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흔적을 나라, 교토에서

이틀째 - 호류지[법륭사(法隆寺)] 백제관음상의 기원에 대해

보리숭이 2009. 1. 20. 23:08

‘호류지’ 대보장전 특별실에 소장된 백제관음상은 높이 2.8m의 목조입상이다. 훤칠한 키에 미소를 머금은 표정, 아래로 흘러내린 선(가사)은 백제양식 그대로를 닮았다. 가사의 흐름은 부드럽기 이를 데 없어 <덴죠노하고로모(天女の羽衣)>를 연상케 한다.

앳된 듯 어찌 보면 청초하고 원숙하면서도 티(흠) 없는 이 불상은 지표상에 둘 도 없는 아름다운 미술품이라는 걸 그 누가 부정하겠는가. 이 불상에 대해 서구의 미술가들도 <미로>의 <비너스>상을 능가하는 작품이라 해서 극찬을 한 바 있다.

<비너스>상은 현재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인류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이 관음상에 대해 석학 <앙드레 말로>는 무어라 평을 했던가. <만약 일본열도가 침몰해서 단 한 가지만 갖고 빠져 나가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백제관음상을'을 택하겠다.>
고 실토한 바 있다.

 

이 백제관음상의 기원에 관한 글과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신 마로님께 감사드리며 http://phalanx.egloos.com/738160 에서 아래 글을 퍼왔다.

 

석가삼존상, 호류지.

1.
한국인들에게 호류지(法隆寺)는 담징(曇徵)이 그 곳 금당(金堂)에 그렸다는 벽화 때문에 제법 알려진 곳입니다. 호류지에는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과 구세관음상(救世觀音像), 백제관음상(百濟觀音像) 같은 아스카 시대의 걸작 불상들이 있습니다. 이 중 석가삼존상과 구세관음상은 아스카 전기(前期)에 제작된 것으로, 백제관음상은 아스카 후기(後期)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석가삼존상과 구세관음상은 각각 금당과 유메텐(夢殿)에 안치되어 있었지만 백제관음상은 금당(金堂)과 강당(講堂) 등을 전전하는 그야말로 ‘유랑하는 불상’이었는데, 1900년 무렵부터는 나라(奈良)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에 맡겨져 전시되었습니다.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篤實)가 나라에 있을 때 자주 찾아가서 봤다는 건 이런 시기의 일입니다. ‘백제관음’은 1998년에야 호류지 안에 새로 건립된 ‘백제관음당(百濟觀音堂)’에 안치되었습니다.


‘백제관음’은 석가삼존상, 구세관음상보다 더욱 유연하고 미려하여 당시 이 불상을 제작하고 향 하던 집단의 예술적 감성이 대단히 세련되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일종의 유미주의가 그 시대 지배집단을 휘감고 있었으리라 짐작하게 합니다.

 

구세관음상, 호류지.


석가삼존상은 광배(光背)에 제작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이 불상을 도래인(渡來人)인 ‘도리(止利)’라는 조각가가 서기 623년에 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의 사학자들은 ‘도리’가 백제인이라고 단정하는 경향이 있고, 제가 본 일본 문헌들에선 ‘도래인’이라고 했습니다. 일본학자들이 ‘도리’가 백제인임을 인정했는지는 책을 몇 권 보질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일단 ‘도래인’이 곧바로 ‘백제인’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담징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 고구려계와 신라계도 일본에서 활동을 했으니까요.
구세관음상은 ‘도리’가 제작한 건 아니지만 “도리양식(止利樣式)‘의 보살상(菩薩像)의 계보에 속”한다고 합니다. 이는 “중국 남조(南朝)의 양(梁)양식을 원류로 삼은 백제양식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지적할 수 있는 조상(造像)”입니다[나라(奈良)국립박물관 불교미술자료연구센터소장인 마쓰우라 마사아키(松浦正昭)와 나라문화재연구소 매장문화재센터 소장 미쓰타니 다쿠미(光谷拓實)의 「飛鳥白鳳の佛像 - 古代佛敎のかたち」(至文堂)에서].

‘백제관음(일본 발음은 ’구다라 간논‘)’의 유래에 대해선 확실한 자료가 없습니다.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백제관음’이라는 명칭에서 이미 백제로부터 직접 전해졌거나 백제계 조각가가 제작했음이 입증되는 것처럼 여기기 쉽지만, 문제는 이 백제관음에 대한 기록은 에도(江戶)시대로 접어든 17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백제관음상, 호류지.


2.
고대(古代)한일관계사의 다른 국면에서도 그렇듯 일본 학계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한국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부정하고 싶어 합니다. ‘백제관음’은 미학적 가치가 높고 폭넓은 숭배의 대상이 되었기에 일본 학계에선 이를 선뜻 백제의 산물이라 확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백제관음’에 대한 글들은 ‘백제관음’이 백제에 기원을 두었을 가능성은 언급하지 않고 이 조상이 간다라 조각에서 중국 남조(南朝)로 이어지는 불교미술 전파경로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백제에 대해선 어물어물 넘어가고 싶어 합니다. 설령 백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 경우에는 어디까지나 ‘백제’는 남조(南朝)불상 양식이 일본에 전해진 ‘통로’에 불과했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내비칩니다.
호류지의 백제관음당에 붙은 일본어 안내문에서는 이 불상의 기원에 대해서는 한반도와 일본 간의 교류라는 맥락에서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백제관음’이라고 이름이 붙었대서 곧바로 한반도에서 건너온 것으로 여기지는 말라는 말입니다. 호류지에서 발행한 ‘백제관음’에 대한 안내서를 훑어보면 일본의 학계는 ‘백제관음’에 ‘백제’라는 이름이 붙은 건 어디까지나 불상의 양식과 계보에 썩 밝지 않았던 이들이 다소 막연히 이 불상이 한반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기고는 ‘백제’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니까 그 의미를 과대평가하지 말라... 하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인터넷을 뒤져 보면 이 불상이 일본에서 널리 쓰였던 녹나무로 제작되었다는 점, 그리고 작풍이 백제 불상과 다르다는 점 때문에 명칭과는 달리 일본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는 글도 보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큰 문제는 ‘백제관음’과 뚜렷한 연결성을 입증할 만한 유물이 한반도에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지요.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이나 와쓰지 데쓰로(和辻哲郞),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같은, 일본 내에서 명성이 자자한 연구자들이 이 불상이 한반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느냐, 라고 한국 쪽 학자들은 말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 쪽 학자들의 ‘전열(戰列)’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듯 보입니다. 이래서야 일본 쪽에선 눈도 꿈쩍하지 않을 것입니다. 홍윤기 교수는 「일본의 역사 왜곡」(학민사, 2001년)에서 와쓰지 데쓰로 교수가 했다는 “백제관음상은 조선에서 일본에 건너온 (불상)양식의 현저한 한 예이다.”라는 말을 옮겼습니다. 홍 교수는 와쓰지 교수의 이 말이 ‘일본 불상 미술사에서 널리 알려진 명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호류지의 ‘백제관음’안내서에 수록된 와쓰지 교수의 말은 이렇습니다. “백제관음상은 조선을 거쳐 일본에 도래했던 양식의 현저한 한 예이다.” 그리고 와쓰지 교수는 그 문장을 이렇게 이어갔습니다. “[‘백제관음’의 양식적인]기원은 육조(六朝)시대의 중국이고, 거기서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서역(西域)미술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양식에 도달한다.”

이래서야 홍윤기 교수가 인용한 오카쿠라 덴신의 “백제식 표본은 호류지 사찰의 허공장보살(백제관음)이다”라는 말도, 직접 원문을 보고 전체 맥락을 살피기 전까지는 신뢰하기 어렵게 됩니다. 호류지의 관주(管主)인 다카다 료신(高田良信)은 ‘백제관음’ 안내서에 실린 자신의 글에서 오카쿠라 덴신 등의 제안에 따라 ‘백제관음’을 ‘조선풍관음(朝鮮風觀音)’으로 부르고 기록했던 시기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카쿠라가 ‘백제관음’이 ‘조선풍’임을 지지했음은 알 수 있지만 다카다 관주가 오카쿠라의 말을 직접적으로 인용하지 않은 터라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주장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세키노 다다시는 한국 문화를 폄훼한 것으로 악명이 높은데, 이 사람은 ‘백제관음’에 대해 “조선에서 고도로 발달한 수법으로 백제 예술의 최고 걸작”이라고 평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김현구 교수가 쓴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작과 비평사, 2002년)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김현구 교수의 이 책은 일본의 황통(皇統)이 백제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한 책입니다. 그런데 ‘백제관음’을 둘러싼 부분에서 김현구 교수는 실수를 연발하는지라, 세키노 다다시의 말도 전후 맥락을 충분히 검토한 위에 인용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 인용된 것을 그저 다시 옮겼는지 알 수 없습니다. 책에는 ‘백제관음’과 ‘구세관음’의 사진이 나란히 실려 있는데도 김 교수는 ‘백제관음’을 ‘구세관음’과 같은 것이라 말합니다. 또 미국의 미술학자 ‘페로스’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아마 ‘페놀로사(Fenollosa)’의 오기(誤記)가 아닌가 싶습니다. 얄궂게도 책 뒤쪽의 색인(索引)에는 ‘페로스’가 빠져 있더군요.

3.
‘백제관음’에 대한 언급은 한국에선 주로, 소위 재야학자들이나 미술에 대한 세밀한 지식이 부족한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불교미술연구에서 이름 높은 학자들의 언급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불교미술연구자들은 중국의 양식과 한국의 양식을 비교하는데 골몰할 뿐 일본의 불교미술과 그것이 한국과 갖는 연관성에 대해서는 (지나가는 말로 이러한 연구의 필요성은 주워섬기면서도)관심이 없는 듯 합니다.

일본의 고대 문명이 죄다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 출신들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자부심을 키우는 건 우스운 일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고대 문물에서 한반도 문물과의 공통점, 영향관계를 세밀히 살피는 건, 지금 한반도에선 그 전모를 대략적으로도 짐작하기 어려운 백제 문화의 양상을 파악하는데 좋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by 마로 | 2005/01/01 0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