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최송설당

[소설 최송설당] 제14장 보시(布施)

보리숭이 2018. 4. 30. 17:47


선교사의 도움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도산 안창호는 한심한 작태를 목격하게 되었다. 조선 상인들은 서로 단골을 차지하기 위해 헐값에 홍삼을 매매했다. 그것도 모자라 서로 모함하기에 바빴다. 반면 중국인 마을에서는 단합행위는 할망정 값을 깎는 일은 없었다. 안창호는 자신의 영달보다는 동포끼리 힘을 합치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꼈다. 뜻있는 동지들과 <공립협회>를 설립하고 <공립신보>을 발간했다. 그러나 경제적 기반이 약한 타국에서 언론사를 운영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최송설당은 매일 아침 배달되는 대한매일신보를 보는 일로 일과를 시작했다. 미국에 있는 <공립신보>가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하여 의연금을 모집한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최송설당은 국운이 쇠락하여 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대한매일신보 앞으로 의연금 보냈다. 그랬더니 ‘문명 여사(文明女士)’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다.
‘국동에 거주하는 유지 부인 최송설당이 공립신보를 읽다가 강개(慷慨)격절(激切)한 의론(議論)을 항상 감탄(感歎)불이(不已)하더니 이번 평양에서 제부인(諸婦人)이 공립신보원조금을 모집하는 취지서를 널리 퍼뜨리매 최부인이 동정을 표하여 본사에 4원을 보냈으니 최부인이 문명(文明)에 유지(有志)는 참으로 감탄할 만하다.’
신문 보도는 최송설당이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껏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신문을 읽었다고 했다. 처음으로 여론의 힘을 실감했다. 얼마 후 안창호로부터 감사의 편지가 도달했다. 이때부터 최송설당은 도산 안창호 선생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궁궐을 나온 최송설당은 서울 무교동에 234평의 대지를 마련하고 기와집을 신축하였다. ‘송설당’이라는 현판도 내걸었다. 이제는 늦게 일어나도 찾는 사람이 없었다. 웃전에서 부를까 긴장된 자세로 대기할 필요도 없어졌다. ‘최상궁’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없어졌다. 모든 것이 궁궐에 들어오기 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개나리가 울타리를 따라 꽃망울을 터트리자 북악산 자락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최송설당은 노곤함을 달래고자 외출을 했다. 경복궁의 광화문 처마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때 우연히 황제의 수라간을 담당했던 장상궁을 만났다.
“장상궁님! 오랜만입니다."
“최상궁님! 잘 지내셨어요?”
두 사람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서로가 그동안의 안부가 궁금했다.  최송설당은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소매를 잡았다. 최송설당의 집에 도착한 장상궁은 “집이 좋네요.”하고 말끝을 흐렸다.
“예, 평생 살아야 하는 집이니 하나 장만했습니다. 장상궁은 어떻게 지내세요?”
“예, 저는 명월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한양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곳이네요.”
“명월관은 내로라하는 양반들이 매일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누가 명월관을 만들었나요?”
“전선사의 장선을 했던 안순환이라는 분이 시작했답니다.”
“전선사라면 황제의 반찬을 만드는 곳 아닙니까.”
“왕실에서 많은 궁녀들을 내보내자 안사장은 임금님 식사를 만들던 수라간 나인, 음료와 다과류를 만들었던 생과방 나인, 더운 요리를 담당한 소주방 나인, 다과와 떡을 만들던 외소주방 나인까지 출궁하는 나인은 모조리 명월관으로 흡수했답니다.”
“그래요! 정말 다행이네요.”
“안사장은 단순히 궁중요리만 선보인 것이 아니랍니다. 우리가 궁중에 있을 때는 사람마다 본상과 곁상을 마련하였잖아요. 안사장은 4명이 둘러앉아 먹는 겸상(兼床)이란 것을 개발했답니다.”
“음식이 푸짐해 보이겠네요.”
“물론이지요. 명월관이 생기기 전에는 ‘요리’라는 단어도 없었잖아요. 기껏해야 약식집, 팥죽집, 전골집, 냉면집이 전부였지요.”
그랬다. 당시 조선의 밥집이나 술집은 주막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명월관은 임금이 먹던 궁중요리를 일반인이 맛볼 수 있는 최초의 공간이었다. 동시에 조선 최초로 다양한 요리들을 즐길 수 있는 요릿집이었다.
“안사장은 관기 제도가 폐지되자 어전에서 가무를 행하던 궁중 기녀들까지 명월관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저런, 저런”
황제가 먹던 궁중요리에 향긋한 술 냄새와 기녀들의 화장품 냄새, 궁중악사들과 기녀들의 공연이 곁들여졌다. 이는 시각, 후각, 청각, 미각을 모두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나마 저는 요리에 재주가 있어 평생 요리를 만들고 있지만 일부 궁녀들은 말이 아닙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나인들 중에 인물이 반반한 애들은 부잣집 소실로 들어갔답니다.”
명월관으로 모여든 기생 중에는 뛰어난 명기와 상궁이나 나인 출신의 아리따운 자태를 지닌 기녀들이 많았다. 당시 기생들은 1패, 2패, 3패로 나누었다. 궁에서 나온 기생들은 당연히 1패 기생이었다.
장상궁이 돌아가고 최송설당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궁에 있을 때는 모든 궁인들이 임금 한 분만을 바라보고 살지 않았던가.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도 너무 빨리 바뀌고 있었다. 최송설당은 자신과 함께 얼마 전까지 황제를 모시던 궁인들이 화류계의 여성으로 전락하거나, 수라간 나인들은 낙원동에 떡집을, 악공들은 사설 강습소를, 화공들은 인사동에서 화실을 여는 현실에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바로 자신과 동고동락을 하던 궁인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만큼 세상은 급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최송설당은 궁궐에 있을 당시 김천군 증산면 평촌리에 위치한 청암사에서 화재가 났었다. 그때 사찰을 복원하는 공사에 시주를 한 적이 있었다. 시주는 했지만 궁에 묶여 있는 몸이라 가보지 못했다. 이제 자유로운 몸이 되었으니 김천의 노모도 만나볼 겸 청암사에도 들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청암사 터는 다시 불타서 흔적이 없었다. 청암사 주지 대운 스님을 만났다.
“스님, 이게 웬일입니까! 다시 불이 났나요?”
“예, 보살님께서 시주를 해주셔서 절이 중건되었건만 지난해 다시 불이 나서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재건을 하기는 해야겠지만 돈이 없어서…….”
“자금은 제가 마련해 볼 터이니 재건 계획을 세워 보세요.”
대운 스님은 날아갈 듯이 기뻤다. 그날부터 중건 계획을 수립해 나갔다.
한양으로 올라온 최송설당이 몸을 추수를 무렵 침선방 상궁으로 있던 박상궁이 죽었다는 기별이 왔다. 평소 황실의 옷뿐만 아니라 자신의 옷도 지어주었던 박상궁이었다. 마포나루 인근의 박상궁 집을 찾아갔다. 마침 궁궐에서 같이 일했던 소주방 이상궁, 세수간 김상궁, 생과방 유상궁도 와 있었다.
“불쌍하기도 하지 우리네 신세, 사람이 죽어도 곡해 줄 자식이 있나, 묻어줄 친척이 있나.”
궁궐에서 죽었으면 여의도에 있는 궁녀들 묘지에 묻어주었을 것이다.  궁궐을 나온 궁녀는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궁궐에서 궁녀로 살다간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도 없다. 평생 남자라고는 임금님 한 분만을 모시는 꽃 들이었다. 때로는 왕비님의 시중을 들다가 늙고 병이 들면 소리 소문 없이 떠나야 했다. 모두들 자신의 미래가 박상궁과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때 최송설당이 나섰다.
“내가 이번에 김천 청암사를 다녀왔습니다. 작년에 불이 나 폐허가 된 것을 보고 왔습니다.”
“청암사는 우리 궁녀들과 인연이 깊은 절이잖아요.” 이상궁이 거들었다.
“예, 그렇습니다. 인현왕후께서 폐비가 되어 청암사에 숨어 있으면서 열심히 불공을 드렸더니 3년 후에 복위가 되었던 사연이 있지요.”
“우리 궁녀들이 은퇴하면 수양을 하던 절이 아닙니까.”
이때 최송설당이 다시 나섰다.
“우리가 힘을 합쳐 절을 복원합시다. 그러다가 우리가 죽으면 명복을 빌어달라고 하면 어떨까요?”
“좋은 생각이긴 한데 돈이 문제겠지요.”
“마마님들은 형편껏 내십시오. 나머지는 제가 보태겠습니다.”
“최상궁이 나서주기만 한다면 우리도 힘을 보태지요.”
이렇게 하여 의견이 모아졌다. 박상궁의 49재를 지내는 날 모두들 형편대로 기부금을 가지고 왔다. 기껏해야 20원이나 30원이었다. 여기에 최송설당은 500원을 내놓았다. 이를 계기로 청암사는 중건되었다



현재의 청암사

청암사가 중건되자 대운 스님은 청암사 일주문 옆 바위에 “대시주 최송설당 경신모춘 주지 김대운”라는 비문을 세웠다. 청암사는 이때 참여했던 상궁들 외에 26명의 상궁들이 인현왕후 이후 불사에 참여했다. 최송설당은 동고동락했던 같은 처지의 상궁들과 함께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암사에 새겨진 최송설당 송덕비

최송설당은 환갑을 바라보게 되자 전국의 명산대찰을 유람하기 시작했다. 금강산의 유점사, 표훈사, 정양사를 찾아갔다. 열심히 불공을 드리며 스님으로부터 법문을 듣는 것도 빠트리지 않았다. 표훈사에서는 만공스님께 법문을 청했다.
“스님, 보시(布施)란 무엇입니까?”
“보시란 널리 베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비의 마음으로 다른 이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베풀어 주는 것을 뜻합니다.”
“보시에도 종류가 있습니까?”
“예, 보시에도 종류가 있지요. 불가에서는 주로 삼시설을 애기하고 있지요. 첫 번째는 재시(財施)로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능력에 따라서 재물을 베푸는 것입니다. 스스로 인색한 생각을 버려서 구하러 온 사람으로 하여금 기쁨을 얻게 하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부처님의 가르침, 즉 진리를 가르쳐 주는 법시(法施)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무외시(無畏施)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여 공포와 위험 앞에 놓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때 그 사람을 공포 속에서 구출해 평화와 안전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보시는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합니까?”
“보시에는 보시하는 이, 보시 받는 이, 보시하는 물건이라고 하는 삼륜상(三輪相)이 없어야 합니다. 삼륜상을 없애고 무심(無心)에 주하여 행하는 보시를 청정하고 참된 보시라고 하여 이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합니다. ‘내가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베풀었다.’라는 자만심 없이 자비의 마음으로 온전하게 베푸는 것을 뜻합니다.”
“스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법당 안에서는 알 듯 하나 법당을 내려가서는 실천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항상 마음에 두고 실천해 보시지요.”
훌륭한 가르침을 받고 최송설당은 표훈사를 내려왔다.
여름철이 접어들 즈음 김천에는 대기근이 들어 보리 죽도 먹을 수 없어 나물로 연명했다. 이런 소식을 김천에 살고 있던 동생들로부터 듣게 되었다. 최송설당은 본가도 둘러볼 겸 김천으로 내려왔다.
“언니, 우리 군내면에 살 때 얼마나 어려웠어요.”
“그땐 생각만 해도 끔찍했지.”
“올해 김천이 그렇답니다."
“그렇다면 당장 한번 돌아보자.”
최송설당은 친정 동생과 함께 마을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김천을 떠나기 전 굶주림에 시달렸던 모습 그대로였다. 집집마다 쌀독에는 쥐도 안 들어갈 정도로 비어있었다. 어린이들의 머리에는 버짐이 피어있었고 팔다리는 가죽만 붙어있었다. 모두들 먹을 것이 없어 풀뿌리로 연명하고 있었다. 즉석에서 교동 주민을 위해 벼 50석을 내어 놓았다. 주민들이 본가로 몰려와 고맙다는 인사할 조짐을 보이자 최송설당은 즉시 김천을 떠났다. 표훈사에서 들은 진정한 보시를 실천하고 싶어서였다.

멀리 있는 관악산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황사로 뿌옇게 가렸다. 날씨는 후텁지근하여 바깥출입이 줄어들 때였다. 궂은 날씨에도 조선일보 최은희 기자가 최송설당을 찾아왔다. 인사를 나누자 최송설당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기자 선생, 오늘은 내가 먼저 물어봅시다.”
“말씀하시지요.”
“요즈음 신문에서 ‘평양의 백선행, 한양의 최송설당’이라고 나와 백선행씨를 비교하여 보도하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나요?”
“예, 두 분이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첫째는 두 분의 나이가 60대로 고령이십니다. 아마 백선행 여사가 여사님 보다 6살 더 많을 겁니다. 두 분 모두 홀몸으로 자수성가하여 선행을 많이 하신 점이 비슷합니다.”
“백선행씨는 무엇으로 부자가 되었소?”
“백여사는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갖은 고생을 하셨지요. 억척같이 재산을 모아 평양 시내에서 50리 떨어진 만수산을 한 평당 2-10전 씩 주고 샀습니다. 알고 보니 속아서 잘 못 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불모지 땅이 석회석 광산이었습니다. 이 땅을 시멘트 만드는 일본의 소화전 주식회사에 평당 40 전 받고 팔았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요, 부자가 된 다음에 어떻게 했소?”
“제일 먼저 한 일이 평양 송산리에 다리를 자비로 놓았습니다. 평양 사람들은 이 다리를 ‘백선행교’라고 부릅니다. 나라가 해야 할 일을 개인이 한 것이지요. 다음에는 평양 시민들이 모여서 행사를 할 수 있는 공회당을 지었고요, 중간중간에 자선 사업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창덕 소학교에 300석지기 땅을 희사했고, 평양 숭현 학교에는 전답 2만 6천 평을 희사했고, 나머지 재산도 조만간 사회에 희사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분을 나와 비교하면 되나요.”
“여사님도 훌륭한 일을 많이 하셨지 않습니까.”
“한 가지 더 궁금한 것이 있는데, 최기자 말고 여기자가 있소?”
“아직은 없습니다. 제가 조선 최초의 여기자입니다.”
“최기자는 조선일보에서 ‘부인 견학단’지면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부디 지금처럼 여성의 권리와 자유가 신장되도록 노력해 주시오.”
“예, 잘 알겠습니다.”
최송설당의 질문이 끝나자 최기자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며칠 후 조선일보에는 다시 한 번 평양의 백선행과 한양의 최송설당의 업적을 기리는 기사가 실렸다. 최송설당은 자신을 칭찬하는 기사가 실리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모친의 유언에 따라 김천공립보통학교에 기부해 총독 표창을 받았고, 금릉유치원과 금릉학원에 유지비를 기부했었다. 그 정도로는 스케일이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신 엄귀비의 유지를 받들지 못하는 죄책감이 들었다. 칠순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재산을 정리하는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종의 승하로 국권 상실의 비통함이 높아지고 민족자존에 대한 각성을 불러왔다.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 발표로 불을 지폈다. 33인 대표가 모였으며 본인이 참석하지 못한 곽종석의 경우는 아들이 대신 참석했다. 파고다 공원이 아닌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이 이루진다는 사실에 강기덕은 불만을 토로했다. 민족대표 손병희의 연설에 이어 만세 삼창으로 끝났다. 참석자들은 포승줄에 굴비 엮이듯이 묶여 일본 경찰에 끌려갔다.
재판이 있는 날이었다. 최송설당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만해 스님이 재판을 받는 사실을 알고 법원으로 갔다. 법원은 과거 의금부가 있던 종로 공평동에 우람한 석조 건물로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최송설당은 얌전히 방청석에 앉았다. 피고와 재판관이 입정하자 재판은 시작되었다.
검사가 만해 한용운에게 물었다.
“피고는 이번 운동으로 독립이 될 줄 알았는가?”
“그렇다. 독립될 줄로 알았다.”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의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그렇다. 반드시 조선의 독립은 성취될 것이다.”
검사는 씩 웃더니 서류철을 덮으며 자리에 앉았다. 피고는 개전의 정이 없고 재범할 개연성이 높다는 사실에 흡족한 표정이었다.
이어서 재판장은 검사의 공소 사실을 인정하는지 물었다. 피고들은 구차한 변명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판사가 물었다.
“이 선언서에는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대목이 있는데 폭동을 선동한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조선 사람 한 사람이 남더라도 독립운동을 하라는 것이다.”
“인민들이 피고 등의 선언서에 자극되어 관리에 대항할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나는 독립선언을 하면 일본은 반드시 승인할 줄로 믿었지 그런 생각은 안 했다.”
심문은 손병희, 최린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모두들 당당한 답변에 감동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33인에게 주어진 죄명은 보안법, 출판법 위반에 소요죄이었다. 판결문은 짧았고 모두 3년형에 처해졌다.
 재판이 종결되자, 최송설당은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을 선포하노라…….”로 시작되는 독립선언서를 읽어 보았다. 폐위된 왕권을 돌려달라는 문구는 어디에도 없었다. 따라서 일본에 계신 영친왕이 다시 돌아와도 황제가 되거나 총독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최송설당은 영친왕에 대한 미련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꿈도 수정해야 했다.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부산을 떠난 열차는 아홉 시간 반 만에 한강 다리를 건너 남대문 역에 도착했다. 하늘 가득히 고인 구름은 경성의 하늘을 감싸고 있었다. 플랫폼을 나서는 예순한 살의 제3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해군 제독 복장에 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남산의 푸른 소나무와 북악산의 산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의 곁에는 옅은 미색 기모노 차림의 부인 사이토 하루코가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남대문 역에는 백의민족임을 알리는 흰옷의 물결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군중보다 일찍 도착한 총독부 관리, 조선의 귀족, 각국 영사들이 보였다. 일장기로 도배한 역 광장에는 일본군 병사들이 삼엄하게 도열했다. 왜성대에서는 17발의 예포가 발사되었다. 총독이 의장대 사열을 마치고 광장을 빠져나갈 즈음 수류탄이 터졌다. 그러나 총독의 마차는 유유히 광장을 빠져나갔다. 수류탄은 총독의 마차와 미즈노 경무총감 마차 사이에 떨어진 것이다. 강우규는 “아직은 죽을 운이 아닌 놈이군.”이라며 중얼거렸다. 그는 황급히 군중들 틈을 빠져나갔다. 10년 전 안중근은 나라 밖 하얼빈에서 조선의 총독을 살해했다. 반면 강우규는 나라 밖에서 잠입하여 조선의 총독을 살해하는 거사를 벌였으나 실패였다.
최송설당은 군중들 틈에서 총독의 부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새로운 총독의 부임은 새로운 황제의 취임으로 보였다.
20여 년 전(1897년 10월) 자신이 궁궐에 들어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고종은 환구단에서 열성조에게 고하고 대한제국 황제 선포식을 했다. 반면 사이토 총독은 서울역에서 남산의 신사참배를 시작으로 조선의 새로운 통치자가 되었음을 고했다. 고종은 면류관에 황룡포를 입으시고 신하들은 금관조복을 입고 뒤들 따랐다. 총독은 일본에서 총독부 관리들과 함께 부임을 했고 일본 군복을 입고 나타났다. 고종은 수천 년간 이어져온 중국과의 조공 시스템을 청산하고 세계열강과 대등한 위치에서 황제의 나라를 선포했다. 독립 연호로 ‘광무’를 사용했다. 대한제국 13년은 근대화의 기운이 싹튼 시간이었다. 전환기이면서 동시에 혼란의 시기였다. 주자학의 나라에서 근대 문명국가로 처절하게 변화의 격투를 벌인 시간이었다. 그러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때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조선 백성이나 오늘 서울역에 모인 조선 백성들은 무명 흰옷을 입고 나온 것은 변함이 없었다. 백성의 눈에는 나라를 잃었다는 슬픔보다는 백성 위에 군림하는 통치자만 바뀌었다고 보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총독이 부임하고 3개월이 지났다. 길거리에는 세밑 풍경과 함께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최송설당은 신문을 보던 중 경성부인회에서 중심이 되어 결핵 환자를 돕는 운동을 전개한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결핵은 조선 땅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가난한 사람만 골라서 찾아왔었다. 얼굴에 홍조를 띠면서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보아왔다. 한 집안에 환자가 있으면 다른 가족까지 감염이 되곤 했다. 그러다 보니 결핵 환자는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최송설당은 측은지심이 발동하였다. 크게 마음을 먹고 1만 원을 기부하였다.
해가 바뀌고 파란 보릿대가 들판마다 피어오를 즈음이었다. 초청장 하나가 배달되었다. 총독부인 사이토 하루코가 보낸 초청장이었다. 열흘 후에 총독관저에서 경성부인회 결성이 있으니 초청한다는 내용이었다. 한일 합방을 전후하여 조선에서는 부인회 결성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주로 기독교 단체에서 교세를 확장하는 수단으로 부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의병의 부인들은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부인회’를 만들었다. 뒤따라 친일파 부인들은 친일 부인회를 결성했다. 우후죽순처럼 부인회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최송설당은 총독 부인의 초청을 받고 갈등의 시간을 보냈다. 몇 개월 전에 발생한 대구의 ‘애국 부인회’ 사건이 떠올랐다. 황애시덕과 김마리아가 주동이 되어 ‘대한민국 애국 부인회’를 결성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원조를 했었다. 이것이 일본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던 것이다. 독립운동에는 가담하지 못할망정 친일 부인회에 가담해야 하는가? 갈등이 왔다. 또한 경성 부인회 결성이라는 모임에는 거부감도 있었다. 총독 부인이 추진하는 단체에 가입하게 되면 친일의 성향을 띠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현실의 권력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사이토 하루코는 현실 권력의 최고 지위에 있는 인물이 아닌가. 초청을 거부할 수도 없었고, 또한 아니 가기도 찜찜했다. 자신을 초청한 사람이 최고 실력자의 부인이라는 사실에 불가항력이라고 느꼈다. 한편으로는 어떤 인물인지 관심이 가기도 했다.
최송설당은 초청된 날짜에 맞추어 총독 관저를 찾아갔다. 기모노 차림의 귀부인이 정중히 맞아주었다. 
“사이토 하루코라고 합니다.”
“최송설당입니다.”
“지난번에 너무나 큰돈을 기부하셨기에 감사드립니다.”
“제 정성을 담았을 뿐입니다.”
“일본 황실의 지시에 의해 제가 경성 부인회를 결성하고자 하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부인의 자세가 너무나 겸손하고 정중하여 최송설당은 할 말을 잃었다.
“저도 경성 부인회에 가입해야 하나요?”
“예, 그렇게 해주시면 큰 힘이 되겠습니다.”
“저는 이미 늙었고, 부인회 같은 고명한 단체에 가입할 만한 인물이 되지 못합니다.”
“아닙니다. 부인께서는 이미 유치원이나 보육원에 여러 번 기부를 하셨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진정한 봉사를 많이 하고 계셨습니다.”
“이미 부인회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봉사를 내세우는 사람은 필요 없습니다.”
총독 부인은 아랫사람을 통해 최송설당의 행적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최송설당은 부인의 간곡하고 진정성 어린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제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최송설당께서는 연로하시니 몸으로 봉사는 안 해 주셔도 좋습니다. 가끔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십시오. 가난한 사람을 마음으로 어루만져 주시면 됩니다.”
“그런 일이라면 더 이상 사양할 수도 없군요. 동참하겠습니다.”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찾아주세요.”
간단한 다과와 음료를 마신 후 최송설당은 자리를 떠났다. 다음날 최송설당은 통장에서 5천 원을 추가로 인출하여 경성 부인회로 보냈다.
한 달 후에 일본 정부로부터 영구 적십자 회원증을 보내왔다. 적십자 회원증을 받아든 최송설당은 친일파 부인들처럼 권력을 이용하거나 아부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