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흔적을 나라, 교토에서

이틀째-일본 최초의 사찰인 아스카테라 ( 飛鳥寺, 비조사 )

보리숭이 2009. 1. 20. 16:41

日 최고 사찰 아스카테라, 부여 왕흥사가 표본

일본 최고 사찰인 아스카테라(飛鳥寺)가 한국 왕흥사를 표본으로 삼아 건축됐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고 아사히신문이 2008.4.16일 보도했다.

와세다대 오하시 가쓰아키 불교미술사 교수는 지난해 10월 백제 수도 부여에 있는 왕흥사 유적에서 발견된 출토품들이 아스카테라와 왕흥사 사이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스카(飛鳥)는 야마토 분지의 남쪽 지대로 오늘날의 나라현 다카이치(高市) 군 아스카(明日香) 촌을 지칭한다. 현재 아스카 촌은 가옥 1,500여 호, 인구 7,000여 명의 농촌 지역으로 총면적 2,400헥타르의 작은 규모이지만 아마 고대에는 주위의 훨씬 넓은 지역들을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다. 야마토 국이 세워진 구체적인 장소가 바로 이 아스카이며,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은 아스카를 마음의 고향으로 여긴다고까지 말한다.

그런데 야마토가 그렇듯이 아스카(飛鳥)라는 지명도 다른 경우에는 날 飛 자나 새 鳥 자를 이렇게 읽는 법이 없는 특이한 지명이다. 그렇다면 아스카라는 지명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일본인 학자들 가운데서는 옛날 일본으로 이주한 수 많은 도래인(渡來人)들이 유랑 끝에 얻은 안주의 땅이라는 의미로 안슈쿠(安宿)라고 불렀던 것이 후대에 와전되었다는 설 등을 주장하지만 막연한 주장일 뿐 어느 하나 그럴 듯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없다.

한편 우리 나라의 일부 연구자들은 최근 이두식 읽기를 통해 일본 고대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어떤 분은 아스카가 새(鳥) 날아(飛) 즉 "새로운 나라"라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야마토 국이 쿠슈에서 기나이로 와 새 나라를 열었다는 뜻에서 나라 이름을 새 나라 즉 아스카(飛鳥)로 지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분은 새 날 혹은 날이 샜다는 의미의 이두식 표현이 아스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스카(飛鳥)의 현대식 지명이 한자로 明日 또는 明日香인 것이 그 근거이다. 이런 주장들은 모두 어느 정도의 일리는 있어 보이지만, 왜 "새 나라"나 "새 날"을 아스카라고 읽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설명이 없다. 좀 억지로 같다 붙여 보면 "새"라는 우리 옛말은 東·新·日의 뜻을 모두 가지고 있었으므로 아침을 뜻하는 앗·아치와 뜻이 통한다. 그리고 마을을 의미하는 우리 고어에는 스구라라는 말이 있으니 이것이 스카로 변했음직하다. 즉 새=앗과 나라=스카가 합쳐져서 아스카 즉 아침의 새 나라가 되었으라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아스카에 남아 있는 유적들을 대표하는 것은 일본 최초의 사찰인 아스카테라(飛鳥寺)이다. 588년에 소가노우마코가 건립한 아스카테라는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사원으로 백제에서 초빙된 기술자들이 참여하여 조영되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호코우지(法興寺)이며, 탑을 중심으로 3개의 금당을 갖춘 가람 배치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지금 남아 있는 아스카테라는 당시에 건립된 사찰은 아니며, 원래의 사찰은 헤이조코가 새로운 도읍으로 정해졌을 때 함께 옮겨 가 겐코우지(元興寺)가 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유적으로는 당시의 유명한 불상 제작가로 호류지의 삼존불을 만든 당시의 예술가 구라쓰쿠리노토리(鞍作鳥)가 만든 아스카다이부쓰(飛鳥大佛)가 있다.

 

쇼토쿠(聖德) 태자

 

쇼토쿠(聖德) 태자는 요메이 천황의 아들이자 스이코 천황의 조카로 우마야도였다. 아버지 요메이 천황이 병으로 죽었을 때 우마야도 왕자는 아직 13세에 불과하였으나 소가씨와 모노노베씨 간에 권력 투쟁이 일어나자 소가씨와 연합하여 모노노베씨의 세력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하였다. 592년 스이코 천황이 즉위하자 우마야도 왕자는 정식으로 태자의 지위에 봉해졌으며 천황을 대신하여 정무를 담당하는 셋쇼(攝政)에 임명되어 사실상 아스카 문화를 꽃피운 주역이 되었다. 쇼토쿠 태자는 그 어머니가 마굿간에서, 정확하게는 마굿간 앞을 지나다가 낳았다고 해서 우마야도 즉 마굿간 왕자라 불리었다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에 지어낸 이야기라는 해석도 있다. 아무튼 그는 생후 4개월부터 말을 하고, 동시에 10여명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비범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들도 역시 후대의 사람들이 그의 비범함을 강조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일 듯 싶지만, 아무튼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고 특별한 재능을 가졌던 것 같다.


쇼토쿠 태자가 왕위 계승자로 임명되고 섭정의 지위에 오른 것은 물론 외조부인 소가노우마코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쇼토쿠가 생각한 이상적인 국가는 우마코가 생각한 것과는 달랐다. 그는 백제나 고구려로부터 건너온 학자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외국의 제도나 문물을 배우면서, 가장 이상적인 나라는 바로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율령에 의해 통치되는 중앙 집권 국가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그는 한편으로는 소가씨와 협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소가씨 등 귀족들의 권력 확대를 제한하고 천황으로의 권력 집중을 추진하는 일련의 개혁 조치들을 단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603년의 관위 12계와 604년의 헌법 14조이다.


관위 12계는 지방과 중앙의 호족 세력들을 중앙 관리로 재편한 것으로 이들에게 12계의 관직을 주어 각각의 관직마다 복장과 색을 다르게 하여 위계질서를 분명히 한 것이다. 이 12계의 관위는 대덕, 소덕, 대인, 소인, 대례, 소례, 대신, 소신, 대의, 소의, 대지, 소지로서 이는 쇼토쿠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는 유교적 통치 이념을 도입하여 중앙 집권화를 꾀한 것으로 보인다. 헌법 14조는 쇼토쿠 태자가 직접 작성하였다고 하는데, 천황에 대한 복종과 중의의 존중, 불법승의 숭경 등 관인에 대한 훈계적 내용을 담고 있었다.


쇼토쿠 태자의 불교의 옹호자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호류지와 시덴노지 등 아스카문화의 대표적인 사찰들을 건립하였으며, 법화경․승만경․유마경 세 경전을 해석한 {삼경의소(三經義疏)}를 직접 저술하였다고 한다. {삼경의소}는 지금 남아 있는 것 중에서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그러나 일찍이 소가씨와 모노노베씨의 권력 투쟁에서 불교가 중요한 계기가 된 것처럼 이때 불교의 숭상은 단순한 종교적 의미 이상의 것을 담고 있었다. 애초에 인도에서 나타난 불교의 교리는 인도 전래의 카스트제도와 부족제도를 초월한 보편적 원리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소가씨가 불교의 숭상을 주장한 것이 기존의 모노노베, 오토모 등의 토착 부족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쇼토쿠 태자가 불교를 숭상한 것은 호족 세력 연합 위에 서 있던 야마토국을 중앙 집권적인 율령 국가로 재편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 있었다. 이 시기에 {천황기}, {국기} 등의 역사서 편찬이 이루어진 것도 역시 천황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그 내용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한편 쇼토쿠 태자는 외국과의 외교나 선진 문물의 도입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607년 오노노이모코를 사신으로 한 견수사를 수나라에 파견했는데, 이 때 수 양제에게 보낸 국서에서 "해뜨는 곳의 천자가 해지는 곳의 천자에게 보내노라"라고 썼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아마 일본이라는 국호도 여기서 비롯된 듯 싶다. 이러한 외교 정책은 대외적으로 일본의 위신을 높이는 데에도 목적이 있었지만 그를 통하여 국내의 정치 세력들에게 천황의 권위를 높이고자 한 것이 더욱 큰 목적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쇼토쿠는 많은 유학생과 학승들을 수나라에 보내 선진 문물을 배워 오도록 했는데, 이때의 유학생들이 뒤에 덴치 천황이 다이카 개신을 할 때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견수사는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 선 이후에는 견당사로 이름이 바뀌는데 이후 9세기까지 무려 수 십 번이나 중국을 왕래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개혁 조치들과 문화의 보호를 통하여 쇼토쿠 태자는 새로운 국가 체제의 기틀을 만들고 아스카 문화의 융성을 가져왔다. 그러나 뿌리깊은 귀족 세력들을 완전히 물리친다는 것은 쇼토쿠 태자로서도 불가능하였다. 특히 귀족 세력을 억제하려는 태자의 개혁 정책은 자신의 외가이기도 한 최고의 권력자 소가씨와의 관계를 긴장시켰다. 622년 쇼토쿠 태자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데, 태자의 전기에 의하면 죽는 당일 부인에게 "오늘밤 나는 저 세상으로 떠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태자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만약 태자의 죽음이 자살이라면 그 이유는 무었이었을까? 30여년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상을 다 펴지 못한 데서 온 절망이었을까? 아니면 천황의 권위를 높이고 귀족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에서 도입한 불교였지만 그 과정을 통하여 스스로 불교에 깊이 심취하면서 속세의 모든 야망이 부질없음을 깨달은 것일까? 아마 그 두 가지 모두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실제로 만년의 태자는 종종 "세상사는 모두 덧없고 불법만이 오직 진리"리고 말했다고 한다.

 아스카다이부쓰(飛鳥大佛)

일본 최고의 불사리

 아미타여래

 

 

관세음보살

한편 아스카에는 유명한 다카마쓰즈카(高松塚)가 있다. 직경 18미터, 높이 5미터로 비교적 소규모이지만 1972년에 발견된 사신도(四神圖)를 비롯해 여자 군상, 성좌 등이 극채색으로 그려진 벽화가 특히 유명한데, 이 때문에 이 고분의 주인은 고구려계가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으며, 몬무 천황이라는 설도 있지만 아직 확실한 정설은 없다. 아무튼 일본 황실이 백제계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다른 증거들 가령 호류지의 금당 벽화를 그렸다는 담징의 예에서 보듯이 고구려나 신라, 가야 등의 영향도 적지 않게 받았을 것이며 당연히 혈통이 섞이는 경우도 많았으리라고 보인다.

 다카마쓰즈카(高松塚)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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