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고 정문에서 7시에 출발한 우리 일행은 10시 25분엔 "백제의 미소"를 만날 수 있었다.
서산마애삼존불상은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층암절벽에 새겨진 불상이다. 가운데에 가장 큰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어.. 세 분의 부처를 조각했다 하여 삼존불상(三尊佛像)이라 불린다. 흔히 '백제의 미소' 로 널리 알려진 이 마애불은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한 마애석굴 형식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瑞山磨崖三尊佛像 , 국보 제84호)
불이문(不二門)을 지나 비로서 만나게 되는 인바위. 축대 너머에 삼존불 중 본존불의 윗 부분이 살짝 보인다.
보호각이 말끔히 사라지고 바위에 흔적만 남아 있다.
불상이 발견된 것이 1959년, 국보 지정이 1962년, 그리고 보호각이 처음 세워졌던 것이 1965년이라니까.. 발견되고 나서도 제법 이른 시점에 보호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보호각을 세우고 나니 인위적으로 통풍과 채광이 차잔되어 내부에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생기는 등.. 예상치 못한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보호하려 한 의도가 도리어 불상을 훼손하게 되는 이 역설! 결국 어느 때부터인가 보호각 철폐 주장이 왕왕 들렸고.. 주저주저하던 문화재청이 마침내 2005년 보호각 철거 결정을 내리고 그로부터 1년 후 2006년, 보호각을 설치한 지 43년 만에 삼존불은 눈부신 햇살 앞에 설 수 있게된 것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유흥준 교수가 전한 바에 따르면.. 마애불이 향하고 있는 방위는 동동남 30도로 일조량을 가장 폭넓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향(경주 토함산 석굴암의 석불이 향하고 있는 방향과 같다고 한다)이며, 마애불 정면에는 가리개를 펴듯 산자락이 둘러쳐 있어 바람이 정면으로 마애불을 때리는 일을 막았고, 마애불이 새겨진 벼랑 위로는 (사진에서 보는 바처럼) 마치 모자의 차양처럼 앞으로 불쑥 내민 큰 바위가 처마 역할을 하고 있어서 빗방울이 곧장 마애불로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데, 마애불이 새겨진 면석 자체가 아래쪽으로 80도의 기울기를 갖고 있어서 더욱 효과적으로 빗방울을 피할 수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광선을 최대한 받아들이면서 비바람을 직방으로 맞는 일이 없는 위치에 새긴 것이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상체는 옷을 벗은 상태로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불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이상, 문화재청 설명 참조)
보는 각도에 따라 웃는 모습이 달라진다하여 다양하게 앵글을 잡아 보았다.
마애불이 새겨진 면석 자체가 아래쪽으로 80도의 기울기를 갖고 있다.
부처님 세 분의 정체에 대해 알아보자. 세 분 중 가운데 가운데 가장 큰 분이 여래보살, 왼편의 살짝 앉아 볼터치 하고 계신 분이 미륵보살로 보는 데에까지는 학계에서도 별 이견이 없는 모양이다. 문제는 오른쪽에 서 계신 분인데.. 이에 대해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제화갈라보살로 보는 견해와 관음보살로 보는 견해로 나뉜다고 한다. 이에 대해 유흥준 교수는 사견임을 전제하여 관음보살 편의 손을 들어주었는데.. 어쨌든 문화재청의 공식 안내(위 글)에는 제화갈라보살로 명기되어 있다.
제화갈라보살이다. 4등신의 어린아이상으로 새겨진 제화갈라보살은 과거 석가모니부처님이 연등불이었을 때 보살이다.(과거불)
연꽃잎을 새긴 대좌(臺座) 위에 둥근 얼굴에 눈을 한껏 크게 뜨고 두춤한 입술로 벙글벙글 웃고 서있는 여래입상(현재불)
전체 조각 가운데서 얼굴이 가장 두드러져서 높은 돋을새김을 이루고 있다. 양 어깨를 가린 법의 안쪽에 속옷 매듭 자락이 매우 선명하여 이 부처님 조각의 섬세함과 두드러짐을 느끼게 한다. 광배는 전체적으로 부주형을 이루고 있는데 안쪽에 핀 연꽃 위에 불꽃 줄기가 은근하게 떠오른다. 잎이 두꺼운 연꽃대좌에 늠름히 서서 오른쪽 손은 약지와 새끼를 구부리고 왼쪽 손은 편 채로 삼국 시대 불상들의 독특한 손모양을 하고 있다. 시무외인과 여원인이다. 대좌로부터 광배에 이르기까지 2.8m이다.
미륵보살로 고개를 약간 외로 틀어 귀엽게 웃는 모습으로 한 다리는 내리고 한 다리만을 반대편 무릎에 올려 반가부좌를 하고 한 손은 팔꿈치를 구부려 빰을 괴고 생각하는 자세로 앉아있다. 이런 반가사유상은 7세기 초 무렵 삼국에 공통됐던 신앙경향을 보여주는 상으로 이 마애불의 연대를 추정하는 데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미래불)
"1959년 4월, 부여박물관장을 지낸 연재(然齋) 홍사준(洪思俊) 선생이 보원사터에 유물조사 온 길에 마애불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 (중략) - 홍사준 선생은 보원사터를 조사하러 나올 때 마을사람들이나 나무꾼을 보면 혹시 산에서 부처님 새긴 것이나 석탑 무너진 것 본 일 없느냐고 묻곤 했다고 한다. 지금 서산 마애불로 가는 길목에 돌미륵 한 분이 돌무지 위에 세워져 있는데 여기가 본래 백암사터였다는 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인바위 아래 골짜기에서 만난 한 나이 많은 나무꾼이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 저 인바위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새겨져 있는디유, 양 옆에 본마누라와 작은마누라도 있시유. 근데 작은마누라가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마누라가 장돌의 쥐고 집어던질 채비를 하고 있시유."
서산 마애삼존불과 보원사터를 보고 나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강댕이 미륵불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본래 강댕이 미륵불은 강댕이골로 진입하는 지점에 설치된 강당교에서 북쪽으로 약 100 m 지점의 고풍저수지 안에 있었다. 이곳은 지대가 높아 지금도 섬처럼 되었으며 풀이 자라고 있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이 저수지로 수몰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긴것이다.
조성연대는 고려말~조선초로 추정되는데 높이는 216cm, 폭은 65cm 두께는 25cm 이고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다.
오른팔을 위로 올려 가슴에 붙이고 왼팔은 구부려 배위에 대어 서산지방의 다른 미륵불과 같은 형태이다.
전설에 의하면 서해로 통 하는 중국 사신들이 오가는 통로에 세워졌다고도 하고 또는 보원사를 수호하는 비보장승이었다고도 한다.
왜 이 불상을 미륵불이라고 부를까? 머리에 쓴 보관과 용화수 꽃을 든 손모습[수인]인 용화수인 때문이다. 하지만 손에 든 용화수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미륵은 미래에 나타날 부처님이다. 궁예도 자신이 미륵부처라 믿었다. 이 불상은 고려 말이나 조선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어렵고 혼란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미륵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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