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 제 2석굴암을 뒤로 하고 경주 불국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일행을 앞질러 매표소에 도달하였으나 일행들이 뒤에 보이지 않고 있다.
너무 일찍 온 것인가 하여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혼자서 단풍놀이를 하였다.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일행의 소식은 없다. 휴대폰은 밧데리가 나가고..
난감하여 매표소의 안내원에게 이 곳 말고 들어가는 길이 있는가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 까, 정문이 보이는 사이 길로 가면 나온다 한다.
바쁘게 일주문을 향하니 용현씨가 "어디 갔다가 이제 오냐"고 짜증스런 목소리를 낸다.
모처럼 온 불국사 방문은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일행을 만나기 위해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일주문을 지나니 천왕문이 나왔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인 사천왕이 안치된 전각으로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쫓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엄숙하게 하여,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하는 문이다. 이 문 밖은 하늘아래 천하가 되고 문안은 하늘의 천상이 되는 것이다.
왼쪽은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으로 손에 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으며, 오른쪽은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으로 손에 보탑을 들고 있다.
왼쪽의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비파를 들고 있으며, 오를쪽의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은 검을 지고 있다. 사천왕들은 무서운 힘으로 악함을 항복시키고 착함을 보호한다. 또 발밑에는 악귀들을 밟고 있는데 이를 생령좌(生靈座)라 부른다.
자하문이 보인다. 글자 그대로 붉은 안개가 서린 문이란 뜻으로 이것은 부처님 몸에서 자금색의 빛을 나투시므로 이 문까지 그 빛이 서린다는 것을 의미하고 문안에는 해와 달의 모양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자하문은 곧 성역에 들어서는 관문이 된다.
불국사 전면의 석축은 그 아래가 일반인의 속세이며, 그 위가 부처님이 사시는 불국토임을 상징하고 있다. 대웅전 영역으로 오르는 청운교와 백운교는 사바세계와 불국토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다리이다.
다리는 청운교가 16단, 백운교가 17단, 합쳐서 전체 3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33이라는 수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33천 도리천을 의미한다. 신라인들은 이 다리를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면서 속세에서 도리천에 이르는 것을 머리에 되뇌였을 것이다.
18C '불국사 고금창기'엔 돌계단 다리와 자하문의 순서를 자하문-청운교-백운교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안내판과 가이드북에 있는 내용과 다르다. 안내판과 가이드북이 잘못된 것이다. 대목수 신영훈 한옥문화원장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올라가는 순서를 중시하나 옛 사람들은 대문을 나선 뒤의 순서를 따라 자하문, 청운교, 백운교라고 불렀다. 현대인들은 문을 들어가는 시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옛 사람들은 문을 나가기 위한 시설로 여겼다."고 하니 다른 이유를 알 것이다.
*도리천 : 욕계(欲界) 6천(六天) 가운데 제2천을 말한다. 산스크리트 Tryastria의 음역으로 의역해 33천이라고도 한다. 불교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간주되는 수미산(須彌山)의 꼭대기에 있다. 수미산 꼭대기에는 사방에 각 8천성(八天城)이 있으며, 중앙에는 제석천(帝釋天)이 머무는 선견성(善見城)이 있기 때문에 합쳐서 모두 33성이 된다. 그러므로 33천이라고 한다. 이곳의 천인(天人)들은 신장이 1유순(由旬)이고, 수명은 1,000세이며, 남녀의 구별이 있어서 신체가 서로 접근하면 음기와 양기가 만나서 아이가 태어난다. 처음 태어날 때 인간의 6세 된 아이와 같은 모습을 하며, 저절로 옷이 입혀진다고 한다. 이곳에는 뛰어난 누각·동산·연못·난간 등으로 장엄하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고 한다. 제석천이 머무는 곳으로서의 도리천은 원래 인도에 있던 것을 불교에서 취한 것이다.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摩耶) 부인이 죽은 뒤에 이곳에 다시 태어났으며, 석가모니는 도리천에 올라가 어머니를 위해 3개월 동안 설법했다고 한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 직선으로 딱딱해진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있게 풀어준다.
백운교의 2중 아치 모습은 전 세계에서 유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의 홍예는 역사다리꼴의 이맛돌을 사용한 일반적인 홍예인 반면 위의 홍예, 특히 바깥으로 노출되는 부분의 홍예는 원형으로 깍은 판석을 사용했고 이맛돌을 사다리꼴로 만들었다. 이맛돌을 먼저 놓고 좌우의 돌을 설치한 것이다.
아래의 자연석으로 이루어진 부분은 지면에서 솟아오른 천연의 바위이며, 그 위에 가지런히 정리된 인위의 것을 첨가하였다.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부분으로 파격적인 조형이다. 가구식 기단을 이루는 지대석은 자연석 위에 그랭이질을 해서 올려 놓았다. 결과 지진에도 대비한 구조가 된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가구식 기단의 탱주와 우주 아래 위에서는 석축 안쪽으로 깊숙이 박힌 돌을 두어 그것이 지대석과 갑석을 물고 있도록 하였다. 전체적으로 현대 건축 공법인 H빔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석측이 바깥으로 밀려나가는 것을 막는 구조적인 배려일 뿐 아니라 조형적인 배려가 동시에 이루어진 안성맞춤의 구성이다.
좌경루의 모습 - 남성적이다.
범영루의 모습 - 여성적이다.
기단의 돌기둥은 수미산을 본뜬거라하여, "수미범종각"이라고도 한다. 좌경루의 직선과 대조적이다.
범영루, 지금은 법고가 있지만, 원래는 범종각이였다고 한다.
751년에 세워져, 여러차례 증건되었고 1973년에 불국사 옛모습대로 다시 세워졌다.
불국사 앞쪽 마당의 당간지주는 2매 1조의 형태로 서있는 당간으로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양식이며 동양 문화권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다. 당간지주는 불보살의 공덕이나 역사적 목적으로 기를 달 때 깃대를 고정시키는 기둥역할을 하는 것이다. 중간부에 한 단의 턱을 지어 변화를 주고 있으며 정상부는 둥글게 처리되고 안쪽에 간구가 마련되어 있다. 간대석은 별다른 장식없이 지름 45cm 크기의 얕은 원공을 표현하고 있다.
불국사 전면 석축의 서쪽, 극락전으로 들어가는 안양문 앞에 위쪽의 연화교와 아래의 칠보교가 있다. 모두 신라 751년(경덕왕 10년)에 김대성에 의해 불국사가 창건될 당시의 유구로 추정되며, 1974년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극락세계가 연화와 칠보로 장식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연화교와 칠보교의 디딤돌은 10단, 8단으로 전체 18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극락전 앞 안양문의 석축은 대웅전 앞 자하문의 석축과 달리 1층으로 되어 있다. 지형의 경사에 맞추어 대지가 낮게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대웅전 앞의 축대에 비해 작으나 축대에 더 많은 세밀한 장엄을 베풀었기 때문에 펼쳐진 석축은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밑에 있는 연화교 10단의 충계에 등형을 만들어 양분하였고, 양쪽 끝의 등형에는 난간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석주만 남아 있다.
연화교, 칠보교, 백운교, 청운교가 한 곳에 보이는 모습
안양문을 좌측으로 돌아 극락전으로 가는 길
대웅전의 서쪽에 대웅전 영역보다 대지는 한 단 낮은 곳에 위치해 있다. 극락전은 극락정토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는 이 영역의 중심 전각이다.
극락전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조선 효종 10년(1659년)에 중창되었다. 그 뒤 어떤 이유인지 모르나 조선 영조 26년(1750년)에 다시 중창되었다. 일제시대인 1925년에 중수한 바 있고, 1973년에 다시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각은 남향이고 아미타불상은 동쪽을 향하고 있으므로 불상 앞에서 기원하는 사람은 극락이 있는 서쪽을 향하게 된다. 김천 직지사는 극락전을 아예 서쪽에 동향으로 세운 것과 비교된다.
조선 후기에 중창을 하면서도 신라 때의 기단과 초석을 그대호 활용하였다. 기단은 지대석과 탱주, 우주, 면석 및 갑석으로 구성된 가구식이다.
내부에는 후면 내주에 의지해 어간에 불단을 마련하고 아미타여래좌상을 봉안하였다. 본존불 뒤에는 후불탱화로 아미타회상도를 걸었으며, 옆면에는 2위의 조사도를 모셨다.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은 원만한 얼굴로 앞면을 응시하고 있으며 어깨에는 법의 자락을 걸쳤다. 양손은 각각 엄지와 검지를 구부려 아미타구품인 가운데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취하고 있다. 근엄한 표정을 지은 네모진 얼굴과 지극히 절제된 옷주름 때문에 더욱 돋보이는 신체 볼륨, 그러면서도 탄력성이 줄어들어 느슨한 느낌을 주는 옷주름 등에서 9세기의 양식을 알 수 있다.
극락전 현판 뒤에 복돼지가 있다.
이 극락전 복돼지의 안내문의 일부를 보면.
........아미타부처님의 24대원에 "모든 것에 만족하기를 원합니다"라는 원이 있습니다.
만족한 삶은 의식주의 구족과 더불어 욕심의 끝을 알아 스스로 절제하라는 경계의 뜻을 내포합니다.
부의 끝은 스스로 만족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금년은 600년에 한번오는 황금돼지해라고 합니다.
세간에서 돼지는 재물과 의식의 풍족함을 상징하며 복을 가져다주는 길한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행복과 즐거움이 가득하다는 극락정토의 복돼지는 부와 귀의 상징인 동시에
지혜로움으로 그 부귀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부와 귀가 함께 하는 곳에 "착한 지혜의 근본"이 있다면 그 곳이 극락정토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한번씩 쓰다듬고 만지고 가고 복을 빌기도 하고...
올해가 600년에 한번 온다는 황금돼지라고 하여 인기가 많은 모양이다.
극락전에 들어가는 연화교 디딤돌의 위에 연꽃이 새겨져 있다. 연꽃을 살포시 밟고 극락전에 올라가는 모습을 창안해 낸 신라인의 상상력에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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