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최송설당

[소설 최송설당] 제11장 제실재산정리국(帝室財産整理局)

보리숭이 2017. 11. 8. 18:32


제11장  제실재산정리국(帝室財産整理局)


1907년 3월 2일.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부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흰 턱수염을 바람결에 휘날리며 황제 폐하를 알현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뱃속에 깊이 숨겨진 검은 마음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부임과 동시에 이토 히로부미는 하야시 공사와 하세가와 헌병사령관을 관저로 불러 만찬을 베풀었다. 식사가 끝나고 술이 거나하게 취해갈 무렵 이토 히로부미는 자신의 본심을 들어냈다.
“하야시 공사, 자네는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무엇부터 했는지 아나?”
“이성계라면 조선을 건국한 임금 아닙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이성계를 연구했더니 과전법라는 토지개혁부터 실시했더군. 공전(公田)을 확대하고 사전(私田)에 대해서는 제한을 두는 조치를 취했더군.”
“민심을 돌리는 작업을 했군요.”
“그래, 바로 그거야. 우리가 조선의 왕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황실의 권위를 무너트려야 하오. 황실은 아직도 너무나 많은 땅을 가지고 있어. 황실의 토지를 국유화 하는 방안을 연구하시오.”
“예. 각하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세가와 사령관은 조선 군대를 해산하도록 하시오.”
“당장 그렇게 하면 엄청난 저항에 부딪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겠지. 그러나 그 정도의 저항도 없이 한 나라가 우리 손에 들어오겠소?”
“네, 빠른 시일 내에 시행토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일본은 차곡차곡 조선의 국권을 빼앗는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1907년 6월 어전회의의 풍경은 국운이 기우는 대한제국의 비통함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씩씩거리며 연습함대 장교들을 대동하고 고종의 턱 앞에서 다그쳤다.
“이와 같은 엉뚱한 방법으로 일본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시렵니까?  차라리 일본에 대해 당당히 선전포고를 하시지요.”
황제는 말이 없었다.
“황제 폐하,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것이 사실입니까? 아닙니까?”
고종은 ‘그렇다’고 답변할 수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난감한 처지였다. ‘그렇다’고 하면 을사조약에 위배되는 선전포고라고 할 것이다. ‘아니다’라고 하면 헤이그에 파견한 밀사들의 입장이 말이 아니다. 다시  한번 이토 히로부미가 눈알을 부라리며 다그쳐 물었다.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사실이 있습니까?”
고종은 오랜 침묵 끝에
“나는 모르는 일이요.”
라고 답변했다.
“분명히 폐하께서는 모르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폐하는 모르는 일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어금니를 깨물며 두 번씩 확인을 하고는 곧바로 대궐을 나갔다. 고종의 답변은 전신을 타고 동경을 거쳐 지구 반대편에 있는 헤이그에 전달되었다. 고종의 밀사 이준, 이위종, 이상설 3인은 만국평화회의장에는 입장도 못하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이준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하였다.

그해 7월 3일 더위가 절정에 이를 무렵 이토 히로부미는 총리대신 이완용을 통감 관저로 불렀다. 이토 히로부미는 처음부터 이완용을 세차게 몰아붙였다.
“황제의 행위는 을사보호조약을 위반한 것이며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른바 없소.”
“내각은 각하의 선처를 바랄 뿐입니다.”
“나 역시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본국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는 몸이요. 그런데 어떻게 귀국을 용서할 수 있겠소.”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 앞에서 몸 둘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다가 거듭 사죄하였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결국 고종을 퇴위시키겠다는 약조를 하고 통감 관저를 나왔다.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를 받은 이완용 내각은 7월 6일 내각 회의를 개최하였다.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고종에게 추궁한다는 데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바로 입궁하여 어전회의를 열었다. 먼저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이 고종을 몰아쳤다.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은 전적으로 폐하에게 있습니다. 폐하께서 사직의 안위를 염려한다면 차제에 자결함으로써 사직의 위기를 구하셔야 합니다.”
감히 신하가 황제의 자결을 운운하다니 고종은 기가 막혔다. 고종이 안색을 달리하며 다른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다. 누구 한 사람 입을 열지 않았다. 대궐의 천정에서 매미 소리만 요란히 들릴 뿐이었다. 송병준이 다시 고종을 압박했다.
“폐하, 만일 폐하께서 퇴위를 못하시겠다면 도쿄에 가서 일본 천황 폐하께 사죄하셔야지요. 그것도 못하시겠다면 일전을 겨룬 후 하세가와 대장에게 항복하는 수밖에 없나이다.”
“신하가 황제의 폐위를 거론하는 것은 법도에 없는 법이요.”
역대 왕들은 스스로 양위를 거론한 적은 있으나 신하가 제왕의 퇴위를 거론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전으로 돌아온 황제는 입맛이 당기질 않았다. 엄귀비가 가져다주는 약주를 마시고는 겨우 잠이 들었다. 늦은 밤, 술이 깸과 동시에 잠도 깼다. 엄귀비는 황제의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귀비도 내 곁에 눕구려.”
“아닙니다. 오늘은 이게 편합니다.”
귀비가 황제의 팔을 주물러 주었다. 잠에서 깨 황제는 귀비에게 말을 걸어왔다. 
“귀비는 언제 궁에 들어왔소.”
“5살에 생각시로 들어왔나이다.”
“그러면 내가 궁에 들어올 때 보았겠네.”
“예, 폐하께서 12살에 궁에 들어오시는 것을 보았나이다.”
“그땐 철없는 소년이었지.”
“그때는 그저 궁녀들과 놀이만 하면 되셨나이다.”
“궁에 들어와 10년 동안은 개항 압력을 견디거나 서원을 정리하는 일들은 아버님의 몫이었지.”
“성인이 되시고 나서는 개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나이다.”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 개항을 했고, 별기군을 조직하여 신식 군사훈련을 도입하면서 개화를 위해 몸부림쳤었지.”
 “임오군란으로 대원군 대감께서 재집권 하신일도 있었나이다.”
“아버님께서는 청나라로 압송되시는 수모를 격어셨지. 청나라 장수 위안스카이는 궁궐 안에까지 말을 타고 들어와 날 물러나라고 했어. 그러고는 자기 마음대로 조선의 관리를 20명이나 갈아치웠어.”
“갑신년에는 개화파가 개화를 주장하였나이다.”
“그땐 청나라의 개입으로 혁명은 수포로 돌아갔었지.”
“청나라와 일본 군대가 조선 땅에서 전투를 벌인 일도 있었나이다.”
“동학란으로 결국은 일본 군대는 황궁을 포위하고 황후를 죽였어. 그 일만 생각하면 너무 분해.”
“그렇지만 아관파천을 결행하셨나이다.”
“그땐 1년 만에 환궁할 수 있었지. 귀비의 수고가 많았어.”
귀비와 대화는 지나간 시절 크고 작은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만 했다. 새벽닭 우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먼동이 틀 무렵 황제는 잠이 들었다.
 
고종이 침묵하고 칩거하여도 일본의 압박 수위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고종이 양위를 하되 겉으로 보기에는 조선정부 스스로 하는 모양새를 취하도록 압박을 가해왔다. 16일에는 총리대신 이완용은 고종의 양위를 주청했다. 다음 날은 다른 대신들도 고종을 찾아와 양위는 불가피하다고 주청했다. 고종은 어쩔 수 없이 7월 18일 밤 조칙을 발표했다.
“짐이 열성조의 국기를 사수한지 오늘로 44년에 이르고[...] 이에 군국(君國)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케 한다.”
고종은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케 한다.’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황제의 자리에 미련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황제의 의도일 뿐이었다. 일제 통감부와 내각의 대신들은 조칙이 발표되기가 무섭게 고종을 퇴위로 몰아갔다. 이에 격분한 서울의 상인들은 철시를 하고 도처에서 일본을 규탄하는 시위가 열렸다. 이완용의 집은 성난 군중들에 의해 습격을 받아 불탔다. 결국 7월 20일에는 경운궁 중화전에서 양위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양위식에는 고종도 황태자도 참석하지 않았고 두 명의 내관들이 대리하였다.
고종이 강제 퇴위하자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가체제에 마지막 숨통을 죄기 시작했다. 법령제정권·관리임명권·행정권 및 일본 관리의 임명 등을 내용으로 한 7개항의 조약안을 제시했다. 아무런 장애도 없이 1907년 7월 24일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의 명의로 이 조약을 체결·조인하였다. 새 황제에게는 결재를 강요했다. 같은 날 한국 외교권을 접수하였다. 일본 통감부 설치를 중요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사이에 체결 조인하였다.


순종이 즉위하자 통감부는 황실 재산을 국유지로 전환하기 위한 작업을 본격화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통감부 고위관리들과 대책회의를 열었다.
“얼마 전 본국 훈령에 조선을 식민지를 만드는 비용은 현지에서 조달하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그에 대하 대책을 말해보시오.”
정무총감이 답변하였다.
“그동안 검토한 내용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조선의 황제는 홍삼 전매권, 광산채굴권, 화폐주조수입, 관영회사 운영수입 등 내탕금이라는 명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재산이 있습니다. 이를 내각에서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내각에서 할 일이오, 황제가 사용할 수 있는 돈줄을 조이는 것이 필요하오. 다음은?” 
“화폐개혁을 단행하겠습니다. 대한제국의 화폐인 백동화와 엽전을 신화폐로 바꾸어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화폐 주조권를 장악하고 상인들을 몰락시킬 수 있겠지.” 
“황실의 경비절감 차원에서 관리의 정원을 축소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선황실에는 관리와 궁인들이 너무 많아. 과감하게 줄이도록 하시오.”
“조선 황실에는 250여개의 역마다 역둔토가 있습니다. 그러나 철도부설과 전신의 발달로 파발역의 기능은 상실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들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요. 당연히 국유지로 편입해야지. 이게 전부요?”
“아닙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궁내부의 보고에 의하면 엄귀비가 보유하고 있는 궁방전 재산은 다른 사람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다고 합니다.”  
“엄귀비는 재산이 많아 진명과 명신여학교를 세웠지요. 이참에 나머지 재산은 국유지로 편입되도록 해보시오.”
 회의는 끝이 났다. 조선 황실은 눈치 채지 못하는 가운데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작업을 차근차근 진행해 나갔다.


일본 통감부는 먼저 궁내부의 정리에 들어갔다. 궁내부는 1894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궁정의 권한을 축소하는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갑오정권이 붕괴되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국정의 중요 정책을 집행하는 기구로 탈바꿈 했었다. 러일전쟁이 끝난 뒤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궁내부 관제를 개편하여 고문경찰로 하여금 궁중을 경위토록 하였다. 궁금령(宮禁令)을 제정하여 사실상 황제를 연금 상태에 몰아넣었다. 내시나 궁녀들도 궁궐 밖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나중에는 전의(典醫)마저 일본인 의사를 배치함으로써 황제의 건강상태도 수시로 확인했다. 본격적인 황실 재산을 빼앗는 작업으로 제실재산정리국을 설치했다. 모든 사무는 일본인 고문 가토(加藤增雄)가 장악했다.

조선왕조 시대에는 왕자나 후궁 등 각궁 소유의 궁방전은 황실의 사유재산으로 인정해왔다. 일본 통감부는 처음에는 국유와 분리하여 ‘제실유(帝室有)’라고 규정하였다. 나중에는 ‘제실유’의 개념은 없애고 황실 재산마저 ‘국유(國有)’로 이속시키는 작업을 본격화 하였다. 

통감부는 국유재산과 제실재산을 분할하고 조사한다며 임시제실유급국유재산조사국(臨時帝室有及國有財産調査局)을 설치했었다. 이 과정에서 전국에 산재한 역둔토를 국유지로 편입시킴은 물론 궁장토의 상당부분을 국유지로 편입시켰다. 설치기간이 만료되자 이를 해산하지 않고 제실재산정리국(帝室財産整理局)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가장 대표적인 표적은 개인 재산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경선궁 엄귀비였다. 엄귀비가 소유한 재산은 국유재산과는 구분되는 재산이었다. 단지 재산이 많다는 이유로 엄귀비에게 재산목록을 내 놓으라고 압박했다. 경선궁이 보유한 재산은 상당했다. 양정, 진명과 명신여학교에 기부한 재산 말고도 남은 재산이 더 많았다. 더 이상 경선궁 소유로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미 학교를 설립하는 데 거금을 들인 것은 세상이 아는 일이다. 그렇지만 궐 밖에서는 기부한 재산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경선궁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남은 재산을 친정 쪽으로 빼돌리는 일도 이미 때가 늦었다.


엄순헌황귀비(嚴純獻皇貴妃)

솔부엉이 울음소리가 궐내까지 들려오던 날 밤 엄귀비는 최상궁을 불렀다.

“내가 2년 전에 진명여학교와 명신여학교에 5백만 평을 기부하여 학교설립을 했지 않은가. 기부를 했으면 당연히 학교소유로 전환을 해야 하는데 아직도 탁지부에서 관리권을 행사하고 있다네.”
“너무나 부당하옵니다.”
“각궁에서 자신의 재산을 관리해온 것은 5백년 내려온 관례가 아닌가. 이참에 경선궁 소속 토지 중 일부를 영친왕궁의 소속으로 이관시키려고 했더니 인정할 수 없다는 게야.”
“궁궐 내부에도 첩자가 있었나 봅니다.”
“그러게 말이야.”
“제실재산정리국은 궁내부 소속이지만 일본의 조종을 받는 게 틀림없사옵니다.”
“이제는 영친왕궁으로 돌리려 했던 재산목록을 내놓으라고 하니 어쩌면 좋겠소?”
경선궁이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였지만 최상궁도 뾰족한 묘책은 없었다.
“최상궁.”
엄귀비는 밖에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낮은 목소리로 최상궁을 불렀다.
“예, 귀비 마마”
“내가 믿을 사람은 최상궁 밖에 없네요.”
“어떻게 하시라는 분부신지요?”
“최상궁은 황태자의 보모가 아니오. 조만간 영칭왕도 가례(家禮)도 치루고 새살림을 내주어야 할 것이요. 이참에 영친왕궁으로 돌리려고 했던 내 재산을 최상궁이 관리해주시오.”
“예!”
“일단 소나기는 피해가야 되질 않겠소.”
최상궁은 엄귀비가 영친왕궁으로 돌리려고 했던 재산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을 알아차렸다.
“예, 마마의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그러나 궁궐에는 눈이 많지 않습니까?”
“눈가림으로 대전과 내전 궁녀들 중 큰 상궁들에게 각각 전답 2천 평씩을 나누어 주세요.”
“알겠나이다.”
내전을 물러나온 최상궁은 경선궁이 영친왕궁으로 돌리려 했던 1백여만 평의 땅 문서를 별도로 분류해 놓았다. 그리고 대전(大殿)과 내전(內殿) 큰 상궁 20명에게는 경선궁이 하사하는 토지라고 하며 파주에 있는 농토를 나누어 주었다. 토지를 하사받은 궁녀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읍하였다. 한편 최상궁이 별도로 분리한 농지는 비밀리에 관리하도록 지시가 뒤따랐다. 최상궁은 매년 농사가 마무리 되면 수확량을 엄귀비에게 보고했다. 또한 엄귀비의 지시대로 처리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최상궁은 엄귀비의 재산관리인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