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방출궁인(放出宮人)
하루아침에 선대왕이 되어버린 고종은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문안 인사를 드리던 신하들도 보이지 않았다. 환관이나 궁녀들도 현저히 줄어든 궁궐은 덩그러니 크게만 보였다. 마지막 미련으로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황태자를 세우고 싶었다. 황태자가 될 수 있는 인물에는 의친왕과 영친왕이 있었다. 인물 면에서는 의친왕이 영어에도 능통했고 인물도 출중했다. 그러나 황제는 엄귀비가 낳은 늦둥이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하고자 했다.
이번에는 종친들과 유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순종이 황제로 등극한 이상 영친왕은 ‘황태제(皇太弟)’가 되어야지 ‘황태자(皇太子)’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비록 제위에서는 물러났어도 실질적인 황제는 자신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태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모르자 가장 조급해 진 사람은 엄귀비였다. 명분 싸움에 휘말려 시간을 끌다보면 자신의 아들이 황태자에서 밀려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상궁은 문안 인사차 일찍이 귀비전에 들렸다. 엄귀비는 여느 때와는 달리 머리에는 띠를 두르고 팔을 괴고 있었다.
“귀비 마마, 무슨 걱정이라도 있나이까?”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오.”
“걱정은 나눌수록 줄어든다고 하지 않습니까. 제게도 말씀해주시지요.”
“최상궁, 내가 귀비로 책봉될 때 생각나오?”
“예, 알고 있습니다. 황제께서는 마마님을 황후로 책봉하고자 하셨으나 종친들의 반대로 귀비로 책봉되신 일 말씀이시지요.”
“맞아요, 숙종조 때 희빈 장씨가 왕후로 책봉되었으나 훗날 폐비가 되었지. 그러고는 앞으로는 후궁은 왕후가 될 수 없도록 조칙을 내리신 것을 인용한 것 말이오.”
“이번에는 무슨 일로 종친들이 들고 일어났나이까?”
“황제께서는 우리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하고자 하시는데, 종친들과 유생들이 ‘황태제’가 되어야 한다는 거지.”
“황태자와 황태제는 무슨 차이가 있나이까?”
“황태제로 책봉되었다가 만약 순종께서 원자를 출생하게 되면 그 아기를 황태자로 책봉해야 된다고들 하겠지.”
논리적으로 볼 때 ‘선왕의 아들이므로 황태제가 되어야 한다.’는 종친들의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최상궁도 답변이 궁색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께서 의지가 확고하시다면 좋은 일이 있지 않겠나이까?”
얼버무리고 귀비전을 나왔다.
귀비전을 나오자마자 최상궁은 곧바로 평소 알고 지내던 김주부를 찾아갔다. 김주부는 승정원일기를 담당하던 관리였다.
“김주부님, 긴히 상의드릴 일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최상궁은 엄귀비가 처한 입장을 소상히 알려주었다.
“주부님께서 선대왕 중 왕세제가 왕세자로 책봉된 사례를 찾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힘써 찾아보리다.”
최상궁은 적절한 사례금을 건네며 빠른 시일 내에 찾아 줄 것을 당부하고 헤어졌다.
며칠 후 김 주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좋은 사례가 있습니까?”
“좋은 사례가 있소. 태종 대왕께서 왕세자로 책봉 된 사례가 있소. 당시는 정종 대왕에게 양위가 되어 있었지요. 엄격하게 말하면 태종은 왕세제가 되어야 했소. 그러나 태종대왕은 자신은 태조로부터 태자 책봉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소. 결국 왕세자 책봉을 고집하여 왕세자가 되었소.”
최상궁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곧장 귀비전으로 달려가서 김주부에게서 들은 대로 고했다. 엄귀비도 손뼉을 치며 공감했다.
“보모는 내가 어려울 때마다 날 구해 주는 구려. 당장 폐하께 고하리다.”
고종은 서둘러 대신들을 경운궁으로 불러 먼저 말문을 열었다.
“태종대왕께서 정종대왕으로부터 왕세제가 아니라 왕세자로 책봉된 사례가 있다. 태종대왕은 형님이 아니라 부친인 태조대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기록을 남기고 싶으셨다. 따라서 짐은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하고자 하니 대신들은 그렇게 알라.”
고종의 논리에 대신들도 더 이상 이의를 달 수 없었다. 특히 총리대신 이완용이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섰다. 이완용이 적극적으로 동의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황제 폐위 후 백성들의 분노로 자신의 집이 불타고 없어 졌을 때였다. 엄귀비는 황제에게 주청하여 이완용에게 집을 한 채 선물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이완용은 엄귀비의 빚을 갚은 셈이었다.
1907년 8월 7일 영친왕은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엄귀비는 황후가 되려던 자신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하는 꿈을 이루었다. 황후는 못되었지만 황태자의 어머니가 됨으로써 그에 상당하는 만족을 얻었다. 엄귀비는 서둘러 영친왕의 가례를 치르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은 엄귀비의 희망일 뿐 일본의 생각은 달랐다.
이토 히로부미는 순종을 압박하여 영친왕의 일본 유학 윤허를 받아냈다. 그러자 고종과 엄귀비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조선에도 수학원이 있어 황태자 수업을 받으면 되는 것 아니오.”
“아닙니다. 일본으로 가셔서 일본 황족들과 유대도 돈독히 하고 선진문물에 대해서도 배우셔야 합니다.”
고종이 일본에 보낼 수는 없다고 주장해도 이토 히로부미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두 가지 꾀를 냈다. 하나는 일본의 황태자가 조선을 방문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궁녀들로 하여금 먼저 황태자가 공부할 일본을 방문하여 견학을 하고 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일본 황태자가 조선을 방문하게 되면 조선의 황태자도 답방 형태로 일본을 방문하는 것이 예의라고 주장할 명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요시히토 일본 황태자 일행이 조선을 방문하여 삼엄한 경비 속에 융숭한 대접을 받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으로 사전 답사를 갔던 궁녀 두 명은 황태자가 머물 방과 거처를 둘러보았다. 또한 왕실 학교도 견학을 하고 돌아왔다. 결과 보고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학습원은 너무나 깨끗했고 신식교육을 받도록 체제가 잡혀 있다는 것이었다.
고종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일본의 간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1월 13일 순종의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기도록 하고 고종이 거처하는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순종과 격리시킴으로써 고종은 무료한 나날만 보내는 노인신세로 전락했다. 영친왕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이틀 전이었다. 고종은 영친왕을 자신의 거처로 불렀다.
“아바마마, 부르셨나이까?”
“가까이 오너라. 이 글자의 뜯을 알겠느냐?”
고종은 자신이 쓴 글씨를 영친왕에게 보였다.
선천하지우이우(先天下之憂而憂)
후천하지락이락(後天下之樂而樂)
“예, 아바마마, 천하의 걱정은 먼저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나중에 즐기라는 뜻이옵니다.”
“그래, 맞다. 장차 군주는 이러한 마음 자세로 살아야 하느니라.”
“아바마마, 명심하겠나이다.”
고종은 다시 한 글자를 써서 영친왕에게 주었다.
“외국에서의 생활은 고달플 것이다. 그렇더라도 때가 올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하느니라. 오늘 이 글자를 네게 주마.”
고종은 참을 인 “忍”자를 써서 영친왕에게 손수 건네주었다.
“아바마마, 깊이 명심하고 고이 간직하겠나이다.”
이렇게 하여 부자간의 이별은 막을 내렸다.
영친왕
1907년 12월 5일 영친왕은 한양을 떠나 일본으로 출국하는 날이었다. 날씨도 영친왕의 출국이 아쉬웠는지 문고리가 얼어붙을 정도로 매서운 추위가 휘몰아쳤다. 북악산에는 백설이 덮여있고 처마를 타고 내려온 고드름은 햇빛에 반사되어 무지갯빛을 발하고 있었다. 황태자가 된지 불과 4개월 만이었다.
최상궁은 친자식과도 같았던 영친왕과의 이별을 맞이하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너무나 안타깝고 아쉬운 이별이었다.
“황태자 전하, 장차 이 나라의 군주가 되실 분이십니다. 일본에 가시더라도 품위를 잃지 마시고 강건하십시오.”
“보모, 나 일본 안 가면 안 될까?”
열한 살 어린이다운 말이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러다 최상궁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황태자 전하님은 이 나라의 지존이 될 분이십니다. 함부로 눈물을 흘리시면 아니 되옵니다.”
최상궁도 안타까운 마음은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지금은 공부하러 떠나시는 것이니 공부를 마치면 다시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참고 기다리셔야 합니다.”
최상궁은 친모인 엄귀비만큼 가슴이 쓰렸으나 자신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이토 히로부미는 성큼성큼 낙선제로 들어섰다. 황태자가 입고 있던 한복을 벗기고 군복으로 갈아입혔다.
낙선제를 떠나는 황태자는 궁인들에게 이별 인사를 했다.
“잘들 있으시오.”
삽시간에 낙선제는 궁인들의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거침없이 순종께 하직인사를 드리기 위해 데리고 들어갔다.
“잘 모시고 가겠습니다. 황제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잘 부탁하오.”
“원로에 몸 건강히 잘 가거라.”
순종 황제도 뒷말을 잊지 못했다. 영친왕은 인천으로 가서 만주호를 타고 일본으로 떠났다.
영친왕이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 일제는 궁내부 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 작업을 착수하였다. 궁내부의 새로운 관제를 발표하였다. 경리원을 비롯한 궁내부에 소속된 다수의 원(院), 사(司)를 폐지하고 관리도 대폭 감축하였다. 이때 폐관 또는 퇴관된 이가 주임관 166명, 해고된 자는 역원(役員) 3,809명, 여관(女官) 232명, 권임(權任) 순검(巡檢) 이하 317명에 달했다. 대신 일본인을 궁내부에 배치하였다. 영친왕의 출국으로 최상궁은 본연의 업무가 없어졌다. 당연히 출궁의 대상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엄귀비의 만류로 연말까지만 궁에 머물게 되었다.
새해를 맞이하여 붉은 태양은 변함없이 떠올랐다. 모두들 막연히 올해는 좋은 일이라도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이었다. 새해가 되었건만 궁궐 안은 조용했다. 한해 전만 해도 새해가 되면 대신들이 황제 폐하께 문안드리기 위해 줄을 섰었다. 폐위되어 유폐된 황제에게 올해는 그저 몇몇 대신들만 문안드리고 있었다. 이미 창덕궁에서 순종 황제가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상궁은 출궁차비를 차리고 새해 인사 겸 작별인사를 드리기 위해 대전에 들어갔다. 엄귀비가 상궁들의 업무를 관장하고 있으므로 엄귀비께 작별 인사만 드리면 될 일이었다. 적적하기 짝이 없는 폐위된 황제에게도 작별 인사를 고하게 되었다.
“황제폐하, 귀비마마, 만수무강 하시옵소서”
“그래, 얼마 만에 궁궐을 나가는가?”
“예, 14년이 되었나이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네.”
“황태자 전하를 잘 보필하지 못해 망극할 뿐이옵니다.”
“어디 그 일이 최상궁 탓이겠나. 모두가 짐이 부덕한 탓이지”
이 대목에서 황제는 만감이 교차했다. 자신이 국사를 잘못 다루어 외교권을 빼앗기고, 황제 지위마저 잃게 되고, 황태자는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는 신세가 되지 않았던가.
이때 엄귀비가 거들었다.
“내가 일러둔 대로 궁궐 가까이 거처를 정해서 내가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 올 수 있도록 하시오.”
“예, 잘 알겠나이다.”
하직 인사를 마친 최상궁은 대한문을 나섰다. 오늘따라 궁궐 문이 엄청나게 커 보였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제는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지나간 10여 년간을 가만히 돌이켜 보았다.
엄상궁을 도와 아관파천을 했던 일, 영친왕의 보모가 되었을 때 세상을 다 얻었던 것 같았던 심정, 증조부의 신원이 회복되어 가문이 살아난 일, 엄귀비로부터 재산관리를 위탁받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던 일, 모두가 추억 속의 일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가슴이 쓰리어 오는 비통함을 가눌 수가 없었다. 5백년 이어온 조선왕조가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며 떠나는 심정은 너무나 슬펐다. 궁궐을 나와서는 엄귀비가 부르면 언제나 달려갈 수 있도록 덕수궁 가까이 누룩골(국동) 에 거처를 마련했다.
최상궁이 궁궐을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 창경궁에 동물원을 짓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동물원뿐만 아니라 식물원도 짓는다고 했다. 황제가 계시는 곳은 구중궁궐이라고 하여 백성들이 쉽게 접근할 수도 없는 곳이 아닌가. 궁궐을 헐어 동물원을 만든다고 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코끼리는 중국에서 구입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전국의 수령들에게 야생동물을 산채로 잡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창경궁은 동물원 개장과 동시에 ‘창경원’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순종황제께서도 개관식에 직접 참석하셨다고 했다. 진기한 동물들을 보기위해 백성들이 창경원으로 몰려들었다.
최상궁도 상춘가절에 창경원을 찾았다. 입장료는 10원 이었다. 당시 책 한권이 10원 이었으므로 그다지 비싼 편은 아니었다. 창경궁 자리를 헐어낸 자리에는 호랑이, 코끼리, 원숭이 등등 다양한 동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제는 창경원 내에 왕벗, 겹벗, 수양벗, 산벗나무를 종류별로 심었다. 왕벗은 일본의 국화로 ‘요시노사쿠라(吉野櫻)’라고 불렀다. 창경원 주요 통로 상에 심었다. 코끼리와 원숭이 울타리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지난날 영친왕이 동궁으로 사용하던 낙선제가 지척에 있으나 보일 듯 말 듯 가려있었다. 허물어져버린 창덕궁의 회랑이 마치 조선왕조가 허물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일본은 황실의 권위를 실추시킴으로서 조선을 식민지로 몰아가고 있었다. 기우는 황실의 진면목을 보는 듯 했다.
[출처] 소설 "최송설당" 제12장 방출궁인|작성자 최동현세무사
'소설 최송설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최송설당] 제14장 보시(布施) (0) | 2018.04.30 |
---|---|
[소설 최송설당] 제13장 부(富)의 행로 (0) | 2018.01.02 |
[소설 최송설당] 제11장 제실재산정리국(帝室財産整理局) (0) | 2017.11.08 |
[소설 최송설당] 제10장 학교 편 (0) | 2017.10.10 |
[소설 최송설당] 제9장 김천편 (0) | 2017.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