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18일 일요일 (4일째)
여행지: 히메지 히메지성 글쓴이: 홍석규
여행 4일째 일본을 이해하게 된 계기가 된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건축물이라 할 수 있는 경복궁이나 수원 화성 등을 보았지만 우리와는 다른 일본의 건축기술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여러 사찰을 다녔지만 석탑은 보지 못했다. 법주사 팔상전이 어쩌면 이들의 목탑에 해당되지는 않을까? 우리 선조들이 돌 다루는 기술로 수천 년간 살아 숨 쉬는 석탑 등 문화재를 남겼다면 이들은 천연 재료인 거대한 목재를 가공하여 규모면에서 엄청난 건축물을 문화유산으로 남긴 것이다.
한반도 특히 백제시대 이후의 건축문화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재창조한 역량에서 현대의 일본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순례한 사찰은 대부분 평지에 넓은 곡창지대를 끼고 있어 규모면에서 거대했으리라 판단되며 개인 별장에서 사찰로 재건된 경우가 많았다.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향! 극락정토를 구현하고자 하는 정신은 나라를 불문하고 일본인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마지막 여행지인 히메지성(姫路城 히메지조) 견학은 마지막이라 아쉽고 일본의 3대성(오사카성, 나고야성, 히메지성)이라 기대가 되었다. 여행가이드로부터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 센히메의 이야기는 견학의 묘미를 더했다.
히메지성은 효고 현 히메지 시에 있는 제곽식 평산성이다. 성벽이 백색의 회벽(불화살로부터 타지 않도록)으로 되어 있어 하쿠로성(白鷺城: 백로성)이라고도 부른다. 일본을 대표하는 근세 성곽이다. 성 전체는 세계유산이며 국가 사적이다. 천수를 포함하여 여러 건물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현존하는 천수각을 가진 12곳의 성 가운데 한 곳이며, 에도 시대 이전에 건조된 천수를 가진 성곽 중 하나이다.
천수각이 국보인 성은 히메지성을 포함하여 마쓰모토 성, 이누야마성, 히코네성 이 네 곳뿐이다. 히메지 성은 이들 성 중에서도 가장 온전히 보존되어, 천하의 명성, 일본 제일의 명성이라 불리고 있다.
※ 건축 규모와 건축한 사람은 유명하지 않으나 원형대로 보존된 것이 3대성에 들게 되는 사유라고 한다.
성이 축성된 이래 폐성과 전화(戰火)의 위기를 모두 면해 불사조의 성이라고 불리며, 천수를 비롯한 많은 건물이 현존해 있고, 그 중에서 대천수, 소천수, 와타리 망루 등 8개 동이 국보, 74동의 각종 건조물(망루 27동, 문 15동, 담 32동)이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또, 199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히메지 성의 주소인 ‘히메지 시 혼 정 68번지’는 일본의 주소 중 천황의 거처인 고쿄에 이어 두 번째의 면적을 자랑한다. 근대에는 육군 보병 제10연대가 주둔했었다.
시대극이나 영화 등의 현지 촬영지로 유명하다.
산요도 교통의 요지에 히메지성이 있다. 에도 시대에는 도자마 다이묘인 이케다 가문과 신판 다이묘인 마쓰다이라 가문 그리고, 후다이 다이묘가 성주로 역임하였다.
무로마치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축성은 1346년 아카마쓰 사다노리가 남북조 시대에 그의 아버지 아카마쓰 노리무라가 히메야마 산에 세웠던 사찰 쇼묘지를 토대로 성을 축성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1441년 가키쓰의 난에서 아카마쓰 가문이 몰락하자 야마나 가문의 세력하에 있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오닌의 난이 일어났고, 이런 혼란한 상황 속에 다시 아카마쓰 가문이 이 지역을 탈환하였다.
16세기 전반 고차쿠 성을 중심으로 아카마쓰 가문의 일족인 고데라 가문이 하리마 평야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고데라 가문의 사관이였던 구로다 시게타카가 조다이로 하리마 성에 입성한다. (이 시기 축성설도 있다.)
시게타카는 소규모 성채에 불과하던 히메지 성을 개축한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고 히메야마 산의 지형을 잘 살린 중세 성곽이라고 생각된다. 1573년까지 구로다 가문 대대로 조다이에 역임되었지만, 1576년 오다 노부나가의 명을 받은 하시바 히데요시가 하리마에 주둔하자, 하리마 국내에서는 오다 가문을 지지하는 세력과 모리 가문을 지지하는 세력이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엔 오다 가문을 지지하는 세력이 승리하게 되었다. 모리 가문을 지지했던 고데라 가문은 몰락하자, 사관으로 있던 구로다 요시타카는 재빨리 하시바 히데요시 슬하로 들어가게된다.
1580년 구로다 요시타카는 히데요시에게 히메지 성을 본성으로 삼도록 성을 헌상한다. 히데요시는 같은 해 음력 4월부터 다음해 음력 3월에 걸쳐 성을 대폭 개수하였고, 히메지 성은 근세성곽으로 재탄생되었다. 당시 유행했던 석벽으로 성을 둘렀으며, 더욱이 성에 천수를 세운다. 이 천수는 3층 이었다고 전해진다. 성의 남부에는 대규모 성하 마을이 생겼으며, 히메지를 하리마 국의 중심지가 되도록 정비하였다. 이 시기 히메지 북쪽으로 지나던 산요도를 끌어들여 히메지의 성하 마을을 관통하게 정비하였다.
1582년 음력 6월 히데요시는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아케치 미쓰히데를 야마자키에서 격파하고 단숨에 천하 폐자의 자리에 올랐다. 다음해인 1583년 자신의 거처를 오사카성으로 옮기고, 히메지 성은 동생 하시바 히데나가에게 주었지만, 히데나가도 1585년 야마토 고리야마 산성으로 이봉되었기 때문에 이를 대신하여 사돈 관계인 기노시타 이에사다가 히메지 성에 입성 이 지역을 다스린다.
1601년 이에사다는 빗추 아시모리 번으로 이봉되었고, 그를 대신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이케다 데루마사가 하리마 일국 52만석을 영지로 받아 히메지 성에 입성한다. 이 시기 히메지 성은 8년에 걸쳐 대폭 개수되었으며, 성의 면적도 전보다 훨씬 넓어졌다.
에도 시대
1617년 3대 번주 이케다 미쓰마사가 아직 유아이기 때문에 중요 거점을 맡기기에는 불안하다고 판단, 이나바 돗토리 번으로 전봉 조치한다. 그 후임으로 이세 구와나 번에서 혼다 다다마사가 15만석에 입봉되어 입성한다. 1618년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인 센히메와 혼다 다다마사의 아들 혼다 다다토키와의 결혼을 계기로 니시노마루를 정비해, 성의 대부분이 완성되었다.
관람을 마치고 비오는 오후였지만 날씨만큼이나 마음이 푸근해 졌다.
해외로 처음 가다보니 음식과 추위 등 걱정이 많았음에도 일행과 함께 하다 보니 아무 탈 없이 잘 다녀온 것 같다.
4박5일 동안 같이한 딸 예빈이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으며 귀웅이도 같이 왔다면 더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해 본다.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같이 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특히 사찰 순례중에 불법을 펴기 위해 헌신한 옛 성현들의 숭고한 구도의 정신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삼국의 흔적을 나라, 교토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바리 나라.교토에 다녀와서 (0) | 2009.02.04 |
---|---|
[스크랩] 기행문 5일째/ 오사카에서 귀국 - 고한희 (0) | 2009.02.02 |
[스크랩] 기행문 4일째/ 교토 동본원사 - 이금미 (0) | 2009.02.01 |
[스크랩] 기행문 3일째/ 교토 청수사 - 이금미 (0) | 2009.02.01 |
[스크랩] 기행문 3일째/ 교토 이조성 - 윤미영 (0) | 2009.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