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시에 있는 이 샘은 용정시의 이름이 붙게 된 기원이 되는 곳으로 이 샘으로 말미암아 이곳에 마을이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지금은 그 자리에 용정지명기원지정천((龍井地名起源之井泉,룽징띠밍치왠즈징쵄)이라고 쓰인 비석이 세워져있다.그곳에 작은 공원을 조성해 놓았는데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용정은 용이 살고 있다는 우물이 있어 용두레촌 즉, 용정으로 불리워졌다 한다.
해란강 하류 평원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한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870년 전후이다.
용정을 가로지르는
해란강은 북간도의 상징적인 강으로 장백산맥의 주봉인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남강산맥과 영액령산맥의 증봉산, 계관리자산에서 시작되는데 하곡분지를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두만강으로 흐른다.
일찍이 영락민이 정착하여 풍요로운 곡창이 되도록 한 해란강은 간도인들에게는 생명의 젖줄이었다. 유동, 부동, 서작동, 청산리 등 마을이름
뿐만 아니라 용수골, 통수골, 매바위골 등 산골이름들도 한국적인 지명이 많다.
이 강줄기에 정착한 유민들은 대개 조선말엽
양반계급의 수탈과 전제정치에 시달리던 상민과 천민층으로서 고국땅을 등지고 넘어온 함경도 사람들이라 한다.
용정에서 처음으로
조선족마을이 조성된 해는 1877년이라고 전해지고있다. 함경북도 회령의 리재민, 장인석, 박윤언 등과 평안북도의 김인상 등이 처음으로 14호를
거느리고 와집령(흔히 오랑캐령이라고 부른다)을 넘어 륙도하와 해란강 함수목(지금의 용정시 시교)에 이르러 강변의 황무지를 개간함으로하여 첫
마을이 시작되였다고 한다. 이것이 용정의 시초라 할것이다.
두만강 회령방면에서 강을 건너 남강산맥을 넘어가면 오랑계령에 이르게
되는데 거기서 북으로 흐르는 육도하를 따라 100리 가량 북상하면 넓은 평원에 이르러 해란강과 합쳐지는데 그곳이 통칭 용두레골이다.
러일전쟁후 룡정은 간도지방으로 진출하는 일본제국주의 거점이 되었으며 1907년에 일제는 을사보호조약을 내세워 무장군경대를 파견하는
한편,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했다. 그때 용정촌에는 100여호의 조선족이 거주, 한족 (중국인)은 불과 몇 호가 되지 않았다 한다.
청나라 정부가 일제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길림변무방판 오록정을 용정촌에 파견해 철회를 촉구했으나 1909년 일제는 청나라 정부를
억압해 이곳에서 간도협약을 체결하여 통감부파출소를 간도일본총령사관으로 고쳤던 것이다.
용정은 우리 민족이 개척한 우리의
도시이다.그러므로 이곳에서는 지금도 70퍼센트이상이 조선족이므로 한족이 오히려 우리말을 배우는 현상이 많다.또한 용정은 우리 민족이 본격적으로
벼농사를 시작한 곳이라고도 한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908년 일제는 <조선인의 생명재산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이곳에 군경을 파견하여
<조선통감간도파출소>를 세웠다.이 기구는 나중에 <간도일본총령사관>으로 바뀌였다.
후에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으로 몰려들면서 교육열이 높아져 학교가 세워지고 차차 민족의식도 싹트고 따라서 애국심도 들끓게 되였다. 그러다 끝내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3월에는 이곳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이른바 <3.13만세운동>이라 불리우는 이 사건은 만주지방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내외에 과시한 가장 뜻깊은 사건이였다.이후로 용정은 우리 민족의 얼은 가장 잘 지키는 요람이 되였다.
이런 변천과정에서
용정촌은 간도의 수도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백의문화의 색채가 진하게 밴 즉, 겨레문화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용정은 장백산맥의
중단에 위치해있으며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중간이 평원입니다. 경내에 해란강과 부르하통강이 흘러 농업이 발달하였다. 전국에서 제일 큰
과수농장이 있으며 잎담배와 사과배, 송이버섯이 특산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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