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전에서 대웅전으로 통하는 길은 한 단계 위의 세계로 가듯 계단을 올라야 했다. 계단은 108계단을 짧은 거리에 가능하게 하는 방법으로 36계단을 세 줄로 하여 만든 계산적인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범영루에 안치된 법고
자하문에서 본 좌측
자하문에서 본 우측이 위의 그림 좌측과 같이 보면 음양을 말하고 있는 듯..
자하문에서 저녁 노을을 보며
좌경루에 있는 목어와 운판
대웅전은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모신 전각으로 석가여래의 불국토를 이루는 일곽의 중심 전각이다. 현존하는 건물은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터전 위에 영조 41년(1765년)에 천룡사(天龍寺)의 스님 채원(采遠)이 중창한 건물로 조선시대 후기의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기단과 초석은 신라 경덕왕 10년(751년)에 불국사가 창건될 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평면도 원래의 평면구성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석등과 석가탑, 다보탑이 있고, 앞쪽에 범영루와 좌경루가 좌우대칭이 되어 팽팽한 긴장감을 준다. 꽤 넓은 대웅전 앞 공간이 활기를 잃지 않는 것은 이런 석조물들이 계획적로 배치되어 있는 까닭이다. 흔히 불국사를 돌아볼 때 놓치기 쉬운 것이 경내로 들어가기 전의 석축 장치이다.
불국사의 중심이 되는 대웅전 건물을 1695년에 다시 세운 것이고, 기단은 신라 때 것 그대로이다. 관음전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이 가파른 계단을 낙가교라 하는데, 이곳에 이르면 회랑이 어떻게 무설전과 대웅전을 두르고 있는지 잘 볼수 있다.
내부에는 후면의 내주열에 의지해 불단을 만들고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로 미륵보살과 갈라보살을 모신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셨으며, 다시 그 바깥으로 소조(塑造)의 가섭과 아난 두 제자상을 모셨다. 삼존불과 제자상은 언제 조성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임진왜란 후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존상 뒤에는 후불탱을 봉안하였고, 좌우에 다시 사천왕을 두 폭에 나누어 그린 사천왕도를 봉안하고 있다.
석등 사이로 대웅전의 석가모니불을 만나 볼 수 있다.
석가탑(불국사 삼층석탑) (통일신라 경덕왕10년, 751)
높이 10.63m로 3층 석탑 전체가 아무런 조각없이 간결하고 소박하며 각 부분이 안정적인 비율로 구조적인 균형미와 우아함이 돋보이는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탑이다.
석가탑을 무영탑(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정식명칭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으로, 법화경의 다보여래와 삭가여래가 나란히 앉아 설법하고 증명한다는 데서 연유한다고 한다.
1층의 몸돌과 2,3층의 모돌의 비율이 4:2:2를 보이는 것은 감은사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래쪽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을 고려한 것이다. 또한 지불돌의 끄트머리를 보면 위로 치켜 올라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지붕돌의 낙수면 끝을 사선으로 내려친 것으로 끝이 위로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단정한 기단부와 탑신부에 비해 상륜부가 다소 시끄럽고 무겁게 보이는 것은 석가탑보다 백년이나 뒤에 만들어진 남원 실상사 삼층석탑의 상륜부를 그대로 본떠 만든 것을 1974년에 얹었기 때문이다.
도굴범에 의해 훼손된 것을 1966년 12월에 수리하였는데, 이 때 2층 몸돌의 윗면 가운데에 있는 네모 사리공 안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사리장엄구와 함께 발견되었다.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라는데 이설이 생겼다. 1966년 석가탑에서 출토된 묵서지편(墨書紙片·문서 뭉치) 일부가 2005년 중수기(重修記·탑을 보수한 기록)로 밝혀졌으며, 중수기에 1024년 탑을 보수하면서 다라니경을 넣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돼 학계는 혼란에 빠진 것이다. 이 경우 제작연대가 일본 목판본인 백만탑다라니경(770년 제작)보다 늦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0월 27일 박물관 소강당에서 ‘석가탑 발견 유물 조사 중간 보고회’를 열었으나 이 논란에 종지부를 찍진 못했다. 박물관의 의뢰를 받은 노명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와 이승재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는 이날 “묵서지편 판독 결과 다라니경의 제작연대는 학계 통설처럼 8세기 중반 통일신라시대일 가능성이 높으며 11세기 초반 고려시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석탑 주변으로는 네 모서리와 각 면 중앙에 하나씩 모두 8개의 연꽃을 새긴 돌이 있고, 그 사이를 장대석으로 연결하고 있다. 불국사 고금역대기에 팔방금강좌라 하였고, 연꽃 한 송이가 1보살로, 8보살을 나타내며 성역을 나타낸다.
다보탑 (통일신라 경덕왕10년, 751)
높이 10.34m로 일반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과는 다른 특이한 형태로, 정식명칭은 "다보여래상주증명탑"이다.
이 명칭은, 법화경에 석가여래의 진리를 다보여래가 늘 증명한다고 하는데 연유한다고 한다.
이런 내용을 탑으로 조성한 예는 다른 불교 국가에서는 없다.
4각 기단의 네면에 계단을 설치하고, 중앙에 4각형 돌기둥을 세우고 교차되는 받침을 얹어 탑의 지붕돌을 받치게 하였다.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보존 상태가 좋았을 듯한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그 행방을 알 수가 없으며 지금은 한마리만 남아 있다.
무설전
대웅전 뒤에 대웅전 중심축에 맞추어 서있는 강당 건물이다.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문무왕 10년(670년)에 왕명으로 의상대사와 그 제자 오진(悟眞)과 표훈(表訓)을 비롯한 10명의 대덕(大德)에게 강론을 맡도록 하고 따로 표훈대덕을 머물게 했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경덕왕 10년 불국사 창건 이전에 존재했던 건물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기단과 계단, 초석은 대웅전이나 극락전의 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문무왕 때 창건했다고 하는 무설전은 경덕왕 때 불국사가 중창되면서 사라지고 새로 지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기단과 계단 및 초석은 경덕왕 때 만든 것이 현존하고 있으나 상부의 목조건축은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조선 숙종 34년(1708년)에 중창되었다. 그러나 그나마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방치되어 소실되었고 현존하는 무설전은 1972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도리통 8간, 양통 4간으로 내부에는 전면과 후면에 두 줄로 내주를 배열하여 전후퇴의 평면을 구성하였다. 1972년에 새로 지은 건물이나 평면은 경덕왕 때 창건당시의 모습을 따르고 있다. 외2출목의 주심포식으로 지붕은 맞배이다. 강당 건물이므로 내부에 불상은 봉안하지 않았다.
모든 사찰이 그러하듯이 여기에 다듬어진 돌들, 나무들, 그리고 적절히 꾸며진 공간(空間)들은 모두 사람의 정성이 깃든 곳이며, 그 정성은 우선 연약한 인간의 비원(悲願)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구원(救援), 부모의 명복(冥福), 국가와 민족의 안녕, 부처의 가호(加護), 그 모든 것을 비는 절실한 염원(念願)이 이곳 돌 하나하나에 담겨 있다 하겠으며 이러한 정성으로 이룩된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佛國), 즉 이상적 피안(彼岸)의 세계 그 자체라 하겠다.
이 불국을 향한 염원은 대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하나는 《법화경(法華經)》에 근거한 석가여래의 사바세계(娑婆世界) 불국이요, 다른 하나는 《무량수경》 또는 《아미타경》에 근거한 아마타불의 극락세계 불국이요, 또 하나는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불국이다. 이 셋은 각각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一廓)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 비로전으로 종합되는 전체의 구성을 통하여 그 특징적인 표현을 이루어 놓았다.
이곳에 정성을 바친 승려와 선현(先賢)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으나 주요한 인물만을 열거하면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는 영제부인(법명 法流), 절을 중건한 지소부인, 헌강왕비(憲康王妃) 권씨(법명 秀圓), 의상의 제자 표훈(表訓), 불국사의 개조로 불리는 김대성, 탑을 조성한 백제의 예술가 아사달(阿斯達), 그에 대한 애정을 자비(慈悲)로 승화시킨 아내 아사녀(阿斯女), 지금은 불타 없어졌지만 광학장강실(光學藏講室) 벽에 석가상을 수놓았던 경문왕(景文王)의 공주로서 비구니가 되었던 원해(圓海) 등은 모두 이 절에 염원을 건 사람들이다. 고려시대에는 지율(持律)이 엄하기로 이름난 유가학승(瑜伽學僧) 해원(海圓)이 이곳에 살았으며, 조선시대에는 효령(孝寧) ·안평(安平) ·영응(永膺) 등의 대군(大君)과 세종 ·노산군(魯山君), 왕실의 대비(大妃) ·상궁(尙宮) 등의 지성(至誠)이 끊임없이 불국사로 쏠렸다하겠다.
불국사 경내에는 다보탑(多寶塔, 국보 20), 3층석탑(국보 21), 연화교 ·칠보교(蓮華橋 ·七寶橋, 국보 22), 청운교 ·백운교(靑雲橋 ·白雲橋, 국보 23),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遮那佛坐像, 국보 26),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국보 27), 사리탑(舍利塔, 보물 61) 기타 많은 문화재가 잔존한다.
저문 가을 저녁, 불국사의 밤이 찾아오고 있다. 이곳에 모처럼 와서는 결국 비로전도, 극락전도, 사리탑도 친견하지 못하고 무리들과 함께 힐튼호텔로 떠난다.
또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오늘 보지 못한 곳을 우선으로 보리라 되새기며..
모두들 구경도 좋지만 춥고 배가 고프단다. 저녁을 먹어야 된단다.
밥을 먹는 것도 중요한 것이니....
그들을 따라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오늘 신문에 경북대 지리학과 황상일 교수는 최근 대한지리학회지에 발표한 '불국사 지역의 지형특성과 불국사의 내진구조'란 논문에서 불국사의 서쪽과 남쪽 기단부 돌축에 '그렝이법' '결구' 등 다양한 내진공법이 적용됐다고 밝혔다.
이 연구결과에 따르면 대웅전 남회랑 돌축과 석가탑 하부구조 등은 울퉁불퉁한 자연석 위에 맞닿는 면에 다듬은 돌을 얹는 '그렝이법'을 적용했고, 청운교와 백운교에는 목조건물 기법으로 돌을 짜맞추는 방식인 '결구'가 사용됐다는 것. 이 같은 내진 구조는 지진에너지를 흡수한 뒤 분산 또는 소멸시켜 상부 구조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황 교수는 또 불국사 반경 600m 안에 기존에 알려진 활성단층 3개 외에 경내 밑을 지날 가능성이 있는 활성단층 하나를 더 발견했다고 밝혔다.
황 교수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지진이 30여 회나 되기 때문에 불국사를 설계한 사람들도 지진이 구조물에 영향을 미칠 것을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며 "이 영향을 막기 위해 건축물에 다양한 내진공법을 고안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옛 선조의 현명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연구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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