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 14일 토요일(인도 여행 5일째)
여행지: 날란다 대학, 영취산, 왕사성 터, 빔비사라왕 감옥터, 부다가야 글쓴이: 권오웅
비록 고층 건물은 보이진 않지만 큰 규모의 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무능한 주(州) 정부 관리 때문에 1백만이나 되는 파트나의 서민들은 힘겨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여행 안내서엔 기록되어 있다. 가슴 아픈 일이다. 도시를 벗어나려는데 다시 안개가 몰려왔다. 안개 속에 보이는 야자수의 모습이 환상적으로 다가왔다. 차창 밖의 이국적인 풍경을 넋을 놓고 보다가 오늘 갈 곳에 대한 안내 방송을 하게 되었다. 이금미 선생님의 실수 덕분에 발표하고 싶었던 장소에 대해,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도 더 준비하게 되어 이금미 선생님에게 고맙게 생각되었다. 차 안에서 안내 방송이 끝났을 때 박수 소리가 꽤 있었던 것으로 봐서 발표를 못하지는 않은 듯 하니, 오늘 여행길에 조금은 도움이 된 것 같아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여기 저기 숲이 있는 끝없는 평원을 달려 9시 10분경에 날란다 대학 입구에 도착하였다. 날씨는 좋았다. 다른 날 이 때 쯤은 안개 속이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앞으로 긴 숲길이 이어지고 저 멀리 붉은 벽돌 건물이 위용(偉容)을 드러낸다. 숲 속에 자리한 참으로 아름다운 대학 캠퍼스였다.
이 곳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쓰고 중국 역경사(譯經史)에 신역(新譯)의 역사를 연
현장(玄奘) 스님이 당 태종의 만류를 뿌리치고 따르는 사람 40여명을 데리고 서역길을 오다가 천신만고(千辛萬苦) 속에 40명을 다 잃어버리고
홀홀 단신(單身)으로 와서 공부했다던 그 대학이더란 말인가? 그런데 현장스님에게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인도 길을 떠나기 전에
꿈을 꾸었는데 강물을 건너려고 발을 내밀 때마다 연꽃이 솟아 자리를 만들고 다 건너니 높은 산이 솟아 있었는데 저절로 그 높은 산에 오르게
되더라는 것이다. 현장 스님은 험난하기 짝이 없는 서역 길을 가다가 어느 낡은 절에 이르니 노승(老僧) 한 분이 병으로 누워있었다. 준비한
비상약(非常藥)으로 극진히 간호해 주니 떠날 때 범본(梵本) 경(經)을 한 권 주더라고 한다. 그런데 인도 접경에 이르렀을 때 사람을
희생물(犧牲物)로 삼아 제사지내는 무리를 만나 꼼짝없이 결박되어 제물(祭物)로 바쳐질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자 현장 스님은 노승에게서 받은
경을 한 번이라도 읽게 해 달라고 청하여 그 경을 읽으니 갑자기 천둥소리 일고 비바람이 일어나자 그 무리들은 놀라 현장을 풀어 주었다고 한다.
뒷날 고국으로 돌아올 때 그 노승을 만난 곳을 찾았으나 그 곳을 끝내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노승에게서 받은 경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
한다. 우리가 지금 독송(讀誦)하고 있는 반야심경은 현장이 번역한 것이다. 현장 스님은 이 날란다 대학에 18년간 유학하고 부총장의 지위에까지
오르고 귀국하여 많은 불경을 번역하였었다. 이 날란다 불교 유적은 부지가 세로 5㎞ 가로 11㎞에 달하였는데 7세기 현장
법사(法師)가 머무를 동안 1만 여명의 학승(學僧)이 있었고 교수는 1천 5백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한창 전성기엔 학승(學僧)이 5만 여명이
되었다고 한다. 신라(新羅) 고승(高僧) 혜업(惠業), 현태(玄太), 현각(玄恪)과 아르야발마 등이 이곳에서 공부하였다는 사실이 7세기
의정(義淨)의 대당 서역 구법 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기록되어 있다 한다. 그 외에도 많은 삼국시대 구법승(求法僧)들이 이곳에 와서
공부하였으리라. 혜초(慧超) 스님이 서역을 거쳐 인도에 갔다가 중국에 간 사실로 미루어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세계
곳곳을 누비는 한국인의 정열은 이 분들의 구법의 열기와 통하는 면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 뜨거운 구법의 열기를 오늘날 사회 각 부분에
잘 되살린다면 한국의 앞날은 한결 밝지 않을까? 이 곳은 힌두교 등 다른 종교, 철학, 수학 등 전 학문을 가르친 세계적인 종합 대학이었다. 인도의 네루 수상이 그 당시 날란다에 유학한다는 사실은 교양 증명서라고 한 말이 결코 빈 말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오늘날의 하버드, 옥스퍼드에 비견되는 대학이었으리라. 건물 구조는 'ㅁ'자 모양의 빈 공간 둘레로 방이 삥 돌아가며 있는 방식이다. 방의 문은 가운데로 향해 나있다. 이런 식으로 2층이나 3층을 올린 구조이다. 가운데 'ㅁ'자 모양의 빈 공간엔 우물이 있었다. 이런 기숙사 건물이 죽 이어져 지어져 있었다. 방안을 보니 침대 자리가 선명(鮮明)하였다. 또한 기숙사 안에는 부처님을 모신 공간과 강당이 있었다고 한다. 아래층에는 식당 건물로 추정(推定)되는 곳도 보인다. 건물 뒤쪽으로도 학생들이 기거(起居)했던 방이 많이도 보였다. 건물 뒤에는 사리불의 사리탑이 웅장(雄壯)하게 서 있었다. 사리불의 고향이 이 고장이기 때문에 세워진 듯하다. 사리탑 왼쪽 앞부분 중간 길가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이 날란다 대학 유적이 발굴되는 과정의 사진이 게시되어 있었는데 사리탑이 발굴되는 과정과 사리탑 원래 모습 추정도도 그려져 있었다.
사리탑 원래 모습은 중앙에 사리탑이 위치하고 네 귀퉁이에 불상 조각이 들어 있는 기둥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재 건물 유적에는 앞쪽 두 곳
기둥만이 보였는데 기둥에는 불상을 배치할 수 있는 네 단의 공간이 조성되어 있었다. 제일 윗단에는 아아치형 감실 안에 큰 불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아래 둘째 단에는 불상이 봉안되었던 네모진 감실이 왼쪽 기둥에는 세 개, 오른쪽 기둥에는 네 개만 남아 있고 셋째 단에는 아름답게 조각된
아아치형 감실이 왼쪽에는 세 개, 오른 쪽에는 네 개인데 불상이 봉안되어 있었다. 네 째단에는 왼쪽 기둥에는 세 개, 오른 쪽
기둥에는 네 개의 입상이 네모진 감실에 조각되어 있었다. 기둥에 새겨진 조각들은 아름답게 느껴졌다. 넓게 펼쳐진 대학 유적을 돌아다녀 보고,
건물 뒤쪽 길도 걸어보고,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으리라고 추정되는, 잔디 깔린 공간도 바라보고, 남은 유적 높은 곳에도 올라가 보며 옛날의
화려했던 시절의 모습을 떠올려 보고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실감하기도 했다.
입구로 가는 숲길 옆길에는 오늘도 부겐베리아라는 꽃이 변함없이 아름답게 피어 나그네의 심회를 달래주고 있었다. 10시 50분경 버스에 오르려는데 주위에는 여느 성지(聖地)처럼 구걸하는 어린이들, 어른들, 물건을 팔려는 아이들이 뒤섞여 다가와 마음을 몹시도 아프게 하였다.
여행기에서 보았던 영취산 향실(香室)이 뚜껑 없는 사각형 모자를 올려놓은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부처님 설법 장소라 생각하니 왠지 정겹게 느껴진다. 조금 올라가니 왼쪽에 리프트가 오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일본인이 영취산 맞은편 봉우리에 세운 다보탑(多寶塔) 쪽으로 올라가는 리프트들이었다. 비교적 널찍하게 닦여진 산길을 봄 산행하듯 가볍게 오르면서 오른쪽으로 펼쳐진 숲으로 푸른 분지를 보노라니 그 예전 번성했던 왕사성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산은 나무는 꽤 있었으나 척박한 땅임을 알 수 있었다. 4~500 미터쯤 올라가자 왼쪽 위로 다보탑이 있는 봉우리가 높게 보이고 정면에 비교적 높은 봉우리, 오른쪽에 부처님이 설법(說法)하신 향실이 가까이 바로 위로 올려다 보이는 곳이 나타났다. 여기서 향실 가는 길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C자 모양으로 굽어진다. 지금은 비록 그 길이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지만 그 옛날 이 길로 빔비사라왕이 부처님을 뵙기 위해 오르내렸던 길이다. C자 길을 따라 오르노라니 아난다와 사리불이 수도(修道)하던 굴이 보였다. 들여다 보니 각각 한 사람은 족히 수도하기 좋은 장소였다.
목갈리나 수도 굴, 마하 가섭 수도 굴, 데바닷타가 부처님께 돌을 굴렸다는 높지 않은 절벽은 확인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 곳을 지나 바위 있는 곳을 돌아 층계를 오르는데 향실 입구 오른쪽에 독수리 모양의 바위가 보인다. 영취산(신령스런 독수리 산)이 영취산이란 이름을 얻게 된 연유를 알 것 같다. 우리나라 통도사(通度寺)도 그 의미가 여러 각도로 풀이되지만 그 중 하나가 이 영취산과 모습이 통하는 산에 있는 절이라는 뜻이다. 통도사가 위치한 산 이름도 영취산이다.
그곳을 지나니 향실 공간이 나타나는데 누군가 꽃 목걸이와 향을 준다. 가만히 보니 이것을 빌미로 돈을 시주하게 하려는 행동이었다. 왠지 씁쓸했다. 향실 부분은 조그만 봉우리 꼭대기인데 지금은 가로 10미터 세로 20미터 정도의 공간에 시멘트로 바닥을 깔고 일부는 벽을 만들어 네모진 공간을 만들고 앞 부분에는 조금 단을 높여 부처 사진을 봉안하고 그 단 아래서 향을 피우게 하고 있었다. 그 공간에 사람들이 앉는다면 공간 동쪽 부분에 바위가 있는 곳도 조금은 있어 4,50명은 앉을 수 있을 듯 했다. 우리 금강회 회원들은 이 곳에서 나무 묘법 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을 같이 외우고 반야심경을 같이 독송하고 이어 참선(參禪)도 해 보면서 법화경(法華經)(妙法蓮華經), 보적경, 무량수경(無量壽經) 등 많은 경을 설하였고 염화시중(拈華示衆)이란 말의 유래지인 영취산에서 옛 부처님 당시를 회상해 보았다. 뜻깊은 자리였다.
이어 스님에게 법문을 청하여 들었다. 이야기가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이야기가 달빛에 물들면 전설이 된다는 말을 시작으로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갔기에 골고다 언덕은 성스런 언덕이 되었고 이 곳에서 부처님이 설법하셨기에 이 곳이 성스런 곳이 되었다는 '성별(聖別)'이라는 용어에 대한 법문과 칠엽굴에서의 제1차 경전 결집은 아난이 외우고 모인 모든 사람이 모두 함께 외우는 결집이었다는 사실과 바이샬리에서의 2차 경전 결집 때는 승려들의 계율에 관한 문제로 상좌부와 대중부가 나뉘졌었는데 이것이 대승불교 흥기(興起)의 싹이 되었다는 법문이 있었다.
이어 주변 경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데 맞은편 봉우리에 일본인이 세운 다보탑이 썩 좋게 보이지 않았다. 원래 부처가 이 곳에서 법화경을 설할 때에 땅 속에서 탑이 하나 공중으로 까마득히 솟아나고(多寶塔) 다보여래(多寶如來)가 나타나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이 옳다는 증명을 하였다는 사실이 법화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사실을 바탕으로 법화경을 신봉하는 일본인이 다보탑을 그리워하여 영취산 앞산을 다보산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 다보산의 정상에 산치 대탑을 본따 다보탑을 세웠다고 한다. 경주 불국사 법당 앞에 다보탑과 석가탑이 있는 것도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할 때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왕사성 가장자리에, 터 알 수 있게 돌로 쌓은 사방 60 미터의 정방형의 터만 남아 있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8년 전에 빔비사라 왕은 여기에 유폐(幽閉)되어 늘 영취산 바라보며 부처님께 예배하다 굶어 죽었다고 한다. 왕비가 면회갈 때마다 음식을 갖다주자 어머니도 아들이 감금했다고 한다. 여행사 팀장은 왕비가 몸에 꿀을 발라 왕을 면회했으며 왕은 이렇게라도 연명하다가 말발굽 소리에 자기를 죽이러 오는 줄로 지레 놀라 스스로 자결했다는 전설도 있다고 했다. 감옥터에서 바라보니 영취산 향실이 너무도 잘 보였다. 부처님 계신 곳 하염없이 바라보았을 빔비사라왕을 생각하니 왠지 스산한 마음 일어남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들어가 보니 우리나라 대나무 보다 못한 대나무들이 빽빽이 난 곳이 여기 저기 조성되어 있고 딴 나무들이 군데군데 서 있는데 북쪽으로 연못만이 조금 크게 덩그런히 마련되어 있었다. 그 옛날 부처님이 설법하셨을 때의 아늑함과 화기로움이 넘치는 공간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못내 애석(愛惜)했다. 연못을 뒤에 두고 단체 사진을 찍고 대나무 밀생지(密生地)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 것으로 마음을 달랠 수 밖에 없었다. 이곳 대나무 중에는 가시가 난 것까지 보이는 것이 특이했다.
버스는 다시 왕사성 성내(城內)로 들어가 바로 남쪽으로 달린다. 구릉 지대와 평지를 한참 지나가니 왕사성을 둘러싼 산을 양쪽으로 보며 왕사성 지역을 벗어나게 되었다. 양쪽 산에는 돌을 쌓은 성(城)의 남은 자취가 남아 있었다. 죽림정사 쪽으로 통하는 북쪽 통로와 남쪽으로 나가는 이쪽 통로만 막으면 왕사성 안은 그야말로 철옹성(鐵甕城)이 될 것 같았다.
이어 남서쪽에서 흘러와 왕사성을 둘러싼 산을 휘감아 흐르는 강이 눈에 띄었다. 폭이 70~80 미터는 됨직한 이 강은 건기(乾期)라 모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기(雨期) 때는 상당한 수량의 물이 흐를 것같이 보였다. 왕사성 안이 물이 부족한 것이 흠이었다는 말이 있는데 아마도 이 물은 왕사성에 중요한 물 공급원이 아니었을까 짐작되었다.
뒷날 수자타가 공양을 올리던 자리에 절이 세워져 수자타의 공덕을 기리고 수자타가 살던 집터에는 탑이 세워졌다 한다. 수자타 탑을 보러 마을 쪽으로 조금 더 걸어 들어갔다. 꽤 큰 탑이 이미 여러 곳에서 봤던 것처럼 벽돌로 층계 지어 쌓여 있었다. 언덕처럼 변한 것을 발굴했다 한다. 탑 한 쪽 구석에는 발굴한 흔적을 남겨두고 있었다. 수자타의 아름다운 행동을 생각하고 유미죽을 받아먹는 부처를 타락했다고 무시하고 길을 떠났던 다섯 비구가 생각났다. 이 곳에서는 북동쪽 십리 쯤에 전정각산의 힘차게 솟은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수자타 탑 앞 언덕에도 올라 보니 거기서도 전정각산이 힘차고 아름답게 보였다.
조재숙 선생님은 마이산(馬耳山)이 연상된다고 했다. 힘찬 모습은 통하는 듯 했다. 힘차면서도 아름다운 전정각산에 눈을 떼지 못하고 보다가 버스 있는 데로 오는데 강 건너 대보리 대탑 사이로 지는 해가 아름답게 보였다. 옆에 있던 여행사 팀장은 몇 번이나 이 장면을 보려 하였으나 못 보았다고 하면서 사진기의 셔터를 누른다. 조재숙 선생님과 낙조를 찍느라 시간을 보내고 가까이에 있는 차로 걸어와 차에 오르니 일행 중 일부 시선이 곱지 않은 듯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그렇게 낙조(落照)를 찍는 동안 버스에 있는 분들은 구걸하는 아이들에 시달린 듯 했다. 우리 때문에 버스가 빨리 출발하지 못해 미안할 뿐이었다.
버스는 바로 대보리 대탑 부근으로 달렸다. 대보리(大菩提) 대탑(大塔)은 위쪽에 화살을 빽빽이 꽂아 놓은 듯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는다. 보수 공사 중임을 알 수 있었다. 기원전 3세기 아쇼카 왕이 부처님 성도(成道)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52(55)미터에 이르는 이 9층탑에는 탑신의 감실(龕室)마다 수많은 불상(佛像)이 봉안돼 있다. 아래쪽이 정사각형으로 올라갈수록 좁혀진 방추형의 이 탑은 5세기경 증축되었고 지금의 탑은 7세기에 다시 증축된 것이라 한다. 10세기말 이슬람 군대가 인도에 침입했을 때는 이 탑을 지키기 위하여 흙을 쌓아 올려 이 탑을 덮어 보호했다고 한다. 이후 1890년 영국인 버킹함이 이를 발굴하기까지 600여 년의 긴 세월동안 이 탑은 흙 속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대보리(마하보디) 대탑이 분지에 세워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탑을 덮었던 흙을 걷어내어 둘레에 쌓아 놓았기 때문이라 한다. 이 대탑은 힌두교의 손에 들어갔다가 1953년 5월에야 불교도 관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대보리 대탑 쪽으로 들어가려니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했다. 덧버선을 제 때에 챙기지 못한 아쉬움을 여기에서도 느끼며 대보리 대탑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보리 대탑이 정면으로 보이는 계단에서 일행 전체 사진을 찍고 바로 탑 1층 방 속에 모셔진 부처님 계신 곳으로 갔다. 이 때가 5시 35분경이다. 부처님을 참배하려 하니 탑이라서 그런지 장방형의 아아치형 공간을 지나 깊숙한 곳에 부처님이 위치하고 있었다. 1층 대탑 정중앙의 큰 감실은 법당으로 꾸며져 있었다. 공간은 20여명도 채 앉지 못할 정도로 좁았다. 참배하는 분들이 많아 차례를 기다려 참배하고 보니 부처님은 우리나라 불상 같은, 눈을 살포시 감은 잔잔한 미소 머금은 모습은 아니었다. 불상 뒤에는 부채살 모양 같은 연꽃 무늬의 광배(光背)가 있었다.
불상 앞에 있는 둥근 돌로 된 곳도 손으로 만져 보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곳은 시바의 상징인 링가가 있었던 곳이었다. 여행사 팀장은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곳일 것 같다고 했다. 탑 뒤의 보리수 나무 위치로 보아서 가능할 법한 얘기라고 생각했다.
이어 탑 뒤를 돌아 보리수 아래 금강보좌(金剛寶座)를 보러 갔다. 대탑과 보리수 사이에 위치한 금강보좌는 가사로 덮어놓고 참배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비록 금강보좌가 여러 번 옮겨졌다 하지만 의미있는 장소였다. 진리를 깨달은 부처님을 다시 한 번 연상할 수 있는 좋은 곳이었다. 금강보좌에 참배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주변에도 금강보좌를 보러 온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날이 저물어가 대보리 대탑 부근에서 서둘러 나왔다. 미처 못 본 것은 내일 보기로 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로 오니 호텔 측이 손님을 더 많이 예약받아 몇 사람의 방이 모자라는 안타까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회장 부부와 여행사 팀장이 다른 호텔에 묵고 여자 분들 몇 분이 한 방에 세 분씩 지내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이 밤에 박영각 선생이 총무여서 우리 방에서 전체 회합을 가졌다. 그 날까지의 여행 과정의 문제점과 앞으로의 대책이 논의되었다. 여행사 팀장이 늦게 들어오자 우리의 입장을 전하게 되었다. 좋은 중간 점검 자리였다. 그 좋은 자리를 무사히 마치는 듯 하였는데 침대 다리 하나가 여러 사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하여 일행이 다 돌아간 뒤 호텔 측에 연락하여 고치는 해프닝이 일어났었다. 돌아보니 모두 좋은 추억이었다.
금강보좌를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금강보좌 위에는 큰 보리수 나무가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 나무는 본래 핍팔라 라는 나무였는데 부처가 이 나무 아래서 진리를 깨닫자(成道) 보리수(菩提樹)(진리를 깨달은 자리에 있었던 나무)가 되었다. 그런데 이 보리수는 부처님 당시의 보리수는 아니다.
깨달은 자리인 금강좌(金剛座)(금강보좌) 위에 있었던 보리수는 여러 번의 수난을 당하였다. 불심이 깊었던 아쇼카 왕이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자 이를 시기한 아쇼카 대왕의 왕비에 의해 이 나무를 잘라진 것이 첫 번째 수난이고 불교를 배척한 벵갈의 왕인 서상크에 의해 사탕수수 액이 보리수 한가운데 집어 넣어져 죽게된 것이 두 번째 수난이고 태풍에 의해 잘라진 것이 세 번째 수난이다. 아쇼카 왕과 데비 사이에 태어난 아들 마힌다와 딸 상가미타가 금강좌 위에 있었던 보리수 나무 가지를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럼에 심었었는데 이 스리랑카의 보리수 나뭇가지를 가지고 와 다시 심은 것이 지금 여기에 서 있는 보리수라고 한다.
보리수 나무 북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일주일간 선정에 듦(4주째)(오색 광명 발함. 이것을 형상화한 것이 불교 5색기). 동문과 대탑 사이에서 선정에 듦(5주째)(어떤 바라문이 묻기를 어떤 것이 훌륭한 바라문인가? 마음이 깨끗한 것이 훌륭한 바라문이다 라고 답함). 대탑 입구에서 남쪽으로 무차린다 연못이 있는 그 곳에서 선정(禪定)에 듦(6주째)(비가 와서 그 지역 물 바다 되자 머리 아홉 달린 코브라 나타나 뱀의 머리 펼쳐 부처 비 맞지 않게 함.) 이것을 기념하여 대탑 남쪽에 가 보니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그 가운데 부처님을 비에서 보호하는 머리 하나인 코브라가 조각되어 있었다. 티베트 불교 영향으로 연못 둘레에 만국기 같은 깃발이 무수히 달려 있어 보기에 좋지 않게 느껴졌다. 무차린다 연못 중간에서 선정에 듦(7주째)(두 상인이 공양을 함. 복 받기 위함. 공양 받을 그릇 생각하자 사방의 사천왕 금, 은, 마노로 만든 발우 바침. 받지 않음. 사천왕들이 돌로 만든 발우 바치자 모두 포개어 하나의 발우 만듦. 펼치면 4개 되고 포개면 하나되는 발우의 기원됨.) 7주 뒤 법 전하러 사르나트(녹야원<鹿野苑>)로 떠남.
대탑을 중심으로 대보리 대탑 도량 경내는 무수히 작은 탑들로 장엄되어져 있었다. 거의 대부분 용수 보살 등 후세 스님들이 대탑에 공양을 올리기 위해 봉헌한 사리탑들이다. 무차린다 연못을 둘러보고, 석주를 세워 속이 넓게 들여다 보이는 두 겹의 울타리가 쳐진 대탑 둘레을 탑돌이를 겸하며 천천히 걸었다. 한 겹 석주 울타리 뒤에는 승려들이 오체 투지로 대탑을 향해 경배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수한 사람들이 대탑 둘레에서 경배하는 장엄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직도 머리 위에 큰 냄비같은 그릇을 이고 경건하게 서 있었던 서양인, 우리가 돌고 있던 길을 따라 오체 투지로 절하면서 전진하던 젊은 여인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탑돌이 하면서 무수히 경건히 예배했을 사람들을 생각하고 지금 예배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삶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았다. 7시 50분경 대보리 대탑을 빠져 나오면서도 대보리 대탑이 발산하는 강한 울림을 오래 간직해 보려고 다시 한 번 대보리 대탑으로 눈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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