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흔적을 나라, 교토에서

삼국인이 만든 동대사 - 금당

보리숭이 2009. 1. 20. 10:26

대불전(국보, 에도시대)

 

동대사는 749년에 대불상이 완성되고 752년에 동대사 금당인 대불전이 준공되었다.

 

동대사 건립에는 가람 총책임자 고구려출신인 고려복신(高麗福神), 재정지원 왕인의 후손 행기(行基)스님, 조불사 백제인 국중마려(國中麻呂), 대불전 전당 건축 책임 신라인 저명부백세(猪名部百世)가 참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주축이 되는 대불전은 건립당시 裳階(모코시)를 포함 정면11칸 87m, 측면 7칸 51m의 건물이었으며 기둥의 총수는 84개이었고 공포는 3출목 원형단면의 장연과 각형단면의 부연이 사용되었다.

 

당시 건축세부 수법은 도쇼다이지 금당건물과 같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에 들어섰던 건물은 1180년 방화로 소실되고 그 다음에 1195년 헛첨차(첨차를 기둥에 삽입) 공포형식으로 대불양식(다이부쓰요)건축양식을 따라서 재건되었으나 1566년에 다시 소실되었다.

 

이후 140년간의 재건공사를 거쳐 1705년에 완공된것이 현재있는 대불전이다. 현재 크기는 동서길이 57m 높이 47m로 축소되어 재건되었다.

 

 

신 나라(奈良) 동대사(東大寺)에서 크게 놀라는 관광객들
그 절과 불상은 백제·신라 후손이 만들어 준 것 / 월간 아리랑 arirang21@arirang21.com

김정동(목원대 교수, 문화재 전문위원, cdkim@mokwon.ac.kr)

크기에 놀라는 관광객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일본 중부 지방을 여행하게 되면 거의 대다수가 들르는 절이 하나 있다. 나라(奈良)의 동대사(東大寺; 도다이지)이다. 관광객들은 이 절의 대불전(大佛殿)을 보고 매우 놀란다. “왜 이렇게 크지… 일본 것은 작다는데…”하며 당황스러워 한다. ‘왜(倭)’ 라는 말, ‘축소지향’ 따위의 단어에 오랫동안 길들여져 있기에 일본에서 큰 것을 보면 당황하는 것이다.

필자도 오래 전(1981.8.14) 동대사에 갔을 때 너무 놀라서 입을 닫을 수가 없었던 적이 있다. 동대사 전역도 그렇지만 그 큰 대불전 안에는 또한 엄청난 크기의 시커먼 대불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름도 대불(大佛: 다이부츠)이라고 했던가? 대불은 인간의 왜소함을 가르쳐 주고 있는 듯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대불전의 내진주 기둥을 기어서 들락거린다. 재미로 하는 짓이지만 스스로의 작음을 재인식하게 해주는 일기도 했다. 언젠가 후지산에 갔을 때도 “일본은 참 큰산을 가졌구나” 하고 혼자 말했던 적이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본 그 산은 아름답기보다는 오히려 커서 나를 압도했다. 어떤 사물을 한 단어로 정의 내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다시한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참 교육이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겼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전해주는 것이 참 역사 교육이라고 생각되었다. 특히 한일 관계에서는-.

동대사의 비밀?

얼마전 아사히 신문사에서는 ‘대불(大佛) 개안(開眼) 1250년 동대사의 모든 것 전(展)’을 개최한다고 보도했다(2002.4.17). 나라 공원 내에 있는 나라국립박물관에서 열릴 이 전시회(2002.4.20-7.7)의 보도기사에는 동대사를 만든 스님들의 이름이 거명되어 있었는데 필자의 주목을 끈 사람은 행기(行基, 668-749)와 양변(良弁, 로우벤; 689-773) 스님이었다. 기사 중 그림 하나도 눈을 끌었는데 그것은 일본 남북조시대의 그림인 ‘사면어영(시조우노미에, 四聖御影)’이었다. 이 그림은 동대사의 안내 책자에도 이미 실려 있는 것인데, 동대사와 대불 조성에 관여한 네 사람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도 행기와 양변 스님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러면 그 스님들은 누구인가? 오늘의 숙제인 것이다.

동대사는 나라시대(奈良時代)에 세워졌다. 동대사란 절 이름은 ‘나라 동쪽의 관대사(官大寺)’란 뜻으로 지었다. 일종의 국립 가람으로 당시 일본으로서는 중요한 정부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일본 인구 5백만 명이던 시절 동원된 인력만도 2백만이 넘었다. 대역사였던 셈이다.여기서 ‘나라시대’는 710년부터 794년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직전까지를 말하는데 백제·신라와 깊은 관계가 있을 때였다. 동대사는 743년 착공된다. 불교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래한 것이 552년인데 거의 2백년이 지난 때의 일이다. 이미 신라에서는 676년 부석사가, 715년에는 불국사에 다보탑과 석가탑이 그리고 720년에는 황룡사 9층탑이 각각 건립되었다.

그즈음 일본에 세워졌던 절은 667년의 관세음사(觀世音寺)가 최초이고 741년에 세워진 국분사(國分寺)가 두 번째 쯤 되고 있었다. 동대사는 그후 최초·최대의 절이 되는 것이다.
이 절 짓기에 백제계의 행기와 양변 스님이 앞장섰고 백제·신라계의 건축가들이 그들을 뒷받침 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은 이 절을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일본 정부가 세운 것이라고 호도하고 있다. 어떤 자료에도 백제·신라계의 주도로 세워졌다라고는 적혀 있지 않다. 동대사의 비밀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행기와 양변 스님

일본 교과서에 행기 스님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나라시대의 ‘천평문화(天平文化)’가 꽃필 무렵이다. 당시 일본은 불교 국가였다. 일본인들은 행기를 ‘교키’라고 불렀다. 행기는 백제계로 일본에 건너 간 왕인(王仁) 씨 계족(系族)의 후손이었다. 행기의 조부는 왕진이(王辰爾)라는 이름의 선사(船使)였다. 배를 전문으로 하는 직업이었다. 왕진이는 나니와(難波; 오사카 지방)의 항구를 개척한 사람이었다. 그는 고구려 자(尺)를 가지고 일본의 항만을 개척해 준 은인인 것이다.

행기는 668년 오늘날 오사카 부근, 사카이(堺)시 가원정(家原町)에 있는 가원사(家原寺)에서 백제 왕족 고지재지(高志才智)와 백제 여인 봉전(蜂田)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는 가와치(河內) 지방 대조군(大鳥郡) 가원 땅이었다.(홍윤기, 『행기 큰 스님』, 자유문학사, 1996) 그즈음 왕(王) 씨가 고지(高志) 씨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일본화한 것이다. 따라서 행기 스님의 성은 백제의 왕씨이기도 하고 고지 씨이기도 하다. 행기는 15세에 출가하여 나라 야쿠시지(藥師寺)에서 신라 승 혜기(惠基)로부터 ‘유가유식론’을 배웠으며, 18세 때는 아스카지(飛鳥寺) 남쪽 선원에서 백제 승 도소(道昭, 629-700)로부터 배운다. 도소는 행기와 인척관계에 있었다.

행기는 22세 때 백제 승 의연(義淵, ?-728) 밑으로 들어간다. 금종(金鐘)이라는 어린이를 돌보면서였다. 그 어린이는 금취(金鷲)라고도 불렸다. 아베(阿部) 씨 집안의 아이였다. 4세기 경 아스카 지방을 지배했던 백제인 아직기(阿直岐)의 후손인 것이다. 이 어린이가 후에 커서 행기 스님의 뒤를 이어 동대사를 마무리한 양변 스님이다.

행기는 24세 때 백제 승 덕광(德光)법사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정식 스님이 된다. 29세 때부터는 일본 전역에 불교를 포교, 사회사업을 벌인 최초의 스님이 된다. 그는 이후 아스카 지방에 49개에 이르는 크고 작은 절을 짓는다. 오사카와 교토 지방의 강에 가교(架橋), 치수(治水) 하는 일도 벌여 공을 쌓는다. 행기는 건축과 토목의 승려였던 셈이다. 그는 지도도 만들어 일본 최초의 전국지도인 「행기도(行基圖)」(805년)를 남겼다. 이는 일본 지도 제작의 효시가 된다. 행기도는 「연력(延曆) 24년 여(輿) 지도」 혹은 「행기 일본도」라고도 한다.

행기는 738년 71세 때 조정으로부터 다이토쿠(大德)라는 칭호를 받는다. 그즈음 의상대사의 제자인 심상(審祥)대덕도 모신다. 심상 대덕은 양변 스님의 금종사(金鐘寺)에 머문다. 행기 스님은 이후 불사에 힘을 쓴 공로와 동대사와 대불 건립에 진력한 공로로 745년 1월 21일 대승정에 올라 상인(上人)이라 호칭된다. 생전에 보살(菩薩)이란 칭호도 얻었다. 행기 화상은… 전국 각지의 고을이며 시골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교화시켰다.…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모여들었다.… 그는 몸소 제자들을 거느리고 피해를 입은 여러 곳에다 다리를 세우고 제방을 쌓았다. 사람들은 모두들 찾아와서 그의 일을 협력해 주었다.그렇게 민중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은덕을 입어 오고 있다.… 행기 화상이 머무르는 곳에는 어디나 수도하는 수도장이 섰다. 일본 각지에 모두 49개소에 이른다.

행기 스님의 불업(佛業)이 가마쿠라(鎌倉)에도 남아 있다. 가마쿠라의 스키모토사(杉本寺)에는 후지와라(藤原)시대의 ‘십면관음입상(十面觀音立像)’의 부분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행기 스님이 전해 준 것이라고 한다. 가마쿠라 불교는 민중과 깊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이는 행기 스님이 원효대사와 같은 민중의 편에 섰던 스님이라는 것과 연결되는 일이다. 행기 스님은 749년 2월 2일 그가 세운 49원의 하나인 스가와라사(菅原寺)에서 82세를 일기로 열반한다. 그리고 2월 8일 생구산(生駒山)의 동릉(東陵)에서 화장된다. 행기를 뒤이어 양변 스님이 동대사 불업의 총책임자 자리를 이어 받는다. 양변 스님도 앞서 말한대로 역시 백제계의 스님이었다. 백제의 학문승이었다고 한다.(김달수, 『일본 속의 한국문화 유적을 찾아서』, 2, 대원사, 1997)

양변 스님은 먼저 동대사 자리에 금종사를 짓는다. 금취사라고도 했다. 현재 동대사의 별당인 삼월당(三月堂)이 금종사 금당 자리에 해당한다. 금취사는 그즈음 신라의 건축 대가로 불리던 저명부백세(猪名部百世, 708-778)가 지은 것이다. 저명부의 가문은 5세기 중엽에 신라에서 왜로 건너 간 유명한 건축가 집안이었다. 저명부 가문에서 또 한 분의 그 옛날 왜 나라 왕실 목공이던 역사적 인물은 ‘저명부진근(猪名部眞根)이라는 건축가였다. 저명부진근은 큰 돌판 위에다 손도끼를 가지고 나무를 깎았는데, 워낙 솜씨가 빼어나서 도끼가 돌판에 부딪치는 일이 없어 도끼날이 빠지지 않고 항상 말짱했다. 매일처럼 진근은 왕궁에서 궁전 짓는 일을 했다.(홍윤기, 『행기 큰 스님』, 자유문학사, 1996) 그들 모두는 신라의 원효대사(617-686), 의상대사(625-702)와 동시대의 인물들이었다.

동대사 세워지다

751년 9월 동대사의 금당(金堂)인 대불전이 준공된다. 큰 기둥 84본으로 세워졌다. 같은 해 신라의 경주에서는 불국사가 준공되고 있다. 두 절의 나이가 같은 것이다. 이를 볼 때 백제와 신라의 건축가와 조불사(造佛師)들이 동대사의 집짓기에 영향을 주었음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본존인 대불은 이듬해인 752년 4월 9일 개안 공양되는데 금동불로 만들어진 것이다. 구리 74만 근이 들어갔다. 경복(敬福, 638-766)이 이 동불 주조에 크게 시주했다. 경복은 백제의 귀족 창성(昌成)의 친손자로 왜 동북부의 무츠(陸奧) 지방을 다스리던 권력자였다. 불상은 앉은 키 15미터 얼굴 길이가 5미터나 되어 속칭 대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원래의 이름은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이다. 15미터 짜리 불상은 중국의 운강석굴(雲岡石窟, 14-16미터), 용문석굴(龍門石窟, 17미터)에 버금가는 것이다.

“이 불상을 몸소 조각한 조불사는 한국인 국공마려(國公麻呂, 712-774) 조불장관(造佛長官)입니다. 국공마려 장관의 할아버지는 백제에서 덕솔 벼슬을 하던 국골부라는 고관입니다. 그리고 거대한 비로자나대불(毘盧遮那大佛)을 모신 대불전의 웅장한 건물을 지은 절 목공 역시 한국 사람입니다. 그 분은 신라인 저명부백세입니다.… 그러니까 이 동대사 가람은 고대 한국인들이 힘을 합쳐 만든 것입니다.”(홍윤기, 앞책, 1996) 저명부백세는 종5위하라는 고관으로 동대사 건축의 책임자였다. 여기서 국공마려는 국중련공마려(國中連公麻呂)를 말하고, 비로자나대불은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을 말하는 것이다. 동대사의 대불전과 여러 건축물들, 그리고 대불은 백제계의 두 스님의 주도로 백제와 신라의 기술자들이 함께 만든 것이다. 일종의 백제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려판 화엄경 소장

이 큰 절과 불상은 만들어진 지 1백년이 지난 855년 2월 지진과 화재로 파괴된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바닥에 나뒹굴던 불상의 머리 부분은 6년 후인 861년에야 다시 제 자리에 올려 질 수 있었다. 그 일 자체가 큰 일이었다. 이후에도 내전으로 대불전을 비롯한 목조 건물들은 반파, 전파되기를 계속한다. 에도시대인 1709년에도 다시 수리 복원된다. 이미 여러 차례 개보수가 되고 있는 것이다. 메이지 시대인 1868년 3월 28일에는 신불(神佛)분리정책이라는 것이 생겨 동대사는 버려지고 황폐해 진다. 이후 1980년 10월 대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된다. 대불은 불체(佛體) 자체와 대좌(臺座)가 창건 당시의 것이지만 양손과 머리 부분은 당시의 것이 아니고 후세에 계속 보수된 것이다.

오늘 우리가 보는 대불전은 당시의 것이 아닌 1709년 이후의 것이다. 창건 당시 규모의 3분의 2규모 정도로 축소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것도 전면 57미터, 깊이 50미터, 높이 48미터로 세계 최대 규모의 목조건축물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동대사는 일본불교 화엄종(華嚴宗)의 대본산이 되어 있다. 그 안에는 수많은 국보·중요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는데 우리와 관계된 것은 ‘고려판 화엄경 수소연의초(隨疏演義 )’뿐이다. 이 서적(書跡)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행기와 양변 스님의 흔적

이제 동대사 경내로 들어가 보자. 제일 먼저 중층(重層)의 남대문을 통과해야 한다. 역시 중층인 중문(中門)을 거치면 대불전이 나오고 대불을 볼 수 있다. 대불전을 나서 오른쪽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행기당(行基堂)이 있다. 행기당 뒤로는 양변 스님의 어영당(御影堂)인 개산당(開山堂)이 있다. 그 뒤쪽에는 국보인 삼월당이 있다. 그 제일 높은 쪽에는 양변 나무(良弁杉)가 있다.

일본인들은 오래 전부터 행기와 양변을 제사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을 일본 사람으로 알고 지내는 제사였다. 뒤늦게 1263년 3월에는 행기의 사리 공양이 대불전에서 열렸다. 양변 스님은 773년 12월 16일 입적했는데 동대사는 그의 기일을 지금도 잘 지켜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교과서에는 행기와 양변 스님의 이름이 전혀 거론되지 않고 있다. 교과서에 있든지 없든지 두 나라 사람 대부분은 행기와 양변 스님을 잘 모르고 있다. 더구나 그들이 백제계라는 것도-.

 

 

 

 

 

 

파이 서비스가 종료되어
더이상 콘텐츠를 노출 할 수 없습니다.

자세히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