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흔적을 나라, 교토에서

사흘째 - 백제계인의 개인 사찰인 청수사 ( 淸水寺, 키요미즈테라 )

보리숭이 2009. 1. 21. 17:52

청수사(淸水寺, 기요미즈테라)는 백제계인의 개인 절


청수사 소개 자료에는 초기 절을 개창한 사람으로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万呂, 758-811)를 기록하고 있다.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라고도 쓰이고 있었다.(橫山正幸, 『청수사』, 法藏館, 1996) 그런데 다무라마로의 조상은 응신(應神)천황 때 백제계 도래인이었다고 한다.(朴鐘鳴, 『京都 안의 朝鮮』, 明石書店, 1999)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으로 건너 온 것이다. 그들이 온 곳은 오늘의 나라현(奈良縣) 아스카(飛鳥) 일대였다고 한다. 따라서 청수사는 백제계 귀화인의 자손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책 어디에도 그런 사실은 기록되지 않고 있다. 다무라마로의 전력이 없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 그가 중국계라고 하고 있을 정도이다.
기록에 의하면 다무라마로는 환무(桓武)천황 때 장군으로 역할하고 있었다. 환무의 외척은 백제계 도래인이었다. 다무라마로는 일본 동북쪽 에미시(蝦夷) 정벌에 성공 이름을 떨친 용장이었다. 에미시는 이민족 에조를 호칭하기도 한다.


그의 키는 180cm에 이르고 가슴 두께가 36cm였다고 한다. 얼굴은 붉고, 눈은 밝고 예리하며, 황금색 턱수염이 덮여 있었다. 성격은 부드러워 웃으면 어린아이 같이 보이지만 화가 나면 귀신맹수도 벌벌 떨 지경이었다 한다. 전형적인 장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778년 다무라마로는 부인이 임신 중이라 보약이 되는 사슴을 잡으러 음우산에 갔다가 자도사(子島寺)의 중으로 수행 중이던 스님 엔친(延鎭, ?-821)을 만나게 된다. 엔친은 현심(賢心)이라고도 부른다.


엔친 스님은 행예거사(行叡居士)의 초암(草庵)에 관음사(觀音寺)를 연다. 다무라마로는 780년 가불전(假佛殿)을 기증한다. 이로서 개인 절 즉 사사(私寺) 청수사가 시작된 것이다. 다무라마로는 엔친 스님의 영향으로 불교를 믿게 되고 살생을 중지하고 함께 관음사 인근에 북관음사를 건립한다. 이 절이 후에 청수사가 된 것이다. 사슴의 무덤인 록간총(鹿間塚)은 종루 서쪽에 만들어져 있다.
일본은 794년 헤이안교(平安京) 즉 지금의 교토로 천도한다. 다무라마로는 797년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된다. 후에 일컬어지는 장군이란 호칭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12세기에 쓰여진 『부상략기(扶桑略記)』에 의하면, 798년 7월 2일 진수부(鎭守府) 장군 다무라마로가 청수사에 금색 40수(手)의 관세음보살상 1체를 만들어 받쳤고, 그가 살던 집 5칸 3면짜리를 기증해서 당사(堂舍)로 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일본은 부상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고 있었다. 청수사의 위치는 산성국(山城國) 애탕군(愛宕郡) 팔판향(八坂鄕) 동산(東山)으로 되어 있다. 지금은 교토시 동산구 청수 1정목 294번지로 되어 있다.
이 당사가 본당이었다. 당시 이미 무대(舞台)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 본당 건물은 1063년에 불타 버린다. 그후 1633년 재건된 것이 오늘의 본당이다. 본당은 메이지 시대 이후만도 7차례에 걸쳐 수리된다. 1897년 12월 28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기요미즈(淸水)'는 '성스러운 물'이라는 뜻으로 지금도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성스러운 물을 마시기 위해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청수사로 오르는 길은 이미 사람들로 꽉 차있다. 

 인왕문 앞에 놓여져 있는 박견(해태)은 아스카 시대 조선에서 건너 온 것이라고 한다. 당사자(唐獅子)라고도 부른다.
청수사는 임산부의 안산(安産)을 기원하는 절로 알려져 있다. 다무라마로의 부인의 예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인왕문

청수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절의 입구에 있는 인왕문이다. 이 문은 무로마치 시대(14~15)에 만들어졌고, 현재 나머지 건물들은 1629년 대화재로 소실된 후 1633년에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서문과 3층탑

인왕문 오른쪽으로는 서문과 그 뒤로 17세기에 재건된 3층탑이 보인다. 

 

 

 

개산당

다무라마로는 807년에도 당우를 확장시키는 일을 하나 4년 후인 811년 5월 23일 54세로 죽는다. 그의 묘지는 교토 산과구(山科區)에 있는데 사후에도 왕성의 수호신이 되었다. 현재 그의 묘지 일대는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공원(坂上田村麻呂公園)이 되어 있다.
다무라마로와 그의 처의 상을 제사 지내는 사당은 개산당(開山堂)이라 하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다무라 당(田村堂)이라고도 한다. 청수사 경내 본당 매표소 입구에 있다. 현재의 것은 1633년 재건된 것이다. 삼간의 정 사각형 건물이다.  

 

 

본당

개산당 앞을 직진하면 회랑을 통해 청수사 본당으로 가게 된다. 이 본당은 비불관음상을 봉안하고 있는 거대한 건축물이다. 청수사 본당은 산비탈을 이용해 세운 '무대조'라는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유명하다. 아마 청수사에서 가장 인상 깊게 남는 이미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본당의 독특한 건축구조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법화경>에 따르면, 관세음보살은 푸른 바다에 높이 솟아오른 산에 사신다고 한다. 무대조는 바로 관음이 사는 산과 절벽의 모습을 나무 축대로 표현한 것이다.  

 

 

절벽에서 10여 미터 튀어나온 부타이(舞台)라고 불리는 본당의 마루는 못을 쓰지 않고 건축을 했는데 139개의 나무 기둥이 받치고 있어 유명한 것이다.  
 

일본이 자랑하는 이 건축물의 구조는 사실 알고보면 우리 백제문화의 산물이기도 하다.

백제가 멸망하고 난 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의 목공들의 후손들이 대거 동원되었고 이들은 당시 뛰어난 백제의 궁중건축양식을 이곳에 도입하여 이렇게 멋진 건축물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못 하나 사용하지 않은 저 건축물이 무려 1,200여 년 넘도록 아무런 탈 없이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백제의 건축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경내 한 켠에 서 있는 다층석탑

 

 

이것이 그 유명한 청수사의 오토와 폭포!! 나라에 계셨던 스님 엔친 법사님은 관음보살의 꿈 속에서의 가르침에 따라 영수를 구하시려고 여기 히가시야마 산중에 오또와 폭포에 오셔서 오랫동안 수행을 거듭하고 계셨던 교에이 고사를 만났다. 법사께서는 거사에게서 받은 나무 토막에 관세음보살을 조각하여 폭포에 모셨다. 바로 여기에 기요미즈데라의 창건의 유래가 있다. 기요미즈데라의 창건 연기 설화에 의거하여 이 절을 참배하시는 여러분도 이 폭포의 물을 마시는 일을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절차가 되었다. 현재 폭포 제단에 모셔져있는 분은 쿠리카라 부동명왕이다. 이 분은 관세음보살이 변신한 모습이라고도 전해진다. 폭포 물은 지하 천미터나 되는 가모가와의 지하물이 히가시야마 단층의 틈새기를 비집고 분출된 것인데 아득한 옛날부터 마르는 적이 없이 세차게 솟아오르고 있다.

 

깎아지른 절벽에서 나오는 성스럽다는 물이 흘러나오는 이곳에서 사람들은 줄을 선다. 물은 모두 세 줄기로 나오는데 각각 의미가 다르다고 한다.

제일 왼쪽에서 흐르는 물은 지혜와 학문을, 가운데 흐르는 물은 사랑을, 오른쪽 물은 장수(長壽)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여기에 올라 자기가 원하는 물을 받아 먹으면 된다고 한다. 

 

지주신사가 보인다. 연인과의 사랑을 기원하는 곳으로 명성을 얻은 이곳은 아예 본당 뒷편에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조성해 두었다 한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버린 아기를 위한 애기부처들에게 추위를 이기라고 옷을 입히는 대신 턱받이를 해 주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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