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흔적을 나라, 교토에서

사흘째 - 금각사 (金閣寺, 킨카쿠지 )

보리숭이 2009. 1. 21. 16:44

 

 

'금각사'는 일본의 소설가인 미시마 유키오의 동명소설에 등장해 더욱 유명해진 사찰로 이 작품에서는 말을 더듬어 열등감에 사로잡힌 주인공이 금각사의 미에 매료되어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방화를 결심하게 되기까지의 심상이 치밀한 구성과 명석한 문체로 묘사되어 있다.

소설 '금각사'는 미시마 유키오의 대표 작품이며, 전후 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금각사'는 아름다움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속세와 두절시키는 힘이다.

미시마유키오의 책 금각사의 본문에는 "본래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 시대의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1397년 지은 별장이었으나, 그가 죽자 유언에 따라 로쿠온사[苑寺]라는 선종사찰로 바뀌었다. 이 로쿠온사가 긴카쿠사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3층 누각 긴카쿠[閣] 때문인데, 긴카쿠는 무로마치시대 전기의 기타야마문화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3층 건물로 각층마다 건축양식의 시대가 다르다. 1층은 후지와라기, 2층은 가마쿠라기, 3층은 당대(唐代) 양식으로 각 시대의 양식을 독창적으로 절충하였다. 1층은 침전과 거실로 쓰이며, 2층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셔두었다. 3층은 선종 불전이다. 이중 2층과 3층은 옻칠을 한 위에 금박을 입혔다. 1950년 한 사미승에 의하여 불에 타 없어졌으며 현 건물은 1955년에 재건한 것이다. 금칠은 1962년에 했다.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이를 소재로 해서 1956년 장편소설 《금각사(金閣寺)》를 썼다."라고 되어있다.

금각사는 화재로 재더미가 된 우리의 숭례문과 비슷한 '과거'를 지내고 있다.
1950년 7월2일 당시 녹원사는 한 행자승이 불을 질러 뼈대만 남기고 모두 타버렸고, 1962년 금(金)을 입혀 금각사로 거듭났다.
경내 숲속 곳곳에 36개의 자외선 카메라가 은밀히 설치돼 관람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고, 경내 재난예방중앙통제실에서는 실시간으로 전송화면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금각사 입장권이다. 정확한 명칭은 킨카쿠로쿠온지, 일본인들은 이렇게 입장권 하나에도 신경써서 만든다. 

 

 

안내문의 글을 인용하자면 2층과 3층에는 옻칠을 한 뒤 순금의 금박을 입히고 지붕은 화백나무의 엷은 판을 몇겹씩 겹쳐만든 널조각으로 이은 지붕으로 그 위에는 중국에서도 길조라고 불리우는 봉황이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1층은 침전식 건축물로서 호스이인,2층은 무가식 전통 건축물로서 조온도라고 불리운다. 3층은 중국식 선종 불당 건축물로 구쓰코초라고 불리우며 3가지 건축양식이 조화를 이룬 무로마치 시대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1987년 가을, 다시 옻칠을 한 뒤 금박을 새로 입혔으며 천정그림과 요시미쓰 인물도도 다시 복원되었다. 또 2003년의 봄에는 지붕을 새로 이었다.

 

 

 

 

 

 

 

위의 소나무는 교토 3대 소나무 중 하나로 배의 모형을 본뜬 리쿠슈노마쓰라 불리우는 소나무이다.

이 소나무는 일본의 장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직접 심은 소나무라고 전해진다.

금각사 또한 본래 절이 아닌 요시미쓰의 개인 별장 이었는데, 요시미쓰의 사망 후 유언대로 무소국사를 초대 주지로 하여 요시미쓰의 법명인 로쿠온인전에서 2자를 따서 로쿠온지절로 명명하게 되었다. 이후 토요토미가 재건하고 금박을 입혀서 금각사로 되었다고한다.

그러나 일본의 안내책자에는 요시미쓰를 기리기 위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킨카쿠 로쿠온지 절" 이라 표기되어있다.

요시미쓰의 사인은 암살 : 요시미쓰는 아들을 왕의 양자로 주고 즉위식 전날 암살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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