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인사 벽화 海印寺 壁畵 ***
# 해인사 海印寺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伽倻面) 치인리
가야산 남서쪽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이다.
해인사 법당 벽에 그려진 벽화와 그에 대한 해설입니다.
1) 창건
중국 양무제 때 지공화상께서 임종에 동국답산기라는 책을 제자들에게 건네주면서
「내가 죽은 얼마 후에 신라에서 두 명승이 찾아와 법을 구할 터이니 이 책을 전하라」 유언하시고 열반하셨다.
그 뒤에 과연 신라에서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이 와서 법을 구하거늘
지공화상의 제자들이 반기며 스승의 유언을 말씀드리고 동국답산기를 전했다.
두 스님은 너무나 감격하여 지공화상의 탑묘(塔墓)에 찾아가
「사람에게는 고금(古今)이 있을지언정 진리에서는 멀고 가까움이 없다.」
하는 가르침을 생각하며 일주일을 밤낮으로 기도하며 법문을 청하였더니
탑속에서 지공화상이 모습을 나타내어 두 스님의 구도심을 찬탄하고
의발(衣鉢)을 전해주면서 이르기를
「너희 나라 우두산(지금의 가야산) 서쪽에 불법이 크게 일어날 곳이 있으니
그곳에 대가람을 창건하라」 하시고는 다시 탑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순응, 이정 두 스님은 탑묘를 향하여 다시 한번 예배드리고 고국 신라로 돌아왔다.
두 스님은 바로 우두산을 찾아 나섰다.
맑은 물이 흐르고 산세가 빼어난 곳에 자리를 깔고 풀밭에 앉아 선정(禪定)에 들었더니
문득 이마에서 광명이 발하여 하늘로 뻗쳐 올랐다.
그때 나라에서는 제40대 애장왕의 왕후께서 몹쓸 병을 얻어 백방으로 약을 써 봐도 효험이 없자
신하들을 널리 보내어 도승을 구하게 되었다.
한 신하가 우두산 근처를 지나다가 하늘에 뻗쳐 오르는 신령한 빛을 찾아 숲길을 헤쳐가니
선정삼매 속에서 방광(放光)하는 두 스님을 뵙고 예를 올린 후
여기까지 찾아오게 된 내력을 이야기하자 오색실을 내어주면서
실의 한 끝은 궁전 뜰 앞의 배나무 가지에 매고 한 끝은 병실의 문고리에 매어두라고 일러주었다.
신하가 돌아가서 왕에게 사실을 말하고서 두 스님이 시키는 대로 시행해 보았다.
그랬더니 궁전 뜰 앞의 배나무가 말라 죽으면서 왕후의 오랜 병이 완쾌되고 소생하였다.
애장왕과 왕후 그리고 여러 신하들이 크게 기뻐하고 또한 놀라와 하였다.
왕은 은혜를 크게 느끼고 친히 우두산에 오셔서
두 스님을 찾아 뵙고 그 자리에 대가람을 창건하니
〈신라 40대 애장왕 3년(802년) 임오(王午) 10월 16일〉 가야산 해인사의 시초이다
2) 대장경이운移運
팔만대장경 :
고려 고종 23년(1236) 몽고병의 침입을 국민의 단합된 힘과 부처님의 가호로 물리치기 위해
당시의 천도지(遷都地)인 강화도에 대장도감(大藏都監) 본사(本司)를 두고
진주, 남해에 분사(分司)를 두어 대장경판을 새기는데 전 국력을 쏟아
고종 38년(1251)까지 16년간에 걸쳐 완성하여 강화도에 판당(板堂)을 짓고 봉안하였다.
다시 강화읍 남쪽에 있는 선원사(禪源寺)에 옮겨 모셨던 팔만대장경판을
언제 어떠한 경위를 거쳐서 강화도에서 해인사까지 옮겨 모시게 되었을까?
이 문제는 4가지 정도의 사실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 가야산 해인사는 대장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각국사 의천이 주석(住錫)하던 인연깊은 곳이라는 사실과
둘째, 고려말과 이조초의 왜구의 극심한 노략질 앞에 강화도는 이미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사실
셋째, 해인사가 대장경판을 보관하는데 지리적 조건의 우수성과
가야산이 명산이어서 신령스럽게 믿어진 사실
넷째, 해인사는 교통이 불편한 심산유곡이어서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이 일치되어
조선 태조 7년(1398) 5월에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서 서울의 지천사(支天寺)로 임시로 옮겨 모셨다가 다시 해인사로 옮기게 되었다.
(요즈음 8톤 트럭 35대분이 훨씬 넘는) 대장경판을
사람의 힘만으로 강화도에서 해인사까지 옮기는 일은 온 국민이 힘을 기울였을 것이다.
운반행렬의 맨 앞에는 동자가 향로를 들고 길을 맑히면
많은 스님들이 독경을 하며 길을 인도하고
뒤로 소중하게 포장한 경판을 소달구지에도 싣고 지게에도 졌는가 하면 부녀자들은 머리에 이고
팔만대장경판의 정대(頂戴) 공덕과 부처님의 은혜를 되새기면서
서울에서 해인사까지 팔만대장경판의 운반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다.
(일설에는 서울에서 한강에 배를 띄워 대장경판을 싣고 해로(海路)를 통해
낙동강 줄기인 지금의 고령군 개진면 개포마을에 배를 대고 해인사까지 운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개포마을의 예전 이름이 경(經)을 풀었다는 의미에서 개경포(開經浦)라고 했다.)
이조 태조 7년(1398년) 5월에 시작된 경판의 대이동은
이듬해 정종 원년(1399년) 정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인사에 옮겨 모셔져,
700여 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습기나 좀이 생기지 않고 뒤틀리지도 않았는데,
사용한 목재는 강화도에 좋은 나무가 없어
남해지방의 거제도, 완도, 제주도 등지에서 많이 생산되는 자작나무 원목을 베어
바닷물에 3년간 담갔다가 꺼내어 판을 짜서 다시 소금물에 삶아서 그늘에 3년간 말린후
양면에 구양순(歐陽詢)의 해서체로 양각하고 방충을 위하여 옻칠을 하였다.
경판은 모두 81340판인데 양면에 새겨져 있어 162680면으로
한 면에 글자가 322자 씩, 글자 수만 해도 52382960자로 원고지로 치면 30만장쯤의 분량이 된다.
경판 1장당 평균 무게는 약 3.5kg이며, 길이는 67cm, 너비 23 cm, 두께 3cm로
사각이 뒤틀리지 않도록 각목(角木)으로 마구리를 달고 그 이음새는 동제(鋼製)로 장식하였다.
해인사에 봉안되어있는 팔만대장경판은 책으로 엮으면 6815권으로
하루 1권씩 읽는다고 해도 18년이상 걸리는 방대한 양이다.
온 국토가 몽고병에 짓밟히고 강화도에 피난한 상태에서
대장경판을 새기기 위해 원고를 수집하고 사본을 정리하면서 교정하고 조판하는 일도
짧은 시일에 이뤄질 수 없거니와
판목(板木)을 다듬고 경을 쓰고 글자를 새기는 이 모든 일이
16년의 세월에 이루어 졌다는 것은 불가사의라 할 수 있겠다.
또한 팔만대장경판을 새기는 불사에는 조정대신과 전국민의 일심 단합된 협조 아래
몇 백명의 명필과 수천명의 조각사가 동원되었으리라 상상하지만
경판의 글자가 오자(誤字)나 탈자(脫字)없이 정자로 쓰여지고
꼭 한 사람의 필적같이 분담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경탄하는 바이다.
지금까지 세계에 남아 있는 30여종의 대장경판 중에서도 고려대장경만큼 체제가 광범위하고 부수가 완비하며 교정이 엄밀한 것은 그 유를 찾아볼 수 없다.
세계적인 문화유산이요, 우리 조상들의 호국의 얼이 깃든 팔만대장경판은
나라의 보배(國寶)일 뿐만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법보(法寶)이다.
3) 태전/퇴지
당나라 중기 남양 등주 땅에 태어나 뛰어낸 문장으로
후세에 당, 송팔대가의 한사람으로 추앙 받은 한퇴지는 처음에는 불교를 매우 배척하여
자사(지방장판, 주지사) 벼슬에 올라 불법을 비방하는 글을 자주 상소하다가
왕(憲宗)의 미움을 받아 서울(장안)에서 8000리 떨어진 변방의 조주(漸州) 자사로 좌천되었다.
그때 조주땅에는 태전선사라는 고승이 축융봉에서 10년간 수도에만 전념하여
생불(生佛)로 추앙받고 있었다.
한퇴지는 문득 태전선사를 시험해서 불교를 다시 한번 깎아 내리고 싶은 생각에
그 고을에서 유명한 기생 홍련을 불러 계교를 일러 주었다.
만약 백일안에 태전선사를 파계시키면 후한 상을 내리겠거니와 실패하는 날에는 죽음을 각오할 것을 약속했다.
홍련은 자신의 미모나 경력으로 봐서도 자신이 만만했다.
다음 날 몸매를 더욱 아름답게 꾸미고 험한 산 길을 올라 해질녘에야 스님의 암자에 도착하였다.
태전선사를 찾아뵙고 인사를 드린 홍련은
「오래전부터 큰스님의 훌륭한 덕을 흠모해 오던 차
이번에 큰스님 시중도 들면서 백일기도를 올리고 싶어 먼 길을 마다 않고 왔습니다.
자비로 거두어 주십시오.
만일 거절하신다면 소녀는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고 말겠습니다」
이렇게 깊은 산골 외딴 암자에서 머물게 된 홍련은 일이 성사된 것처럼 마음 속으로 기뻐하였다.
다음 날부터 건성으로 기도를 하고, 태전선사의 시중을 들면서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지만
한 달이 넘어가도 선사는 좌선에만 전념한 채 홍련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마음이 조급해진 홍련은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선사를 무너뜨리려 했지만 요지부동.
마침내 약속한 백일이 내일로 다가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홍련은
태전선사의 고매한 인품에 감동되어 자신의 행동이 경망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자사 한퇴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큰 화를 당할 일이 걱정이 되어
약속한 백일이 되는 날 아침 태전선사 앞에 나아가 눈물을 흘리며
「 큰스님 ! 어리석은 소녀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조주자사 한대감의 명으로 스님을 파계시키고 오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사 저는 그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대감님과 약속한 기일이 백일 오늘 저는 내려가면 큰 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섧게 울기 시작했다.
흐느껴 우는 홍련을 자애로운 미소를 띄우며 지켜 보시더니
「너무 염려말고 이리 가까이 오너라 .
조주자사 한대감에게 벌을 받지 않도록 해 줄 것이다.」
하고는 붓에 먹을 묻혀 치맛자락을 펴게 하여 단숨에 글을 써 내려가니
「축융봉을 내려가지 않기를 10년 (十年不下鷲融峰).
색(色)을 보고 부질없음 알았기에 형체가 곧 물거품이라(觀色觀空郞色空)
어찌 법(法)의 한방울 물을(如何一滴曺浮水)
홍련(紅運)의 잎사귀 가운데 즐겁다 떨어뜨리겠는가(肯隨紅運一葉中).」
홍련의 치맛자락에 적힌 시를 본 한퇴지는 그 후 태전선사를 참방하여
선사로부터 「불교의 어느 경전을 보았습니까?」하는 물음에
「별로 뚜렷하게 본 경전은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 선사가 다그치기를
「그러면 그대가 이제까지 불법을 비방함은 무엇 때문인가?
누가 시켜서 하였는가, 아니면 자신이 스스로 하였는가?
만약 시킴을 받아서 하였다면 주인 시키는대로 따라하는 개(犬)와 다름없고
자신이 스스로 하였다면 이렇다 할 경전 읽음도 없이 어떻게 불법을 비방하는가?
알지 못하고 비방한 것이니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나 다름없다」 하는 꾸짖음과 함께
심오한 가르침을 받아 그 후 한퇴지는 지극한 불자가 되어 마음을 깨치고
불교를 비방하던 그 붓으로 불법을 드날리고 삼보를 찬탄하는 문장을 후세에 남겼다.
4) 목어
옛날 어느 절에 덕 높은 스님이 몇 사람의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어가고 제멋대로 생활하며,
계율에 어긋난 속된 생활을 일삼다가 그만 몹쓸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죽은 뒤에는 물고기 몸을 받아 태어났는데
등 위에 큰 나무가 솟아나서 여간 큰 고통이 아니었다.
하루는 스승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 가는데
등 위에 커다란 나무가 달린 고기가 뱃전에 머리를 들이대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스승이 깊은 선정(禪定)에 잠겨 고기의 전생을 살펴 보니,
이는 바로 병들어 일찍 죽은 자기 제자가 방탕한 생활의 과보(果報)로 고통받는 모습이었다.
이를 가엾게 생각하여 수륙천도제(水陸薦度際)를 베풀어 고기의 몸을 벗게 하여 주었다.
그날 밤 스승의 꿈에 제자가 나타나서 스승의 큰 은혜를 감사하며
참으로 발심하여 공부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등에 있는 나무를 베어 고기 모양을 만들어,
부처님 앞에 두고 쳐주기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고,
강이나 바다의 물고기들은 해탈할 좋은 인연이 되겠기에 ...
이렇게 해서 고기 모양의 목어(木魚)를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차츰 쓰기에 편리한 둥근 목탁(木鐸)으로 변형되어,
예불이나 독경을 할 때 혹은 때를 알릴 때에도 사용하며,
그 밖의 여러 행사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일설에는, 고기는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자므로
수행자도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해야 불도(佛道)를 성취한다는 뜻에서
고기 모양의 목어를 만들어 아침 저녁으로 치게 하였다고도 한다. )
* 우리나라의 큰 사찰에 가보면 종각이 있고,
이 종각에는 네 가지 법구(法具 : 사물四物)가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쇠로 된 범종(梵鐘)과
가죽으로 만든 커다란 법고(法鼓),
구름 모양의 운판(雲板),
그리고 고기 모양의 목어(木魚)가 그것이다.
* 범종은 고통 속에 살아가는 땅 밑 중생들의 해탈을 기원하며 울리고,
큰 북은 네 발 가진 짐승의 무리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치는 것이며,
목어는 물 속 생물들의 구원을 위해 두드리는 것이며,
운판은 날아다니는 날 짐승과 온갖 곤충들의 안락을 바라며 소리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물의 울림 속에는
「원컨대 이 소리 온누리에 두루 퍼져
고통 받는 온갖 중생 다 함께 해탈케 하여지이다」하는 염원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곧 뭇 중생의 행복과 해탈을 기원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우는 자비의 소리인 것이다.
5) 설산동자
한 수행자가 히말라야의 깊은 산속에서 홀로 고행하면서 많은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제석천(帝釋天: 범천과 함께 불교를 수호한다는 천신)은
그가 과연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굳은 믿음이 있는가를 시험하기 위하여,
나찰(羅利: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악한 귀신)로 변해 히말라야로 내려왔다.
나찰은 수행자가 사는 근처에 와서 과거 부처님이 말씀하신 시의 앞 귀절을 외웠다.
<꽃은 피면 곧 지고 사람은 나면 이윽고 죽는다.
이 허무한 법칙은 생명있는 것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로다.
(諸行無常 是生滅法) >
이 시를 듣고 무한한 기쁨을 느낀 수행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험상궂게 생긴 나찰 이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저처럼 추악하고 무서운 얼굴을 가진 것이 어떻게 그런 시를 읊을 수 있을까?
그것은 마치 불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을 바라는 격이리라.
그러나 혹 저것이 과거에 부처님을 뵙고 그 시를 들었는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하고 생각한 그는 나찰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과거 부처님이 말씀하신 시를 들었습니까?
나는 그것을 듣고 마치 망울진 연꽃이 피는 것처럼 마음이 열렸습니다”
“나는 그런 것은 모르오. 여러 날 굶어 허기가 져서 헛소리를 했을 뿐이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당신이 만일 그 시 전부를 내게 일러 주신다면,
나는 평생토록 당신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물질의 보시(布旅)는 없어질 때가 있지마는 법(法)의 보시는 다함이 없는 것이니까요”
“당신은 지혜는 있어도 자비심이 없소.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하고 남의 사정은 모르니 말이오.
나는 지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란 말이오”
“당신은 대체 어떤 음식을 먹습니까?”
“놀라지 마시오. 내가 먹는 것은 사람의 살덩이이고 마시는 것은 사람의 따뜻한 피이지요.
그러나 나는 그것을 구하지 못해 괴로와하고 있소”
“그렇다면 나머지 반의 시를 들려 주십시오.
그것을 다 듣는다면 내 몸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누가 당신의 말을 믿겠소? 겨우 시 한 귀절을 듣기 위해 소중한 목숨을 버리겠다니….”
“어떤 사람이 질그릇을 주고 보배로 된 그릇을 얻듯이,
나도 이 무상한 몸을 버려 금강석처럼 굳센 몸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시방삼세(十方三世)의 모든 부처님께서 그것을 증명해 주실 것입니다?
“좋소. 그러면 똑똑히 들으시오. 나머지 반을 말할테니”
하고 나찰은 시의 뒷 귀절을 외웠다.
<살고 죽는데 대한 생각을 없애버리면,
쓸데없는 욕심이나 두려움이 사라진다네
(生滅滅已 寂滅爲樂) >
그는 이 시를 듣고 더욱 환희심이 솟았다.
시의 뜻을 깊이 생각하고 음미한 뒤에, 벼랑과 나무와 돌에 새겼다.
그리고 나무 위에 올라가 나찰에게 몸을 던지려 하였다.
그 때 나무의 신(樹神)이 그에게 물었다.
“그 시에는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이 시는 과거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이 시를 들으려고 몸을 버리는 것은 나 하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렇게 말을 마친 수행자는, 이윽고 몸을 날려 나무에서 떨어졌다.
그런데, 그 몸이 땅에 닿기도 전에 나찰은 곧 제석천의 모양을 나타내어,
그를 받아 땅에 내려놓았다.
이를 지켜 본 모든 천신(天神)들이 그의 발에 예배하고
그 지극한 구도의 정신을 찬탄하였다.
6) 세조-문수동자
이조 7대 임금인 세조는 그의 조카인 나이 어린 단종을 패하고 왕이 되었기 때문에
그 죄악의 응보였는지,
아니면 단종의 모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서 힐책하며
「내 아들의 나이가 어려 당신이 섭정을 하고 있었으니 왕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었을 터인데,
무엇이 부족하여 왕위를 빼앗고 영월로 귀양까지 보내어 그렇게도 무참하게 죽여버렸단 말이요.
왕이 그렇게도 탐이 나던가요? 이 더러운 양반아」하고 침을 뱉었는데,
이런 까닭인지 세조는 이때부터 온 몸에 등창이 생겨서 그 고통을 형언할 수가 없었다.
용하다는 의원도 신비한 영약도 아무런 효험이 없자, 세조는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진심으로 참회하고, 강원도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상주도량으로 영험하다는 소리를 듣고,
상원사에 가서 문수보살님께 지극 정성으로 백일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백 일째 되는 날 몸이 가렵고 견딜 수가 없어서, 기도를 마치고 개울로 나아가 목욕을 하였다.
혼자서 몸을 씻으면서 누가 등 좀 밀어 줬으면 하고 생각하는데,
마침 개울 옆 작은 샛길로 한 동자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세조 임금은 동자를 손짓해 불러 자기의 등을 좀 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동자가 그러마고 부드러운 손으로 등을 밀어 주는데,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목욕을 마친 후, 세조 임금이 동자를 향하여 칭찬을 하고 다시 이르기를
“ 행여나 사람을 만나더라도 상감의 흉한 종기를 씻어드렸다는 얘기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더니
동자가 미소를 지으며
“잘 알겠습니다. 상감께서도 후일에 누구를 보시던지
오대산에 가서 문수동자를 친견했다는 말씀을 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는 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세조는 어린 것이 자기의 종기를 씻어주고 소문을 퍼뜨릴까 염려하여 부탁한 것인데,
문수보살이 자기 병을 고쳐주고 성인(聖人)을 만났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부탁을 받았으니
도리어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뒤로 세조의 종기는 씻은 듯이 나아, 환희와 감사한 생각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라에서 제일가는 화공(畵工)을 불러서
자기가 본대로 문수동자의 모습을 그리게 하고 또 조각하여 모시었으니,
지금의 상원사 선원에 모셔진 문수동자상이 그것이다.
이 밖에도 세조가 상원사에 있을 때의 이야기 중에 한 가지는
세조 임금이 상원사에서 여러 대중 스님네와 같이 대중공양을 하는 데에 참례하여,
임금도 승려들이 사용하는 발우(鉢盂)라는 식기 4개를 펴놓고 음식을 받아서 공양하였다.
이 때 공양을 받기 전에 미리 천수물을 받아 놓았다가,
식사를 끝낸 뒤에 반드시 이 물로써 발우를 씻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사미승 아이가 천수물을 돌리면서
“처사님 어서 물 받으십시오” 하고 말하자,
큰방의 대중스님네와 신하들이 크게 두려워하며 곧 벌을 받을 줄로 알았는데,
세조는 사미승이 자기를 처사라고 불러 준 것을 큰 영광으로 여기며 사미승을 칭찬하고,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누구에게 처사란 말을 들어보겠느냐”
하며 오히려 큰 상을 내렸다고 한다.
또 한번은 세조가 법당에 올라가서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려 하는데 문득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 세조의 곤용포자락을 잡아 끌면서 절을 하지 못하게 했다.
세조가 이상하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 법당을 살펴보게 하니,
탁자밑에 자객이 세조가 엎드려 절할 때 죽이려고 칼을 품고 노리고 있었다.
곧 자객을 붙잡아 내고 양묘전(養猫田)을 상원사에 하사하여 고양이를 기르게 하였다.
세조는 불교의 탄압으로만 일관한 조선불교에 많은 공적을 이루기도 하였다.
7) 앙굴리말라
부처님 당시 사바티(舍衛城)에는 훌륭한 바라문 학자가 500명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아힝사(不害)라고 하는 제자는 체력도 강하고 지혜도 뛰어날 뿐더러
용모도 아주 단정한 젊은이로서 스승의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다.
어느 날 바라문이 집을 비우고 나간 사이에
바라문의 아내는 젊고 늠름한 아힝사를 자기 방으로 불러들여 유혹하려고 하였으나
아힝사는 침착하게 말하기를
“스승의 아내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그런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하고 거절하였다.
바라문의 아내는 젊은 제자에게 연정을 품었다가 창피를 당한 것이 분해서
자기 손으로 입고 있던 옷을 찢고 머리카락을 어지러이 하여 자리에 누웠다.
남편인 바라문이 돌아와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당신께서 가장 신망하는 제자 아힝사가 당신이 나간 사이에
내 방에 들어와 욕을 보이려다가 내가 반항을 하자 이렇게 옷을 찢고……”
하면서 흐느끼는 것이었다.
바라문은 속으로 분노가 치밀어 아힝사를 파멸시켜 버릴 방법을 생각하고는
자기 방으로 아힝사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너의 학문은 이제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일만 마치면 비법(秘法)을 전해주겠다”
영문을 모르는 아힝사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스승님께서 시키시는 일은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하고 다짐을 하니
바라문은 벽장에서 한자루의 칼을 내어주면서
“지금 당장 거리에 나가서 백명의 사람을 죽이고
한 사람 한테서 손가락 한개씩을 잘라내어 목걸이를 만들어 돌아오너라.
그것으로써 너의 학문은 완성되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힝사는 칼을 받아 들고 몹시 고뇌했으나 스승의 명령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었던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거리로 뛰쳐 나갔다.
그러고 상대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여 손가락을 잘라 모았다.
손가락을 잘라내어 목걸이를 만든다는 뜻에서 사람들은 그 살인마를
“앙굴리말라”라고 불렀다. 앙굴리(Angulli)는 손가락, 말라(Mala)는 목걸이라는 뜻이다
거리에 탁발을 나갔던 비구들이 기원정사로 돌아와 부처님께 그 일을 알렸다.
부처님은 곧 탁발할 준비를 갖추고 거리로 나가셨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그 길로 가시면 안됩니다. 그 길에는 앙굴리말라 라는 무서운 살인마가 있어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입니다”하고 만류하였으나
부처님은
“내게는 두려움이라는 것이 없소”라고 말씀하시면서 살인마가 날뛰는 거리로 나아가셨다.
살인마 앙굴리말라는 드디어 아흔 아홉 사람을 죽이고
한 사람만 더 죽여 목걸이를 완성하기 위해 사람을 찾아 다녔다.
그때 그의 어머니가 소문을 듣고 자기 자식을 찾아왔다.
살인마는 눈이 뒤집힌 나머지 자기 어머니마져 죽이려 달려가는데
저 편에 부처님의 모습이 보였다.
살인마는 어머니를 젖혀두고 부처님을 쫓아가며 부르짖었다.
“꼼짝 말고 거기 섰거라 정반왕의 태자야!
내가 바로 앙굴리말라이니 손가락을 내게 바쳐라”
부처님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앙굴리말라를 바라보셨다.
그는 부처님의 자비스럽고 위엄있는 모습에 조금전까지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때 부처님은 조용히 말씀하셨다.
“앙굴리말라 나는 지금 이렇게 서있다.
너는 어리석어 무수한 인간의 생명을 해쳐왔고 나를 해치려 하지만
나는 여기 이렇게 있어도 마음이 평온하다.
너를 가엾이 여겨 여기에 왔다. 내가 이제 너에게 지혜의 칼을 다시 주리라”
이 말을 듣자 앙굴리말라는 문득 악몽에서 깨어나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마치 시원한 물줄기가 치솟아 오르는 불길을 꺼 버리듯이 그는 피묻은 칼을 내던지고
부처님 앞에 꿇어 엎드려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부처님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그 뒤 그는 부처님을 따라 기원정사에 가서 설법을 듣고 지혜의 눈을 뜨게 되었다.
8) 학소도림
당나라의 백락천(白樂天) 이라고 하면 유명한 시인이요, 뛰어난 경륜을 지닌 정치가이기도 하다.
그가 본래 학식과 총명이 뛰어난데다 벼슬이 자사(刺史)의 지위에 올라 자뭇 그 우월감에 충만해 있을 때 였다.
한 때 그가 항주(抗州)의 자사로 부임한 후의 이야기이다.
하루는 그리 멀지 않는 사찰에 도림선사(道林禪師; 741~824)라고 하는 이름난 고승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한 번 직접 시험해보리라 작정하고 선사가 머물고 있다는 절로 찾아갔다.
도림선사는 청명한 날이면 경내에 있는 오래된 소나무 위에 올라가 좌선(坐禪)을 하곤 하였다.
마침 백락천이 도림선사를 찾아온 날도 나무 위에서 좌선하는 중이었다.
백락천이 나무 아래 서서 좌선하는 스님의 모습을 올려다 보니 아슬아슬한 생각이 들어
- 선사의 거처가 너무 위험합니다.
하고 소리치니, 선사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 자네가 더욱 위험하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듣고 있던 백락천이 어이없어 하면서
- 나는 벼슬이 자사에 올라 강산을 진압하고, 이렇게 안전한 땅을 밟고 있거늘 무엇이 위험하단 말이오?” 라고 대꾸하는 것이었다.
선사는 그가 학문과 벼슬에 자만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이 기회에 교만한 마음을 깨우쳐주기 위해 곧 바로 쏘아 부쳤다.
- 티끌같은 세상 지식으로 교만한 마음만 늘어 번뇌가 끝이 없고, 탐욕의 불길이 쉬지 않으니 어찌 위험하지 않겠는가.
백락천은 자기의 마음을 환하게 꿰뚫어 보는 듯한 눈매와 자기가 자사라는 벼슬에 있음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자기 할 말을 다하는 기개에 눌려
- 제가 평생에 좌우명을 삼을 만한 법문 한 귀절을 듣고 싶습니다.
하고 애초에 선사를 시험하려 했던 불손한 태도를 바꿔 공손한 자세로 가르침을 청했다.
- 나쁜 짓을 하지말고(諸惡莫作)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衆善奉行)
이같은 대답에 대단한 가르침을 기대했던 백락천은
- 그거야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니요.
하고 신통치 않다는 듯이 말하니 선사는 침착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팔십 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네.
이 말을 들은 백락천은 비로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 가르침을 실천하여 인격화되지 않으면 아만과 번뇌만이 더할 뿐
진리의 길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당대의 문장가 백락천은 그 자리에서 도림선사에게 귀의하여 불법의 수행을 돈독히 하였다고 한다.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려 주고 있는 백락천의 명문(名文) 시구(詩句)들도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인격에서 울려 나오게 된 것이 아닐까.
9) 사슴왕
아주 오랜 옛날, 베나레스의 사슴동산에는 500마리의 사슴들이 떼지어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황금빛 털로 장식된 사슴 왕은 다른 사슴들에 비해 유난히 크고 늠름하였다.
그 때 인간의 왕은 사슴고기에 맛을 들여 매일 사슴동산에 와서 한 마리씩 활로 쏘아 잡아 갔다.
사슴들은 인간의 왕이 나타나면 두려워 떨며 이리 뛰고 처리 뛰다가 화살에 맞아 죽어갔다.
또한 많은 사슴들이 섣부른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리며 신음하였다.
이에 황금빛 사슴왕은 사슴의 무리를 모아 놓고 말했다.
- 많은 동료들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느니 보다는,
차라리 이쪽에서 차례를 정해 스스로 나아가 죽음을 기다리기로 하자.
죽을 때 죽더라도 차례가 아닌 다른 사슴들에게는 상처를 입히지 않고, 하루라도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였다.
사슴왕은 인간의 왕에게 나아가 사슴들의 뜻을 전달하였다.
이렇게 되어 인간의 왕은 손수 활을 쏘지 않게끔 되었다.
자기 차례가 된 사슴은 제발로 걸어 나가면 왕의 요리사가 와서 그를 잡아가곤 했다.
그런데 하루는 새끼를 밴 암사슴의 차례가 되었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황금빛 사슴은 자기가 대신 죽기로 생각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다치지 않도록 왕이 특별히 주의를 준 바 있는 황금빛 사슴이 처형대 위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본 요리사는 왕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알렸다.
인간의 왕은 황금빛 사슴에게 말했다.
- 너만은 죽일 생각이 없는데 어째서 여기에 나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느냐?
- 오늘은 새끼 밴 친구의 차례가 되어 제가 대신 죽으려고 합니다.
사슴왕의 말을 들은 왕은 속으로 크게 뉘우치며 말했다.
- 나는 너처럼 자비심이 깊은 자를 사람들 속에서도 보지 못했다.
너로 인하여 내 눈이 뜨이는 것 같구냐. 가거라 너와 암사슴의 목숨 만큼은 살려주리라.
그러나 사슴의 왕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 우리 둘만의 목숨은 건질 수 있다 할지라도 다른 사슴들의 목숨은 어찌 되겠읍니까?
- 좋다 그들의 목숨도 구해 주리라.
- 임금님의 자비로 저희 사슴의 우리들은 죽음을 면했지만 다른 동물들은 어찌 되겠읍니까?
- 좋아 다른 동물들의 목숨도 보호하지.
- 거룩하신 임금님,
죽기를 싫어하고 살기를 좋아 하는 건 생명을 가진 모든 생물들의 한결같은 소망입니다.
날아 다니는 새들과 물속 고기들의 생명까지도 보호해 주십시오.
인간의 왕은 황금빛 사슴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생각하기를
「사람이나 짐승이나 살려고 하는 점에서는 조금도 다름이 없구나.
사슴왕처럼 동료 사슴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는 마음이야 말로
보살의 자비심일 것이다. 내가 남에게서 무엇을 뺏어오는 삶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베풀어 줄 수 있는 생활만이 평화로운 세계를 가져 다 줄 것이다.」하고 깨닫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황금빛 사슴은 안간의 왕에게 모든 생물의 안전을 보장받고 동료 사슴들과 함께 숲에서 평화롭게 살았다. 〈자타카 12〉
*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前生)이야기를 본생담(本生談 ; Jataka)이라고 하는데,
이 이야기도 그 중의 하나로 황금빛 사슴왕이 바로 부처님의 전신이라고 한다.
10) 무착문희
중국 오대산 중턱의 외딴 암자 금강굴에서 한 스님이 손수 밥을 해먹으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 스님은 어려서 출가하여 무착(無着; 821-900)이라는 법명을 받아 계율과 교학을 공부하다가 문수보살의 영지(靈地) 오대산에 참배하고 문수보살을 친견(親見)하고자 기도를 하는 중이었다.
하루는 식량이 떨어져 산 아래 마을에 내려가 양식을 탁발해 올라 오다가
소를 몰고 가는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노인의 모습이 범상치 않음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뒤를 따르게 되었다.
한참을 뒤쫓아 가다 보니 전혀 보지 못했던 웅장한 절 한 채가 나타났다.
노인이 문 앞에서 “균제야! ” 하고 부르니 한 동자가 뛰어나와 소고삐를 잡아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따라 들어가 노인에게 인사를 드렸더니,
동자가 아주 향기로운 차를 한 잔 내왔다. 노인이 묻기를
- 자네는 오대산에 무엇하러 왔는가?
- 저는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그 가호를 얻고자 찾아왔습니다.
- 자네가 가히 문수를 만날 수 있을까? 자네 살던 절에는 대중은 얼마나 되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 300여명 되는 대중이 경전도 읽고 계율도 익히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곳은 어떠한지요?
-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이요, 용과 뱀이 뒤섞여 산다네.(龍蛇混雜 凡聖交參)
무착은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새 밖은 어두워져서 무착은 노인에게 하룻밤 쉬어갈 것을 청하였더니
- 애착이 남아 있는 사람은 이곳에서 자고 갈 수 없네.
하고는 동자에게 배웅하게 하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어둑해진 길가에 나와서 무착은 동자에게 물었다.
- 아까 노인에게 이곳 대중의 수를 물었더니 전삼삼 후삼삼이라고 하시던데 도대체 무슨 뜻인가?
하고 물으니,
동자가 큰 소리로 무착아! 하고 부르니 엉겁결에
- 네.
하고 대답하자,
-그 수효가 얼마나 되는고?
하며 동자가 다그쳐 묻는 것이었다.
무착은 또 다시 말문이 막혀 동자를 쳐다 보며
- 이 절 이름은 무엇입니까?
- 반야사(般若寺)라고 합니다.
하며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니 웅장하던 절은 금시에 간 곳이 없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동자도 사라지고 없는데, 허공에서 한 귀절 게송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面上無瞋供養具)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미요한 향이로다(口裡無瞋吐妙香)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心裡無瞋是眞寶)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無染無垢是眞常) >
이렇게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서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무착은 더욱 수행에 힘써 앙산 선사(仰山; 840~916)의 법(法)을 이어받아
어디에도 거리낄 바 없는 대자유인이 되었다.
어느 해 겨울, 동짓날이 되어 팥죽을 쑤고 있는데
김이 무럭무럭 나는 죽 속에서 거룩하신 문수보살이 장엄하게 나타나서는
- 무착은 그 동안 무고한가?
하며 옛날 오대산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시키며 먼저 인사말을 건냈다.
그런데 무착스님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팥죽을 젓던 주걱을 들어 문수보살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문수보살은 놀래어
- 어이, 무착 내가 바로 자네가 그렇게도 만나고 싶어하던 문수일세 문수야!
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받은 무착스님은
- 문수는 문수요, 무착은 무착이다.
만일 문수가 아니라 석가나 미륵이 나타날지라도 내 주걱 맛을 보여주리라.
하고 대꾸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문수보살은
- 쓴 꼬두박은 뿌리까지 쓰고 단 참외는 꼭지까지 달도다.
내 삼대겁(三大劫)을 수행해 오는 동안 오늘에사 괄시를 받아 보는구나.
하는 말을 마치고 슬며시 사라져 버렸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 금강굴에서 3년 간이나 기도를 하고,
또 문수보살을 원불(願佛)로 모시고 다녔던 무착이었건만
깨달음을 성취한 뒤에는 문수보살이 스스로 나타나셨어도
도리어 호령을 하고 주걱으로 얼굴을 갈긴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체득한 선사들의 기백이요 실력인 것이다.
11) 태조무학
조선의 태조는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이성계(李成桂)이다.
그는 날로 부패해 가는 고려왕조를 탄식하여, 청운의 뜻을 품고 팔도강산을 두루 다니며 무예를 연마하고 정신을 단련하는 등 명산과 유서깊은 사찰을 찾아다니며 천지신명과 제불보살님의 가호를 빌기도 하였다.
한때 그가 함경도 안변 땅에 머물적에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혼자서 곰곰히 생각다 못해 답답한 가슴을 안고 그 마을에서 해몽을 잘 한다는 점장이 노파를 찾아가서 묻게 되었다.
- 다른 게 아니라 내가 간밤에 몇 가지 이상한 꿈을 꾸었기에 해몽을 좀 해 달라고 왔소.
하면서 꿈의 내용을 이야기했더니, 이성계의 얘기를 듣고 깊이 생각하던 점장이 노파가 신중하게 말하기를
- 대장부가 받은 꿈의 계시를 어쩌 한낱 계집이 말할 수있겠습니까. 여기서 서쪽으로 40리쯤 들어가면 설봉산(雪峯山)이 있고, 그 산의 조그만 토굴에 도인 스님이 한 분 살고 계십니다. 그 어른에게 물어보시면 잘 일러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성계는 노파가 일러준대로 설봉산을 찾아 도인 스님이 계신다는 토굴에 들어가 본즉 한 스님이 선정(禪定)에 들어 있었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이성계는 스님에게 공경히 절을 하고 찾아 온 사연을 말하였다.
- 진세(塵世)에 사는 사람이 의심스러운 일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아오니 자비로써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 무슨 일인지 말씀을 하여 보십시오.
- 실은 제가 간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하도 궁금해서 일부러 찾아 왔습니다.
시골마을의 닭들이 일제히 울어대고, 하늘에서는 꽃이 비오듯 떨어지는 것을 봤습니다.
또 저는 헌 곳간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짊어지고 나오다가 거울이 깨어지는소리에 문득 꿈을 깨고 말았습니다. 무슨 불길한 징조는 아닌지요,
- 정말로 그러한 꿈을 꾸셨다면 남에게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꿈입니다.
이곳은 아무도 없으니까 가만히 들어보십시오,
마을의 닭들이 일제히 “꼬끼오”하고 울어 댄것은 “꼬뀌위 꼬뀌위”한 것이니
반드시 고귀한 지위에 오른다는 뜻입니다(高貴位) .
헌 곳간에 들어가서 등에 서까래 세 개를 가로 졌으니 그 양이 임금 왕(王)자와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성계는 내심 형용할 수 없는 흥분된 마음을 감추고 다시 묻기를
- 그러면 하늘에서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어진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스님은 말 없이 붓을 들어 시(詩) 한 수를 적어 내 놓았는데 이성계가 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 화락능성실(花落能成實) 꽃이 떨어졌으니 열매가 맺힐 것이요
경파개무성(鏡破豈無聲) 거울이 깨어졌으니 소리가 요란할 징조로다. >
하고 스님은 다시 이성계의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 장군의 면상을 본즉 군왕의 기상이 얼굴에 가득하지만 아직 겁기(劫氣)가 다 벗어지지를 못
하였으니 성현에게 기도를 올리고 공덕을 지어야 일이 성취되겠소이다.
이 일은 나만 알고 비밀을 지킬터이니 장군께서도 꿈 이야기를 입밖에 내지 말아야 하오.
아직도 3년의 시일을 기다려야 할터이니 그 동안에 이 자리에 절을 세워 오백 라한을 모시고
기도를 잘 드리도록 하시오,
하고 자세히 알려주었다.
이성계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님께 스승의 예를 올리고 그 뒤에도 가르침을 청했으니,
이 스님이 바로 무학대사 이다.
이렇게 해서 이성계는 자기의 출생지 안변 땅에 절을 지어〈임금 왕(王)자를 해석했다고 하여〉 석왕사’(釋王寺)라 이름하고, 등극한 후에는 무학대사를 ‘왕사(王師)로 모시게 되었다.
12) 태조 라한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에 함경도 함흥에서
그 아버지 환조(桓租)의 상(喪)을 당하고 장지(葬地)를 얻지 못하여 답답하게 여기든 중이었다.
하루는 그 머슴이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스님 두 분이 산 아래를 가리키며
- 정말 명당자리군 당대에 군왕이 나겠는데
하니까 또 다른 스님이 말하기를
- 정말 그렇군요. 저 자리는 중국 같으면 틀림없이 천자가 날 자리입니다.
이와 같은 얘기를 엿들은 머슴이 곧 바로 이성계에게 달려가서 그 말을 전하였더니
그는 말을 타고 달려가서 두 스님을 뵙고 그 땅을 가르쳐 달라고 해서
그의 아버지를 장사지내 모시었으니 그곳이 바로 함흥의 정릉(定陵)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이성계는 명당을 얻어 쓰고
그 뒤에 무학대사에게서 이상한 꿈의 해몽해 주는 말씀을 듣고 왕이 될 예시를 받았다.
그리고 공덕을 쌓기 위해 석왕사라는 절을 짓고 오백 나한을 모시기 위해
응진전(應眞殿)을 지었다.
그때 마침 함경도 길주에 있는 광적사가 병화로 말마암아 패사가 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광적사에 방치된 대장경일부와 오백 나한상을 석왕사로 옮겨 모시기로 작정하였다.
이 오백 나한상을 모셔 올 때에 철주에서 원산포까지는 배로 옮겼으나
원산으로부터 석왕사까지는 이성계가 직접 돌로 된 나한상을
한 분씩 한 분씩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옮겨 모시었다.
오백이나 되는 나한상을 끝까지 한 분씩 잘 옮겨 모시어 498분을 석왕사로 옮겨 모시게 되었다. 그런데 맨 마지막 두 분만이 남게 되자 조금 귀찮은 생각이 들어
두 분의 나한상을 한꺼번에 운반하여 모시게 되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기도 후 살펴보니
맨 나중에 모셔온 존상 한 분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를 않는 것이었다.
이성계가 놀라서 사방을 두루 찾아 보았으나 종시 알 수가 없으므로 단념하고 있었더니
그날 밤 꿈 가운데 없어진 존상이 나타나서 말하되
- 그대가 그만큼 신심을 발하여 나한상을 하나씩 업어 오다가
나만은 따로 업어가지 않고 덧붙여 업어가니 그렇게 성의가 부족하여 되겠는가.
이런 푸대접 받기가 싫어서 나는 묘향산 비로암에 가 있으니 그리 알아라.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곧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더니 과연 그곳에 나한상 한분이 계신다는 것이었다.
이성계가 곧 바로 그곧까지 가서 정중한 마음으로 다시 모시고 와서 참회하고 뉘우쳤으나
이튿날 보니 다시 없어지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없어진 그 나한존상외 자리에는 명패만을 모시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연유로 해서 석왕사의 오백 나한이 모셔진 응진전에 한 분 성상이 모자라는 것이다.
이성계는 이와 같이 오백 나한을 모시고 3년에 걸려 오백 성재를 정성껏 올리었다.
그 후 조선을 건국하고 등극한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가르침을 얻고자 하여 찾아 봤으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팔도의 방백으로 하여금 무학대사를 찾아 모셔오게 하라는 영을 내렸다.
팔도의 방백들이 곡산(谷山) 에 이르러 고달산(高達山) 초막에 도승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혹시 그가 무학대사인가 싶어서 그들은 시종하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친히 골짜기 윗봉에 올라가서 각각 그 관인(官印) 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놓았다.
방백의 일행이 초암에 이르러 본 즉 과연 눈빛이 빛나는 노장이 호미로 채전을 메고 있었다.
삼도 방백이 그에게 대화를 청하였다.
- 이 암자는 누가 지었읍니까?
- 이 절은 내가 지었소만……
- 이런 험산에 무얼 보고 지었습니까?
- 예 저 건너 삼인봉(三印峯)을 응하여 지었지요.
- 어째서 저 봉우리를 삼인봉이라 합니까?
- 이곳에 절을 짓고 있으면 3도 방백이 와서 저 봉우리 나뭇가지에 인(印)을 걸어놓을 날이 있을것 같아서 그리 했지요.
스님의 대답에 방백들은 깜짝 놀라 일어나서 그 스님에게 예배를 하였으니
그는 과연 무학대사였다.
그들은 임금이 스님을 청한다는 말을 하고 모시고 가게 되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곧 대사를 왕사(王師)로 모시고 천도(遷都)의 일을 문의하였다.
무학대사는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끝내 물리치지 못하고 두루 도읍지를 고르다가
마침내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13) 아난의 지옥구경
난타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배다른 동생이다.
즉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정반왕의 아들이지만
부처님은 마야부인을 어머니로 하고, 난타는 마하파자파티 부인을 어머니로 하였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고국인 카필라에 돌아왔을 때 마침 난타에게는 세가지 경사스러운 일이 겹쳐 있었다.
그것은 새 궁전이 완성되어 그곳으로 들어가는것, 신부를 맞아 결혼식올 올리는 것, 그리고 카필라국의 태자로 책립된다는 것 등의 일이었다.
특히 새로 맞이하는 신부는 나라에서 제일가는 미녀로 이름을 순다리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아우되는 난타를 제도(濟度)할 때가 되었음을 알고
성 안에 들어가 난타의 집으로 가셨다.
난타가 나와서 보니 부처님께서는 걸식을 하러와서 빈 바루를 들고 서 계셨다.
그래서 바루를 받아 음식을 담아 부처님께 드리려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받지 않고 되돌아서 가는 것이었다.
난타는 하는 수 없어 어디선가 바루를 건네줄 생각으로 뒤를 따라 가다가 마침내 니그로다 정사에까지 오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난타를 의자에 앉게하고
“착하다, 비구여 ! ” 하고 말씀하시자 저절로 머리가 깎이고 몸에는 가사가 입혀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난타의 생각은 집에 두고 온 부인의 모습이 생각나서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처님이 언제나 그를 데리고 다니기 때문에 탈주의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이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정사의 당번을 서라는 명령을 받았다.
낮시간에 부처님과 비구들이 걸식하기 위하여 밖에 나가면 한사람은 남아서 당번을 서는 것이다.
드디어 탈주의 기회가 왔다 생각하고 부처님이 다니시는 큰 길을 피해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을 빠짐없이 아시고 오솔길 맞은 편에서 오고 계셨다.
부처님께서는 가까이 다가가서 자비스럽게 말씀하셨다.
- 난타 ! 너는 아직까지도 집에 두고 온 부인 생각만을 하고 있구나.
- 예, 그렇습니다. 부처님
부처님께서는 난타를 데리고 히말라야 깊은 산으로 가셨다.
그 산 속에는 한 마리의 늙은 원숭이가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원숭이를 가리키며
- 부인은 미인이라는데 이 눈먼 원숭이와 비기면 어떻냐?
- 제 아내 순다라는 미인으로서는 인간 중에서도 겨룰 자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그녀를 눈먼 원숭이 따위와 비교하십니까?
그 다음 부처님께서는 난타를 데리고 천상계(天上界)에 올라가 천상의 궁전을 구경시켰다.
궁전 속에는 500명이나 되는 아름다운 천녀가 미묘한 악기를 울리며 누구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궁금해진 난타가 천녀들에게 물었다.
- 누구를 맞이하기 위해 준비를 하십니까?
- 염부제라는 나라에 부처님의 동생으로 난타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출가하여, 계율을 지키고 수행한 공덕으로 다음 생에 이곳 저희들의 천자가 되십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난타는 뛸듯이 기뻐하였다.
- 그 난타라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이대로 여기서 살게 해 주십시요.
- 안됩니다. 우리들은 천녀입니다만 당신은 인간입니다. 인간의 일생을 마치고 와 주셔요.
난타는 그대로 부처님에게 돌아와서 천녀들에게 들은 것을 부처님에게 이야기 하였다.
- 네 아내는 미인이라고 하지만 그 천녀들과 비교하면 어떻냐.
- 제 아내와 천녀의 차이는 늙은 원숭이와 제 아내의 차이와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난타를 데리고 염부제로 돌아왔는데 그 이후 난타의 수행은 비상한 것이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난타를 데라고 지옥을 구경하였다.
지옥에는 큰 가마솥이 여러 개 있고, 솥하나는 펄펄 끓는 데도 옥졸들은 계속 나무를 집어 넣고 있었다. 난타는 옥졸들에게 물어 보았다.
- 여보시오, 다른 가마엔 모두 죄인이 벌을 받고 있는 모양인데,
이 가마는 계속 끓이고 있으니 어떤 까닭입니까?
- 염부제에 부처님의 동생으로 난타란 자가 있지요.
그는 출가했으니 다음 생에는 천상에 태어나겠지만,
천상의 수명이 다하면 다시 이 지옥에 떨어지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가마솥을 끓이며 기다리고 있소이다.
난타는 두려워 떨면서 부처님께 다가와서 어서 염부제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 너는 천상의 세계에 태어나고 싶어서 계율을 지키고 정진하는 것이냐?
- 아닙니다. 저는 천상에 살고 싶지 않읍니다. 제발 지옥에만 떨어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렇게 해서 더욱 수행에 전념하게 된 난타는 17일만에 아라한과를 성취하여 성인의 경지에 이르렇다고 한다.
* 연재되고 있는 벽화설명의 그림은 해인사 큰법당인 대적광전의 벽화임을 알려드립니다.
14)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
아득한 옛적 인도 남쪽에 조그만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에 장나(長那)라는 부자가 예쁜 여자를 부인으로 맞아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 근심이 있었는데 그것은 몇 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는 것이었다.
하루는 부인이 제단을 차려놓고
「천지신명이시여! 옥동자 하나만 점지하여 주시옵소서.」하며 지극정성으로 기도하고 빌었다. 기도를 잘 모신 영험인지 그 후로 태기가 있어 옥동자를 낳고
삼년이 지나 또 한 아들을 낳게 되었다.
장자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큰 잔치를 베풀어 이웃사람들을 대접하였다.
또 예언가를 청하여 두 아이의 장래운명을 말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예언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 다음
「두 형제는 용모는 단정하고 고우나
부모와의 인연이 박해서 일찍 부모를 여윌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이런 연유로 이름은 형은 조리(早離), 동생은 속리(速離)라, 일찌기 부모를 여읜다는 뜻이다.
그 뒤 몇 해가 지나 형은 열살, 동생은 일곱살이 되었는데
그해 삼월에 어머니는 홀연히 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로 병세는 나날이 악화되어 갔다.
어머니는 두 아들을 불러 놓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조리야! 속리야! 엄마는 아무래도 병이 낳을 것 같지 않구나
사람이 한번 태어나서 죽는 것은 누구라도 면할 수 없는 것이니
죽는 것은 무서울 것이 없다마는 너희 어린 형제를 남겨놓고 떠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몹시 아프고 쓰리구나.
너희들은 내가 죽은 뒤라도 서로 도우며 착하게 살기 바란다.」
하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두 아들은 식어가는 어머니의 시체를 붙들고 통곡하였다.
장나는 마을사람들의 도움으로 장사를 후히 지내고, 두 아들을 극진히 사랑하며 몇 년을 살았다.
여러 사람들의 권유와 소개로 새로 들어온 후처는 죽은 부인과 용모가 비슷하여
두 아들도 엄마가 다시 살아온 것처럼 좋아하였다.
새로 온 부인도 두 아이를 불쌍하게 여겼는지 귀엽게 여기고 사랑하였다.
그런데 다음해 큰 흉년이 들어 들판의 곡식을 하나도 수확할 수 없었다.
장나는 집안을 새 부인에게 맡기고 이웃나라에 보물을 식량으로 바꿔오기 위해 먼 길을 떠났다.
혼자 남게 된 부인은
「만일 영감이 안 돌아오면 저 아이들은 어떻게 키울 것인가
또 내가 저 아이들에게 상속해 줄 것이 아닌가.
두 아이는 장차 큰 장애가 되겠구나.」
부인은 아이들을 없애려고, 뱃사공을 매수하여 두 아이들을 멀리 갖다 버리게 하였다.
영문도 모른 채 낮선 무인도에 버려진 두 아이들은
좁은 섬 안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부모를 찾았으나 끝내 사람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두 형제는 목이 터져라고 엄마 아빠를, 그리고 뱃사공 아저씨를 불렀지만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조리와 속리 두 형제는 마침내 겹친 피로와 굶주림을 못 이겨
가엾게도 쓸쓸한 무인도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다.
죽음에 임박해서 아우 속리가 사람들에게 속아서 비참하게 죽게 되는 운명을 한탄하자
말없이 듣고 있던 형 조리는 아우를 위로하며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
「나도 처음에는 세상을 저주하고 사람을 원망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은가!
차라리 우리가 다음 세상에 태어날 때는 이 고뇌의 체험을 인연으로 삼아서
우리와 같이 비운(悲運)에 우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자.
다른 사람을 위로해 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위로를 받는 길인 것을 일찌기 배우지 않았던가」
이 말을 듣던 아우도 비로소 형의 말뜻을 알아듣고 밝은 얼굴이 되었다.
이리하여 형과 아우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거룩하고 크나 큰 서원을 세웠다.
「우리는 여기서 죽더라도 내생에는 성현이 되고 보살이 되어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인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해 주자.
또 세상에는 빈곤하고 병든 사람이 얼마나 많겠느냐.
그들에게 의복과 양식을 주고 온갖 병을 치료해 주자....」
하는 등의 서른 두 가지의 서원을 세우고 어린 두 형제는 서로 얼싸안고 숨져 갔다.
무인도에서 외롭게 죽어간 두 형제의 얼굴에는 조용하고 밝은 미소가 어리어 있었다고 한다.
이 섬의 이름이 보타락가산이며
형은 관세음보살이 되고 동생은 대세지보살이 되었다고 한다.
15) 보경당-인생
끝없이 황량한 벌판에 한 나그네가 가고 있었다.
가도 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고 길도 없는 벌판이었다.
그러한 나그네 앞에 한 마리의 사나운 코끼리가 나타나 달려 오고 있었다.
겁에 질려 죽을 힘을 다해서 도망치던 나그네는 다행히도 한 우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우물에는 한 줄기의 넝쿨이 우물 안으로 내리 뻗어 있었다.
나그네는 급히 넝쿨을 타고 우물 안으로 들어가 나무뿌리에 매달려 몸을 숨겼다.
당장에라도 밟아 죽일 듯이 뒤쫓아 왔던 코끼리는 좁은 우물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기에 우물 주변을 맴돌 수 밖에 없었다.
코끼리의 위험에서 몸을 피할 수 있게 된 나그네는 나무뿌리에 매달려 우선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잠시 후 우물 속을 휘둘러본 나그네는 소스라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윗쪽으로 쳐다보니 검은 쥐 흰 쥐 두 마리가 나무뿌리의 윗 부분을 갉아 먹고 있었다. 생명처럼 매달려 의지하고 있는 그 나무뿌리를 두 마리의 쥐가 갉아 먹고 있으니 오래지 않아 그 나무뿌리는 끊겨 밑바닥으로 떨어질 판이었다.
그리고 사방의 우물 안 벽에는 네 마리의 독사가 나그네를 향하여 독을 뿜으며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고, 아랫쪽 우물 밑바닥에는 무서운 독룡이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겁에 질린 나그네가 급히 우물 밖으로 나가려고 위를 쳐다보니 코끼리는 보이지 않고 우물 입구쪽에 연기가 자욱하고 불꽃이 튕겨 오르는 것이 보였다. 들불이 일어나 휩쓸고 있는 것이었다.
윗쪽으로도 아랫쪽으로도 또 옆으로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한 줄기 나무뿌리에만 의지하고 매달려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머리 위에서 두 마리의 쥐가 나무뿌리를 갉아 먹고 있으니 언제 끊겨 독룡이 있는 밑바닥으로 떨어지게 될지 몰라 나그네는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때 다섯 방울의 꿀물이 나그네의 입술에 똑 똑 떨어져 입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나그네는 그 달콤한 꿀맛에 지금까지의 모든 두려움과 괴로움을 잊고 꿀물이 떨어진 쪽을 쳐다 보았다. 거기에는 꿀벌집이 있었다. 나그네는 입을 벌리고 꿀물이 벌어지기를 바랐다.
그때 나무가 흔들리는 바람에 꿀벌들이 놀라서 날아다니며 나그네의 얼굴과 머리를 쏘았다.
나무뿌리를 잡고 있는 손을 놓는다면 밑으로 떨어져 독룡에게 먹히고 말 것이며, 벌을 피하여 머리를 휘젓고 몸을 뒤틀다가는 네 마리의 독사에게 물릴 것이다. 성난 코끼리와 들불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나그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지경이다.
위의 이야기는 불설비유경(佛說醫輸經)에 나오는 인생에 대한 비유이다.
어리석은 인생은 삶의 참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되고 그릇된 생활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이 비유에 나오는 나그네는 바로 우리들 인생이며, 황량한 벌판은 무명의 긴밤(無明長夜)에 비유하고 코끼리는 무상(無常)에, 우물은 생사의 험난한 이 세상에, 한줄기 덩쿨은 생명에, 검은 쥐 흰 쥐 두 마리는 낮과 밤에, 덩쿨을 쥐가 갉아 먹는 것은 순간순간 늙어가는 것에, 네 마리 독사는 우리의 육신을 구성하는 사대(四大; 흙, 물, 불, 바람의 네가지 요소)에, 다섯 방울의 꿀은 오욕(五欲; 재물, 애욕, 음식, 명예, 수면 등의 다섯가지 욕망)에, 벌은 삿된 생각에, 들불은 노병(老病)에, 독룡은 죽음에 각각 비유한 것이다.
출처 :바람꽃과 솔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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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m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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