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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에 다녀와서

보리숭이 2006. 10. 11. 23:12

소수서원은 사적 제 55호로서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사액서원이라 함은 국가에서 서원에 책. 노비등 의보조를 해주고 임금이 직접 이름을 하사한다라는 의미이다. 한편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학기관으로서 많은 인재 양성을 하였다.

 

고려후기의 학자 회헌 안향(고종30년(1243)∼충렬왕32년(1306)이하 회헌이라 함)은 나라가 매우 어려운 시기에 사십여년 벼슬길에서 두 차례나 왕을 수행(隨行), 원나라에 다녀오는 등 국사에 이바지하고 ,文敎와 유학(儒學) 진흥에 크게 이바지했다.당시에 불교신도(神道)의 그늘에 쇠잔해만 가는 유학을 일으킴에 힘써, 퇴락한 문묘(文廟)를 수리, 중국에서 공자와 72제자의 상(像)을 그려다가 모셨고, 교육 재단인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했으며, 그리고 중국에서 정주학(程朱學)을 수입, 연구하여 펴고 장려하는 등으로, 시들었던 유학에 활력의 샘줄기를 터놓은 분이 회헌인데...

 

 (愼齋)주세붕(이하 신재)은 당대의 석학이며 도학자로, 선현(先賢) 회헌을 우리나라 도학의 비조(鼻祖)로 우러러 오던 터에, 중종36년(1541)5월, 풍기군수에 부임, 3일만에 회헌의 옛마을 순흥을 찾았다.(그때 順興府는 금성대군사건으로 폐지되어, 풍기군에 병합되어 있었음)신재는 그 길에 순흥읍터에서 북쪽 약3리쯤인 숙수사(宿水寺)에 들렀다. 숙수사는 회헌이 소년시절 글읽던 절로서, 신재의 기록에는 폐지(廢址)라 했으니, 그 때는 이미 절은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있었던 듯하나, 혹은 그때까지 절이 있었는데, 서원을 짓기위해 철거시켰다는 설도 있다.

 

마치 거북이 엎드린 형상으로 따로이 솟아 도사린 영귀봉(靈龜峰)을 배경으로 자리한 숙수사터는 소백산에서 근원한 죽계(竹溪)의 맑은 여울이 바로 무릎밑에 못을 이루고 동쪽으로 물을 격하여 마주한 연화봉(蓮花峰)기슭 푸른 절벽이 못물을 그림자를 드리워, 그 산수풍광이 중국의 여산(廬山)에 내리지 않는다고 신재는 찬성(贊成)했거니와,거기는 늘 흰구름이 골짜기에 서려 있다고 하여, 신재는 이름하여 백운동(白雲洞)이라 했다.(順興志엔 「본래는 船乎洞」이었다고 함) 백운동을 거닐면서 거기 회헌을 제사하는 사당을 세우기로 뜻을 정한 신재는 그때 영남에 심한 흉년으로, 어려운 상황임을 무릅쓰고 건설계획을 서둘렀다. 이듬해(중종37년) 8월 15일 역사를 시작, 土地神에 개기(開基)제사를 지내고 터를 다듬는데, 한자남짓 땅밑에서 놋쇠와 황금이 1백20근이나 나오는 기적(奇蹟)이 있었다.(그것으로 祭器와 많은 서책을 마련하여 서원에 비치했다.)사당이며 강당 등 30여칸이 완성된 것은 그 이듬해(중종38년)였다.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綠洞書院)을 본받아 백운동 서원이라 이름하고, 그 8월11일 회헌의 위패와 함께 그 영정(影幀)을

봉안했으며, 또 그 이듬해 중종39년 (1544)년 9월 1일에 안축·안보 (安軸·安輔:회헌의 再從孫,고려 충렬∼忠穆王때의 학자 名臣)를 배향(配享)하고, 해마다 봄 가을 제사를 받들게 했다. 함께 선비를 기르기 위해 서당을 설치하고, 토지와 곡식으로 운영기금을 세울새, 고장 선비 進士 황빈(黃彬)이 벼 70석을 내어 도왔다.고을의 生員 몇 사람과 고을 선비 김중문(金仲文)에게 관리와 운영을 맡게 하여, 여기서 학문을 탐구할 선비를 불러 모으매, 사방에서 많은 학도가 모여들었다.신재가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으로 영전되는 명종1년 乙巳(1545)에 회헌의 후손인 설강(雪江) 안현(安玹)이 경상감사(慶尙監司)가 되자, 이 서원에 와서 사당에 참배하고, 선비를 공궤함에 불편이 없도록 시중들 하인을 늘리고 경비를 크게 돕는 등 서원의 설비를 충실히 했으며, 그로부터 본도의감사들은 이 서원에 한결같이 마음을 써, 감히 소홀히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