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최송설당

[소설 최송설당] 제8장 복권

보리숭이 2017. 8. 23. 11:31

제8장에서는 최송설당이 평생 염원하였던 조상의 신원을 해결하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홍경래난으로 양반의 신분에서 노비의 신분으로 신분하락을 하였습니다.



제8장 복권(復權)

 

 

조선에 최초로 전화기가 도입된 것은 1882년이다. 청나라 톈진 유학생 상운(尙雲)이 전화기와 전선 100m를 가지고 왔다. 1896년 덕수궁에 자석식 전화기가 설치되어 고종은 즐겨 사용하였다. 매일 아침 홍릉에 있는 명성황후의 묘에 전화를 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 전화는 주요 관아는 물론 인천까지 개통되었다.

포근한 햇살이 궁궐의 장지문 깊숙이 스며들 즈음 황제는 경운궁 대청마루에서 의정부 관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종친들의 의견이 황후의 간택은 숙종대왕의 교지를 따라야 한다는 말이더냐.”

“......”

“종친들의 뜻이 그렇다면 짐은 그렇게 따르겠노라.”

“.......”

황제의 통화는 끝이 났다. 이때 장지문 밖에서 황제의 통화에 유난히도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던 사람은 시종 정환덕이었다. 그는 무속인으로 궁궐에 들어온 사람이다. 그는 황제보다 먼저 상대방을 불러내고 황제에게 전화기를 건네주는 비서 역할을 했다. 정환덕이 황제의 통화 내용에 신경을 곤두세운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엄순비가 50세가 되던 해에 황후 간택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던 시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비라는 칭호는 왕후와 동격이었으므로 당연히 엄순비가 황후가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단지 황제의 의중을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속인들은 황후 간택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다. 황제께서 엄순비의 관상이 황후의 상이 들어있는지 물어 온다면 답변을 해야 한다. 어떻게 답변하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황후의 관상이 아니라고 했다가 황후가 되는 날에는 엄순비의 미움을 살 것이고, 황제는 다른 사람을 점찍고 있는데 황후의 관상이라고 했다가는 황제의 미움을 살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살아남는 길은 황제의 의중이 어디에 있는지는 먼저 간파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궁궐 밖에서는 궁궐 내에 사는 사람들은 잘 먹고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궁궐 내부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시기하고 질투하며 애증의 세월을 살아간다. 어떤 면에서는 평민들보다 더 고달픈 삶을 살고 있다.

정환덕의 입을 통해 궁궐에 들어와 있는 무속인들에게 황제의 의중이 전파되었다. ‘숙종대왕의 교지를 따른다는 것이다.’무속인들은 왕후 간택에 관한 숙종대왕의 교지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숙종의 교지 내용을 알아냈다. 교지 내용은 단순했다.

 

“희빈 장씨가 왕후에 자리에 올랐으나 성정이 나빠 폐비가 되었다. 앞으로는 후궁을 왕후로 간택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렇다면 황제의 의중은 엄순비를 황후로 삼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무속인 최병주가 한 밤중에 황제의 거처로 불려갔다.

“그대는 엄순비의 관상에 황후의 상이 들어있다고 보는가?”

답변을 못하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말해 보아라.”

“......”

최병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엄순비의 관상에는 황후의 상이 들어있지 않나이다.”

“알았다. 물러가거라.”

최병주는 땀을 뻘뻘 흘리며 대전을 빠져 나왔다.

다음 날은 정환덕이 황제께 불려갔다. 어제와 똑 같은 질문이 주어졌다. 정환덕의 답변도 어제와 동일했다. 다음날 황제의 교지가 내렸다.

“엄순비를 엄귀비에 책봉한다. 황후는 별도로 책봉하지 않는다.”

길일을 택해 엄순비는 귀비 책봉례를 치렀지만 기쁘지 않았다. 자신은 엄귀비로 머물 수밖에 없고 언제 누가 황후의 자리에 오를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궁녀로 있을 때 철종의 후궁 거처에 장씨 성을 가진 상궁이 있었다. 그녀는 살결이 희고 키가 훤칠하여 고종의 마음에 들어 성은을 입었다. 의친왕 이강을 낳게 되자 귀인이 되었다. 왕자를 출산하게 되자 민왕후는 장귀인에게 쇠꼬챙이로 지져대는 심한 고문을 하였다. 그러고는 아기 왕자와 함께 사가로 냉혹하게 내쫓아 버렸다. 결국 장귀인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고 말았다. 훗날 누군가 황후로 책봉되어 왕자를 낳게 되면 자신과 영친왕은 장귀인과 의친왕의 신세와 같을 수도 있지 않는가? 생각할수록 소름이 끼쳤다. 자신을 황후의 자리에서 떨어트린 것이 무속인 들이라고 생각하니 이가 갈렸다.

엄귀비보다 현실적으로 더 불안한 사람들도 있었다. 엄귀비가 황후의 상이 아니라고 했던 무속인들이었다. 또한 무속인들이 추천하여 궁에 들어온 나인들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 엄귀비로부터 복수의 칼이 날아올지 몰라 불안했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온 세상을 녹여내고 있었다. 밤이 되어도 열기는 수그러들지 않고 열대야가 기승을 부린지 한 달이 되었다. 북악산 그림자가 경운궁 후원을 덮을 즈음 엄귀비가 최상궁을 불렀다. 해는 떨어졌지만 어두워지려면 한 시간은 족히 있어야 될 듯 했다. 그날따라 엄귀비는 자신과 단둘이 산책을 하자며 다른 궁인들은 백보 뒤에서 따라오도록 했다.

“최상궁! 궁궐에 들어와 있는 무속인과 점쟁이들을 쫒아낼 방법이 없을 까?”

“잘못한 일이 있으면 죄를 물으면 되지 않겠사옵니까?”

“그들의 수효가 십여 명이 넘는다네. 나름대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으니 간단하지가 않단 말이오.”

“그들이 잘 못하는 일들이 어떤 일들입니까?”

“최상궁은 내가 믿으니까 하는 말인데, 내가 황후가 못된 것이 무속인들 때문이라는 것을 아오?”

“처음 듣는 말씀입니다.”

“내 관상은 황후가 아니라고 했다네, 그뿐인가 내가 밤마다 황제폐하를 녹여 낸다고 하질 않나, 모든 벼슬자리는 나를 거쳐야 된다고 소문을 퍼트리고 있다네.”

“그런 일이 있었나이까? 그들은 언제부터 궁궐에 들어오게 되었나이까?”

“명성황후 때 한 명이 들어오더니 두 명이 되고, 마지막에는 무속인이 다른 무속인을 끌어들인 것이라네. 그들은 환관이나 나인들 속에 섞여 있다네.”

“명성황후님이 무속인을 궁으로 들인 데는 사연이 있으시겠지요?”

“명성황후님은 자식을 넷 두었다네. 셋은 어린 나이에 죽고 황태자님도 남자구실을 못하는 분이지 않소. 밖에서 볼 때는 강인한 여성 같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주 마음이 여린 분이었다네. 그리고 흥선대원군 대감과 사이가 좋지 않아 죽을 고비를 넘길 때마다 무속인들이 예언을 했다네. 그때마다 잘 들어맞아 무속인을 가까이 하게 되었지.”

그때서야 최상궁은 엄귀비가 자신을 후원으로 불러낸 이유를 알았다.

“마마 저 나름대로 방도를 찾아보겠나이다.”

“저들의 촉수는 내 옆에도 있고, 환관이나 궁녀들 중에도 있소. 일이 잘 못되면 감쪽같이 독살을 당할 수도 있소.”

“잘 알겠나이다.”

최상궁은 엄귀비의 의도와 무속인들의 생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아무와 상의할 일도 아니었다. 궐내 막강한 세력을 형성한 무속인들을 쫒아내는 일에 앞장선다는 것은 위험천만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가 바뀌자 공진회라는 단체에서 황제폐하께 상소문이 올라왔다. 내용은 궐내에 있는 무속인들이 혹세무민하고 있으니 이들을 쫒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강홍대, 성광호, 김대진, 장한기, 최병주, 정환덕, 장두환, 조세환, 강회람, 이인순, 이재인, 안영중, 이정훈, 최병규, 한진문, 이필화, 계향, 수련 등 18명의 명단과 각자의 죄상까지 기술하고 있었다. 궁궐 내부는 벌집 쑤셔놓은 듯 수군수군했다. 무속인들은 똘똘 뭉쳐서 배후가 누구인지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대체로 엄귀비와 최상궁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상소문의 진위에 대한 어전회의가 열리는 아침이었다. 엄귀비는 황제폐하께 아뢰었다.

“폐하, 신첩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나이까?”

“뭘 거리 뜸을 들이시오. 어서 말해보시오.”

“금일 어전회의는 내명부에 관한 일이오니 무속인들을 처벌하지 마시고 신첩에게 기회를 주시길 청원 드리옵니다.”

“잘 알았소. 내 생각해 보리다.”

어전회의가 열렸다. 대체로 상소문의 내용대로 무속인들은 혹세무민하고, 벼슬을 팔고, 황당한 말로 민심을 교란시키고 있다는 결론이 났다. 그러나 황제폐하의 교지는 엉뚱했다.

“오늘 상소는 내명부의 관한 일이니 엄귀비에게 일임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무속인들도 공로가 있으니 불문에 부치도록 한다.”

무속인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엄귀비의 보복을 두려워했는데 관용을 베풀지 않는가. 그러나 그것은 짧은 판단이었다. 몇 개월이 지나 모든 것이 평안한 상태로 돌아간 어느 날, 무속인들과 정씨 성을 가진 나인들까지 하루아침에 궁궐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만큼 엄귀비는 주도면밀한 여인이었다. 상대방이 방심한 틈을 타서 궁궐내의 인맥을 철저히 파악했던 것이다. 이때 정환덕도 궁궐에서 쫓겨났다. 목숨을 건진 그는 ‘남가록(南柯錄)’이라는 소설을 써서 엄귀비와 최상궁에게 앙가품을 했다.

 

궁에 들어간 최상궁이 잠시도 잊지 않은 것은 가문의 원한을 푸는 것이었다. 조상의 억울한 죄명을 풀어주고 싶었다. 영친왕의 보모가 된 지 4년이 지났다. 엄귀비의 신뢰가 고래 힘줄만큼이나 굳어졌다고 판단되는 시점이었다. 최상궁은 먼저 엄귀비와 상의를 하였다.

“마마, 저에게는 평생 풀지 못한 숙제가 있나이다.”

“무슨 숙제를 평생 풀지 못했소. 내가 도와 줄 수 있는지 말해 보시오.”

“제 증조부에 관한 일입니다.”

“무슨 일이요?”

“증조부께서는 홍경래 난이 일어날 당시 선천의 부호군으로 있었습니다. 당시 난을 진압하는데 소극적이었다는 누명을 쓰고 가문이 몰적을 당했나이다.”

“저런… 난 그런 줄도 몰랐네.”

“마마님께서 증조부의 원한을 풀어주셨으면 합니다.”

“딱한 사정은 알겠으나 궁중에는 법도가 있질 않소.”

엄귀비는 미꾸라지 빠지듯 한발 빠져나갔다. 그렇다고 최상궁으로서도 물러설 개재는 아니었다.

“마마님께서 재조사 하도록 길만 열어주십시오. 나머지 일은 제가 대응하겠나이다.”

“재조사를 할 만한 물증을 가지고 있소?”

“예 저희 집안 대대로 보관하고 있는 증거물이 있습니다.”

“알겠소, 먼저 법부에서 절차를 밝도록 해보겠소. 그러나 조사 결과에 대해서는 나는 모르는 일이오.”

“여부가 있겠나이까.”

엄귀비로부터 반승낙을 받은 최상궁은 날아갈 듯이 기뻤다. 드디어 자신이 일생동안 기다렸던 날이 온 것이다. 정면 승부를 걸 시간이 도래했다.

도승지를 통해 홍경래 난 당시 최봉관의 죄상에 대해 재조사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조사관으로 법부좌랑이 선정되었다. 90년 전의 기록을 모아둔 서고에는 민들레 홀씨처럼 먼지가 폴폴 날아다니고 있었다. 조사관은 먼지 더미 속에 홍경래난 당시의 기록을 찾아냈다. 그러고는 며칠 후 최상궁과 심문이 이루어 졌다.

“당시 최봉관의 죄목에는 ‘첫째, 외가 유문제와 함께 홍경래 무리에 가담하여 반란군에 무기를 제공했다. 둘째, 최봉관은 선천군의 무장으로써 난이 일어나기 전에 관군을 선동하여 선천부사가 관아를 지킬 수 없도록 했다. 셋째, 난이 났을 때 적극적으로 나가서 싸우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 대해 할 말이 있는가?”

“예, 유문제는 저희 증조부 최봉관 부친의 외가로 육촌간입니다. 홍경래 난 당시 반란군에 가담한 자들 중에 친가나 처가로 6촌도 아니고, 아버지의 외가로 6촌까지 죄를 물었다면 당시 평안도 사람은 한 사람도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는 너무나 광범위한 처벌이라고 사료됩니다.

둘째, 반란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내부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은 앞뒤가 맞질 않습니다. 증조부는 반란군이 선천군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옥에 있었습니다. 옥에 있는 사람이 어찌 관군을 선동할 수 있겠나이까? 또한 사전에 홍경래 무리에 가담했다면 반란군이 선천에 왔을 때 옥에서 풀려나자마자 반란군의 중책을 맡는 것이 순서였을 것입니다. 전혀 중책을 맡은 일이 없습니다.

셋째, 반란군이 쳐들어왔을 때 적극적으로 나가서 싸우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선천부사 김익순은 증조부가 반란군에 가담했다는 혐의가 있다고 하여 장 100대를 치도록 했습니다. 자신의 몸도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난리가 났다고 하여 나가 싸울 수 있겠습니다.”

“최봉관이 내부 반란을 일으켜 관군을 선동하였다는 것과, 선동을 한 일이 없다는 부분이 차이가 난다. 그기에 따른 물증은 있는가?”

“예, 외람되게도 제가 당시 형부의 기록을 가지고 있나이다.”

최상궁은 집안 대대로 간직해오던 당시 선천군 형부의 기록을 제시했다. 선천군 형부의 기록은 다음과 같았다.

 

“최봉관의 외가 육촌 유문제가 홍경래 무리에 가담한 정황이 있었다. 최봉관도 연루되었는지 문초하였던 바 본인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므로 곤장 백대로 다스렸다.”

 

“이것은 그대가 가지고 있는 기록이고, 관의 기록에는 반란군이 도착하기 전에 관군을 선동하였으므로 부사가 관아를 지킬 수 없었다고 되어 있다. 어찌 그대의 기록을 믿으란 말인가.”

“조사관님, 두 기록의 필체와 날짜를 비교해 보시지요.”

조사관은 촘촘히 두 기록을 비교해보았다. 90여년이 지났지만 두 기록은 지질이나 필적이 일치했다.

“그러고 보니 종이의 지질도 비슷하고 필체는 동일하고 날짜만 차이가 있구나.”

“그렇다면 관아의 기록은 김익순 선천부사가 자신의 죄를 부하 장수에게 씌우기 위해 나중에 기록을 만들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사관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추가로 진술할 내용은?”

“김익순 선천부사는 반란군이 쳐들어 올 때는 관아를 버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다가 반란군에 항복해서 유영장(留營將)이라는 보직을 받아 부사 자리를 보전했습니다. 나중에는 반란군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관군에 붙었다가 반란군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이러한 상사가 어찌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나도 알고 있는 일이오. 다른 할 말은 없소?”

“김익순 부사의 가족은 역적으로 몰렸다가 3년 만에 복권되었습니다. 손자 김병연(金炳淵)은 과거에 장원급제까지 했습니다. 김병연이 장원급제를 한 연유는 김익순의 행동은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글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것을 알고 하늘을 보고 살수 없다고 하여 삿갓을 쓰고 방방곡곡을 유랑하며 살았습니다. 역모를 도모한 사람만도 못한 상사가 만든 기록을 어찌 믿을 수 있습니까? 변절을 밥 먹듯이 한 상사가 어찌 부하무장의 죄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이 대목에 대해서는 조사관도 할 말이 없었다. 결국 법부 쪽에서도 당시 기록은 전란 중에 작성된 것이므로 부실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였다.

드디어 고종황제로부터 ‘최봉관의 몰적(沒籍)을 복권하노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억울하게 덮어 쓴 선조의 죄가 씻어진 것이다. 89년 만에 가문이 복원되고 이제 중흥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은 것이었다. 최상궁은 복권의 교지를 받아드는 순간 만감이 교차하였다.

 

반란군에 가담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사한 증조부 최봉관,

4형제를 이끌고 고부로 귀양 가서 노비생활을 한 조부 최상문,

학문적 식견이 높아도 과거시험에는 응시 할 수 없었던 부친 최창환,

훈장의 딸로 찢어진 가난을 면치 못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

 

4대에 걸친 고난의 길이 이제야 해결된 것이었다. 어찌 눈물이 나지 않으랴. 그동안 참고 참았던 설움에 눈두덩이 불어 터지도록 울고 또 울었다.

 

19세기와 더불어 저물고 기우는 조선사회는 부정과 부패로 얼룩져있었다. 고려 광종 때부터 시작된 과거시험제도는 훌륭한 인재를 등용한다는 취지가 지켜져 왔었다. 이제는 부패한 조정 관리들에 의해 망가진 제도가 되었다. 순조의 등극 이후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과거시험은 대리시험, 시험지 바꿔치기, 시험답안 베껴 쓰기, 조상 바꾸기 등등 시험장의 부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을유년(1985년)에 시행된 식년시에는 100명이 합격 정원이었다. 상감께서 1백 명을 더 선발하도록 하였다. 이들에게는 각각 2만 냥씩 받고 팔도록 지시했다. 시험관이 시험지를 뒤섞어 버려 결국은 공정하게 선발된 인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러한 모습은 정부 스스로 과거제도를 폐지하는 데에 이르게 하였다. 인재 등용에 있어서도 문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뇌물을 바치고 현감으로 부임하였는데 며칠 후 후임 현감이 부임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였다. 그러다 보니 신임 현감은 부임과 동시에 재물 챙기기에 급급하였다. 암행어사를 파견하였는데 여기에도 부정이 있어 암행어사를 감시하는 암행어사를 파견하였다.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높이 치솟았다. 자연히 민란이 빈번하였다.

경선궁의 배후와 영친왕의 보모라는 권력을 쥐고 있던 최상궁은 가문의 복권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가까운 친척에게 벼슬자리 하나 내리도록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는 음직으로 처음 벼슬하는 도사, 감역, 참봉, 감청 등의 벼슬은 우열에 따라 값의 고하가 결정되어 있었다.

고부댁이 최상궁이 되어 영친왕의 보모가 되었다는 소식은 오가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고향 마을에 까지 퍼졌다. 이때 이용교가 찾아왔다.

“고부댁, 아니 마마님 나와의 약조는 잊지 않으셨겠지요?”

“어떻게 알고 찾아 오셨나요?”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지 않소. 약속을 안 잊었다면 이제는 군수자리 하나는 주셔야지요.”

최상궁은 김천서 서울로 올라 올 때를 떠올렸다. 그때로서는 지켜 질 가능성도 희박했던 약조‘은혜를 갚겠다.’는 말이 생각났다. 어떻게 보면 오늘의 최상궁이 된 것은 이용교가 서울까지 데려다 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알았어요. 내가 알아 볼 테니 기다려 보세요.”

이용교와 헤어지고 최상궁은 엄귀비를 통해 벼슬자리 하나를 부탁했다. 물론 적절한 사례금도 바쳤다. 그 결과 이용교에게는 창원군수 자리가 제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