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최송설당" 제10장 학교 편을 올립니다
한국 학생들은 "학교 다녀 오겠습니다"는 인사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송설당은 학교를 세우기 전부터 학교설립을 목격하고 충분한 학습을 했습니디.
소설 "최송설당" 제10장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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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학교
한국의 학생들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인사로 시작하여 ‘학교 다녀왔습니다.’로 하루의 일과를 마감한다. 그러나 언제부터 이러한 인사법이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저 습관적으로 반복할 뿐이다.
1885년 선교목적으로 설립된 배재학당을 효시로 이화학당, 경신학교, 숭실학교가 차례로 세워졌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족의 선각자들은 교육만이 나라를 살릴 수 있다고 자각하게 되었다. 관리들은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가 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의무로 생각했다. 한일합방 전까지 세워진 학교가 전국에 2천여 개가 넘었다. 이때부터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는 인사법이 탄생되었다.
1907년 7월 29일, 일본을 방문한 미국 육군 장관 태프트는 가쓰라 다로 일본총리와 만났다. 두 사람은 대한제국과 필리핀을 서로 맞교환하는 밀약(密約)을 맺었다. 이러한 음모도 모르는 조선 조정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엘리스의 방한 소식에 환영 준비를 했다. 엄귀비도 준비에 바빴다. 미국의 풍습을 알 수 없는 엄귀비는 최상궁을 불렀다.
“최상궁, 이화학당에 가서 메리 스크랜턴(Mary Scranton) 교장을 모시고 오시오.”
“무슨 용무로 찾는다고 말씀드릴까요?”
“조만간 미국 대통령의 공주가 미국의 정치제도를 모르는 조선에서는 미국 대통령의 딸을 ‘공주’라고 불렀다.
우리나라를 방문하게 되어 있소. 접대를 해야 할 터인데 내가 미국의 풍습을 잘 모르지 않소.”
엄귀비의 분부를 받은 최상궁은 메리 스크랜턴 교장을 찾아가서 엄귀비의 전갈을 전했다. 이틀 후 최상궁은 메리 스크랜턴 교장을 모시고 내전으로 들어왔다. 최상궁이 물러나려고 하자 엄귀비가 말렸다.
“최상궁도 거기 앉으세요. 우리 영친왕의 보모가 아닙니까? 보모는 두루두루 알아야 왕자 교육을 제대로 할 테니까요.”
최상궁은 엄귀비의 분부대로 함께 자리를 했다.
“어서 오세요. 궁금한 것이 많아 보자고 했습니다.”
“네 마마, 무엇이 궁금하신지요?”
“미국의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황제폐하와 같은 것이오?”
“아닙니다. 미국은 4년마다 대통령을 선출합니다. 임기가 정해져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미국의 풍습에 대해 엄귀비는 많은 내용을 알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엄귀비에게 충격을 준 내용도 있었다.
“미국과 조선이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미국은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데 조선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남녀가 평등하다고요! 어찌 그게 가능한 일이오?”
남자가 하는 일에는 무조건 따라야 하는 여필종부(女必從夫)의 사상에 젖어있는 조선의 시각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예 가능합니다. 조선이 서양에 비해 힘이 없는 것은 2천만 조선 인구의 절반은 여성인데 여성이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조선이 힘이 없는 것이 여성들이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라니 엄귀비는 충격이었다. 이런 대화도 있었다.
“여사님은 이화학당을 열 때 한 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셨는데 어떤 믿음이 있으셨나요?”
“비록 한 명으로 시작하였지만 언젠가는 몇 백 명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교육은 한 인간을 발전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으셨군요.”
메리 스크랜턴 교장을 통해 엄귀비와 최상궁은 교육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헤어질 시간이 되었을 때 엄귀비는 마지막 부탁을 했다.
“미국의 공주가 오면 통역할 사람이 필요하오. 교장선생님이 통역할 사람을 추천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조선인 중에서 저희 학당을 졸업한 선생님을 추천하겠습니다. 여메례라고 합니다.”
“미국에 가보지도 않았는데 영어를 우리말처럼 잘할 수 있나요?”
“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그게 바로 교육의 힘입니다.”
최상궁은 가마로 메리 스크랜턴 교장을 학교까지 모셔다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보니 최상궁에게도 오늘의 대화는 충격이었다. 조선의 여성은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하여 남편이 하는 일은 무조건 따르는 것이 미덕이다. 남존여비(男尊女卑)라고 하여 사내는 귀하고 딸은 천대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교육으로 남녀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하니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조선 정부는 인천항에 내린 '미국 공주' 엘리스에게 황제 전용 열차를 내주었다. 선례가 없는 만찬을 베풀었다. 엄귀비도 면담 일정을 잡아 여메례가 통역하는 가운데 접견을 했다. 엘리스가 돌아간 후 엄귀비는 여메례의 통역에 감탄을 했다. 대화를 연결시켜 주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메례라고 했던가요?”
“예, 귀비마마.”
“지금 어디서 일하고 있나요?”
“보구여관(普救女館)에서 간호보조사 일도 하고, 이화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선교사 활동도 합니다.”
“보구여관은 조선 최초의 여성병원이 아닌가요. 유창한 영어는 어디서 배웠나요?”
“이화학당과 보구여관을 만든 로제타 홀(Rosetta Hall) 여사로부터 배웠습니다.”
“로제타 홀 여사는 어떤 분인가요?”
“선교사인 남편을 따라 자녀들과 함께 왔습니다. 남편은 평양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발진티프스로 돌아가셨고, 아들도 전념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조선에서 봉사활동을 한단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의과대학에 다닐 때 ‘인류에 대한 진정한 봉사를 하려거든 아무도 가지 않은 곳으로 가라.’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종교적인 신념과 교육의 결과가 조선으로 오게 만들었다구요!”
엄귀비와 최상궁은 로제타 홀의 진정한 봉사정신에 가슴 깊이 전율을 느꼈다.
“언젠가 나를 도와 줄 일이 있을 것이요. 내가 부르면 꼭 와주시오.”
“귀비마마님께서 불러주시면 기꺼이 찾아뵙겠습니다.”
엄귀비는 교육의 힘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여메례로부터 실감하게 되었다. 언젠가 자신도 교육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메례의 통역실력에 감탄한 사람은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최상궁이었다. 미국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조선 사람이 우리말 하듯이 영어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교육이 바로 저런 것이 구나’최상궁은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엄귀비는 경선궁이라는 궁호로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다. 경선궁은 짧은 시간에 명성황후에 못지않은 권력을 누렸다. 따라서 엄청난 재물을 모을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토지가 가장 큰 재산이었다. 엄귀비가 재물에 집착을 한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낳은 영친왕을 황태자의 뒤를 이어 황제로 앉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황태자는 성불구자로 후사가 없을 것이 확실했다.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왕자로는 의친왕과 영친왕이 있었다. 의친왕은 궁 밖에 나가서 살았고 뒤를 봐줄 인물이 없다는 약점은 안고 있었다. 그러나 일찍부터 미국에 유학함으로써 서양문물에 대한 상당한 견문을 가지고 있었다. 인물도 출중했다. 그만큼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엄귀비 자신 또한 배경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뱃속으로 낳은 왕자를 후계자로 올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넉넉한 재물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을사조약(1905년)으로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다음 단계로 황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수작을 벌였다. 이러한 기미는 엄귀비가 먼저 알아차렸다. 엄귀비는 최상궁을 불렀다.
“왜놈들은 별 해괴한 일을 벌이고 있지 않소? 왜 황실 재산을 넘보고 있다고 생각하오?”
분노에 찬 엄귀비의 물음에 최상궁은 천천히 답했다.
“마마! 저놈들은 두 가지 꿍꿍이를 가지고 있나이다.”
“두 가지 꿍꿍이라니?”
“하나는 황실 재산을 국유화함으로써 황실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랍니다. 다른 하나는 황실 재산을 빼앗아 국고로 귀속시키면 백성들은 박수칠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고얀 놈들, 황실 재산을 빼앗아 백성들에게 박수 받겠다고”
엄귀비는 이를 갈며 분을 참지 못했다.
“이럴 때 마마께서 선수를 치시면 어떠하실까요?”
“어떻게 한단 말이요”
“마마께서 먼저 백성들을 위해 재산을 써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 함부로 재산을 써 버린단 말이요.”
“그러나 가만히 계시면 저들에게 빼앗기고 말 수도 있습니다.”
엄귀비는 진퇴양난이었다. 자신의 재산을 국유화한다면 일본인들은 찬사를 받을 것이다. 반면 자신은 백성으로부터 비웃음을 살 것이다. 그렇다고 앉아서 당할 수는 없었다.
“잘 알았소. 내 생각해 보리다.”
그날 이후 엄귀비는 며칠 간 생각이 생각으로 꼬리를 물었다.
엄귀비는 결단력이 있고 결심이 서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여인이었다. 며칠 후 최상궁을 다시 불렀다. 경선궁 소유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를 해 보도록 지시했다. 최상궁은 보름여 만에 경선궁 소유의 재산 목록 정리를 마쳤다. 최상궁은 그동안 파악한 재산내역을 보고하러 들어갔다.
“마마, 경선궁 소유의 토지는 족히 2천만 평은 되는 듯합니다.
“그래요, 생각했던 것 보다는 많네요.”
“예, 전국 곳곳에 있습니다.”
“최상궁 말대로 내가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어요,”
“어떻게 하시겠나이까?”
“조만간 내가 여학교 두 개를 만들어 5백만 평을 기부할 겁니다. 하나는 2백만 평, 나머지 하나는 3백만 평으로 나누도록 하세요.”
“마마, 그렇게나 많은 재산을 써버리시게요!”
“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 되지 않겠소.”
엄귀비의 통 큰 결단력에 최상궁은 내심 놀랐다.
“오늘부터는 어디에 있는 땅을 어느 학교에 기부할 것인지 장부 정리를 해주세요.”
“마마의 분부대로 준비하겠나이다.”
“그리고 이참에 친정 조카 엄주익이가 운영하는 양정의숙에도 2백만 평을 주도록 준비하세요.”
“예, 알겠나이다.”
내전을 물러난 최상궁은 경기도 파주, 강화도, 영종도, 부천, 황해도 신천군, 은율군, 재령군 안악군과 전라도 완도군에 있는 토지를 세 학교에 기부할 수 있도록 목록을 만들었다. 이후 엄귀비의 의도대로 이 땅들은 각각의 학교에 기부되었다. 이번 일을 통해 최상궁은 중요한 사실을 학습하게 되었다.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백만 평 이상의 토지 정도는 투입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본시 엄귀비의 부친은 2남 3녀를 두었다. 두 아들은 일찍 죽고 딸 자매만 살아남았다. 엄귀비로서는 자신의 뒷배를 봐 줄 집안의 인물로 조카인 엄주익과 친정 동생이 되는 엄준원을 활용하였다. 엄주익은 엄귀비와는 7촌 조카였다. 엄귀비의 큰 오라버니 엄봉원의 사후 양자로 입적되었다. 엄귀비와는 법적으로 고모와 조카 지간이 되었다. 엄준원은 엄귀비의 큰아버지의 둘째 아들이었다. 엄귀비의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양자로 입적했다. 따라서 엄귀비와는 남매간이 되었다. 두 사람은 출세의 가도를 달렸다. 엄귀비에게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다. 매사 중요한 일이 있으면 두 사람을 불러 의논을 했다. 당시 엄준원은 정동의 달성위궁 사저 자리에 사숙을 열고 학도를 모아 신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엄귀비의 부름에 엄준원이 자문을 했다.
“사숙은 잘 되어가오?”
“예, 그런대로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나도 학교를 세워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오?”
“예,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지금 조선에는 여학교가 몇 개나 되오?”
“1890년에 이화학당이 문을 연이래 1895년에 부산정신여학교, 1898년에 배화학당, 1904년에 호수돈여숙, 원산 루씨여학교, 원산 진선여학교가 있나이다. 이 밖에도 학교 1896년 평양 숭현여학교, 1897년 인천 영화여학교, 목포 정명여학교, 1903년에 숭의여학교, 1905년 군산여명여학교, 1906년에 선천의 보성여학교가 있었다.
는 있으나 아직은 기틀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래봐야 6개뿐이네요”
“그렇습니다. 너무 적습니다.”
“나도 동감이오. 얼마 전에 메리 스크랜턴 교장이 조선에 필요한 것은 조선의 여성이 깨어나는 것이라고 했소. 오늘부터 여학교를 세울 수 있는 준비를 아우가 해 주시오. 필요한 자금은 내가 다 지원할게요.”
그렇게 하여 엄준원은 여학교 설립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해가 바뀌고 입춘이 지나 대궐에도 봄꽃이 필 무렵 엄귀비는 황제 앞에 아뢰었다.
“폐하, 그동안 폐하 몰래 일을 벌였나이다.”
“무슨 잘못 이라도 있었는가?”
“신학문을 가르치는 여학교를 두 개 세울 준비가 되었나이다.”
“그래! 한 개도 아니고 두 개 씩이나 세운다고.”
“예, 그러하옵니다. 폐하”
“7년 전인가 찬양회원들이 상소를 올려 관립여학교를 세워달라고 한적 있었지. 그때는 내각에서 반대를 해서 결국은 스스로 ‘순성여학교’를 세우지 않았는가.”
“예, 그러하옵니다.”
“귀비가 여학교를 세운다고 하니 더더욱 반가운 일이구려. 그래 얼마나 준비를 했는고?”
“준비를 한지는 반년이 지났나이다. 조만간 개교를 하고자 하는데 폐하께서 학교 이름을 지어주셨으면 하옵니다.”
“그것도 좋은 일이오. 하나는 ‘덕을 쌓고 학업을 닦아서 겨레와 온 누리를 밝게 비춘다.’는 진덕계명(進德啓明)으로 하고, 줄이면 ‘진명’이 될 것이오. 다른 하나는 밝을 명(明)에 새 신(新)으로 하여 ‘명신’으로 하면 어떨까.”
“폐하, 너무도 좋은 이름입니다. 즉시 ‘진명’과 ‘명신’으로 명명하도록 하겠나이다.”
고종은 흔쾌히 허용하였다. 당시 조선에는 ‘내외법’이 있어 여성들은 문밖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다. 여학교를 세움으로써 여성들이 학교를 다니게 되면 자유롭게 바깥나들이 할 수 있는 명분도 찾을 수 있었다.
진명여학교에는 경선궁의 전답 2백만 평이 하사되었다. 그리하여 1906년 4월 21일 진명여학교가 개교했다. 초대 교장으로는 달성의숙을 운영하던 엄준원이 맡았다. 훗날 엄준원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진명여학교의 실질적인 설립자는 여메례였다. 여씨는 이미 엄귀비의 통역관으로 실력을 인정받은바 있었다. 자연스럽게 학교 운영의 총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여메례는 여자청년회를 조직하여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족운동에도 힘썼다.
진명여학고 개교1주년 사진
개교 후 한 달이 지나서 엄귀비는 격려차 진명여학교를 방문했다. 마침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이 체조를 하고 있었다. 10년 전 이화학당에서 처음으로 체조를 도입했을 때 한양에서는 온통 난리가 났었다. 여학생이 손을 번쩍 들어 겨드랑이를 내보이고, 가랑이를 벌려 뜀박질을 하는 모습을 보고 학부형들은 하인들을 시켜 업어왔었다. 이화학당 출신은 며느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소문까지 파다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이제는 체조가 신체를 건강하게 하고 협동심을 길러주는 운동이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아는 시대가 되었다. 최상궁은 교육의 가치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엄귀비에게 물었다.
“마마, 궁금한 것이 있사옵니다.”
“무엇이 궁금한가?”
“마마께서는 귀한 재산을 하필이면 학교사업에 투자를 하셨는지요?”
“지난 을사년의 보호조약이 체결되고 나자 배우지 못한 한이 땅을 메웠고 울분은 하늘을 찔렀지 않소. 이때부터 애국지사들은 정부는 물론 외국을 믿지 않고 있지요. 선각자들은 기울어져 가는 조선을 살릴 길은 교육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 이러한 때 내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그러시면 마마님은 관립이나 공립학교를 세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공립학교를 세우게 되면 학부형들은 일본식 교육을 시킬 것이라고 단정해 버렸을 것이네.”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에서는 누구나 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일본의 간섭도 없었다. 많은 일본인 교사들이 한국에 진출해 있었지만 반드시 일본식 교육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당시는 관리로 채용되는 것보다는 교육 사업을 벌이는 것을 최고로 훌륭한 일로 생각했다. 이 때 운영한 보통학교 교과 과목은 수신, 국어, 한문, 일어, 산술, 지리, 역사, 이과, 도화, 체조로 했다. 시간이 가능하면 창가, 수공, 농업, 상업을 더할 수 있었다. 여자에게는 수예를 가르쳤다. 최상궁도 학교를 세우는 일은 거룩한 일이라는 생각이 싹텄다.
같은 해(1906년) 명신여학교는 한성부 박동(수송동)에 위치한 480평 대지에 75칸 한옥으로 지어졌다. 5명의 양반가 딸들을 첫 학생으로 받아들여 5월 22일 개교했다. 정경부인 이정숙씨가 최초로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정숙 교장은 엄귀비와 더불어 한일부인회 활동을 해온 인연이 있었다. 일본인 여성학감 후치자와 요시에가 학교 운영을 도왔다. 엄귀비는 학교 설립과 동시에 3백만 평을 기부했다. 따라서 학교 교육과 운영에 소요되는 모든 경비를 궁에서 하사하였다. 학교 안에 기숙사를 만들어 일체의 비용을 학교에서 부담했다. 특히 궁내의 내인들도 명신여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도록 했다. 개교 3개월 후 엄귀비가 학교를 방문하였을 때 교장선생이 맞이하였다.
명신여학교 개교1주년 사진
“귀비마마. 신입생을 5명밖에 확보하지 못해 송구하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이화학당의 메리 스크랜턴 교장은 1명의 학생으로 시작했답니다. 15년이 지난 지금 엄청나게 발전했잖아요. 교육만 잘 시켜 주세요.”
“잘 알겠습니다.”
“언젠가 조선의 모든 여성들이 학교에 다닐 날을 꿈꾸며 시작합시다.”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최상궁은 엄귀비의 당찬 포부에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왔다. 명신여학교는 1909년에는 교명을 숙명고등여학교로 개칭하였다. 1912년에는 재단법인 숙명학원으로 발족하였다.
교육에 대한 열풍은 김천 지역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김천은 경부선 철도가 개통된 이후 매일 쏜살같이 달리는 기차를 목격하고 있었다. 육중한 쇠로 만든 기차가 증기를 뿜으며 달릴 때면 민중들은 과학의 힘을 자각하게 되었다. 1905년부터 1910년 사이에 김천지역에도 학교설립이 줄을 이었다. 대표적인 학교가 1906년 이재택 군수가 개령에 세운 개진학교, 1906년 김황진 군수가 지례에 세운 일중, 광흥, 보성, 육영학교, 1907년 박일양 군수가 기로동에 세운 양성학교, 1907년 김천상업회의소가 김천시장안에 세운 광흥학교, 1908년 직지사에서 세운 직명학교, 1908년 김천유지들이 김천에 세운 보명학교, 1909년 이승하 군수가 황남면에 세운 황남학교, 1909년 이희봉 교장이 개령에 세운 진명학교, 1909년 개령유지들이 세운 달중학교, 1909년 이영조 등이 김천에 세운 사립보통학교, 그리고 교회에서 세운 영진학교와 기독명성학교, 천주교회가 세운 성의학교가 있었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이 되고 나서는 학교설립이 통제되었다. 또한 이미 설립된 학교도 운영난에 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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