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쉼터

[스크랩] 201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보리숭이 2010. 3. 14. 13:35
지리산의 밤

최수진

지리산에 밤이 왔어요
엄마가 빨래 걷는 것을 깜빡 잊었어요

다람쥐 오소리멧돼지 산토끼 아기들이
엄마 몰래 마을에 내려와
빨랫줄에 걸린 옷을 하나씩 입었어요

토끼는 귀에 아빠 양말을 하나 걸치고
아기곰은 내 팬티를 입었어요
오소리는 누나의 보들보들한 블라우스를 입고
다람쥐는 엄마 모자를 꼬리에 걸치고
아기멧돼지는 할머니 통치마를 입었어요
서로 쳐다보며 하하하하 웃었어요

아기동물들을 혼내지 마세요
빨랫줄에 앉은 아기새는 모른 척
웃고만 있었어요

당선소감
 "지리산 아기동물들이 보내준 선물"


저는 걸음이 느립니다. 친구들은 항상 빨리 가자고 재촉합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저만치 뒤따라오는 저더러 느림보라고 놀립니다. 하지만 저는 친구들보다 더 많은 것을 봅니다. 길에 핀 꽃과 나무와 다람쥐와 나비와 풀벌레와 새, 걸음이 느려야만 자세히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지리산에는 동물들이 많습니다. 아기젓가락만한 개구쟁이 초록뱀이 있고, 뻔뻔하지만 겁이 많은 줄무늬 산고양이가 졸고 있습니다. 밤에 엄마를 찾아 우는 덩치만 큰 아기곰도 있고, 가끔 놀러오는 날라리 아기다람쥐도 있습니다. 불빛 아래 정신없이 춤을 추다가 방충망에 붙어 쉬는 나방이랑 곤충들까지 모두 다 제 친구들입니다.

아기동물들과 어린이들과 저는 모두 한 팀입니다. 어른들은 저더러 아이들과 수준이 딱 맞다 놀리시지만 저는 어린이들과 노는 일이 재밌습니다. 그 속에 있으면 어른이기를 강요받지 않아 즐겁습니다. 제게 있어 동물들과 어린이들은 관찰 대상이 아니라 공감하는 존재입니다. 길을 지나갈 때나 생활 어디에서든 어린이들을 보면 그 나이 때 저의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많은 어린이들이 산타로부터 선물을 받는 날입니다. 제게도 지리산 산타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받아본 선물 중에 가장 기쁜 선물입니다. 참 오랜만에 받아보는 선물입니다.

심사위원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기회를 주신 한국일보사에도 감사드립니다. 이 시를 쓸 수 있게 해준 지리산 동물들과 어린이들에게도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최수진



인터뷰
"삽화 직접 그린 동시집 내고 싶어"


찬 바람이 불면 문학병이 도져 신춘문예에 응모하고 낙선하고 좌절하고, 또 도전하고 좌절하고 다시 시도한 끝에 등단한 기성 작가들의 신춘문예 도전기는 들을 때마다 눈물겹다.

최수진(26ㆍ본명 김수진)씨는 첫 도전에 당선의 영광을 얻은 행운아다. 그의 행운은 그러나 오랜 시련 끝에 찾아왔다. 고교와 대학 입시는 물론 온갖 경시대회에서 늘 낙방의 고배를 마셔 "거의 쓰러져 있었다" 고 한다. 그는 "아예 기대를 안 했는데 이제야 운이 트이는 것 같아요" 라며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당선작은 방학이면 머물던 경남 사천시 곤명면, 지리산 자락의 시골집 체험이 바탕이 됐다. "3년 전 어느 아침 빨랫줄 위에 하얀 서리가 내린 채 걸려있는 빨래들을 발견했어요. 그리고 전날 밤 들었던 개, 멧돼지 같은 동물 울음소리를 떠올렸죠. 산짐승들이 한 번씩 빨래들을 입어보지는 않았을까, 하는 메모를 남겨뒀지요."

연세대 생활디자인학과를 졸업한 그는 전공과 거리가 멀지만 문학에 대한 꿈은 중고교 시절부터 이미 품고 있었다. "파스텔이나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린 뒤 옆에 메모를 하는 버릇에서 시의 씨앗이 자라났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동시를 쓸 수 있는 원동력을 부모님 덕으로 돌렸다. "늘 제가 즐거워하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좀 철없는 일을 해도 다른 말씀이 없으셨죠. 제가 아이들의 마음에 잘 공감할 수 있다면 그 덕분이겠지요."

"꼭 어떤 책을 읽기보다는 활자로 된 것에는 다 흥미가 있다" 는 그의 독서체험은 종횡무진이다. "읽고 읽고 하다보면 무언가 연결고리가 생기고, 그런 두루뭉술한 생각들이 마음의 형태가 되어 눈이 되기도 하고 비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고 그는 말했다. "가끔 서점에 가서 아이들이 무슨 책을 읽고 무슨 고민을 할까 옆에서 유심히 지켜봅니다. 어른이 되면서 어린이의 마음을 버리도록 강요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는 자신이 쓴 동시에 삽화도 직접 그린 동시집을 내고 싶다며 활짝 웃었다.



심사평
자신만의 동시 세계를 열어갈 가능성 엿보여



올해 응모된 826편 가운데 작품의 완성도나 시적 표현에서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 작품들을 선별하여 최종 4편을 가려냈다. 최수영의 '아이스크림 저울' , 문현식의 '늦은 후회' , 김병욱의 '지렁이 못' , 최수진의 '지리산의 밤' 이 그것이다.

우선 '아이스크림 저울' 은 생동감 있는 어린이의 마음을 잘 붙잡은 시다. 그러나 다루고 있는 세계가 소소한 일상에 그치고 있는 점이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늦은 후회' 역시 작품 속에 드러난 시적 화자의 마음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으나, 시가 지나치게 산문화되어 있는 점이 한계로 여겨졌다. 제목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좀 더 세심한 고려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지렁이 못' 은 사물에 대해 새로운 환기를 일으키는 힘을 가진 작품이었다. 무심코 지나치는 사물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게 하고 그것을 따스하게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당선작과 끝까지 겨루어 볼 만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함께 보내온 작품들이 다소 평이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지리산의 밤' 은 동화적 상상의 세계를 시적 언어로 정감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꿈과 현실을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고 그 둘을 자연스레 연결지어 공상의 세계를 구체적인 실감의 세계로까지 승화시키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함께 보내온 작품에서도 자신만의 동시 세계를 열어갈 가능성이 엿보여 망설임 없이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올리는 데 합의했다. 더욱 정진하여 우리 동시단을 빛내는 재목이 되길 바란다.

                                                                                                           정호승 김제곤 

 
      출처 : 하람 김시인의 뜨락
      글쓴이 : 하람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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