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마스테! 영혼의 여정

인도 성지순례 기행문 2일째/델리,럭나우,쉬라바스티

보리숭이 2006. 2. 2. 19:54

2006년 1월 11일 수요일(인도 여행 2일째)

여행지: 델리 - 럭나우 -쉬라바스티    글쓴이: 박영각
 

- 시대의 흐름을 잃어버린 문명의 나라 -


오늘부터 사실상 인도 성지순례의 시작이다. 오늘 일정은 델리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럭나우까지 가서, 다시 전용 버스를 타고 쉬라바스티로 이동하여 기원정사, 급고독 장자의 집터, 앙굴리마라의 집터 등을 순례하는 것이다.

어제 늦게 델리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간단히 입국 수속을 마치고 우리 나라 버스 대합실처럼 후줄근한 공항 구내를 돌고 돌아 희뿌연 연무와 인도 특유의 냄새를 뒤로하며 공항을 빠져나온 것이 밤늦은 시각. 빵빵 뿡뿡 삑삑 … 온갖 경적 소리를 온 몸으로 느끼며 한 시간여를 달려 궁전같이 우람하게 생긴 아쇼카 호텔(ASHOK HOTEL)에 도착, 나의 영원한 해외 룸 메이트인 권오웅 선생님과 함께 방에 들어온 것이 대충 10시(이하 현지시간)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간단히 씻고 자리에 누우니 비행기에서의 뒤척임 섞인 수면과 여행지에서의 설레임으로 잠이 쉽게 들지 못하고 11시를 훨씬 넘겨 잠이 들었었다.

 

새벽 4시에 모닝콜이 들어와 잠이 깨었다. 사실 모닝콜 이전에 벌써 잠이 깨어 있었지만. 이른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몸은 3시간 30분의 (-)시차를 느끼는지 크게 피로감이 없다. 부랴부랴 씻고 나서 4시 30분에 커피숍으로 향했다. 벌써 몇 분이 내려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는 조촐하게 뷔페식으로 준비되어 있었는데, 식빵과 계란, 쌀죽, 그리고 감자 삶은 것이 전부여서 간단히 아침을 해결했다. 이 중에서 쌀죽은 동글동글한 우리 쌀과는 달리 인디카종인 길다란 쌀(안남미)로 만든 것으로 우리 나라 흰죽과 같으면서도 약간은 구수한 맛이 느껴지는, 인도 여행 후반부에는 정감마저 느끼는 것이었다.

우리 팀 가이드로 한국말은 영 형편없이 서툴지만 그래도 영화배우 뺨치는 미모와 살인 미소를 지닌 아난드(Anand)의 그 위험한 미소를 가슴에 안으면서 5시 30분경에 예정대로 호텔을 출발했다.

잠깐 동안 버스를 달려 5시 45분경 역 주변의 광장에 도착하니 밋밋한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그림자가 다가온다. 보니 짐꾼들이었다. 적당히 흥정을 거치는 듯하더니 수레에 짐(우리의 소중한 여행용 가방들)을 포개 싣고서 여럿이 끌고 밀고 한다.

 

우리 나라의 소가 끄는 작은 수레 같은 것에 짐을 싣고 가는데 끈으로 대충 묶어 떨어지지 않을까 불안하기도 했지만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하면서 용케 역 구내까지 100여 미터 이상을 이동하였다. 어둠 속이지만 짐꾼과 비척거리며 지나치는 사람들, 여기에 오물들의 흔적과 냄새가 범벅이 되어 눈과 코를 괴롭힌다. 그래도 앞사람 놓칠세라 빠른 걸음 재촉하며 구불구불 울퉁불퉁 돌고 돌아 역 구내로 들어섰다.

 

5시 58분 기차에 탑승하여 6시 15분에 럭나우를 향하여 출발했다. 우리가 탄 기차는 고속열차로 SHATABDI EXP. 이며, AC CHAIR CAR 칸(에어컨이 있고, 지정석임)으로 럭나우까지 511km를 달려 12시 30분경 도착 예정이란다. 이것도 사실은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 - 알고 보니 다른 팀의 현지 가이드로, 이름은 리시(Rishi)라고 했다. - 의 열차표를 통해 확인한 것이었다. 기차는 차칸의 가운데를 중심으로 하여 마주보게 되어 있었고, 한 쪽에 3자리씩 배열되어 있고 식탁도 딸려 있었으며, 상당히 깨끗하고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좌석마다 신문이 준비되어 있었으며, 조금 있으니 홍차와 보온병에 담긴 뜨거운 물, 비스킷 1개, 사탕 2개를 주었다. 특히 홍차는 매우 맛있어서 이후 짜이(홍차에 밀크를 더한 것)와 함께 인도 여행 내내 피로를 덜어주는 활력소가 되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안개 속으로 희뿌옇게 사물들이 가려져 있어 옆자리의 리시와 간단히 수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영어로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이야기를 하여 보니 리시는 한국어를 매우 유창하게 구사하여 나를 놀라게 하였다. 내가 인도는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많은 나라라고 하자 인도는 한국과 비교해 볼 때 인구가 적어 어려움이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11억의 인구가 적다니(?). 아니라고 하자, 리시는 인도는 땅덩이가 남한의 33배는 되는데 인구는 33배가 못 되니 인구밀도 면에서 본다면 턱없이 적다고 엄살을 부린다. 딴엔 맞는 말이다 싶었다. 리시는 또 몇 가지 인사말도 가르쳐 주었다. 예컨대 나마스떼(안녕하세요?), 슈끄리와(감사합니다), 파르밀렝게(다음에 또 봐요)와 같은 말들이었다. 한편, 인도인들도 매우 시끄럽지만 한국인도 시끄럽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러고 보니 마냥 신나게 이야기하는 것은 한국 사람이요, 현지인들은 잠시 신문을 보는가 싶더니 그냥 꾸벅꾸벅 존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제 저녁 1시 무렵에 잠들어서 4시에 깼다고 하면서 가이드로서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연신 하품을 하기에 그냥 그대로 잠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리시가 한잠을 잔 뒤에는 다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중 몇 가지를 적어 보면, 인도는 독립기념일이 1947년 8월 15일로 한국과 매우 인연이 깊다고 했다. 그리고 인도 젊은이들의 결혼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인도 젊은이들은 아직도 부모의 선택과 가치관에 주로 응하는 편이라고 했다. 그리고 리시 본인은 3월쯤에 한국에 한 번 방문할 예정이라고도 했다. 참으로 우리말을 깊이 이해하고 유머가 넘치는 젊은이였다. 이후에도 리시와는 몇 번 마주쳤으며, 그 때마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See you later!

기차가 출발한 잠시 후에 아침 식사가 나왔다. 야채말이 튀김 두 개와 감자 조각 튀김, 완두콩, 식빵, 홍차를 맛있게 먹으며 인도의 첫 아침이 시작되었다.

 

이제 안개도 걷혀 창밖으로 드넓은 평원이 펼쳐진다. 사방을 둘러봐도 드넓은 평원만 있을 뿐 산 하나 없는 공간. 그 공간 속으로 줄지어 푸르름으로 들판들을 가득 메운 유채밭들, 사탕수수밭들, 밀밭들, 논들. 가끔씩 보리수 나무와 망고 나무가 어우러져 버러 있고, 더더욱 새떼들의 자유로운 비행이 섞여 평화로운 모습을 더해 준다. 그 가운데 작은 초가집처럼, 어찌 보면 움막처럼 동그랗게 지은 것들도 간간히 눈에 띠었다.

 

8시경 중간 정차역인 ALIGARH에 도착했다. 잠시 주변의 풍경을 보니 집들은 나지막하고 낡았으며,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지붕이 없는 경우가 많아 마치 짓다가 말은 건물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건물 위로는 까마귀 같은 새들이 종종이 몰려 있었으며, 원숭이들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역 구내에는 부서지거나 낡아빠진 기차들이 방치되어 있었으며, 각종 오물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또한 주변으로는 돼지들이 쓰레기를 뒤지고 있고, 배설물들이 엉켜있어 우리 나라의 모습에 비유하자면 마치 지저분한 쓰레기장 주변의 빈민가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역 구내에서는 현지인들이 서서 아침 식사를, 손으로 주물러 먹는 모습이 간간히 눈에 들어와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기차는 중간 정차역인 ETAWAI, ACHALDA, BHAUPUR, KANPUR(여기서는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 아마 상당히 큰 지역인 것 같았다.) 등에서 잠깐잠깐 쉬면서 끊임없이 달렸다. 그런 가운데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은 계속 반복되어 이제는 눈이 시렸다. 가끔씩은 아이들이 들판이나 공터에 모여 공놀이(크리켓)를 하고 있었으며, 들판 군데군데 커다란 굴뚝이 서 있고 연기가 피어 올랐다. 이것이 벽돌 공장이라고 했다. 드넓은 평원이니 마땅히 다른 재료보다는 구하기가 쉬운 흙으로 벽돌을 구워 건축 재료로 삼는 것이리라. 그래서인지 집들은 대개 붉은 벽돌로 쌓아올렸는데 다만 지붕 처리는 엉망이어서 지붕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분간키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고 이번 인도 여행 중에 어디서나 보았듯이, 소똥을 잘 반죽하여 말리는 것이 자주 보였다. 바구니를 들고 배설물을 줍는 여인들의 모습, 심지어는 손으로 주물럭거려서 넓적하게 다듬거나 벽에 찰떡 마냥 찰싹 붙여서 말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잘 말려서 중요한 연료가 된다고 했다.

또한, 재미있는 것은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과 마찬가지로 기차도 연신 경적(HORN)을 울려댔다. 이것도 철길 위를 건너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것들에 대한 예비 경고의 신호이리라.

한편, 잠깐잠깐 쉬는 동안에 간간히 보이는 이들의 삶의 모습은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혼돈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예컨대, 철도 보수를 위해 돌을 나르는 데 머리에다가 이고서 나르는 모습이 과거 우리네의 모습과도 너무나 닮은 것만 같아 연민의 정도 느껴졌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생리적인 자연 현상인 볼일을 유유자적하게 보고 있는데, 한쪽으로는 철길에 소가 들어와서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고, 그 사이를 졸리운 듯 어슬렁거리는 개들, 느긋하게 서성대는 사람들, 짐을 머리에 이고 나르는 남자 짐꾼들, ……. 도저히 21세기의 모습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얼마 있지 않아 지나게 된 갠지스 강가의 마을에서도 볼 수 있었다. 강가의 아이들은 마냥 물놀이에 신이 났고, 그들과 더불어 물 속으로나 풀숲으로 헤집는 소들의 검은 몸짓이 유난히도 크게 보였다.

12시 45분에 럭나우(Lucknow)에 도착하여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전용버스를 타고 바로 식당으로 이동했다. 차로 10여 분을 달려가니 조그마한 시장 입구 같은 곳에 식당이 있었다. RITZ REST. 좁고 어중간한 2층으로 된 식당이었는데 규모에 비해 음식은 깔끔한 편이었다. 먼저 매콤한 스프가 올라왔으며, 이어서 국수 튀김과 긴 쌀(안남미) 튀긴 것, 그리고 카레인 듯한 소스 두 가지가 나왔다. 배고픈 차에 맛있게 먹고 나니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이 식당에서 인도식 비데 때문에 한바탕 웃음을 웃은 일이 있었다. 식사 후 화장실을 이용했는데, 화장실 구석에 손잡이 달린 바가지가 있어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 하고 여럿이 궁금해 하였다. 아마 변기에 물을 퍼붓는 도구라고 생각했을 때, 누군가가 인도식 비데라고 하여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들은 함부로 볼일을 보면서도 꼭 물통은 들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식당을 나와서 차로 향하는데 거리의 대서방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 하나에 구식 타자기를 놓고 문서 작성을 대신해 주고 있는 모습이 말 그대로 거리의 대서방이어서 신기한 마음에 찰칵!

14시 30분경 식당을 출발하여 다시 성지를 따라 동으로 동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오토바이와 차들이 뒤섞여 흐르고 있었으며, 길가로는 조그만 행상 같은 리어카들이 우리 나라의 1960년대 시골 장터처럼 줄지어서 음식이며 과일들, 옷들을 팔고 있었고, 그들 사이를 오가는 소들이며 양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오물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 아파오는데 또한 경적소리는 연신 빵빵 뿡뿡 삑삑거리고, 브레이크와 가속의 연속으로 몸은 이리 흔들, 저리 흔들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비켜가는 차끼리의 거리감이 곧 부닥칠 듯하여 오싹하기도 하고 긴장도 해 보곤 한다. 그러면서 기막힌 운전 솜씨에 속으로 감탄도 해 본다.

 

이렇게 흔들리며 외곽으로 벗어 나와도 결국 길은 편치 못하고 포장되었다고는 하나 이미 많이 파손되어 신작로와 별반 다르지 않고, 노폭 또한 좁아서 맞은편에 차가 올라치면 그냥 브레이크를 밟으며 감속을 하고 비켜가기를 반복한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곳의 차들은 시속 30km내외로서 하루 이동거리가 300km내외라고 한다. 차 소리는 요란한 데 영 나아가지를 않는 모양이다. 그나마 조금 이동하다가 자주 정차를 하기도 했다. 보니까 철길과 교차할 때마다 화물열차를 먼저 통과시키기 위해서 한참을 쉬는 것이었다. 또한 화물열차는 얼마나 꼬리를 매달았는지 한 50여 량은 되는 듯했으며, 뛰어도 따라갈 듯 느릿느릿하였다. 말 그대로 인도식 시간, 느긋하다 못해 멈춰버린 듯한 답답함이었다.

먼지를 풀풀 날리며 반포장쯤 된 길을 가는데 길가로는 사탕수수를 압축기로 짜서 파는 곳이 죽 늘어서 있었으며, 사탕수수를 질겅질겅 씹는 모습도 보였다. 생각 같으면 내려서 어떤 맛인지 한 그릇 먹어보고 싶었지만 위생을 생각해서 참았다.

이렇게 흔들리며 가는 동안에 벌써 몸은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겹치는 피로감에 졸다가 깨다가를 반복하였다.

17시경 시골의 시장을 지날 때였다. 광제 원장님과 몇 사람이 차에서 내려 과일을 사 왔다. 바나나와 귤, 석류였다. 바나나는 약간 떫은 맛이 있었고, 귤도 씨가 있고 싱싱하지 않으면서도 자극적이었지만, 석류는 상큼하고 달큼한 맛이 일품이었다. 이후로도 석류는 우리의 입맛을 자극하였다.

 

  

이렇게 과일을 사는 동안 시장의 사람들은 여럿 몰려들어 차 안에 있는 우리 이방인을 신기한 듯 쳐다보고 무어라고 중얼거리고, 우리는 우리대로 차 안에서 바깥을 보며 사람들과 노점들과 나른함과 푸근함이 섞여 돌아가는 시장 골목을 바라보며 무어라고 하고, 말 그대로 서로가 동물원 원숭이 꼴이었다.

 

내가 특히 흥미 있게 본 것은, 가게 앞에 전화박스를 만들어 PCO(인도에는 집집마다 전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 전화를 가지고 영업하는 곳이 있고, 이 곳에서 전화를 걸 수 있다고 했다.)라는 간판이 선명한데, 그 앞에는 채소와 과일을 파는 노점상, 또 그 앞으로 자전거를 유유히 끌고 가는 노인네의 그림자, 그 옆에서 쪼그리고 앉아 길거리 이발을 하고 면도를 하는 모습이었다. 바로 여러 시대가 중첩되어 나타난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과일을 단맛을 보는 동안 해는 고요히 지평을 내려간다. 멀리 바알간 일몰의 해의 모습과 그림자처럼 비치는 공작새들의 잠자리 드는 모습, 나무 그림자들. 사방이 평원이라 금방금방 내려가던 해가 지평으로 내려앉자마자 채 5분도 안 되어 온 천지가 어둠 속에 묻혔다. 참으로 잠깐 동안이었다.

이후 어둠 속에서 자전거로 귀가하는 사람들과 이리저리 비켜가며 버스가 흔들리는 동안 생리적인 신호가 왔다. 그러고 보니 모두들 점심 후에 자연의 생리를 오래 참았다. 그래서 팀장에게 얘기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로 하였다. 한적한 시골 길가에 차를 세우고 어둠 속으로 전진하여 혹시 있을 지뢰(선지자의 배설물)를 조심하며 길섶에 몸무게를 덜어 놓았다. 가끔 지나치는 차들의 불빛만이 명멸할 뿐 모든 것이 어둠 속에서 고요히 숨을 죽인 시간, 아마 한국 시간이라면 저녁 10시를 향해 가고 있겠지. 몸은 점점 무거워 온다.

다시 한 시간여를 달려 호텔에 도착하였다. Lotus Nikko Hotel(이 호텔은 체인으로 Kushinagar, Sravasti, Bodhgaya에 있다고 했다). 일본식 이름답게 깔끔하면서도 단아한 미가 느껴졌다. 비록 밤에는 - 침낭 부인과 전기장판 부부를 제외하고 - 옷을 껴 입고도 담요 한 장과 체온으로 버티느라 추워서 혼이 났지만. 각기 방을 배정받고 간단히 여장을 푼 후, 저녁을 먹었다.

 

저녁에는 쥬스에 쌀죽과 식빵, 야채 샐러드, 삶은 당근, 계란 후라이, 우유와 콘푸로스트에 홍차를 곁들여 먹었다. 이 곳에 오기 전에 듣기로는, 인도 음식이 먹기에 힘들다고 했지만 나로서는 별반 힘들지 않고 오히려 푸근하게 먹을 정도였다.

인도의 시간대로 움직이다 보니 예정보다 늦어서 오늘 계획한 기원정사, 급고독 장자의 집터, 앙굴리마라의 집터 등은 보지 못하고 내일 아침으로 기약했지만, 인도의 두 번째 밤은 이렇게 아직도 기대와 설레임 속에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 제 3일째 아침 - 금강경(金剛經)을 설하신, 기원정사에 서다 -

예정대로라면 6시 30분경 호텔을 나서기로 했지만 아침 안개가 너무나 자욱하여 몇 발 앞을 볼 수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결국 6시 40분경 호텔을 출발했다.

한 10여 분을 달려가니 급고독 장자의 집터가 나왔다. 책에서 보았을 때에는 이곳이 타원형의 언덕으로 되어 있고, 주변을 두루 볼 수 있는 약간 언덕진 지형으로 근처에는 자이나교 사원까지도 이웃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실제로도 보니까 약간 언덕진 곳에 위치한, 안개 속에 싸인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집터였다. 손을 모으고 경건한 자세로 집터 위에 올라서니 그 규모가 크게 크지 않고 또한 보존 상태도 별로 양호하지 못하여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집터의 정상부의 가운데에는 소의 배설물도 있고, 그 외에도 여러 오물들이 퍼져 있어 성지로서의 관리보다는 그냥 방치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너무나 안개가 자욱하여 앞을 분간할 수 없는지라 사방을 두루 관찰하기는커녕 바로 옆에 있는 앙굴리마라의 집터도 보이지 않았다.

이는 바로 옆에 있는 앙굴리마라의 집터에 섰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집터 안으로 들어서니 오히려 수닷타 장자의 집터보다 더 웅장했던 듯하고, 지하 통로에는 거의 기다시피 하여 통과해 보았는데 보존 상태는 마찬가지인 것만 같아 안타까웠다. 더욱이 안개는 더욱 짙게 앞을 가려 참으로 우리 일행의 복이 여기까지인지, 아니면 다음에 다시 한 번 더 오라는 것인지는 몰라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답답하기만 했다.

그나마 이런 안개 속에서도 잠시 있으려니 티벳인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순례자들이 낡은 버스를 타고 와서 순례를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일행만의 아쉬움이 아닌 것만 같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앙굴리마라의 집터 앞에서 잠시 흥선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우리 일행 중 하나가, 앙굴리마라는 99명의 목숨을 앗은 악인인데 참회하였다고 그 업보를 받지 않느냐고 질문을 하였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백장야호(百丈野狐)’의 이야기를 비유로 들어주셨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백장스님이 설법할 때마다 한 노인이 있어서 늘 청중을 뒤에서 열심히 듣고 있다가 대중이 물러나면 그 노인도 역시 물러나곤 하더니 어느 날은 설법이 끝나고 대중이 다 물러났는데도 이 노인만이 버티고 서 있었다.

  백장스님은 이상히 여겨 "면전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다. 그 때 노인 말이 "저는 사람이 아니올시다. 옛적 가섭불의 재세시 이 절의 주지였습니다. 그 때 어느 학인이 묻기를 ‘많이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안 떨어집니까?’ 이에 제가 대답하기를 '불락인과(因果에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했기 때문에 오백 년 동안 야호의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청컨대 스님께서 일전어로 야호를 벗어나게 해주시오."하고 묻기를 "많이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안 떨어집니까?" 하였다. 이 때 백장스님이 "불매인과(因果에 얽매이지 않는다)"라고 가리키자, 그 말끝에 대오하여 인사하고 말하기를 "저는 이미 야호의 몸을 벗어나서 뒷산에 있으니 스님께 바라건대 죽은 僧과 같이 장례를 치러 주시오." 이에 백장스님은 유나로 하여금 대중에 고하기를 식후에 죽은 승의 장례식이 있다고 했다. 이 때 대중이 수군거리기를 '일중이 모두 평안해서 열반당에 한사람의 병자도 없었는데 어째서 죽은 승의 장례가 있다고 할까.' 식후 스님은 대중을 데리고 뒷산 바위 밑에 이르러 지팡이로 죽은 야호를 끄집어내어 화장을 했다.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여서 우매한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든 이야기지만 어렴풋이나마 알 것도 같다.

다시 차를 타고 돌아 7시경 기원정사 터에 도착했다.

기원정사 터는 현재 발굴된 부분만으로도 동서로 약 230m, 남북으로 약 350m로 대략 25,000여 평에 달한다고 한다. 이 곳이 바로 부처님께서 금강경을 설하신 곳이다. 기원정사는 인도말로 제다바나(Jetavana)라고 하며, 기수급고독원이라고도 부른다. 장사꾼인 수닷타 장자(급고독 장자)가 라즈기르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을 얻은 바 있어 사위성으로 돌아와 제다태자의 동산에 지은 것이 기원정사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곳 사위성과 기원정사에서 24안거를 보내셨다고 하니, 그 중요성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기원정사의 입장료는 이방인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현지인에게는 20Rs밖에 되지 않는 입장료가 우리 이방인에게는 5달러(대충 200Rs)였다. 그래도 즐거운 마음으로 들어서니 벌써 기운부터가 틀리다. 무어라고 한 마디로 표현할 수가 없지만, 푸근하다고 할까, 평온하달까, 또는 편안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따사로운 기운과 감응이 온몸을 감싸 안아왔다. 그냥 마냥 눈 감으며 마음 속에 담고 싶은 곳이었다.

아침 안개를 가슴에 싸 안으며 동산 안으로 들어가니 입구에서는 보이지 않던 모습들이 하나 둘씩 살아 올라온다. 참으로 신기한 광경이다. 길섶으로 이름모를 꽃들과 나무들. 왼편으로 커다란 우물이 나무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다. 부처님 계실 당시 사용했던 우물이라 하나 지금은 철망으로 덮어놓아 흉몰이다.

 

문득 앞을 보니 커다란 보리수가 갈래갈래로 뻗쳐 올라가며 세월을 감고 있다. 아마 이것이 부다가야의 부처님 성도지의 그 보리수 묘목을 발우에 담아 옮겨 심었다는 아난다의 보리수이리라. 이 보리수의 유래는 부처님이 출타 중이어서 계시지 않을 때에 부처님을 뵙기 위해 기원정사를 찾았던 사람들이 가지고 왔던 꽃이며 향들을 향실 앞에 놓고 그냥 돌아가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급고독 장자가 '이런 때에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부처님께 여쭙자 보리수를 바라보는 것으로 당신을 본 듯하면 좋겠다는 대답을 하셨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부다가야에 있는 성스러운 보리수의 어린 묘목을 옮겨와 심은 것이라고 한다.

잠시 보리수 주변에서 맴돌며 여러 생각에 젖어 사진 촬영도 하고 하는 동안 멀리 아침 기운이 밝아온다. 안개 속에 달처럼 보이는 해오름이다. 부처님께서 금강경을 설하실 때에도 이른 새벽부터 첫걸음을 옮기셨을 거라고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젖어온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부처님께서 금강경을 설하셨다고 하는 최초의 승원터인 간다쿠티(Gandhakuti)가 나온다. 부처님께서 도리천에 계시는 어머니 마야 왕비께 설법하기 위해 천상으로 올라가시고 계시지 않을 때에 부처님을 그리워한 프라세나짓트(파사익) 왕이 부처님이 너무 그리워 향목으로 부처님의 모습을 조각해서 모셨던 곳도 바로 이 곳, 부처님께서 항상 계셨던 향실(香室)이었다고 한다.

  향실 앞에는 작은 탑이 있는데 많은 금분으로 덮여 있었다. 이 탑을 지나칠 때에는 합장하고 절을 했다. 따스한 가슴과 손으로 만져도 보았다. 만약 이 탑도 그 때 있었던 탑이라면 금강의 지혜가 깃들어 있을 것만 같았다.

 

앞선 순례자들이 향실에서 기도를 하고 있어 우리 일행은 순서를 기다리면서 향실 앞의 풀밭 위에서 탑돌이를 하였다. 조용한 기원정사 경내에 울려퍼지는 맑은 목탁 소리와 경건한 목소리가 한데 어울려 호수에 퍼지는 잔잔한 물결처럼 넓게넓게 퍼져 나갔다. 기도가 끝난 후에 향실에 개별적으로 참배를 했다. 우리 일행은 향실에서 다같이 반야심경이라도 독송하고 싶었으나 앞서 자리를 차지한 순례자들이 오래도록 자리를 차지하여 비켜서지 않는 바람에 결국 독송을 포기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그리고 기원정사를 둘러보면서, 문화재 전문가가 아닌 그냥 일꾼들인 듯한 사람들이 벽돌을 쌓아가며 보수를 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문화재 관리의 허술함과 불교인으로서 생각할 때 성지 관리의 헛됨에 잠시 고개를 숙여 본다.

안개가 끝내 맑게 걷히지 않고, 또한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아 주변을 주의 깊게 살피지 못하고 나온 점에 지금 생각해도 또한 못내 아쉽기만 하다.


덧붙여, 인도에 대해 받은 인상을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

인도는 어느 한 시기 문명에 던져졌다가 가끔씩은 멈추어 선 상태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어둠 속에서 눈뜨는 작은 불꽃과도 같은 존재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하여 우리 이방인은 철저한 이방인으로서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사실, 우리 주변을 보더라도 문명, 개화라는 이름 아래 행해졌고,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인류의 여러 재앙들이 얼마나 많은가. 거기에 비한다면 적어도 여기서는 좀더 자유로울 수 있는 그들의 모습이 오히려 나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아침이면 살아 오르는 뿌연 안개는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자연의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말없는 눈빛에서 깊은 고뇌를 읽는다. 그보다도 더 깊은 인더스 문명의 역사를 배운다.

인도! 그들의 삶을 보면서 자신의 삶을 겸허하게 하라는, 좀더 무게를 줄이라는 메시지를 전해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