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방 이후 김천 지역에도 소학교가 생겼으나 인구에 비해서 턱없이 부족했다. 이때 김천 출신으로 여환옥(呂煥玉)이 있었다. 여환옥은 1896년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에서 성산 여씨 여승동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김천에서 해산물이나 농산물을 위탁판매 하던 김천흥업사의 감사직을 맡았고 비교적 윤택한 생활을 했다.
“부인, 우리 집은 방도 많고 마당도 넓으니 어린이들에게 신교육을 시키는 장소로 개방하고자 하오.”
“서방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누가 말리겠습니까.”
이렇게 하여 여환옥은 부인의 허락을 받고 자기 집에다 ‘광명강습소’라는 신교육을 위한 사립 초등학교를 개설했다. 이때는 서당교육이 점차 사라지고 한글과 산수, 사회, 과학 교육에 대한 학교교육 시스템이 도입되는 시점이었다. 강습소를 개설하자마자 동네 꼬마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처음 몇 년간은 집에서 교육을 했으나 나중에는 늘어나는 학생들을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여환옥은 김천사회에서 신교육에 대한 불을 댕겼다.
김천의 독립운동가 여환옥 생가
대추 붉게 익은 뜰 안에 열림 창틈으로 금빛 아침이 몰려왔다. 이 때 여환옥이 최송설당을 찾아왔다.
“여사님, 제가 이번에 여운형선생님을 수행하여 일본 동경에 갈 계획입니다. 가는 길에 영친왕 전하도 찾아뵈올 계획입니다.”
최송설당은 영친왕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뛰었다.
“영친왕 전하를 찾아뵙는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누가 함께 갑니까?”
“공식 수행원에는 장덕수, 최근우, 신상완씨고요. 저는 비공식 수행원입니다.”
당시 여운형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외무부 차장으로 있었다. 귀국하여 일본 하라게이 총리의 초청을 받은 상태였다. 일본정부는 임시정부를 회유할 목적으로 여운형을 불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에서는 여운형의 일본 초청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 가시는 길에 제가 영친왕 전하께 선물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엄귀비께서 살아계실 때는 매년 선물을 보내 드렸습니다.”
“여사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최송설당은 여운형의 출국 날짜에 맞추어 영친왕의 몸에 맞을 황금색 한복 한 벌을 준비했다. 조끼에 금단추까지 달아서 준비했다. 당시 조선에는 남자용 조끼가 유행했다. 그전에는 외출할 때는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를 바로 입었었다. 조끼의 편리성 때문에 새롭게 생겨난 풍습이었다. 한복 안쪽에는 편지 한통도 끼워 넣었다.
여운형은 일본에 도착하여 주로 일본의 척식국장 고가와 면담이 여러 차례 이루어 졌다. 고가는 여운형에게 조선의 자치 운동을 종용했다.
“조선의 자치 운동을 전개하시오. 그것이 조선의 미래를 위해 좋을 것이요.”
반면 여운형은 조선의 독립에 대해 거침없이 쏟아냈다.
“조선은 독립이 되어야 합니다. 조선은 언젠가 독립이 되고 말 것이요.”
몽양 여운형
드디어 여운형은 1919년 11월 동경제국호텔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이 자기의 생존권을 위한 인간 자연의 원리입니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습니까!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는데 우리 한민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다는 것을 한국인이 긍정하는 바이요, 한국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입니다. 일본 정부에게 이를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겠습니까.” 3·1항쟁의 생생한 기억과 독립의 신념에 그득한 여운형의 사자후는 일본인들의 마음도 헤집어놓았다. 임시정부 내부에 혼란을 일으키려던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헛갈려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저런 불령선인을 초대했느냐.”는 항의가 속출했다. 결국 일본의 하라게이 내각이 총사퇴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연히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러나 여운형의 발언은 일본 언론을 타고 궁궐안의 영친왕에게도 전달이 되었다. 영친왕도 일본에 와서 조선의 독립을 언급하는 간 큰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이때 영친왕의 비서 고의경 사무관에게 전화가 왔다.
“여운형입니다. 이번 기회에 영친왕 전하를 뵙고자 하는데 가능하실는지요?”
고의경 사무관은 즉시 영친왕에게 이러한 사실을 전달했고 영친왕도 승낙했다. 그러나 여운형이 약속 날짜에 영친왕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에는 일본 헌병들이 엄중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면담은 무산되었다. 영친왕 집무실에 근무하는 구리하라 촉탁이 이를 경찰당국에 사전에 알린 탓이었다. 결국 최송설당의 한복 선물도 전달되지 못하고 일본 헌병에게 빼앗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최송설당과 여운형은 서로를 알게 되는 사이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으로 민족자결의식이 높아졌다. 앞으로의 독립운동은 일시적인 봉기도 중요하지만 국민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민족교육에 역점을 두어 항구적인 저항운동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판단이 늘어갔다. 전국적으로 계몽운동이 일어났다.
김천지방에서도 일본인 들이 주축이 된 김천청년회가 발족했다. 한국인들은 금릉청년회를 조직했다. 150평 남짓한 2층 건물을 지어 ‘금릉청년회관’간판을 걸었다. 학원을 개설하여 금릉학원이라 하였다. 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청소년과 연령 초과로 보통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는 학생을 모집하였다. 교육내용은 중등학교 교육과정과 전문학교의 일부과정 교육을 실시하였다. 금릉청년회는 3년 뒤에는 유아원까지 병설하였다.
김천고등보통학교 모태가 된 금릉학원
그런 가운데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정권이 들어서게 되고 공산주의 사조가 휩쓸 게 되었다. 조선사회에도 어김없이 공산주의 사조가 침투하였다. 김천 지방에서도 금릉학원에까지 좌익사상이 아편처럼 스며들어왔다. 이때 고덕환을 주축으로 하는 민족진영과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좌우 진영 간의 갈등은 학원 운영에 부실을 불러왔다. 1926년에는 금릉청년회가 주도하여 만든 금릉학원이 재정난에 빠지자 여환옥은 금릉학원 유지회에 가담하여 이사로 활동하였다. 실질적으로 금릉학원의 운영자가 되었다. 교육에 대한 학부모나 학생들의 열의는 하늘을 찌를 듯 했으나 교육비 조달이 문제였다. 가난한 살림에 형제는 많아 지출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학교 운영비 조달이 문제였다. 이때 재정적인 후원자가 최송설당이었다. 당시 최송설당은 어머니 정씨가 사망하면서 재산을 교육 사업에 힘쓰라고 당부하신 유지를 실천했다. 또한 여환옥을 통해 영친왕에게 한복을 선물하려든 일의 실패에 대한 보답으로 1백 원을 기부했다. 이를 계기로 최송설당은 자신이 직접 유치원을 경영하거나 여자보통학교 설립을 고려하고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최송설당은 여환옥을 통하여 여운형이 교도소에 있을 때 사식을 반입하여 주는 등 자신의 정성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여환옥에 대한 최송설당의 신뢰는 물론 여운형과의 친분도 쌓였다.
추풍령 고개를 타고 넘어오는 겨울바람이 김천 읍내로 사정없이 몰아붙이고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날씨 탓에 특별한 용무가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얼굴까지 덥히는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도 한 채 여환옥이 최송설당을 찾아왔다.
“여사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예, 날씨가 추우니까 거동하기 어려운 것 빼놓고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여사님 그동안 후학을 위해 많은 기부를 해 주셨는데 감사합니다.”
“좀 더 큰 금액을 기부했어야 하는데 너무 적어 미안합니다.”
인사가 끝나자, 여환옥은 누가 대화를 듣지 않나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조용한 말씨로 최송설당에게 다가앉았다. 그러고는 최송설당의 의중을 떠 보았다.
“여사님, 지금 조선은 터널의 중간입니까? 터널의 끝이 보이십니까?”
“내가 보기엔 터널의 중간으로 캄캄할 뿐이요. 터널이 끝날 조짐은 보이질 않네요.”
“그러시면 후손들에게 캄캄한 터널을 그대로 물려주시렵니까?”
“나야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요. 마음 같아서야 무언가 해야겠지만 뾰족한 방안이 없네요.”
“여사님 죽기 전에 큰일을 한 번하시면 어쩌실까요?”
“큰일이라면, 무엇을 말하나요?”
“독립운동이지요.”
“예! 독립운동이요.”
최송설당은 예상 밖의 대답에 깜짝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밖에 인기척이 있는지 장지문을 열어 살펴보았다. 다행히 엿듣는 사람은 없는 듯 했다. 다시 좌정을 하였다.
“내가 직접 하기에는 너무나 조심이 되네요.”
“예, 맞습니다. 독립운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일이 잘못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표시 안 나게 하셔야지요.”
“어떻게 표시 안 나게 도울 수 있나요?”
“제가 이번에 동양척식주시회사로부터 융자금을 받았습니다. 저들은 제가 사업상 필요에 의해 융자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 돈을 상해(上海) 임시정부로 보낼 것입니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독립운동을 돕는데 위험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너무 걱정이 되네요.”
“제가 융자받은 돈은 독립운동자금으로는 너무 적습니다. 여사님께서는 저를 믿고 저에게 투자를 하십시오. 제가 사업상 여사님 돈을 빌린 것으로 하면 저들은 여사님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빌려주는 형태라고요.”
“예, 제가 여사님 돈을 차용하고 차용증을 써드리는 것입니다. 대신 빌린 돈은 여사님이 살아계시는 동안 독립이 되지 못하면 갚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여사님 돈은 상해 임시정부로 송금 될 것입니다.”
“그만한 돈은 당장 수중에 있지도 않네요. 너무나 큰일이니 생각할 시간도 필요하고요.”
“일이 잘못되더라도 제가 목숨을 걸고 여사님을 보호하겠습니다. 저를 믿어 보시지요.”
여환옥으로서는 주도면밀한 계획이었다. 그렇다고 최송설당은 즉석에서 동의할 수는 없었다. 여환옥이 돌아가고 나서 최송설당은 몇날 며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여환옥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상해 임시정부로 송금을 하겠다고 실토했다. 그러나 여환옥은 자신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어떠한 행동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쉽게 동의했다가 일이 잘 못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처지가 아닌가. 최송설당은 일생일대의 고심을 했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강우규였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부임하던 날이었다. 삼엄한 경계 속에서 총독 마차를 향해 수류탄을 던진 사나이였다. 최송설당도 눈앞에서 목격했었다. 그 사람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자신의 목숨이 아깝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독립’을 외치며 이슬처럼 사라져가는 것을 보았다. 용기 있는 애국지사의 행동에 비하면 자신의 고민은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여환옥을 믿어 보기로 했다. 인편을 넣어 만나자고 기별을 보냈다. 음력으로 보름이건만 달은 보이지 않고 구름이 켜켜이 쌓여 하늘이 내려와 있었다.
“여기 1만 원입니다.”
“예, 제가 바로 차용증을 써 드리겠습니다.”
“좋은 일에 쓰십시오.”
“진짜 영수증은 3년 후 상해에서 발행될 것입니다.”
최송설당은 1만 원의 돈을 건넸고 차용증도 작성되었다. 그날 이후 최송설당은 자신이 기부한 돈에 대해 깨끗이 잊고 지냈다.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고성산 중턱에 자리한 정걸제 마당에는 나무 백일홍이 진분홍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아침에는 까치가 나뭇가지에 앉아 까악 까악 짓고는 날아갔다. 최송설당은 자신이 평생 해오던 버릇대로 포장지 한 장도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그날도 그동안 모아 두었던 포장지를 색깔별로 분류하여 무거운 돌멩이로 편편하게 펴지도록 눌러 놓았다. 점심을 먹고는 아지랑이에 취해 막 낮잠을 자려고할 때 여환옥이 찾아왔다.
“여사님 잠을 제가 깨운 것 같습니다.”
“어서 오세요. 아침에 까치가 짖더니 여사장이 오시려고 그랬나 봅니다.”
“여사님! 오늘은 제가 영수증을 가지고 왔습니다.”
“무슨 영수증을 가지고 오셨나요?”
여환옥은 누런 봉투에서 잡지책 한 권을 꺼내 놓았다. 표지에는 <무궁화>라고 되어있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예, 이 잡지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행되는 <무궁화>라는 계간지입니다. 이 잡지에 ‘조선에는 최송설당이라는 분이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입하여 인문계 고등보통학교를 세워 후학을 양성하려 한다.’는 수필이 실려 있습니다.”
최송설당은 <무궁화>를 펼쳐보았다. 잡지의 중간쯤 ‘송설송’이라는 수필제목이 보였다. 대충 눈으로 살펴보니 자신의 학교건립 행위를 애국지사로 표현하고 있었다.
“이게 영수증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이 잡지에는 군자금을 받았다는 암호가 들어있습니다. 물론 저도 알지 못합니다. 해방이 되면 상환한다는 내용도 있답니다.”
“그러면 나도 차용증을 드려야지요.”
3년 전에 여환옥이 작성한 차용증 영수증을 문갑에서 꺼내서는 찢어 벼렸다. 여환옥이 놀라는 눈빛으로
“여사님! 아직 저는 빚을 갚지 못했는데요.”
“여기 영수증이 있는데 무슨 빚을 또 갚습니까.”
“그러시면 이 잡지는 여사님이 보관하시지요. 독립이 되면 영수증이 되어 반환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요. 내가 할 일을 하였을 뿐 무엇을 바라겠소. 보상을 받기위해 독립운동을 지원한 건 아니지요.
이 책은 여사장이 가져가시오.”
여환옥은 몇 번이고 최송설당을 존경한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여환옥이 돌아가고 삼일이 채 지나지 않았다. 최송설당은 점심을 먹고 서재에서 시상이 떠올라 시 한편을 적고 있었다. 이때 김천경찰서의 고등계 다니구찌 형사가 급습했다. 한국인 순사보조원 두 명도 뒤따랐다.
“순사님이 왠일이십니까.”
“할머니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는 첩보가 있어왔습니다.”
“난 모르는 일이오.”
“상해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발행하는 <무궁화> 잡지에 할머니의 기사가 났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오?”
“무궁화 잡지에 실린 사람들은 대체로 독립운동을 지원한다는 정보가 있소.”
“얼마 전에 국내에서 발행된 <삼천리>에서도 나에 대한 내용이 실렸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는 여러 차례 실렸는데 그땐 아무 애기가 없었지 않소.”
“하여튼 좀 살펴봐야겠소. 애들아 잡지라는 잡지는 모조리 찾아라.”
최송설당이 보는 앞에서 가택수색에 들어갔다. 그들은 송설당의 서재는 물론 부엌까지 사사치 뒤졌다. 그러나 그들이 찾는 <무궁화> 잡지는 물론 어떠한 잡지도 발견하지 못했다. 다니구찌 형사는 임무 달성을 못했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는지 조그마한 꼬투리라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있었다. 형사는 최송설당이 경상 위에 써놓은 시 한편을 발견하고 종이를 집어 들어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향일화(向日花)”
향일화(向日花)는 충신화(忠臣花)라 키도 크고 헌앙(軒昻)하다
내 마당에 심은 뜻은 그 뉘라서 짐작(斟酌)하랴
달과 갓치 둥근 꽃이 해를 향해 기우리니
아침에는 향동(向東)하고 저녁에는 향서(向西)하여
한때라도 일치안코 충심성의(忠心誠意) 직혀간다
꽃잎마다 빗 누러니 중앙정색(中央正色) 이 아닌가
임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 수유(須臾)인들 옴길손야
숙상한풍(肅霜寒風) 소슬(蕭瑟)한데 화엽(花葉)이색(色) 불변(不變)하니
뒤뜰에 설중고송(雪中孤松) 네가 적실(的實) 내 벗인 듯
해바라기는 충신화라 키도 크고 풍채 좋다.
내 마당에 심은 뜻은 그 누가 짐작하랴.
달과 같이 둥근 꽃이 해를 향해 기울이니
아침에는 동쪽으로 저녁에는 서쪽으로
한 때라도 잃지 않고 충심 성의 지켜간다.
꽃잎마다 노란 빛에 중앙에는 황색이라
임을 향한 일편단심 잠시라도 변할 소냐.
된서리 찬바람에 꽃과 잎이 변함없네.
뒤뜰에 홀로선 소나무 네가 바로 내 벗인 듯
“향일화는 충신화라 했고, 임을 향한 일편단심이라고 한 것은 독립군을 말하는 것 아니오?”
“선생님은 독립군을 많이 잡다보니 해바라기도 독립군으로 보이시나 보지요.”
다니구찌 형사는 자신의 논리가 너무 비약한 것을 직감하고 꼬리를 내렸다.
“오늘은 그냥 가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요. 할머니, 몸조심 하시오. 애들아 가자.”
으름장을 놓고는 팔자걸음에 헛기침을 하며 순사보조를 데리고 나갔다.
그들이 돌아가자 최송설당은 <무궁화> 잡지를 돌려보내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가슴 조이는 하루였다.
이후 여환옥은 최송설당의 독립운동 지원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932년에는 김천고등보통학교에 1,000원을 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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