인들의 눈치를 염려하여 큰 소리로 꾸짖듯 방앗간에 가서 일이나 하라고 몰아 내었다.
8개월이 지난 어느 날 홍인대사는 방앗간을 둘러보시게 되었다.
힘이 부족하여 돌을 등에 지고 열심히 방아를 찧는 노행자를 보시고 소견이 쓸만 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길

「혹 나쁜 사람이 너를 해칠까 염려하여 더 말하지 않은 것인데 네가 그 뜻을 알았느냐?」 라는 질문에

「예 저도 스님의 뜻을 짐작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어느 날  홍인대사(는 문하대중을 모아 놓고 일대의 놀라운 포고를 했다.

「대중은 들으라. 세인(世人)들의 생사가 큰 일인데 너희들은 복이나 구하고 있지,

   태어나고 죽는 괴로움을 벗어나는 진리는 구하지 않는구나.

   너희들은 본심의 지혜로운 마음을 게송으로 표현하여 나에게 가져 오라.

   만일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대에게 초조 달마대사 이래의 가사와 발우,

   그리고 법(진리)을 전하여 육대조사를 삼겠노라」 하였다.


그 당시 대중들 사이에서 오조의 법을 이어받아 육조가 될 자라고 지목을 받고 있던 신수대사(神秀大師)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대중들이 다니는 복도 벽 위에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붙였다.

 

    <身是菩提樹      육체는 지혜의 나무

      心如明鏡臺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

      時時動拂拭      항상 부지런히 털고 닦아

      勿使惹塵埃      티끌 먼지 묻지 않게 하라. >


오조 홍인대사는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게송임을 아셨다.

그러나 대중에게는 이 게송을 따라 수행하라고 했다. 노행자는 여전히 방아만 찧다가 어느 사마승이 외우는 신수대사의 게송올 듣고 아직 깨달음의 진의(眞意)는 증득하지 못했음을 평가하고 그날 밤 글을 잘 모르는 노행자는 다른 동자에게 부탁하여 자기가 부르는 게송을 신수의 게송 옆에 써 달라고 했다.

 

   < 菩提本無樹     지혜는 본래 나무가 없고

      明鏡亦非臺     밝은 거울 또한 대가 없노라

      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何處塵擬埃     어느 곳에 티끌이 일어나리. >


노행자의 게송을 본 대중은 놀라며 의아해 하였다. 그리고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육신 보살을 알아보지 못했다」라고 수군거렸다.
조사께서는 노행자의 게송을 보시고 다음날 방앗간에 가셔서 허리에 돌을 달고 방아를 찧는 노행자에게

「쌀을 얼마나 찧었느냐?」고 물으시니 이에 노행자는

「쌀은 찧은지 오래되었사오나 키질을 아직 못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주장자로 방아를 3번 내려치고 돌아 가셨다. 그 뜻을 알고 삼경에 찾아가니

「네가 이제 제6대조가 되었다. 잘 두호하고 지키어 널리 중생을 제도하라」는 부촉을 하셨다.
노행자는 무명의 나무장사로서 출가한 지 8개월만에  초조 달마대사의 정법상 승인의 의발과 법을 오조 홍인대사에게 전수받아 육조 혜능대사가 되었다.


19) 부모은중경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왕사성에 있는 기원정사에서 대비구 3만 8천인과 그 밖에 많은 보살 마하살들과 함께 계셨다.

그 때에 세존께서 대중을 거느리시고 남방으로 나아가시다가 뼈 한무더기를 보시더니

오체를 땅에 붙이시어 그 마른 뼈에 정중히 예배하셨다.

이를 본 아난과 대중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바로 삼계의 큰 스승이시며 사생(四生)의 어버이시라

  여러 사람들이 귀의하고 공경하옵거늘 어찌하여 이름 모를 뼈 무더기에 친히 절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르셨다.

「네가 비록 나의 상족제자(上足弟子)이며 출가한지도 오래 되었지만 아는 것은 넓지 못하구나.  

  이 한 무더기의 마른 뼈가 어쩌면 내 전생(全生)의 조상이거나 여러 대(代)에 걸친 부모일 것이므로 내가 지금 예배한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이르셨다.

「네가 이 한 무더기 마른 뼈를 둘로 나누어 보아라.

  만일 남자의 뼈라면 희고 무거울 것이며, 여인의 뼈라면 검고 가벼우리라」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석존이시여 남자는 세상에 있을 때 큰 옷을 입고 띠를 두루고 신을 신고 모자를 쓰고 다니기에 남자인줄 아오며, 여인은 생전에 갖은 방법으로 치장하고 다니므로 여인인줄 알게 되오니다. 그러나 죽은 후의 백골은 남녀가 마찬가지 이옵거늘 어떻게 그것을 구별해서 알아보라고 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이르셨다.

「만일 남자라면 세상에 있을 때에 마소를 부리기도 하고 사람을 부려 크게 고생함이 없이 지내기도 할 뿐 아니라, 때때로 가람에서 경을 외우고 법문을 들을 까닭으로 남자의 벼는 희고 무거울 것이요. 여인은 이 세상에 있을 때에 자녀를 낳고, 기름(育)에 있어 한번 아이를 낳을 때에 서말이나 되는 피를 흘리며 아기는 어머니의 젖을 여덟 섬 너말이나 먹느니라. 그런 까닭에 뼈가 검고 가벼우니라」

아난이 이 말씀을 듣고 가슴이 터질 듯 하여 눈물을 흘려 슬피 울면서 부처님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머님의 은덕을 어떻게 하면 보답할 수 있아오리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내가 너를 위하여 분별해 설하리라.

  무릇 사람이 이 세상에 있게 됨은 부모를 인연하기 때문이니라.

  아버지가 아니면 나지 못하고, 어머니가 아니면 자라지 못하나니.

  어머니 몸속에 의지하여 달이 차면 이 땅에 태어나게 되느니라.

  이로부터 어머니는 여덟섬 너말의 젖을 자식에거 먹이니

  어머니의 은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느니라.

  어머니가 아이를 가지면 열달 동안의 신고(辛苦)는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다」고

<부모은중경>에 설하고 있으며 어머니의 크나 큰 은혜를 크게 열 가지로 나누어 설하고 있다.
  첫째, 아이를 잉태하여 열 달 동안 온 정성을 기울여 지키고 보호해 준 은혜,
  둘째, 해산할 때 괴로움을 겪는 은혜,
  셋째, 자식을 낳고 모든 근심을 잊는 은혜,
  넷째, 입에 쓴 음식은 삼키고 단 음식은 아기에게 먹여주는 은혜,
  다섯째, 마른자리 골라 아이를 눕히고 젖은 자리에는 자신이 눕는 은혜,
  여섯째, 때 맞추어 젖을 먹여 길러준 은혜,
  일곱째, 똥 오줌 가려 더러운 것을 씻어주는 은혜,
  여덟째, 자식이 먼 길을 떠나면 생각하고 염려하는 은혜,
  아홉째, 자식을 위해는 나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은혜,
  열째, 늙어 죽을 때까지 자식을 사랑해 주는 은혜
고래(古來)로 동양에서는 백행(百行)의 근본을 효(孝)에 두었고

효의 사상은 인륜(人倫)의 근본이었다.

부처님께서는 태어나신지 7일만에 모친을 잃은 까닭에

부친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지극한 애정을 부모은중경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20) 원효

 신라불교의 대성자로서 추앙되고 있는 원효스님은 속성이 설이시고,

압량군의 북쪽, 율곡 사라수 아래서 출생하시어 29세에 황룡사로 출가하셨다.

그 때 당나라에서는 경 · 율 · 론에 통달하여 삼장법사가 된 현장스님이 29세에 큰 뜻을 세워

17년 만에 서역(인도)의 고승 대덕들을 찾아 불법과 학문을 연구하고 다시 당나라로 돌아온 해가 645년이었다.

나란타사의 계현스님에게 학습한 〈유가론〉〈인명론〉〈구사론〉 등으로 불법을 펴 장안과 많은 중생들을 교화하고 있다는 소식이 세상에 널리 펴졌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동방의 여러 나라 스님들은 현장스님에게 불법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를 찾아가게 되었다.

신라의 원효 스님도 육로로 고구려 변경을 넘어서 당 유학 길에 나서다가 국경을 지키는 병졸들에게 잡혀 많은 괴로움을 겪고, 다시 신라로 돌아와 의상스님과 동행하여 백제 땅을 거쳐 바다로 요동까지 가서 무사히 닿아 길을 계속했다.

어느 날 해가 저문 뒤 원효 스님과 의상스님은 인가가 끊긴 산중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다.

두 스님은 바람을 피하여 무덤 사이에서 잠을 청했다. 한밤중 원효 스님은 심한 갈증을 느껴 눈을 뜨게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둠 속에서 바가지 같은 것에 물이 고여 있기에 그 물 마시니, 그 물맛은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난 스님은 간밤에 자신의 갈증을 풀어준 그릇을 찾으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릇이라고 여겼던 것은 인간의 해골이고, 그 물은 빗물이 고여 썩었던 것이다 !

스님은 불현듯 자신의 배를 뒤틀리고, 오물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때 스님은 문득 깨달았다.

간밤에 마셨던 물이 썩은 빗물인줄 모르고 마실 때에는 그렇게 달콤하고 감미롭던 것이 아침에 일어나 해골물인줄 알고 나서는 온갖 추한 생각과 구역질을 일으키지 않는가.

<마음이 일어나면 여러 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도 없는 것,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삼계가 모두 마음 때문이라. 어찌 나를 속였으리요.

마음 밖에 법이 따로 없으니 어찌 따로 진리를 구하랴

心生則 種種法生/心滅則 觸 不二/三界 唯心/萬法 唯識/心外 無法/胡用 別求)>

 이런 게송으로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읊었다.
밤 새 원효 스님 곁에서 누워 자고 있던 의상 스님은 일어나 당나라까지 먼 길을 다시 떠날 준비를 하다 아무런 채비를 하지 않는 스님에게

“원효 스님 왜 길 떠날 생각을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다.

원효 스님은 대답대신 의상 스님에게

“우리가 당나라 유학 길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하기 위한 것입니까?”

라고 오히려 반문했다. 의상 스님은 얼른

 “그야 도를 구하기 위함이지요”라고 대답하자

 “그럼 이미 도를 구하였다면 더 이상 갈 필요가 없겠지요”하며

길을 거슬러 다시 신라로 돌아와 그 곳에서 깨달은 것을 중생들을 위해 설법하며 여러 곳을 돌아 다녔다.

스님의 높은 도덕은 온 신라를 덮고 널리 알려졌다. 하루는 스님께서 장안거리 (경주)를 다니며 “자루없는 도끼를 빌려주면 하늘 바칠 기둥을 찍으련다”라고 외치고 다녔다.

이를 들은 무열왕은

“이는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겠다는 뜻이니,

  나라에 큰 성현이 난다면 그보다 큰 이로움이 없으리라”하는 생각으로

신하를 보내 과부공주가 있는 요석궁으로 모시도록 했다.
스님을 문천 다리에서 만나거든 일부러 물에 빠뜨리자,

옷을 젖게된 스님은 그 옷을 말리느라고 할 수 없이 요석궁에서 유숙케 되었다.
그러한 인연으로 공주가 아들을 낳으니 그가 신라의 이두를 집대성 한 대학자인 설총이다.


스님은 그후 스스로 저자거리에 나와 속복을 입고 소성거사(小姓居士)라 하며 걸식을 마다 않고 광대들이 굴리는 큰 박을 무애(無)라고 이름지어 춤추고 노래하며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포교하셨다.
스님은 세수 70으로 열반하실 때까지 여러 가지 기행과 설법과 방대한 저술 활동으로 초인적 행을 보이셨다.
중국에 널리 알려진 금강삼매경론 3권은 경주 황룡사에서 대중들에게 직접 강론하신 것이다.
저서 1000여권 중 현재까지 전하여 오는 것은 240여권, 대승 소승의 삼장을 통털어 찬술한 점에 있어서는 일찌기 없었던 일이며, 그 중에 원효 스님의 중심 사상이 담긴 「십문화쟁론」은 오래된 법보로서 대승기신론과 더불어 불교인들이 공부해야 할 명저이다.
스님이 입적하신 해는 신문왕 6년 혈사에서 였고 지월록에 스님의 많은 일화가 적혀있고 고려시대 숙종때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받으셨다. 

 

21) 의상-해인도

 의상스님은 신라 제26대 진평왕 42년(620년)에 왕실 김씨 한신공의 아들로 계림부(鷄林府)에서 출생하셨다. 출가전 스님의 이름을 일지(日芝)라 하는데, 그것은 모친인 선나부인이 태몽에

「하늘에 해가 솟아오르고, 땅에는 쟁반만한 붉은 지초(芝草)가 빛나는 것을 보고」 일지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스님은 어려서 부터 총명하였으며, 또한 구도자적인 천성이 역연했다.

그리하여 그의 나이 19세 되던 12월 아버지께 

저는 이 세속에서 삶의 뜻을 잃고, 불법가운데 새 길을 찾고져 하오니 막지마소서」라고 말씀드려 출가를 허락 받았다.
황복사 안함법사를 찾아가서 예배하니

「장하다! 네가 능히 세간의 그물을 뚫고 나옴이여 !」라고 찬탄했다.
황룡사 금강계단에서 수계한 후, 백제땅으로 구도의 길을 떠나 보덕화상(普德和尙)에게 열반경과 유마경 등을 수학하였다. 그리고 다시 경전을 보다 깊이 중국에 가서 연구하고자 그의 나이 26세때 원효스님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가는 도중 원효스님은 해골물을 마신 기연으로 홀연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뜻을 요달하고 신라로 귀환하셨고, 의상스님은 이에 동요하지 않고 굳굳하게 구도의 길을 재촉하였다.

당나라 사신의 배에 의탁하여 양주(楊州)에 이르른 뒤 종남산 지상사, 지엄 화상의 문하에 이르르니 그의 나이 27세였다.

화엄종의 대조사이신 지엄이 의상의 도착전 날 꿈을 꾸니 신라로부터 한 큰 나뭇가지가 중국까지 뻗쳐, 그 가지 위에 봉황이 마니보주를 물고 있는데 빛이 널리 비치고 있었다. 꿈을 깬 뒤 지엄은 의상을 이렇게 맞이하였다.

「어젯밤 나의 꿈은 그대가 올 징조였소」

지엄은 의상이 자기 제자 됨을 허락하시고 화엄의 깊은 뜻을 강설하시니

스승과 제자는 서로 깊은 신뢰와 보살핌으로 공부하여 몇 년이 지났다.
하루는 지엄화상이 의상을 보고

「그대가 지상사에 온지 벌써 4년, 화엄경을 읽어 그 대의를 대강 짐작했을 것이다.

  <화염경>은 한 글귀 한 말씀은 부처님의 부사의(不思議)한 해탈경계를 설한 것이며

  여래의 구경일승의 법문이다.」
이와 같은 지엄화상의 말씀을 듣고 공부를 계속하여 8년, 더욱 깊은 경지에 나아갔다.
그리고 다시 화장세계관(華藏世界觀)이며 볍계관(法界觀) 등의 관(觀)을 닦아 부사의한 해탈의 경계와 만법의 연기 실상을 궤뚫어 보았다.
이러한 관법을 통하여 불부사의(佛不思議) 경계를 사무쳐 본 뒤로는 「화엄경」에 대한 의심이 다 풀려지고 중중 무진한 법계연기(法界緣起)의 도리가 거울속 그림자 모양 소연이 들어났다.

이렇게 「화염삼매」를 성취한 뒤 화엄경의 내용에 대한 확신이 생기어 화엄경의 대의를 한 그림으로 그리니 이것이 화염일승법계도(華嚴乘法界圖)이다.

이 법계도는 법(法)과 불(佛)이 둘이 없고 부처와 중생, 마음이 다름없는 법계연기를 하나의 간단한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의상스님께서 이 법계도를 설명하는 법계송을 지어 붙이니 법성게라도 한다. 그 게송은

  <法性圓廳無二相     법의 성품 원융하여 두 모습 본래 없고

    諸法不動本來寂     모든 법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네
    無名無相總一切     이름 없고 모습 없어 온갖 것 끊겼으니 
    證智所知非餘境.    깨친 지혜 알 바요 다른 경계 아니로다.>

     (생략) 

의상은 이 법계송을 지은 뒤 이것이 「화엄경」의 진리에 부합한가 확인하고자 설에 불을 지르고 그 불옆에 서서 발원하였다.

「의상이 이제 화엄의 깊은 뜻을 이 30구 210자의 게송으로 표현하였사오니 이것이 노사나 부처님과 문수 · 보현 3대 성존의 뜻에 합하오면, 이 글이 타는 불속에 들어가도 타지 않을 것입니다.」의상이 법계송을 불에 넣어도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의상은 이 법성게를 지엄화상에게 내보이니 지염화상은

「참으로 장하고 장하다 ! 30구 게송속에 화염경 큰 뜻이 다 담기었다.

   이 게송만 외워도 화엄경을 읽은 공덕과 같을 것이니 널리 유전토록 하라.」

이와같이 화엄종의 제2조이신 지엄화상은 의상법사가 깨달으신 바를 증명하시니 스승과 제자의 할 일이 이에서 다하였다.

스님께서는 당나라의 신라 침입설을 듣고 17년만에 급히 신라로 귀국하여 신라 땅에 화엄의 거룩한 진리를 설하시니, 후세에 일연선사는 다음과 같이 찬하셨다.


    가시나무 헤치고 바다 건너서

    티끌먼지 무릅쓰고 도를 찾았네 

    종남산 지상사의 문에 들어가 

    지엄화상 가르침에 도를 깨닫고 

    화엄의 아름다운 진리의 꽃을

    고국땅에 돌아와 심으셨으니

    종남산과 태백산이 같은 봄이네. 


22) 환적대사

환적(幻寂)스님께서는 평시에 호랑이를 타고 가야산 숲속을 누비셨다.

하루는 밖에 볼일이 있어서 나가시면서, 시자인 동자와 호랑이에게,

「동자야, 산문 밖에 볼 일이 좀 있어 내려갔다 올터이니 너희들 서로 사이좋게 놀아라」라고 일르셨다.

스님께서는 곧 떠나셨다.

동자와 호랑이는 스님께서 출타하시자 마치 제세상이라도 만난 듯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신나게 어울려 놀았다. 어느덧 해가 서녁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둘은 배가 고픈 것을 느꼈다. 너무 정신없이 놀다보니 밥 때도 놓친 것이다.

스님께서는 아직 아니 오시고 저희들끼리 밥을 지어 먹기로 하고 동자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밥도 짓고 국도 끓이고 반찬을 만든다, 뭣을 한다. 한참 부산을 떨다보니, 그만 동자는 자기 손가락 중에 하나를 칼에 베어 버렸다.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굉장히 아팠지만 그 경황중에도 동자는 친구인 호랑이를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배가 고픈데 저놈은 몸집도 크니 오죽 배가 고플까, 하고 자기 손가락의 피가 그만 헛되이 흐르는 것이 아까와 친구인 호랑이의 입에 떨구워줬다.

호랑이에겐 참으로 감로수가 아닐 수 없었다.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이렇게 사람의 피가 맛있는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조금 마시고 있다보니 배가 고픈데다가 호랑이는 그만 자기 본래의 동물적 습성이 발동하는 것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서로가 친구인 것을 까맣게 잊은 것이다. 그 자리에서 동자를 몽땅 먹어 치워 버렸다.

정신없이 먹다보니 어느새 바닥이 나고, 그야말로 누가 올까 무서웠던 것이다.

실로 눈깜짝 할 사이었다. 다 먹어치우고 나서 꺼억, 어참 요렇게 맛있는 건 첨이다, 하고 트림을 하며 잇빨을 쑤시다보니, 어허, 나 혼자만 먹다니, 동자는 어디 갔는가, 하고 두리번거리는 거와 동시에 아차, 그제서야 호랑이는 제정신을 차렸다.

아이고 이거 내가 동자를 먹어버렸잖아. 크, 큰일났구나.

당장 간이 콩알만해지고 스님의 불호령 같은 얼굴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으나, 이마 때는 늦은 것이었다. 호랑이는 먹은 것이 당장 소화가 안되고, 사지에 힘이 쭉 빠지고, 어깨가 축 늘어지는 등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렇다고 달아날 수도 없었다. 어느 산촌 어느 골짜기 굴속에 꼬옥꼭 숨어도 스님은 단번에 찾아낼 것이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만큼 호랑이는 스님을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별이 총총한 밤에 스님께서 돌아오셨다. 스님께선 이내 모든 사실을 알아 차리셨다.

즉시에 스님의 주장자가 불호령과 함께 번쩍였다. 뒷다리 하나가 그대로 부러져 나갔다.
아주 생명을 끊어버릴까 하다가, 에라 이왕지사 한 목숨은 죽은 것이고, 네놈도 중생인 것은 마찬가지이니, 그대로 병신인 채로 살되, 다시는 내 눈 앞에 얼쩡거리지 말라 하고, 놈을 가야산 밖으로 쫓아 버렸다. 그뒤부터 가야산에서는 호랑이의 씨가 말랐으며 자연 호식(虎食)이란 말도 없어지게 되었다 한다.

스님은 조선시대 사람으로 1603년에 태어나셔서 11세에 속리산 복천암에서 출가하셨다.

1690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입적하시니 세수 88이었다.

 

23) 달마 / 혜가

혜가스님은 중국 낙양 무뢰 사람으로 어릴 때의 이름은 신광(神光)이다.

신광은 출가 전부터 많은 책을 두루 읽어 학덕이 뛰어난데다,

출가 후에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수행에 전념했고 32세부터는 향산에 돌아와 8년 동안 좌선했다. 그리하여 자주 오묘한 이치를 이야기 하였으나, 마음의 편안함을 얻지는 못하였다.

신광이 하루는 탄식해 말하기를

『유교 · 도교의 가르침은 법도가 여리고 깊은 이치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근자에 멀리서 오신 덕 높은 스님이 소림굴에 계시다 하니,

  그 분을 찾아가 물으면 의심한 바가 풀려 깊은 진리를 얻으리라」하고 달마대사를 찾아갔다.
그 때 인도에서 건너온 달마대사는 소림굴에서 9년 동안 벽을 향하고 앉아서 전법할 시대가 도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광은 자기의 고민을 해결하겠다는 일념에서 조석으로 달마대사를 친견하러 나아갔으나,

스님은 항상 벽을 향하고 계셔서 가르침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신광은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고 계속 토굴 앞에 머물면서 스스로 자책했다. 

 『옛 사람은 도를 구하기 위하여 혈맥을 잘라 굶주려 죽어가는 이를 구하였고,

   낭떠러지에서 몸을 날려 굶주린 호랑이를 살려 주었다.

   옛날에도 오히려 이같이 하였거늘 나는 도대체 어찌된 것인가?』
그날 밤 하늘에서는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신광은 날이 밝아 쌓인 눈이 허리를 넘을 때까지 돌장승처럼 서 있었다.

달마대사는 그때서야 눈 속에 서있는 신광을 보고 저으기 놀라고 가엾은 생각이 들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네가 눈 속에 오래 서서 뭘 구하려고 하느냐? 』

달마대사의 물음에 신광은 비통하게 눈물을 흘리면서 간청했다.

『원컨데 스님께서는 감로문을 열어 널리 중생을 제도하소서.』

이에 달마대사는 신광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모든 부처님의 위 없는 도는 오랜 겁 동안에 정진하여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능히 참아 이룬 것인데,

  어찌 적은 덕과 지혜로서 그리고 경박하고 오만한 마음으로 참다운 법을 구하려고 하는가?

  한갓 수고로움만 더하여 괴로울 뿐이다.』

이 말을 들은 신광은 훌연히 허리에 차고 있던 섬뜩한 패도(칼)를 들어 자기의 오른 팔을 잘랐다. 이 때 떨어진 팔을 때가 아니게 피어난 파초 한 잎이 받아 들었다.

신광의 이같이 열렬한 구도의 마음을 보고 그가 불도를 수행할 만한 큰 그릇임을 안 달마대사는

『모든 부처님이 최초에 도를 구할 때에도 법을 위하여 몸을 잊었는데,

  네가 지금 팔을 끊어 내 앞에 내놓았으니 구함이 있으리라』
하신 후 곧 입문할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혜가(慧可)」라는 법명을 지어주고 제자로 삼았다.

그러자 혜가의 오른 팔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 붙였다.
혜가가 스님께 여쭈었다.

『모든 부처님의 법인(法印)을 가르쳐 주소서.』

스님이 대답했다.

『모든 부처님의 법인은 사람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다.』

혜가가 다시 물었다.

『제 마음이 심히 불안합니다. 스님께서 편안케 해 주십시오.』

이에 달마대사는 중대한 가르침을 제시하였다.

『불안한 마음을 가져 오너라. 너를 위해 편안케 해 주마.』

그로부터 혜가는 물도 긷고 나무도 하면서 앉거나 눕거나 말할 때나 움직일 때마다 자기의 마음을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혜가가 이렇듯 피나는 정진의 6년 만에 홀연히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는 마음이 본래 빈 것임을 깨달았다.

이렇게 뚜렷이 깨달았음을 보일 수 있게 되자 혜가는 달마대사와 다음과 같이 문답하였다.

『마음을 아무리 찾아도 끝내 찾을 수가 없었읍니다.』

『내 너를 위해 마음을 편안하게 한 것이 끝났다.』

이렇게 해서 혜가스님은 달마대사로부터 법을 부촉받아 중국 선종의 제2조가 되었다.

혜가스님은 552년 제자 승찬(僧璨)에게 법을 전하고 34년 동안 업도에 머물면서 설법하다가, 뒤에 관성현 광구사에서 〈열반경〉을 강하여 많은 사람들을 깨닫게 하시고 593년에 입적하시니 세수 107세였다. 

function showSideViewForScrapInfo(curObj, userid, planetUserid, targetNick) { var sideView = new SideView('nameContextMenu', curObj, userid, planetUserid, '\uC0AC\uC774\uD310 \uC0B0\uD0C0\uB85C\uC0AC', targetNick, '1C3cD', '', '\uC0AC\uC774\uD310\uC0B0\uD0C0\uB85C\uC0AC', "unknown"); sideView.hideRow("member"); sideView.hideRow("planet"); sideView.showLayer(); } function winPopup() { window.open('http://blog.daum.net/chefjhkim', 'DaumPlanet', 'width=936,height=672,resizable=yes,scrollbars=yes'); return; }

출처 :바람꽃과 솔나리 원문보기 글쓴이 : may
//

출처 : 사이판 산타로사
글쓴이 : 사이판 산타로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