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숙원이 풀어졌다. 최송설당은 고향 땅 정주 어디엔가 묻혀있을 증조부의 원혼을 달래고 싶었다. 김천군 송운동 뒷산에 허묘를 만들고 가사를 지었다.
우리증조 철천지원
자자손손 유한터니,
전일에 조림하사
광무오년 신원되니,
명면유괴 봉안코자
의대관부 갖추어서
김천군 송운동에
함봉하야 뫼셧세라
허묘를 만드는 것만으로는 최송설당의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1914년에는 조카 최석태를 정주와 선천으로 보냈다. 조부가 고부로 유배된 이후 104년 동안 방치한 8대조까지 선조 묘소를 찾게 했다. 증조부 최봉관의 묘소를 선천 오목동에서 찾았고, 정주 백현에서 8대조와 7대조 묘소를 찾았다. 6대조 묘소는 봉학산에서, 5대조 묘소는 아미산에서 찾았다. 최송설당은 최고급 석물을 제작했다. 평안도 곳곳에 흩어진 선조들의 묘소까지 기차로 실어 날랐다. 이어서 동네 노인들을 모셔 접대하고 일가친척인 최덕홍에게 묘를 잘 관리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오랜 세월 방치한 선조 묘소 앞에 석물을 안치하고 제수 음식을 차린 뒤 절을 올렸다. 이로써 최송설당은 조상의 죄를 씻고 문중의 현창(顯彰) 사업을 빠짐없이 마쳤다. 후손된 도리를 모두 마쳤을 때, 최송설당의 나이 이미 환갑이 되었다.
정주에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였다.
"석태야 기축사화에 대해 들어본 적 있니?"
"아닙니다. 고모님"
"기축사화에는 우리 최영경 할아버지가 관련되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화란다.
"어떤 일로 누명을 쓰셨나요?"
"황해도 관찰사 한준 일당이 얼음이 얼면 정여립이 한양으로 쳐들어가 조정 중신을 죽일 계획이라고 상소를 올렸단다. 그 때는 동인들이 집권하고 있었고 정여립은 동인(東人)에 속한 인물이었지. 당연히 동인들은 정여립의 결백을 주장했단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소식은 들은 정여립은 도망을 가다가 자살을 했는데 마치 반역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였단다."
"사건이 확대되었겠네요."
"그렇지. 선조임금은 서인의 영수인 정철을 시켜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교류가 있었던 사람은 모조리 잡아들이게 했단다. 최영경 할아버지는 남명 조식의 제자로서 정여립과 학문적 교류가 있어 오고 간 편지가 있었단다. 이를 계기로 최영경 할아버지는 국문을 받게 되었지. 국문 결과 정여립과 함께 또 다른 역모의 주모자로 누명을 쓰고 결국 옥사하셨단다."
"억울하게 옥사를 하셨네요,"
"물론이지, 정여립이 역모를 도모하다 도망을 갔다면 집안에 있는 문서들도 태우고 가지 않았겠니. 그리고 군사들을 모은 증거가 있어야 하지 않겠니."
"그러네요."
"나중에 알려지기는 했지만 선조 임금이 권세를 휘두르는 동인들을 배척하기 위한 명분으로 선택한 것이었단다. 최영경 할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었지."
말을 마치자 최송설당은 시상이 떠올랐다.
송설당의 시와 가사 (정후수, 신경숙, 김종순 공저)
정주‧선천의 선영에 석의(石儀)를 차리고 돌아오는 길에 느낌이 있어 지음
우리 집 처음 몰락해갈 때
문중의 운수가 어찌 이리도 한 번에 쇄해졌는가.
아아! 기축년의 재앙은
여러 소인배로 말미암았고
슬프다 신미년의 재앙
말을 하려면 눈물 먼저 흐른다.
이리저리 떠돌며 남쪽으로 옮겨간 뒤
가난이 항상 떠나지 않았다.
아버님께서 옛날에 하신 말씀
선조의 묘소가 서쪽 변방에 있다고
5대를 내려와 모두 잃어버려서
성묘한 지가 너무 오래 되었다.
<후략>
定州‧宣川先壟設石儀回路有感而作)
吾家素零替
門運一何衰
嗚呼己丑禍
寔由群小疑
慘哉辛未厄
欲語涕先垂
漂泊南遷後
貧窮常不離
阿爺昔有言
先壟在西陲
五世俱失傳
省掃渺無期
(後略)
하늘은 최송설당에게 여자의 몸으로 조상의 신원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주었다. 또한 그 정성에 감동하여 조상의 묘소를 단장할 수 있는 많은 재물을 내려주었다.
동생 최광익은 최송설당을 모시고 살았다. 그는 최송설당과 함께 가문의 중흥을 위해 함께 노력했다. 애석하게도 부인 임씨가 장남 최석태를 낳고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병환으로 죽었다. 최송설당은 가문의 중흥을 위해 최광익의 재혼을 서둘렀다. 기왕이면 신교육을 받은 명석한 여성을 가문에 들였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었다. 신여성은 가문의 제일 어른인 최송설당의 권위를 인정하기보다는 충돌하는 일이 잦았다. 결국은 자신이 낳은 어린 아들 최석두(崔錫斗)를 남겨둔 채 합의이혼에 이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최송설당은 동생의 이혼이 자신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는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다. 최석두에 대해서는 항상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1912년 8월 무교동에 새집을 짓고 이사한지 한 달이 되었다. 최송설당은 열 한 살 된 최석두를 양자로 입양하기로 했다. 양자를 통해 자신의 허전한 미래도 채우고 미안한 마음도 달래기 위해서였다. 부친도 양자를 들이고 자신도 양자를 들였다.
“어머니, 절 받으십시오.”
“오냐.”
“오늘부터 어머니를 평생 모시겠습니다.”
“그래, 나 또한 너를 내 아들로 받아들이겠다.”
이렇게 하여 쉰여덟 살의 고모는 열한 살 석두를 양자로 받아들였다. 최송설당은 자신의 뱃속으로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자신의 호적에 입적 절차를 마쳤다. 늦둥이 아들을 두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풀려 나갔다. 최송설당은 편안히 눈 감을 날을 기대하며 행복감에 졌어있었다. 당시 조선사회는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들이는 풍습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어서 가족잔치가 벌어졌다.
“석두야 오늘같이 즐거운 날은 없을 듯하구나. 너에게 선물을 하나 하고 싶은데 무얼 가지고 싶으냐?”
처음에는 망설이는 눈치였으나 이내 어린이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 제가 갖고 싶은 것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래 말해 보아라.”
“저는 자전거 타는 사람이 제일 부러 워요.”
“그래! 그러면 조선에서 가장 비싼 자전거로 사주마.”
조선에 처음으로 자전거를 들여왔던 사람은 서재필과 윤치호였다. 당시는 축지법을 쓰는 기계로 인식되었다. 십 수 년이 지나자 고소득층을 중심으로 생활용품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보니 엄복동 자전거’라는 동요가 유행했다. 당시 엄복동은 자전거포 점원으로 있었다. 조선과 일본 우수선수 자전거 대회에 선수로 출정하여 1등을 차지했다. 암울했던 조선 사회에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다. 따라서 자전거의 수요도 급증했다. 당시 일본제 자전거 한 대는 20원 내지 30원으로 도시근로자 한 달 봉급과 맞먹었다. 엄복동 선수가 탄 영국제 럿지 자전거는 백 원이 훌쩍 넘어 명품 대접을 받았다.
최석두가 사춘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성장 통을 겪었다. 최송설당도 이에 비례하여 심리적 고통을 안게 되었다. 원초적인 갈등은 정체성의 문제였다.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를 최송설당 앞에서는 ‘외삼촌’이라고 불러야 했다. 그러다가 최송설당이 없는 자리에서는 편하게 ‘아버지’로 불렀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이 오지 않을 수 없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 최송설당 귀에도 자연히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양자제도가 보편화된 사회에서는 이 정도의 갈등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당사자인 최송설당과 석두가 서로 참고 견디어내야 할 몫이었다. 어느 날 석두가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너네, 할머니 안경 멋지다.”
“할머니, 저희들 놀다가도 되지요?”
석두는 ‘할머니’가 아니고 ‘어머니’라고 정정해 주어야 했다. 하지만 그 말이 얼른 떨어지지 않았다. 최송설당도 스스로 어머니라고 하지도 못했다. 열 세 살의 소년과 환갑의 어머니는 누가 보아도 할머니와 손자 사이였다. 친구들이 돌아가고 밤이 되자 석두는 베개를 들고 어머니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 밤은 어머니와 함께 자고 싶어요.”
“그래 이리 오너라.”
석두는 최송설당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최송설당은 어깨를 다독거리면 잠을 청했다. 낮에 친구들 앞에서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한 죄책감에 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니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일생동안 몇 번 느껴보지 못한 행복이었다.
최송설당은 친어머니 없이 자란 석두가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도록 하는데 모든 노력이 집중하였다.석두가 나이 들자 일본으로 유학을 보냈다. 우에노 음악학원을 다니게 했다. 유학을 보내고서는 잘 지내는지 항상 어미로서의 걱정이 앞섰다. 학생의 신분으로 학문에만 정진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석두가 생각날 때면 시를 지어 외로움을 달랬다.
최송설당 기념학술대회에서 발간한 책자
[두아를 생각하며]
어린 아들 이별 뒤 배나 생각 나
바라보면 두 뺨이 꿈속에선 예쁜 눈썹
소녀 불러 몇 번이나 사립문서 기다리게 했던가.
무리 따라 응당 죽마타고 있겠지
짐승 되고 날짐승 됨을 내 부끄러워하나니
못 입고 못 먹음을 네가 어찌 아리.
맑은 가을 벗하여 기쁘게 돌아가면
크게 웃고 손잡아 서로 떨어지지 않으리.
[憶斗兒]
惟子別來倍有思
望中雙煩夢中眉
喚孃幾度柴門候
遂隊 猶應竹馬馳
爲獸爲禽吾所愧
無衣無食爾何知
淸秋作伴好歸去
喧笑提携相不離
동경 유학생 석두는 방학을 맞이하여 한양에 와 있었다.
“어머니! 저도 애인 데리고 와도 될까요?”
애인을 데리고 온다는 말에는 최송설당은 당황하였다. 당시는 ‘자유연애’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던 시기였다. 일부 계층에게만 있었지 보편화되지는 못한 시절이었다. 자유연애라는 말의 이미지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당시는 조혼 풍습이 있어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한 남성들이 동경 유학을 갔다. 유학기간 동안에 동료 여학생을 만나 사랑을 나누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자유연애라는 말에는 순수한 남녀 간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세컨드’라는 이미지와 불륜이라는 이미지가 숨어있었다. 다행히 최송설당은 가볍게 받아 넘겼다.
“너도 성년이 되었으니 좋은 사람 있으면 데리고 오려무나.”
“예, 어머니 감사해요.”
초여름 날씨가 오전만 되어도 이글이글 타올랐다. 비는 오는 둥 마는 둥 보슬비로만 내려 마른장마가 계속되고 있었다. 석두가 애인을 데리고 집으로 왔다. 최송설당으로서는 기대 반 놀라움 반이었다. 석두는 이미 양복을 입는 유학생이었으므로 함께 온 애인도 양장에 양산을 받쳐 들었다. 양장 밑으로 드러난 무릎과 다리는 최송설당에게는 민망하기만 했다. 얼마 전까지 외출할 때는 장옷에 쓰개치마를 걸쳤던 최송설당이 아니었던가. 양장을 했으니 머리는 유행을 따라 단발머리로 했다. 전형적인 모든 걸(modern girl)의 모습이었다. 석두는 흰 구두를 신었고 애인은 하이힐로 한껏 각선미를 드러내고 있었다. 최송설당은 최근에 유행하는 고무신이 편하고 좋았다. 이 모든 것들이 최송설당에게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세대 간의 문화적 충격은 어느 시대에나 있게 마련이다. 이 또한 앞선 세대가 젊은 세대를 이해하는 경우에만 갈등은 해소될 수 있다. 이러한 최송설당의 생활과는 달리 석두는 예술을 하는 사람답게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 최송설당은 평생을 근검절약하고 살아왔지만 입양한 자식 석두는 달랐다. 아버지도 입양했는데 자신도 입양의 처지에 놓임에 따라 처음부터 인생관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최송설당이 식사 수발을 드는 사람이 쌀뜨물을 버리는 것을 보았다. “어찌 농민의 피와 땀이 서려있는 쌀 한 톨을 버릴 수 있소. 지금 조선에는 밥을 먹을 수 없어 만주산 콩깻묵을 먹고 있지 않소.”하며 불호령이 났다. 얼마 후에는 닭을 잡았는데 닭발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것을 보았다. “닭발도 다 먹을 수 있는 것을 버렸던데 당장 찾아오세요.”최송설당은 종이 한 장도 버리지 않고 종류별로 모아두었다가 용도에 맞추어 사용했다. 그만큼 남을 위해서는 재산을 아낌없이 사용했으나 자신을 위해서는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다. 최송설당의 근검절약하는 생활에 비하면 석두는 자유분방했다.
봄기운이 사라지고 여름의 초입에 들 무렵 부친 최창환의 제삿날이 다가왔다. 초저녁이 되어서야 석두가 들어왔다. 석두는 최창환의 제사를 정성스럽게 모셨다. 여기까지는 모자간에 아무 일도 없었다. 제사를 마치고 석두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신앙적으로 불교입니까? 유교입니까?”
“나야, 어릴 때는 유학을 배웠고, 성인이 되어서는 불자가 되었지.”
“어머니, 불교에서는 제사를 어떻게 지냅니까?”
“불교에서는 재(齋)라는 것이 있지, 죽은 사람을 위해 ‘천도재’‘49재’같은 것들이 있는데, 망자를 위해 음식을 차려놓고 재를 지낸단다. 법문을 들려줌으로써 망자가 위로받게 되는 것이란다. 사실은 산 사람이 위로받는 것이 더 크겠지.”
“제사로 무엇을 얻을 수 있나요?”
“제사는 사실 돌아가신 분을 불러 산 사람들이 깨우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단다. 돌아가신 분을 통하여 이런저런 것에 괴로움을 받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려는 방편이란다.”
“불교의 제사에 대해서는 잘 알겠어요. 어머니는 불자신데 왜 유교식 제사를 고집하세요?”
“나야 어릴 때는 유학자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단다. 우리나라는 종교에 관계없이 조상대대로 유교식 제사를 지내왔기 때문이란다.”
“그러면 유교에서 말하는 제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조상의 은혜에 감사하고 덕을 추모하는 것이 아닐까?”
“감사와 추모의 정도라면 흥선대원군 시절에 제사를 거부한 천주교 신자들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조선은 유교로 정치를 한 나라란다. 유교에서는 국가를 가정의 확대판으로 보았지. 각 가정이 잘 다스려지면 국가는 자동적으로 잘 다스려진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효가 나라에서도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었던 것이란다. 따라서 조선의 정치체제를 부정한 종교는 탄압의 대상이 되었겠지.”
“제가 아는 상식으로는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혼은 공중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죽어서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삶의 의미가 없지 않겠니? 그렇기 때문에 유교인들은 아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영생하는 방법을 택했단다.”
“효는 오로지 아버지 쪽 혈통만 인정하는 것 아닌가요.”
“조상이라 함은 아버지 혹은 남편의 조상만을 말하는 것이지.”
“그래서 어머니께서도 저를 양자로 드리신 거지요.”
“잘 알면서 왜 그래.”
“만약 제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양자 자격이 없겠네요.”
“이상한 소리를 다하는 구나.”
석두는 무언가 말을 더하려고 하다가 그만 두었다. 최송설당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갔다. 하루는 석두가 술에 뒤범벅이 되어 들어왔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저는 불효자식입니다.”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어서 씻고 자거라.”
“어머니 제가 장가를 가지 않는다면 아들 자격이 없겠지요.”
그때서야 최송설당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만간 장가를 보내 손자도 보고 싶었는데 석두는 딴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는가. 무엇보다 석두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며느릿감으로 점찍어 두었던 처녀를 불러드렸다. 그리고는 정걸제 옆 마당에 정구장을 만들어주었다. 어떻게 해서든 석두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싶었다. 석두와 며느릿감이 정구를 칠 때면 최송설당은 의자에 앉아 구경하였다. 말랑말랑한 정구공이 스핀을 먹고 튀어오를 때는 박수도 보냈다. 무엇보다 석두가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허사로 끝났다. 어느 날 석두는 집나간 친어머니를 찾는다며 집을 나가버렸다. 최송설당은 길러준 정보다는 낳아준 정이 더 그립다는 것을 실감했다. 몇 년간 방황하던 최석두는 스스로 파양을 요청하여 합의파양에 이르게 되었다. 허전한 마음이 가슴을 쓰리게 했다. 갑자기 아침저녁으로 기력이 떨어졌다. 칠순의 최송설당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양자를 들여서 무엇을 하고자 했던가?’오로지 자신이 죽었을 때 제사를 지내 줄 사람으로서 자식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최송설당은 더 늦기 전에 인생 마무리를 다시 생각해야 했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제사는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늘은 최송설당에게 재물복은 내려주었다. 그러나 두 가지 복은 내려주지 않았다. 하나는 남편 복이요 다른 하나는 자식 복이었다. 가족끼리 오순도순 모여 사는 복을 내려주지는 않았다. 누군가로부터 진정으로 사랑받아본 기억도 없었다. 이것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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