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문학의 재능
최송설당은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자 집 가까이 있는 청계천으로 나들이 갔다. 청계천의 시작인 모전교가 눈에 들어왔다. 다리 주변에 과일을 파는 가게인 모전(毛廛)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청계천은 장마철이 되면 홍수로 범람하지만 평상시는 마른 개울이다. 곧이어 광통교가 나타났다. 광통교는 태종 임금이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를 미워한 나머지 정동에 있던 무덤을 헐어서 만든 다리라고 한다. 많은 사람이 밟고 다니면 죽은 영혼이 극락에 가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튼튼한 다리다 보니 어가행차는 물론 한양의 중심 동선이 되었다. 눈이라도 내리려는지 날씨는 푸근했다. 둑에는 빨랫감 보자기가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모닥불 위로 빨래 삶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쪼그려 앉은 아낙네가 방망이를 치켜들 때마다 유방이 보일 듯 말듯했다. 방망이 소리가 장단을 맞추고 있다. 장교를 지났다. 도성 안에서 제일 큰 장통방이라는 긴 창고가 나타났다. 시전 상인들이 많이 살아서 상업의 중심지였다. 장통교를 건너 집으로 돌아왔다. 항상 긴장된 상태로 대기하던 궁중생활에서 사람 냄새가 나는 마을로 돌아왔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 나들이였다. 방으로 들어와 서북으로 난 창문을 열고 보니 인왕산 바위가 눈앞에 성큼 다가왔다. 층층이 쌓인 바위가 오후 햇살을 받아 더욱 희게 빛났다. 북악산의 울창한 나무는 정장을 차려입은 손님처럼 보였다. 붓을 잡고 책상머리에 앉아 생각나는 대로 적어갔다.
<우음(偶吟)>
서북창문(西北窓門) 열어놓고
인왕북악(仁旺北岳) 바라보니
중중층층(重重層層) 저 석벽은
정신골격 쇄락(灑落)하고
울울청청(鬱鬱靑靑) 저 초목은
관대의상(冠帶衣裳) 방불한데
담담히(淡淡) 뜬구름은
오는 손님 반기는 듯
곤곤히(滾滾) 흐르는 물
가는 손님 전별인 듯(餞別)
<중략>
무교동의 최송설당 자택은 시인 묵객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당대에 내로라하는 문인과 지식인들이 드나들었다. 이러한 인물 중에는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애산(愛山) 이인(李仁), 좌산(左山) 이영구(李永九), 평산(平山) 신현중(申鉉中), 화음(華陰) 정윤수(鄭崙秀) 등 당대의 문장가들이었다.
인생을 정리하는 행보를 시작했다. 최송설당은 자신의 삶을 회상하며 노래한 글들을 모아 문집을 만들기로 했다. 문집으로 발간할 바에는 당대 최고의 덕망 있는 문장가로부터 서문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특정인에게 부탁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몇 날 며칠을 곰곰이 생각만 하고 보냈다. 그러다 떠오른 분이 김윤식 선생이었다. 김윤식 선생은 문과에 급제한 이후 암행어사와 승지를 역임하였다. 대원군을 청나라로부터 모셔오는 일에 앞장 섰다가 명성왕후로부터 미움을 사 유배생활을 했다. 김홍집 내각에서 외부대신으로 일했다. 그 뒤 김홍집과 다른 대신들은 처형을 당했으나 덕망이 있어 유배되는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한일합방 시에는 순종의 부름에 합방이 옳지 않음을 주장하기도 했다.이후 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두문불출하였다. 최송설당은 조카 최석태를 통해 김윤식 선생에게 서문을 부탁드렸다. 최석태가 김윤식 대감을 찾아갔다.
“최송설당의 부탁으로 대감님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최송설당이라고요?”
“대감님께서는 이토 히로부미 통감과 함께 영친왕 위문 칙사로 일본에 가신 일이 있으시지요. 그때 선물 심부름을 했던 영친왕의 보모 최송설당의 부탁입니다.”
“얼굴은 알만하네요. 그래 이 늙은이에게 무슨 부탁인가요?”
“최송설당은 궁중생활 10년 동안 틈틈이 써 놓은 글이 백여 편이 되었답니다. 이번에 문집을 발간하고자 하는데 대감님께서 서문을 써 주셨으면 하는 청입니다.”
“요즈음 두문불출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분이 날 기억하고 있다고 하니 써 드리지요.”
최송설당의 작품을 본 김윤식은 한 달 후 서문을 써 보내왔다.
<최송설당집 서(松雪堂集 序)>
부인이 시도(詩道)를 알아 온 지 오래되었다. 상고해 보건대 시경 국풍의 뒷골목에 떠돌아다니는 노래를 들여다보면 태반이 부인에게서 나온 것인데 그 후 한당(漢唐)으로부터 원명(元明)에 이르기까지 쳐줄만한 것이 많다. 우리 풍속에 문예는 여자들이 할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왕왕 새벽별에 떨어지는 기러기와 같이 드문드문 있었는데 전해지는 사람은 없었다. 부인들의 거처에는 왼쪽이 바느질,오른쪽은 반찬 하는 것만이 보일 뿐이었다.
내가 비록 최송설당 여사를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듣기로는 최송설당은 재앙을 입었던 집안에서 태어난 외로운 후손으로서 조상들을 위해 원통함을 씻어주고 재물을 다스리는 돈을 벌어서 완전히 집안을 다시 일으켰으니 진실로 사내대장부들도 그렇게 행동하기에는 어려웠던 일이다. 또 베를 짜는 여가에 때때로 문자를 익힌 부녀자로서 붓을 대기만 하면 비단같이 아름다운 문장을 이뤄냈다. 그런 최송설당의 자서(自序)를 보면 문은 꾸미지 않아도 스스로 법도에 맞고 위치가 올바르며 말하는 것이 시원하게 되었다. 율시나 절구들은 모두가 예스럽고 아담한 품격에 흠씬 무르녹아서 단 한 점이라도 불같은 기운이 없다. 봄꽃봉오리처럼 활짝 퍼져서 인공적으로 붉거나 희게 만들지 않아도 문장이 완성되었다.
국문 가사의 경우에는 더욱더 장점이 많다. 곡조의 품격이 충심하여 맑고 가사의 뜻이 온화하고 고와서 푸른 바다에 사는 용이 국문 가사를 갖고 노는데 턱 아래 여의주의 영롱하고 멋진 채색이 파도 사이에 은은하게 비쳐 빛나는 것 같다. 모르겠다. 부인이 배우지도 않았는데 이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또 어찌 힘들이지 않았는데도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풍류놀이를 하고 글을 쓰는 선비들이 형설지공을 하면서 그 해를 다 보내고 나서도 그가 지어놓은 문장을 보면 마치 매미나 벌레가 우는 것 같아서 병뚜껑으로도 쓸 만한 것이 못 되는 작품을 손가락으로도 다 꼽을 수 없다.
부인이 일찍이 십 년 동안 한 번의 겨울도 풍족히 지내기 못하면서도 널리 모아들이는 것들이 절도에 꼭 맞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준 재질이 아니겠는가? 장차 최송설당 집을 간행하려고 하면서 나에게 책 머리말을 써 달라 하며 말하기를 ‘지은 문고가 다만 이와 같은 것이 약간일 뿐인데도 모두 버리지 못하고 편집하려고 하는 것은 뒷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비취새가 멋지게 보이는 것은 그 날개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고 말했다.
내가 말하기를 ‘곤륜산의 하찮은 구슬 조각도 당대 절세의 진귀한 보배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으니 어찌 당신의 작품이 많지 않다고 걱정하겠는가? 이 원고가 한번 나오게 될 경우 지난 시절 여사들도 전적으로 좋게는 여기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머리를 모아 저 지하에서 칭찬의 말을 할 것이다.’고 했다.
- 갑인년 중춘 80옹 청풍 김윤식 서 -
1914년 봄, 김윤식 선생으로부터 서문을 받아든 최송설당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자신의 글에 대해 전반부에는 ‘붓을 대기만 하면 비단같이 아름다운 문장을 이뤄냈다.’라고 극도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른 선비들이 쓴 글을 ‘지어놓은 문장을 보면 마치 매미나 벌레가 우는 것 같아서 병뚜껑으로도 쓸 만한 것이 못 되는 작품을 손가락으로도 다 꼽을 수 없다.’고 꼬집고 있었다. 또한 작품이 많지 않은 것은 흠이 아니라고 했지만 어딘지 부족한 감이 들었다. 최송설당은 좀 더 정진한 후에 출판하기로 했다.
최송설당은 좋은 작품을 남기고 싶은 열망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작품을 쓰지 않았다고 나무랄 사람도 없다. 내일로 미루었다고 훈계할 사람도 없었다. 그저 생각이 날 때마다 써보겠다는 마음뿐 한 해 두 해 흘러가도 작품이 모이질 않았다. 인간의 품성은 시한에 얽매이지 않으면 게을러지게 마련이었다. 하루는 한 가지 꾀를 냈다. 동호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동호인 간에 석 달에 한번 모임을 가지기로 했다. 모임을 가질 때마다 자기의 작품을 발표하고 서로 평가해주는 모임을 만들었다. 석 달은 금방금방 다가왔다. 그날에 맞추어 작품 발표를 해야 하니 시간에 쫓겨서라도 작품을 쓸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동호인들이 모이는 날이었다. 최송설당은 그 동안 준비해 두었던 견민(遣悶)이란 시를 발표하였다.
견민(遣悶)
춘풍화류(春風花柳) 난만(爛漫)할 때
봄을 짝해 오려는가.
녹음방초(綠陰芳草) 승화시(勝花時)에
잎을 따려 오려는가.
중양가절(重陽佳節) 구추시(九秋時)에
황국(黃菊)보려 오려는가.
엄동설한(嚴冬雪寒) 찬바람에
매화 찾아 오려는가.
유실무실(有實無實) 오동실(梧桐實)과
유사무사(有絲無絲) 양류사(楊柳絲)는
각기 한때 뿐이언만
한결같은 저 노송(老松)은
사시청청(四時靑靑) 푸르렀다
우리인생 너와같이
하나님께 발원(發願)하여
한번 오면 감이 없게
[해설]
춘풍화류 만발할 때 봄을 짝해 오려는가.
녹음방초 활짝 필 때 잎을 따러 오려는가.
중양가절 9월에 국화 보러 오려는가.
엄동설한 찬바람에 매화 찾아오려는가.
있는 듯 없는 듯 오동열매
가느다란 버들가지
각기 한 때뿐이건만
한결같은 저 노송은 사시사철 푸르렀다.
우리인생 너와 같이 하늘에 소원 빌어
한 번 오면 돌아감이 없게 하리
조선 왕실이 무너지면서 양반도 사라졌다. 이러한 모습은 황금정을 지나는 전차를 타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전차 안은 남녀노소도 없고 양반도 상놈도 구분되지 않는다. 전차가 모퉁이를 돌 때면 여인네의 가슴팍에도 거침없이 밀어 부처 남녀 칠 세 부동석은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최송설당이 문집 발간을 앞두고 있을 무렵에는 가사문학에도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농민이라면 타령 한 곡조는 뽑을 수 있었다. 농가에 자연 풍경과 농사일의 정회를 달에 맞추어 부르도록 한 ‘농가월령가’가 대표적이다. 황소 침 늘어지듯이 축축 늘어지는 곡조로 뽑아내 흥을 돋우는 것이 특징이었다.
삼월은 모춘(暮春)이라
청명곡우 절기(節氣)로다
춘일이 재양(載陽)하여
만물이 화창(和暢)하니
<농가월령가>의 물오른 수양버들처럼 늘어지던 노랫가락 자리에는 서양식의 음률이 가미된 가요들이 생겨났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동명의 영화 주제가 <낙화유수>이다. 이런 신가요들이 풍류를 안다는 지식인들 사이에도 유행하고 있었다.
강남달이 밝아서 임이 놀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어졌네.
물망초 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 이 한밤을 홀로 새울까
새로운 사조가 들어오는 와중에도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반성도 있었다. 가사문학은 고려 말 신흥 사대부들이 창안하여 조선 시대에 대중적이 풍류로 퍼졌다. 시대가 바뀌어도 시조와 가사문학을 부흥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절의 변화를 막지는 못했다. 대중들 사이에는 끝자락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최송설당의 가사문학은 500년 가사문학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었다.
출판을 앞두고 최송설당은 당대의 최고 문인 세 분을 자택으로 초청했다. 자신의 작품을 보여 주며 평가를 부탁했다. 초청된 인사는 좌산(左山) 이영구(李英九) 선생, 평산(平山) 신현중(申鉉中) 선생, 화음(華陰) 정윤수(鄭崙秀) 선생이었다. 세 사람은 술상까지 대접받았으니 밥값은 하고 가야 할 처지였다. 최송설당이 보여주는 한시들을 모두 살펴보았다.
春望(춘망)
暇日登高望
韶光正可燐
行人垂柳外
遊子落花邊
한가한 날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니
봄 경치 사랑할 만하구나
늘어진 버드나무 밖으로 지나가는 행인들
떨어진 꽃 주워서 노는 사람들.
먼저 좌산 선생이 평가를 했다.
“춘망이라! 화창한 봄날, 봄의 정취에 흠뻑 빠져있네요. 늘어진 버드나무와 떨어지는 꽃잎 속에 봄을 완상하는 모습이 잘 나타났네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제가 차운을 써 드리리다.”
문장은 절로 베 짜듯이 나와 문장가와 여사(女士)의 명예를 겸하였다. 한 덩이 정신의 원기는 우뚝하여 무너뜨리는 물결에 선 지주(砥柱)같고 백 편의 아름다운 글은 밝기가 모래를 헤쳐 금을 단련하는 것 같다. 마음을 우의(寓意)하고 시를 읊되 반드시 경의(經義)를 따라 시를 지었다.
좌산(左山) 이영구(李永九)
이어서 평산 선생이 <석류>를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石榴(석류)
日日北堂思
開門對石榴
誰識西域果
辛酸世間留
날마다 어머니 생각에
문을 열고 석류를 마주하네.
누가 알겠는가 서역 과실이
맵고 신 세상에 머물 줄이야
“뜰에 발갛게 벌어지는 석류를 바라보며 고향의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네요. 크나큰 과업을 안고 어머니와 고향을 떠나 최송설당이 찾아온 곳은 맵고 신 세상이었겠지요. 이 시는 효심으로 현재의 고통을 참고 있네요. 나도 한 자 써 드리리다.”
문득 이 세상 오늘을 당하여서도 그의 충의(忠意)로 인한 분노와 우국의 뜻은 성정이 바른 데서 나온 것이요, 한탄과 영탄으로 드러난 것은 그의 시문(詩文) 약간 편인데, 말하자면 은혜에 감사하고 지난 일을 회고한 글들이 이것이다.
평산(平山) 신현중(申鉉中)
화엄 선생도 차운을 써주었다.
내가 그의 지행(志行)과 사업을 보니 실로 열렬한 대장부도 행하기 어려운 바가 많고 문장이 또한 예스럽고 아름다워 옛 여사(女史)들에게 구하여도 짝이 될 만한 것이 드물다.
화음(華陰) 정윤수(鄭崙秀)
최송설당은 정진에 정진을 거듭한 결과 김윤식 선생으로부터 서문을 받은 지 8년이 지나자 작품의 숫자도 3백여 편으로 늘어났다. 소재를 택함에 있어 대부분은 늙음을 한탄함, 여성이었음을 한탄함, 자기 스스로의 반성 등 개인적 심회를 읊은 것이 대부분이다. 작품은 여성의 채취를 느끼게 하는 소품들을 대상으로 시작을 했다. <월야(月夜)> <자회(自懷)> <심야독좌(深夜獨坐)> <월석문학루(月夕聞鶴淚)> <추안(秋雁)> <추우(秋雨)> <춘규원(春閨怨)> <장문원(長門怨)> <금(琴)> <슬(瑟)> <지환(指環)> <경(鏡)> <연죽(煙竹)> <소(梳)> <안경(眼鏡)> 등이다. 또한 살아있는 모든 생물체는 최송설당의 시제였다. <하일원중잡영(夏日園中雜詠)>은 홰나무(槐)ㆍ버들(柳)ㆍ오동(桐)ㆍ솔(松)ㆍ오얏(李)ㆍ대추(棗)ㆍ매화(梅)ㆍ석류(榴)ㆍ국화(菊) 등의 초목류와 제비ㆍ해오라기ㆍ갈매기ㆍ까마귀ㆍ꾀꼬리ㆍ닭ㆍ공작ㆍ소리개ㆍ매미ㆍ반딧불 등의 조충류를 소재로 한 22수의 시로 구성되었다.
최송설당은 20년 전에 김천을 떠날 때와 얼마나 바뀌었는지 보고 싶었다.
이른 조반을 먹고 금오산 위에 걸린 해를 보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자 서북쪽에 추풍령과 황악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었다. 백두산에서 출발한 백두대간은 동해안을 따라 소백산까지 내려온다. 서북 방향으로 뻗어내려 속리산과 마주치게 된다. 여기서 더 남쪽으로 내려오면 황악산에 다다른다. 황악산 아래에는 신라 시대 아도화상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터를 잡았다는 천년 고찰 직지사(直指寺)가 자리하고 있다.
백두대간 남쪽은 영남의 관문인 김천, 북쪽은 충청도 영동, 서쪽은 전라도 무주의 세 고을이다. 이들 세 고을이 마주쳐 삼도봉을 이룬다. 예부터 영남에서 백두대간을 넘어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추풍령, 조령, 죽령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추풍령은 김천에서 출발하여 충청도 영동에 다다르는 고개다.여기서 천안을 지나 한양으로 갔다. 20년 전 자신도 오솔길에 불과했던 추풍령을 넘어 한양으로 가지 않았던가. 이제는 경부선 기차가 추풍령 고개 아래에서 허우적거리며 달리고 있다. 철길 옆으로는 신작로가 나서 자동차가 다닐 만큼 커져 있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김천의 유래가 금(金)이 나고 맑은 샘(泉)이 있다고 하여 김천이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물산이 풍족하고 물맛이 좋아 중국의 금릉의 물맛과 같다고 했다. 따라서 김천 사람들은 김천과 금릉을 섞어서 불렀다.
김천은 백두대간 아래 넓은 들이 펼쳐지는 명당자리다. 삼산이수(三山二水)라 하여 사방이 산으로 둘러싼 분지다. 시내 외각으로 두 개의 하천이 흐르고 있는데 감천과 직지천이다. 감천은 덕유산에서 발원하여 김천 시내의 남동쪽으로 흐른다. 직지천은 황악산에서 발원하여 시내의 동쪽으로 흘러 두 시내가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직지천의 물로 농사짓는 다수동 일대 금릉평야는 너르다.가을 하늘에 황금색 들판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이름도 ‘미곡’이라 불렀다.
자신이 김천을 떠날 때는 조그마한 촌락에 불과했었다. 김천역이 들어서고서는 장정들이 모여들어 김천읍으로 승격되었다. 일본인들도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김천역을 지나 남산동 노실고개로 가는 길은 옹기종기 초가집들이 엎드려있다. 고개 너머에는 숲길이 나왔다. 바위틈에서 퐁퐁 솟아나는 과하 샘물을 목에까지 차도록 마셨다. 역시 물맛은 변함이 없었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중국의 과하샘 물맛과 같다고 해서 과하샘이 되었다고 했다. 과하샘은 전국 3대 샘물로 유명하다. 이물로 김천 명주 과하주(過夏酒)를 담고 있었다.
황금동을 지나 양천동과 경계지점 골짜기 초입에 들어섰다. 폭포수는 보이지 않아도 낙숫물 소리는 들렸다. 이 물로 목욕을 하면 위장병과 피부병에 좋다고 하여 낮이면 남정네들이, 밤이면 아낙네들이 몰려들어 ‘약물내기’라고 불렀다.
증산면 일대 금곡은 노다지가 쏟아지던 곳이었다. 진상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 골짜기를 메워버렸다고 한다. 얼마나 삶이 고달팠으면 자신의 터전을 뒤엎었을까. 만감이 교차했다.
아래 장터 쪽으로 발길을 돌리니 매 5일과 10일에 열리는 김천 장날이었다. 인근 상주, 선산, 성주는 물론 전라도의 무주, 충청도의 영동, 경남의 거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전국 5대 장터인 김천장은 장꾼들로 북적였다.
감천 내를 건너 황산에 올랐다. 이게 웬일인가! 시내 중앙에 있는 산바위는 건장한 사나이 모습이고 황금동 쪽 바위는 곱게 치마를 두른 여인의 모습으로 서로 마주 보고 서있다. 용두동의 제방은 초례상이요 황산은 초례상에 올라간 기러기다. 굽이쳐 흐르는 감천 냇물은 주전자 형상이요, 술잔 모양의 약수동에 과하주를 부으면 영락없이 혼례상이다. 여기에 더하여 양천동의 하로(賀老)마을은 이름대로 축하하러 온 노인이요, 말굽 모양의 마좌산은 말을 타고 온 하객이다. 용의 머리 용두동에 모인 장꾼들은 결혼식 하객으로 보였다. 김천의 산과 언덕과 마을의 형상이 참으로 신통하고 기묘했다.
장터로 내려와 따로 국밥을 시켰다. 놋그릇에 밥과 국이 따로 나왔다. 소고기에 파와 무를 크게 썰어 얼큰하게 만들었다. 대파가 입안을 타고 들어가자 달작 지근한 맛이 목줄을 타고 내려갔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최송설당은 제사상에 올릴 제수 거리를 샀다. 김천은 내륙에 위치해 있어 싱싱한 생선은 구경할 수가 없다. 조기, 말린 가오리, 말린 문어, 북어 등의 건어물에 대추, 밤, 호두 건과가 전부다.
돌아오는 길에 교동의 연화지 정자에 올랐다. 고성산 넘어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을 바라보다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늦은 저녁을 먹고 나니 낮에 보았던 김천의 모습이 시상으로 떠올라 차분히 써 내려갔다.
금릉풍경
백두산의 한 지맥이 동쪽으로 뻗어내려
소백산이 되었으며 소백산의 서북가지
속리산이 되었는데 속리산의 한줄기가
남쪽으로 뻗어나가 금릉으로 배치하고
김천명당 열었는데 산과물이 수려한데
기암괴석 마주보니 그 형상이 이상하다
마주보고 섰는모양 사람으로 이르며는
신랑신부 마주서서 혼례하는 거동같이
남자동쪽 여자서쪽 각자복식 구비하네
용두방축 동자모습 황산이 기러기오
감천냇물 주전자에 약수동 술잔이라
과하주샘 술을부어 주고받는 거동이며
하로노인 높이모셔 마좌산 말을모니
시내거리 찬치되어 많은손님 모여든다
미곡에 쌓인백미 금곡에 빛난황금
봉황대위 봉황류라 봉황같은 화락부부
오고가기 여전한데 천장지구 무궁일세
금릉산천 이르기를 이로더욱 명승지라
이땅에서 나는자녀 남녀결혼 하게되면
군자숙녀 쌍을일어 봉황처름 날아가리
만족할 만한 편수의 작품이 모아지자 조카인 최홍렬(崔鴻烈)과 최석태에게 편집을 의뢰하였다. 그들이 편집을 하여 출판 계획을 가지고 왔다.
“고모님! 모두 세 권의 필사본으로 출판을 하고자 합니다. 글씨는 이 시대의 명필인 김돈희 선생이 쓰시도록 하겠습니다. 제1권에는 총 167제 242수 산문 4수를, 제2권에는 한글 가사 49수를, 제3권에는 부록으로 130여 명의 인사가 준 차운과 최송설당 원문을 싣겠습니다. 책머리에는 김윤식(金允植) 선생의 서문과 저자의 자서를 싣고, 전 내부대신 남정철, 전 판서 윤용규 등의 최송설당의 한시에 화답하는 글을 싣겠습니다. 책의 말미에는 곽윤(郭奫)과 최홍렬의 발문을 싣도록 하겠습니다.”
“예, 좋아요. 조카님들 의도대로 깔끔하게 만들어 주세요.”
이렇게 출판은 진행되어 1922년 책으로 발간되었다. 최송설당이 김윤식으로부터 서문을 받은 지 8년이 지난 후에야 출판이 된 것이다. 김윤식은 이미 사망하고 없었다. 책을 받아본 최송설당은 8년 동안을 기다렸다가 출판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세계 각국의 도서관에도 보냈다.
'소설 최송설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최송설당] 제17장 독립운동 (0) | 2018.04.30 |
---|---|
[소설 최송설당] 제16장 가문(家門)의 재건 (0) | 2018.04.30 |
[소설 최송설당] 제14장 보시(布施) (0) | 2018.04.30 |
[소설 최송설당] 제13장 부(富)의 행로 (0) | 2018.01.02 |
[소설 최송설당] 제12장 방출궁인 (0) | 2017.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