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흔적을 나라, 교토에서

기행문 이틀째 법륭사 방문

보리숭이 2009. 1. 29. 14:25

2009년 1월 16일 금요일 (2일째)
여행지: 호류지(법륭사) 글쓴이: 정경지

 

이틀째 아스키테라에 이어 두 번째 방문지는 호류지(법륭사)가 되었다.

법륭사는 아스카시대(6세기 중엽 ~8세기 초)의 모습을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전해주는 사찰이다. 이 절의 창건 유래는 <금당>의 동쪽 법당에 안치되어 있는 <약사여래상>의 후광명 및 <법륭사 가람연기 및 유기자재장>(747)의 유래문에서 알 수 있다.

그 유래문에 따르면, 요메이천황이 자신의 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절과 불상을 건립하도록 명하였으나, 그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후일 스이코 천황과 쇼도쿠 태자가 요메이 천황의 유언을 받들어 607년에 절과 그 본존 <약사여래> 상을 건립한것이 이 법륭사라고 전해오고 있다.

또한 일본 정사의 하나인 <일본서기>에는 670년 4월 30일 심야, 법륭사가 완전히 소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두고 메이지 시대 이래 법륭사의 재건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전개되었고, 오늘날에도 현재의 가람 건립 연대에 관해서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법륭사는 쇼토쿠 태자가 건립한 절로서 1,400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 법륭사는 탑과 금당을 중심으로 하여 서원가람과 몽전불당을 중심으로 한 동원가람으로 나누어져 있다.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국보 및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것만도 약 190종류로 2,300여점에 달하고 있다. 일본 문화재로서는 처음으로 1993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에서 골기와지붕, 배흘림기둥 등 우리 고유의 건축양식은 물론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예우를 받았고 지금도 절 안에 유존된 혜자스님상, 백제관음상, 고구려 혹은 백제에서 제작된 불감(佛龕)인 '옥충주자(玉충廚子)', 토담, 또한 지금은 소실됐지만 담징이 그렸을지도 모르는 금당벽화의 흔적, 금동석가삼존상과 사천왕상의 광목천 광배 등 고구려, 백제와 관련된 유물들이 수없이 많았다


남대문(무로마치 시대, 14세기 말 ~17세기 초)
남대문은 법륭사의 현관에 해당하는 대문으로 1438년에 재건된 것이다. 그 우아하고 아름다운 구조는 법륭사의 대문으로서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 

중문과 회랑
남대문을 지나 조금 걸어 들어가면 중문과 양옆으로 회랑이 길게 늘어서 있다. 그 뒤로 탑이 보인다. 백제 군수리사지등에 보이는 백제식 가람배치로 자오선상에 세워졌으며 남쪽으로 부터 남문-중문-탑-금당-강당과 이것을 둘러싸는 회랑으로 이루어졌다.

중문 좌우의 금강 역사상

중문 좌우에 배치된 금강 역사상은 동서로 길게 이어진 회랑의 살창과 대조를 이루며, 뒤쪽 탑과 금당을 위엄스러운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다. 그 안쪽 정면에는 대강당, 서쪽에는 경당, 그리고 동쪽에는 종각이 세워져 있다.

금당
법륭사의 본존이 안치된 불당이 금당이다. 이 금당에는 쇼토쿠태자를 위해 건조된 금동석가삼존상(아스카시대), 태자의 부왕인 요메이 천황을 위해 건조된 금동약사여래좌상(아스카시대), 아나호베노 하시히토 황후를 위해 건조된 금동아미타여래좌상(가마쿠라 시대)이 안치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을 수호하듯이 장목으로 만든 사천왕상(하쿠호시대)은 사귀의 등 위에서 위엄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그 외에도 목조 길상천입상, 비사문천 입상 등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또한 천정에는 서역문화의 영향이 짙은 천인과 봉황새가 비상하는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그린 닫집이 걸려 있으며 주위 벽면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벽화(1949년에 소실되어 현재는 패널에 그려진 모주 벽화로 대체되었다)가 그려져 있어 창건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석가정토도

이 금당벽화는 중국의 윈깡 석불, 경주의 석굴암과 함께 동양의 3대 미술품으로 일컬어지던 것이었다.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었던 고구려 승려 담징이 그렸다고 알려지고 있는 금당벽화를 최대한 복원하긴 했지만, 어두운 실내조명과 통제된 통로 때문에 하나도 제대로 보기가 어려웠다.
결국 사진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호류지금당벽화는 동서남북 아래 위 모든 벽면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방위에 따라 동쪽에 석가정토도(재현벽화 1호도)로 시작하여 북쪽 벽면에는 일광보살도(재현벽화 2호도), 관음보살도(재현벽화 3호도), 세지보살(재현벽화 4호도), 월광보살도(재현벽화 5호도)가 나란히 있고 서쪽에는 아미타정토도(재현벽화 6)가 그려져 있다.

아미타정토도

아미타정토도를 보면 근엄하게 정좌하고 있는 아미타불 좌우에 연꽃을 들고 있는 관세음보살과 염주같은 것을 들고 있는 대세지보살이 있다. 두 보살은 하얀 피부에 빨간 입술연지까지 바르고 화려하게 최고 패션의 옷을 걸치고 있다. 역시 허리는 굽혀 요염하기까지 한 자세를 취하고 배꼽까지 내놓고 있다. 

벽화의 제작수법으로 보아 한국계 화가의 참여 가능성이 높게 인정되고 있는데 즉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중앙아시아적인 채색방법이나, 철을 이용한 묘사법을 위주로 하고 있다는 점, 한국에서 유행한 사방불(四方佛) 사상이 나타나 있다는 것 등이 그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해준다.

정한숙의 <금당벽화>란 소설 속 담징은 수나라와 전쟁 중인 조국을 걱정하다가 승전 소식을 듣고서 벽화를 그린다.
담징의 관음상 그림에 대한 이 소설의 시구 같은 묘사가 생각이 난다. “거침없는 선이여, 그 위엔 고구려 남아의 의연한 기상이 맺혔고… 목에 걸린 구슬이여, 이는 소식조차 아득한, 조국 땅에 남아 있는,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이런가?”

허망하게도 담징의 소설 속 신화는 실체를 찾을 수 없다. 호류지 안내장 어디에도 담징이라는 두 이름조차 찾아 보기 어렵고 벽화는 아잔타 석굴 벽화에서 비롯해 서역과 중국 둔황, 윈강석굴, 고구려 등의 조선반도(한반도)를 경유한 동양 불교회화의 정수로 대개 요약하고 있다. 제작자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오층탑(오중탑)  
중문 왼쪽으로 돌아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오층탑이다.
백제인 기술자들이 참여해 지은 이 목탑은 창건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백제의 건축양식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호류지의 목탑은 높이 31.5m로 1400여년동안 2번의 큰 보수만 하고 온전하게 모습을 갖춘 제일 오래된 목탑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건물일 뿐 만 아니라 세계최고의 목조건축물이기도 하다.
1993년에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고 다시 호류지는 세계 건축가들의 주목을 받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1300년이 지나도 왜 오층탑은 무너지지 않는가>라는게 제일 말이 많았다.
이에 학자들은

1. 탑 안을 중심으로 기둥이 있어 탑 전체의 밸런스를 맞춰 초고층빌딩의 내진강도에  맞먹는 구조로 되어 있다.
2. 천년 이상의 내구성을 지닌 측백나무를 이용
3. 사용한 모든 못 및 꺾쇄에 옻칠을 해 부패를 막았다.
라고 이유를 대고 있다. 그렇다 해도 7세기의 일본이 현대에 통용될만한  튼튼한 구조물을 왜 법륭사만 만들어 놓았을까 하는 점이다.


의문은 의문을 불러 그것이 이윽고 법륭사를 건립한 쇼토쿠 태자의 수수께끼로 증폭되고 있다. 또 신기한 점은 그 지역 사람들이 말하는 것인데 오래 된 법륭사 경내에는 그 어느곳에서도 희안하게도 거미집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 탑의 최하층의 내진에는 나라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소상들이 다수 안치되어 있으며, 동쪽면에는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이 문답하는 장면, 북쪽면에는 석존의 입적 장면, 서쪽면은 석존의 유골(사리)의 분할 장면, 남쪽면에는 미륵보살의 설법장면을 볼 수 있다.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이 문답하는 장면

석존의 입적 장면

대강당
이 불당은 불교를 연구하고 법회를 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 불당은 종각과 더불어 925년에 낙뢰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다행히 990년에 재건되어 본존인 약사삼존상과 사천왕상도 그때 제작된 것이다.  

성령원(聖院)
가마쿠라시대에 쇼토쿠태자(聖
太子)의 존상을 안치하기 위해 동실의 일부를 개조한 건물이다.

대보장원과 백제관음당
쇼료인 불당에서 동쪽을 향해 걸으면 보물창고인 고호조가 자리잡고 있고, 그 건물앞을 왼쪽으로 돌아 북쪽을 향해 걸으면 식당과 세전 건물이 보입니다. 그 안쪽에 새롭게 만든 가람이 대보장원이다. 대보장원은 1998년에 낙성식을 한 백제관음당을 중심으로 ㅁ자 모양을 취하고 있다. 이 안에는 일본을 대표하는 국보급 문화재가 다수 안치되어 있다. 이 절에 전해오는 백제관음상은 일본 불교 미술을 대표하는 불상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일본 불상으로는 드물게 8등신의 날씬한 몸매와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비가 넘치는 표정을 하고 있다. 법륭사는 대보장원 내 백제관음당에 이 관음상을 안치하고 있다.  


여기에 나무로 만든 백제관세음보살상이 큼직하게 서 있다. 왜 백제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에도시대에 사람들이 그냥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이 보살상은 키가 제법 크고 호리호리하다. 그런데, 이 보살상과 가장 닮은 우리나라 보살상을 골라보면 부여 군수리절터출토의 관세음보살상을 꼽을 수 있다.

백제관음상

두 보살상은 연꽃 받침대에 올라 서 있다. 치렁치렁한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왔다. 겉옷이 아랫배에서 큰 X자형으로 교차하고 있다. 형식화된 겉옷이 아래로 늘여져 있다. 왼손은 아래로 오른손은 위로 들고 있다. 동일한 양식의 보살상으로 봐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다른 점도 많다. 백제의 보살상은 얼굴이 둥그스레한 백제 미인형이다. 일본과는 달리 정병 같은 것을 양손에 쥐고 있다. 일본의 백제관음상은 긴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중국 북위에서 만든 모습이다. 매듭의 위치도 조금 다르다. 결국 일본의 관세음보살입상도 중국과 백제 보살입상과 동일한 양식 아래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가운데 일본의 개성을 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동원 종각
중문에서 왼쪽으로 보면 모퉁이에 종각이 보인다. 이 종각은 부채꼴 모양을 하고 있는 건축물로, 내부에는 나라시대의 범종이 걸려 있다고 한다.

유메도노(夢殿) 불당
중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유메도노불당이 나타난다. 쇼토쿠 태자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739년에 건립한 가람을 조구오인(上宮王院) 불당이라고 하는데, 그 중심건물이 이 불당이다. 평지에 제법 높게 2중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계단, 지붕, 건물높이와 크기가 적당히 어울려 멋지다.
동원가람은 언제 건축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특이한 건물이었다. 8각형 건물인데, 동서남북에 올라가는 계단과 문을 달았다. 2중의 높은 기단과 적당한 높이의 건물은 보기에 아름다웠다. 몽전은 꼭꼭 문을 닫아 보살상을 직접 볼 수는 없었다. 왜 관람시간에 철통같이 막아서 볼 수조차도 없게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림으로 볼 수밖에 없다. 팔각형 불당 중앙의 감실에는 쇼토쿠 태자 실물 크기의 관음상을 안치하였으며, 그 주변에는 성관음 보살상(헤이안 시대), 쇼토쿠 태자의 효도상(가마쿠라 시대), 교신소즈의 건칠상(나라시대), 또 헤이안 시대에 유메노도 불당을 수리한 도센율사의 소상(헤이안 시대) 등도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몽전 구세관세음보살상

사진에 몽전 구세관세음보살상은 두 손을 가슴에 모아서 뭔가를 감싸쥐고 있다. 키가 훤칠하고 입이 오목한 듯하다. 작은 신광과 두광을 갖추고 있고, 가사는 어깨에서 내려와 양손을 거쳐서 허벅지쯤에서 큰 U자를 이루고 있다. 하의의 끝이바깥으로 쭉쭉 뻗쳤다. 하의의 모습은 북위 불상의 모습인데, 고구려 불상도 대부분 같은 모습이다.
이 관세음보살상과 가장 유사한 우리나라 보살상은 서산마애삼존불의 오른쪽에 있는 보살상이라 보인다. 전체적인 모습이 동일하다. 하의의 끝이 바깥으로 뻗친 정도가 가장 큰 차이점이다. 언제부터 몽전에 모셔졌는지 알 수 없지만, 백제관세음보살상과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로 치면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에 백제나 고구려의 지원이나 영향 아래 제작된 불상이 아닐까?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조불공(造佛工)이 일본에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법륭사를 보면서 절의 넓은 규모에 놀라고, 다양하게 남아있는 목조건축이 부럽다. 어제 동대사 대불전 안에 전시된 초기 모형에서 본 모코시가 법륭사 5층탑에서 보이고 운형첨차가 건물외관에 아름다움과 여유로움을 더해 주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문화재를 보전하고 복원하는데 노력하는 일본의 모습에 탄복한다.

 

이에 비하여 우리는 오랜 세월을 견뎌온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들이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훼손'되거나 '왜곡'하고 있다는 오늘 아침의 뉴스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 이 세계 유산이 인쇄된 흥덕사 터에, 고려 시대 대표 양식이라며, '금당'이 복원되었으나 장식용 기와인 '치미'는 통일신라시대 기법이고, '지대석'은 백제 양식, 긴 '처마'와 좁고 복잡한 내부는 시대 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복원 참여 학자는 고려 시대 건물 비례 관계나 가옥 구조를 이해하지 못했고, 장인들도 당시 고려시대 전문 목수가 없었다한다. 무언가 지상에 건물의 형태가 만들어지기를 원하는 지자체의 의지 때문에 일어난 일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