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마스테! 영혼의 여정

인도성지순례 기행문 7일째(최초 설법의 땅 녹야원을 밟다)

보리숭이 2006. 2. 2. 20:00

나마스테! 영혼의 여정 - 7일째 (최초 설법의 땅 녹야원을 밟다)


2006년 1월 16일 월요일(인도 여행 7일째)

여행지 : 갠지스 강 해돋이 보팅/초전법륜지 싸르나트/녹야원,다메크스투파/싸르나트 박물관

글쓴이 : 정경지


가장 인도다운 도시라는 불변의 도시 바라나시(Varanasi).

갠지스 강과 함께 북쪽의 바루나 강(Varuna)과 남쪽의 아시 강(Assi)의 교차지점에서 유래되었다는 여러 설 중 하나.

젖줄과 같은 갠지스 강(Ganga)이 흐르고,

삶과 죽음이 함께 있는 도시.

이른 새벽부터 순례객으로 붐비고,

힌두교와 회교, 불교의 오랜 전통이 공존하는 도시.

장기 체류하는 외국 여행객이 가장 많은 도시.

미국의 대문호인 마크 트웨인조차 ‘역사보다, 전통보다, 전설보다 오래된 도시’라 했다.

인도 제일의 전통 교육도시(철학, 산스크리트어).


해 지면 나다니지 말라는 곳이 바로 바라나시다. 짜이 한잔 하면서 동트기를 기다린다. 밖은 아주 차가운 날씨건만 사람들의 열기로 숨쉬기도 버겁다.

어제 저녁 싸이클 릭샤를 타고 저녁의 매큼한 공기를 가르며 다사스와멧 가트로 향했던 것이 생각난다. 어둠 때문인지 모든 것이 신비롭기만 했었는데...

사람들을 대신해 브라만들이 복을 빌어준다는 뿌자의식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오늘 아침, 짙은 안개가 우리를 맞이한다. 동틀 무렵이 가장 바쁘다는 바라나시. 갠지스 강의 일출과 순례객들 모습을 보기 위해 이른 새벽 가트(Ghat)로 향한다. 바라나시를 찾는 순례객들에게 갠지스 강에 몸을 담그는 의식은 필수적이기 때문에 강으로 내려가는 계단 길인 가트가 100여 개나 있다


흥선 스님의 제안에 따라 조그마한 양초가 들어 있는 꽃 모양 접시를 사서 불을 밝힌 후에 갠지스 강의 여신에게 등불 공양을 올리게 되었다. 부디 우리의 인도 여행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바라며...

우리 21명에게 꽃 양초 접시를 팔았던 인도 소녀의 사진 한 장을 본다. 21개에 2달러 50센터라고 하는데 3달러를 주었더니 얼마나 기뻐하는지...


< 이른 아침 꽃양초를 파는 아이 모습 >

- 나뭇잎 보울안에 양초, 금잔화, 장미, 여러 개 하얀 꽃잎을 서로 엮어 만든 목걸이형 꽃들이 들어 있음

- 띄워 보내면서 소원을 빌어도 좋다.

 

 

< 갠지스 강 일출광경을 보기위한 보팅 >

- 하얀 꽃잎을 엮은 화관을 머리위에 얹은 우리 보살님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아직 어둡고 차가운 날씨건만 많은 사람들이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강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 곳곳에서 소원을 담은 촛불과 꽃을 띠워 보낸다. 이곳은 배를 타고 오르내리며 가트를 구경하는 여행객들이 많다.


배를 타고 안개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반나체 순례객의 목욕하는 모습이었다.

완전히 옷을 벗은 남자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민망한 생각에 얼굴이 붉혀져 왔으나 점점 힌두교인들의 의식을 받아들여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완전 나체는 아니었다. 가는 팬티를 입고 있었다.

 '사두'라고 불리는 힌두교 수행자들만이 먼저 강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두는 출가해서 명상과 고행, 탁발의 삶을 산다. 그 중 옷을 입지 않고 수행하는 사람을 '나가사두'라고 한다. 나체는 이제 세속의 모든 욕망을 벗어 버렸다는 것을 상징한다.
 

< 힌두교인들이 가트에서 목욕하는 모습 >

- 모든 죄를 씻음을 의미하며 정신의 때를 씻어내고 정화시키는 종교적 행위

- 머리는 항상 동쪽을 향하고 만트라(Mantra, 기도 진언 주문)를 외운다.


 나가사두가 되고 싶다고 해서 바로 옷을 다 벗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각 종파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3년 동안 수련해야 비로소 전신 나체 수행자가 될 수 있다. 사두들은 이마에 '띨락'이라고 하는 가로 및 세로의 독특한 문양을 그려 넣는다. 이것은 쉬바파, 비슈누파 등의 종파를 구분하는 표시이기도 하다.


 인도인에게 이마의 중간지점은 신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곳에 제3의 눈 또는 지혜의 눈이 있다고 믿는다. 힌두교에는 갠지스의 왼쪽 강둑에 신체의 일부를 두고 오면 신들이 사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입욕(入浴)하기 전에 머리를 깎아 그 머리카락을 모래사장에 남긴다. 해가 어둑해 지면 사람들은 촛불을 켜서 갠지스 강에 띄운다. 그것은 강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표시이다.


어제 저녁에 들려 본 갠지스 강을 새벽의 안개를 제치고 일출을 보기 위한 부지런함을 보였으나, 너무나 짙은 안개로 건너 편 황하사 모래톱에도 가지 못하고 강에서 빙글 빙글 돌다가 아쉬움을 발길을 옮겼다.


아침 7시 30분경에 시내를 걸어 힌두와 무슬림의 종교 경계선이 되는 곳에 갔다. 무장한 군인인 듯한 사람들에 의해 사진기는 수거 당하고 긴장 속에 종교 분쟁의 현장을 보듯 분위기가 오싹하였다.

900kg의 순금으로된 골든 탬플이 있었고 이를 쇠철장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때 당시 한국에서는 이곳의 분쟁을 뉴스로 보도됐다는 후문도...1992년, 2002년의 구자라트 종교폭동의 다음 수순으로 바라나시가 가장 유력하다는 심각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힌두와 무슬림의 종교 공동체(religious community)를 중심으로 형성된 대립과 갈등의 축은, ‘만달 정책(Mandal Policy)’을 계기로 인도사회의 전면에 드러난 카스트를 축으로 한 대립과 더불어 현대 인도사회의 폭력화와 분열을 초래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1992년 12월 힌두 성지인 아요디야(Ayodhya)에서 힌두 민족주의 집단이 이슬람 사원을 강제로 파괴한 사건을 시발로 봄베이(Bombay)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번진 힌두-무슬림간의 대규모 폭력 충돌이나, 2002년 2월 인도 서부의 구자라뜨주(Gujarat)에서 발생한 두 집단간의 대규모 폭동 사태는 현대 인도에서 종교를 축으로 한 대립과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들이었다.

이렇게 한편으로 힌두-무슬림간의 갈등을 축으로 하는 대립과, 다른 한편으로 상층과 하층 카스트간의 갈등을 축으로 하는 대립은, ‘만달 대 만디르(Mandal vs Mandir)’라는 구호로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하층 카스트 성원들을 정책적으로 우대한다는 ‘만달 정책’은, 인도사회를 상층 카스트 집단들과 하층 카스트 집단들로 양분시켜 두 집단간의 대립과 폭력 충돌을 심화시켰다. 이와 더불어, 아요디야의 바부르 사원(Babri Masjid)을 허물고 그 자리에 힌두 신화의 영웅이자 비쉬누(Vishnu)의 화신으로 숭배되는 람(Ram)의 사원을 짓겠다는 공약을 내건 ‘만디르 정책’은, 인도사회를 힌두 대 무슬림의 대립 구도로 분열시키고 있다.


긴장된 분위기도 잠시 등교길의 학생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다른 인도인과는 다르게 단정한 복장을 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돋보였다.
 

< 등교하는 인도 바라나시의 학생 >

- 길거리의 사람들의 인상과 전혀 다른 매우 정갈하고 품격 있는 학생 모습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고 처음으로 설법했다는 사르나트를 향했다. 바라나시에서 12Km. 오토릭샤로 1시간 미만의 거리. 이곳에는 석존의 최초 설법을 기념하는 한국, 일본 등 각국의 사원들이 산재해 있다. 바라나시의 분주함과 달리 한적한 곳이다.


처음 방문한 곳은 차우칸디 스투파 (Chaukhandi Stupa)이었다.

  부처님을 맞이한 곳에 세워진 탑이라 하여 영불탑(迎佛塔)이라고도 한다.

사르나트 박물관에서 사르나트 마을 쪽으로 3-400m 쯤의 거리에 위치한 탑으로 5세기 경 굽타왕조에 건립된 것이다. 5명의 수행자가 부처님과 만났던 장소를 기념하기 위한 탑이다.

맨 위에 있는 팔각형의 탑 아래에 벽돌을 층층으로 쌓아 올린 부분이 영불탑의 유적이다.

지금은 이렇게 허물어진 흙더미 같은 모습이나 7세기 중엽 현장 스님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300여척(약 100m)이나 되는 장대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위의 팔각형 탑은 1588년에 이 지방의 태수였던 고바르단이 당시 무굴제국의 악바르 황제가 이곳을 방문한 기념으로 세웠다고 한다. -인도불적답사기(윤호진 지음, 불교시대사) 참조-

 

 

< 영불탑에서의 단체사진촬영 >

- 오른쪽에 보이는 분은 현지 로컬가이드로 현지가이드 아난드와 함께 친절을 보임(백승환샘은 단체사진촬영 중)


 싯다르타는 나이란자나 강에 들어가 몸을 씻고 나오려다 기진하여 강에서 나오지 못했다. 마침 강가에 서있던 나무의 수신(樹神)이 나뭇가지를 기울여 주어 그것을 잡고 겨우 강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싯다르타는 6년에 걸친 극심한 난행(難行)과 고행(苦行)으로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져 있었다.


다행히 가까운 마을에 살고 있었던 수자타라는 처녀로부터 우유죽을 받아 먹고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당시 채식위주의 수행 풍토에서 볼 때 우유죽을 먹는다는 것은 이단 중에 이단이었다. 다섯 비구는 태자가 우유죽을 먹는 광경을 목도하고는 '태자는 타락했다.'며 그곳을 떠나와 녹야원에 자리를 잡았다. 계속하여 고행(苦行)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았던 그들은 간혹 싯다르타의 이야기가 나오면 그의 타락을 비난하기도 했다.


부처님께서 녹야원에 도착하시던 날,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멀리서 걸어오는 싯다르타 태자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타락한 사문에게는 먼저 알은 채를 하지 말자고 얼른 서로 의논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을 대한 그들은 어떤 형언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공손히 머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가까운 곳에 녹야원이 있었다.

녹야원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흐르는 시간이 붙잡아 둘 수 없고, 그래서 무상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철저히 부셔질 수 있을까. 대부분 회교도의 침략으로 인하여 유실되었다고 하니 유일신(唯一神)을 믿는 종교의 순수성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야만성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몇 해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자행되었던, 불교문화를 뛰어 넘어 세계 인류의 문화유산이었던 다미안 대불을 폭파하는! 이교도의 만행을 떠올리게 되었다.


부처님께서 '위없는 깨달음'을 처음 설하셨던 녹야원, 그러나 다메크 스투파(Dhamekh Stupa)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 있었다.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설법한 장소에 세웠다는 다메크 스투파는 붉은 벽돌을 구워 만들었다. 2단으로 구성된 원통형의 모양인데, 꼭대기 부분은 무너져 버리고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탑의 크기는 지름이 28.5m, 높이 33.53m(기단까지 포함하면 41.06m)에 달한다. 지금 남아 있는 모습도 장엄한 아름다움과 함께 당당하기만 한데 원래의 모습은 얼마나 웅대하였을까?


기록에 의하면 다메크 대탑은 마우리아 왕조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굽타 시대에 보완되어 오늘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1835년에 커닝햄이 탑 내부를 조사하다가 법신게(法身偈)가 새겨져 있는 석판(石板)을 발견했는데, 법신게의 글자의 모양이 500년경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한다. 이로써 다메크 스투파의 건립 연대를 대체로 6세기 이전으로 추정하는 발판이 되었다.

감실에 모셨을 불상도 없고, 외벽의 문양들도 회손이 심하지만, 그래도 원형을 거의 유지하고 있어 녹야원을 찾은 순례객의 마음을 그나마 평온하게 감싸 위로해준다.


다메크 스투파의 아래층에는 빙 둘러 연꽃 문양 등 여러가지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져 있고, 중간에는 8개의 감실이 만들어져 있다. 부처님께서 다섯 비구에게 처음 설법 하셨던 팔정도(八正道)를 뜻하는 것 같은 감실에는 본래 감실마다에는 1956년까지 굽타 시대의 불상이 모셔져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빈 공간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다메크 스투파 앞 풀밭에 섰다.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들을 묻혀온 신발을 벗었다. 맨발이 되어 태고(太古)의 무(無)로 돌아갔다. 순간 발바닥을 통하여 들어와 온 몸으로 퍼지는 한 가닥 청량한 기운을 느꼈다. 이때 받아들인 기운은 성지 순례하는 동안 내내 지치지 않고 나 자신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부처님을 뵈옵는 듯한 간절한 마음이 되어 조촐한, 그러면서도 참으로 장엄한 인도 성지 순례를 부처님께 고하였다. 다메크 스투파를 돌며 부처님을 찬탄하는 석가모니불 정근을 모셨다. 우리들 각자의 가슴 속에 부처님을 향한 법향(法香)을 사루기에는 충분하였다.

다메크의 뜻은 ‘진리를 본다’(法眼)을 말함이란다.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원달러’를 외치는 인도 꼬마들이 사슴먹이를 팔려고 우리 일행들을 따라 다닌다. 사슴농장에는 사슴들이 유유자적하게 놀고 있었고, 그 옆쪽으로는 스리랑카 사원이 있었다.


< 다메크 스투파에서 >

- 스투파에 새겨진 문양이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다.

- 초전법륜을 기념, 온전히 보존됨에 의미가 큼

- 다메크 스투파를 마주하고 법문을 듣고 있는 모습

- 흥선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는 모습 


다메크스투파가 보이는 그늘진 곳에 자리잡아 다시 한번 흥선스님의 법문을 듣는 영광을 가졌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보드가야에서 성도 후 8시간 걸려 바라나시에 도착하셨으며, 바라나시의 녹야원까지 7일-10일정도 걸어서 오셨습니다. 여기서 한 때 같이 극심한 고행을 하면서 수도한 5비구를 만나서 설법을 하신 상당히 의미심장한 곳으로서 먼저 크게 大覺을 하신 후 중도, 사성제, 팔정도는 연기 사상과 가장 기본적이면서 궁극적인 것과 통함을 설법합니다. 이는 신행생활에 필수이면서 실천이 중요합니다.”


또한 흥선스님께서는 3일째 안개낀 아침에 쉬라바스티 수닷타장자 집터와 앙굴라말리 집터를 둘러보고 하신 말씀인 ‘백장야호’란 화두를 가지고 ‘불락인과’와 ‘불매인과’에 대한 내용을 부처님이 제일 먼저 설법한 내용으로 다시 한번 말씀해 주셨다.


"화두 중에 백장야호(百丈野狐)란 것이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 백장 스님이 대중을 거느리고 법문을 하시는데 평소에 보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신의 사연은 무엇이길래 설법을 듣고 사라지는가?’하고 그 이유를 물었더니, ‘道를 이룬 도인도 因果를 받느냐’고 한 학인이 묻기에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고 했다가, 그 과보로 500생 동안 여우 몸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백장스님이 그 노인에게 다시 자신에게 물으라고 했어요. ‘道를 이룬 도인도 인과를 받느냐’고 묻자, 백장 스님이 ‘因果에 어둡지 않다(不昧因果)’고 하자 크게 깨쳤다고 합니다. 즉 ‘인과는 철저히 관철된다’는 것입니다. 因果에 순응하고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앙굴라말리 집터앞에서 앙굴라말 리가 악행을 한 후 부처님을 만나 道를 이루었지만 맞아 죽음은 바로 不昧因果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5일째 영축산에서 법문하신 성별(聖別)과 성소(聖所)에 대한 내용을 말씀해 주셔서 그 개념이 바로 잡혔다고나 할까.


“그래서 여기 녹야원은 성별이 일어난 성소가 됩니다. 성소는 성별 그 자체로도 되지만, 둘째는 중생들의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이 모일 때도 성소가 됩니다. '도정석불자신령(道精石佛自神靈)'은 중생들의 간절한 원, 바람, 도가 크다면 어떤 대상은 聖別이 일어난 성소가 된다는 뜻의 이란 말이 있습니다.

보드가야 대탑이 바로 성별, 성스런 자리인 것은 오체투지, 전신투지, 염불 등 신앙 표현을 할 수 있는 성스런 자리인 것입니다. 셋째 진리가 아름다움과 만나는 곳이 聖別이며 아름다움은 감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보드가야 대탑의 부조 솜씨는 수준 미달로 아쉬움이 있으며 성스러움이 아름다움과 만나야 성별이 될 것입니다. 열반당 안의 염불소리 메아리가 스님으로서는 아쉬웠으며 시멘트 건물로 아름다움과 만나지 못하였으며 6m 불상의 성스런 장소가 훼손되었으며 아름다움이 필요하며 많은 노력과 힘, 지혜를 모아서 세계적인 프로젝트를 해서 훨씬 성스러워야 불교도로서 자부심을 가져야 하며 이 모든 것들은 자기만의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흥선스님의 법문을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접하는 저로서는 감동 그 자체였으며 행복이었다.


고고학박물관(Sarnath Archaeological Museum)에는 불교보호자에 의해서 알려진 아소카왕이 만들었던 석주(돌기둥)의 머리의 꼭대기부분에 있었던 4마리의 사자상의 석상(인도의 국장이 되어서, 지폐에 인쇄가 되어있다)등 문화적 종교적인 가치가 높은 물건 등이 다수가 전시되어있다. 관내의 촬영은 금지되어있다.

 

흥선 스님께서 불상에 나타난 여러 양식 변화 과정을 말씀해 주셨다. 박물관에서 많은 부분을 알고 볼 수 있는 행운을 가져봤다.


호텔에서 점심 공양시간에 이정수 법우님의 조촐한 생일 축하 파티가 있었다. 이국땅에서의 생일이라 감회가 남달랐으리라.. . 생일 축하합니다. 올 한해 더욱 행복하시고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기차역으로 가기 전에 인도 지도가 있는 힌두사원인 바라트 마타 사원을 들렀다. 신상대신에 인도의 양각 지도가 새겨져 있었으며 마치 우리나라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는 듯한 그리고 실크로드 길도 지도에 나타나 있었다.

 

< 인도의 양각 지도가 있는 힌두사원에서 관람하는 모습 >


다음 행선지는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 기차역에는 아그라로 가는 한국의 단체 여행객들이 많이 보인다. 이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바라나시에 대한 인상도 극과 극을 달린다. 똥오줌과 더러움 등 다시는 방문하고 싶지 않은 도시라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삶과 죽음, 인생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도시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꼭 다시 찾고 싶은 곳이라는 사람들도 있다. 좋건 나쁘건 바라나시는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 도시임에 틀림없다.


< 아그라로 가는 기차역의 모습 >

< 침대열차에서 이스라엘 모녀와 함께 >

- 그녀들의 배낭은 모녀 몸무게의 2배 이상이었다.


기차역의 포터들이 여행가방을 머리위에 3개, 팔에 각각 1개씩을 들고 마치 곡예하듯이 운반을 해주는 모습이 노동의 가치가 있고 팔이 아픈 나로선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 밤은 기차에서 잠을 자야한다. 12시간 정도를 침대열차에서 지내야 한다고 한다. 사실은 기차가 연착하여 15시간을 지내야 했다. 기차에서 물을 마시다 그만 배탈이 나고야 말았다. 항상 인도에서는 물을 조심해서 마실 필요가 있다.

열차의 화장실은 웨스턴 스타일과 인디언 스타일의 두 종류인데, 양쪽 다 화장지는 없고 손잡이 달린 물 컵이 수도꼭지 밑에 놓여 있다.


아그라의 쉐라톤 호텔에서의 조식을 건너 뛸 만큼 도착시간이 많이도 흘러갔다. 그래서 누군가 그랬다.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외쳐대던 'No Problem'...


불교 4대 성지순례와 아그라의 타지마할 관광의 좋은 추억이 벌써 모두 그리워진다.

언제가 될는지 모르지만 다시 인도를 가게 될 것만 같다.

이번에 경험한 여러 가지 일들을 바탕으로 좀더 인도를 즐기지 않을까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