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결혼 기념일을 기린다고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리 금오산(金烏山) 서쪽 기슭에 있다는 갈항사지를 찾았다.
갈항사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승려 가귀가 총명하여 도리를 알아 승전법사의 법맥을 계승하여 심원장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에는 승전법사가 해골화석 80개를 초석으로 하여 화엄종의 갈항사를 지었다고 적혀 있다.
연혁을 보니 692년(신라 효소왕 1) 당나라에서 귀국한 화엄법사 승전(勝詮)이 창건했다. 그 직후 이 절에서 그는 80여 장의 돌무리를 청중 삼아 <화엄경>을 강의했다. 이 돌들은 그 뒤 많은 영험을 보였다고 한다. 758년(경덕왕 17)에는 남매 사이였던 영묘사(靈妙寺)의 언적(言寂)과 문황태후(文皇太后), 경신태왕(敬信太王)이 삼층석탑 2기를 건립했는데,이 사실은 이 절이 지방에 있었던 왕실의 원찰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더 이상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1469년(조선 예종 1)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는 `교종(敎宗)에 속해 있다`고 나와 있고,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지금은 폐사되었다`고 나와 있어 조선 중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갈항사터에 동·서로 세워져 있던 두 탑(국보 99호)은,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반출될 위기에 처하자 1916년 경복궁으로 옮겨지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한다. 일제 때 김천시 남면 오봉리 갈항사(葛項寺) 터에서 경복궁으로 옮겨진 국보 제99호 갈항사 3층 쌍석탑을 되찾자는 운동이 2005년 이후 김천에서 범시민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최근 국보 반환은 어렵다는 입장을 밝혀와 시민들이 크게 실망하고 있다.
진품 반환이 최선이지만 재현품 전시라도 이곳에 되었으면 한다. 현재는 보물 245호 오봉리석조여래좌상이 쓸쓸히 갈항사지를 지키고 있는데, 동 서에 석탑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석조석가여래좌상은 통일 신라 시대 작품으로 갈항사터에 남아 있는 석불이다
갈항사지 가는 길- 뒤쪽에 금오산이 보인다.
갈항사지 들어가는 길의 감나무
갈항사지 동쪽에 철제울타리에 갇힌, 멸실된 불두를 새로 조성한 비로자나불
오봉리 석조석가여래좌상 이 보물 245호 임을 알리는 안내석
보물 245호로 지정된 이 석불은 높이가 1.5m, 어깨폭이 1.1 m로 사실적인 인상과 잘룩한 허리도 얼굴과 함께 불상 전체의 풍만함과 조화를 이루어내는 훌륭한 조각품이다. 1978년에 보호각을 건립하여 보호하고 있다.
보호각 안의 불상은 오른팔이 떨어지고 하반신이 손상되었지만, 복스런 얼굴에 눈두덩은 몽고주름이 도톰하게 잡혀 은행알처럼 탐스럽다. 가늘게 내려 뜬 눈에는 예배자의 심상이 투영될 것만 같은 눈동자가 표시되어 있고, 오뚝한 코에 오므린 듯 작은 입엔 천진무구한 미소가 베어있다. 신체의 굴곡 역시 얼굴처럼 부드럽지만 가냘프지는 않다. 넓은 어깨에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는 역강한 힘을 느끼게 한다. 단엽의 앙련을 새긴 상대석은 시원스럽지만 새로 만들어 넣은 중대석과 하대석은 조잡하기 짝이 없다. 탑이 조성된 758년 전후의 이상형을 구현하고 있는 우수한 작품이다.
오봉리 석조석가여래좌상'이라는 이름으로 지정됐는데, '갈항사지 석조석가여래좌상'으로 부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갈항사지 서탑
갈항사지 동탑
국보 제99호 갈항사 3층 쌍석탑
갈항사터에 동·서로 세워져 있던 두 탑은,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반출될 위기에 처하자 1916년 경복궁으로 옮겨지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며, 서로 규모와 구조가 같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특히 가운데기둥은 두 개씩을 두었다.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고 있는 탑신부는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의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마련하였다. 동탑의 기단에 통일신라 경덕왕 17년(758)에 언적법사 3남매가 건립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으며, 이두문을 사용하고 있어 더욱 특기할 만하다.
탑에 새겨진 명문은 길지는 않지만 갈항사의 내력과 신라의 정형탑이 어떤 경로로 지방으로 전파되는지를 가늠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명문은 “두 탑은 천보17년 무술년에 세웠다. 남매매 3인이 업으로써 이루었는데 남자는 영묘사의 언적법사이며 매자는 조문황태후이고 매자는 경신대왕의 이모이시다”.로 되어 있다.
여기서 천보17년은 경덕왕 17년(758)으로 원성왕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이 조성되던 무렵으로 통일신라의 문화가 난숙미를 더하던 시기에 해당된다. 조문황태후는 원성왕의 어머니로 박씨인데 계조부인 혹은 지조부인이라 한다. 언적법사는 원성왕의 외삼촌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이 탑은 원성왕의 외가인 박씨 일가들이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탑의 글씨는 탑이 건립되고 30~40년이 흐른 뒤 원성왕이 왕으로 즉위하고 나서 쓰여진 것이다. 이로 보면 갈항사는 승전이 창건할 당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것 같고, 원성왕의 외가인 박씨 세력이 탑을 건립하면서 크게 중창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원성왕은 화엄교단을 통해서 불교를 장악해 나간 인물이다. 황룡사 승려 지해를 궁중으로 불러 50일간 화엄경을 강의하게 하고 전국을 관장하는 불교 행정사무를 황룡사 중심으로 펼쳐 나간 것에서 잘 드러난다. 국가적으로는 불교계 장악을 위해 노력하면서 왕실이나 귀족들은 자신들의 원찰을 적극적으로 확충해 나간 당시의 분위기에서 화엄사찰인 갈항사가 원성왕쪽과 관련맺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두 탑 모두 꼭대기의 머리장식만 없어졌을 뿐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잘 남아있다. 두 탑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각 부분의 비례가 조화를 이루고, 위아래층 기단에 가운데기둥을 두 개씩 새겨 놓고 있어 당시의 석탑양식이 잘 담겨져 있는 탑이다.
오봉리 석조석가여래좌상' 보호각 아래 감 밭에는 마치 첨성대를 땅에 심어놓은 듯한 신라시 우물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이 글을 쓸 즈음에야 알게 된다. 날이 몹시 가물었던 20여년 전 여름날 관세음 보살이 현몽한 곳을 파서 찾아낸 영험스런 우물이라 한다. 다음에 들릴 땐 꼭 찾아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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