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운데 한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제멋대로 생활하며, 계율에 어긋난 속된 생활을 일삼다가 그만 몹쓸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죽은 뒤에는 물고기 몸을 받아 태어났는데 등 위에 큰 나무가 솟아나서여간 큰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스승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는데 등 위에 커다란 나무가 달린 고기가 뱃전에 머리를 들이대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스승이 깊은 선정(禪定)에 잠겨 고기의 전생을 살펴보니,
이는 바로 병들어 일찍 죽은 자기 제자가 방탕한 생활의 과보(果報)로
물고기로 태어나 고통받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를 알고 가엾은 생각이 들어 수륙천도재(水陸薦度齋)를 베풀어 고기의 몸을 벗게 하여 주었습니다.
그날 밤 스승의 꿈에 제자가 나타나서 스승의 큰 은혜를 감사해하며
다음생에는 참으로 발심하여 공부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등에 있는 나무를 베어 고기 모양을 만들어 부처님 앞에 두고 쳐주기를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고, 강이나 바다의 물고기들은 해탈할 좋은 인연이 될 것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고기 등에 자라난 나무를 베어 고기 모양의 목어(木漁)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차츰 쓰기에 편리한 목탁(木鐸)으로 변형되어, 예불이나 독경을 할 때 혹은 때를 알릴 때에도 사용하며, 그밖의 여러 행사에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일설에는 고기는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자므로 수행자도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해야 불도(佛道)를 성취한다는 뜻에서 고기 모양의 목어를 만들어 아침 저녁으로 치게 하였다고 합니다. 포대(布袋)는 '자루'이고, 화상(和尙)은 '수행을 많이 하신 스님'
포대화상은 1100년쯤 전, 중국 당나라 계차(契此)스님을 일컫는 말이다.
늘 커다란 자루를 둘러메고 다녀서 그런 이름으로 불리운다.
뚱뚱한 몸집에 배는 풍선처럼 불룩하고 - 항상 웃는 얼굴..
무엇이든 주는대로 잘먹고, 어디서든 벌렁누워 태평하니 코를 골며 잘자고
어디에 머무는 바 없이, 이마을 저마을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았고
특히 어린아이들과 친구처럼 잘 어울렸는데,
이렇게 아이들과 어울리고 있는 포대화상을 묘사하고 있다.
포대를 내려놓고 앉아있는 스님의 눈썹을 끌어당기고, 젖꼭지를 만지작대고,
배꼽을 찔러대고, 발바닥을 간지르고.. 온갖 짖궂은 장난을 쳐대는 아이들 -
그래도 얼굴가득 더할 수 없이 밝고 맑은 함박웃음을 짓고있는 스님..
마치 산타클로스의 선물자루같은 저 포대엔 무엇이 들어있을까?
전해내려오는 포대화상의 시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我有一布袋(아유일포대) 나에게 포대가 하나 있으니
虛空無가碍(허공무가애) 허공처럼 걸림이 없어라.
展開邊宇宙(전개변우주) 열어 펴면 우주에 두루하고
入時觀自在(입시관자재) 오므릴때도 자재하도다.
결국 무궁무진 자유자재한 '마음'의 도리를 노래한 것이리라.
포대화상은 그렇게 서민들과 아이들과 어울려가며 불법(佛法)을 가르쳤던 것이다.
한사람이 포대화상에게 물었다.
"스님께선 매우 높은 깨달음에 도달하신 훌륭한 스님이라고 들었는데,
어찌하여 귀중한 시간을 아이들과 노는 데만 허비하고 계십니까?
정말 스님께서 불법에 통달하셨다면 저희들에게 법문을 하나 해주십시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포대화상은
자신의 포대를 땅바닥에다 쿵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다! 이것이 불법의 진수이다."
무슨 뜻인지 모르고 어안이 벙벙하여 얼굴만 쳐다보고 있자, 포대화상은 이렇게 들려주었다.
"이것이 내가 보여 주고자 하는 전부이다. 내가 짐을 내려놓았듯이 그대도 자신의 짐을 벗어버려라."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그는 아무 말 없이 포대를 다시 걸머지고는 발길을 내디디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그 다음 일이다. 나는 짐을 짊어졌지만 짐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짐이 더이상 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있기 때문이지.."
안수(岸樹) 즉, '강기슭의 나무'란 본래 대반열반경에 이르기를,
'이 몸은 마치 험준한 강기슭에 위태롭게 서 있는 큰 나무와 같아서 무너지기 쉽다.
폭풍을 만나면 반드시 쓰러지기 때문이다'라고 설한 말씀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정등(井藤)은 '우물속의 등나무'라는 말이다.
한사람이 망망한 광야를 가는데, 무서운 코끼리가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코끼리를 피하여 정신없이 달아나다 보니 언덕 밑에 우물이 있고,
등나무 넝쿨이 우물 속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그 사람은 등나무 넝쿨을 하나 붙들고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
우물 밑바닥에는 독사 네마리가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고,
또 우물 중턱의 사방을 둘러보니 작은뱀들이 혀를 낼름거리고 있다.
할 수 없이 등나무 넝쿨을 생명줄로 삼아 우물 중간에 매달려 있자니,
두 팔은 아파서 빠지려고 하는데, 설상가상으로 흰쥐와 검은쥐 두마리가 번갈아 가며
그 등넝쿨을 쏠아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일 쥐가 쏠아서 등나무 넝쿨이 끊어지거나,
두팔의 힘이 빠져서 아래로 떨어질 때는 독사들에게 잡아먹히는 수밖에 없는 신세다.
그 때 머리를 들어서 위를 쳐다보니, 등나무 위에 매달려 있는 벌집에서 달콤한 꿀물이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네 방울, 다섯 방울, 이렇게 떨어져서 입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렇게 꿀을 받아먹는 동안엔 자기의 위태로운 처지도 모두 잊어버리고 황홀경에 도취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코끼리는 무상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의미하고, 등나무 넝쿨은 생명을,
검은쥐와 흰쥐는 밤과 낮을 의미한다. 작은 뱀들은 가끔씩 몸이 아픈 것이고, 독사는 죽음을 의미한다.
달콤한 꿀물방울은 인간의 오욕락(五慾樂) - 재물, 이성, 음식, 명예, 편안함에의 욕망이다.
급박한 상황에 놓여있으면서도 중생들은 그 꿀 한 방울에 애착하여 무상하고 위태로운 것을 모르고 있다.
이렇게, 생사고해에서 헤매는 중생을 비유한 설화가 바로 '안수정등' 이야기이다.
다시 올라갈 수도 없고, 머무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려갈 수도 없는 신세..
등나무 넝쿨에 매달려 꿀 방울을 먹던 이 사람이 어떻게 하면 살아나겠는가?
구리천녀(天女)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동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히 말하였다. '나는 이 꽃을 그대에게 그냥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내게도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내 소원은 다름이 아니라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동자께서 나와 결혼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동자는, '나는 이미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는 몸이므로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하지만 만일 내세(來世)에서 만나, 결혼을 한다 해도 다시 수행을 위해 출가할 때는 언제라도 헤어질 수 있다는 조건이라면 구리천녀의 요구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미 선혜동자에게 반해 버린 구리천녀는 그에 따르겠다고 하면서 일곱 송이의 꽃을 그냥 동자에게 주었다. 그러면서 다섯 송이는 선혜동자의 뜻에 따라 쓰고, 두 송이는 자기의 사랑을 위해 바쳐 달라고 말하였다. 선혜동자는 꽃을 받아 들고, 나는듯이 뛰어서 연등불에게 달려갔다.
곧바로 선혜행자는 연등부처님 계신 곳에 가서 저 구리천녀가 부탁한 두 송이 연꽃과 함께 일곱 송이 꽃 칠경화(七莖花)를 부처님께 받들어 올렸다. 왕과 백성들이 올린 꽃들은 모두 땅에 흩어졌으나 오직 선혜행자가 올린 일곱 송이 연꽃만이 부처님의 머리 위에 화대로 장식되었다.
이 때 연등부처님이 지나실 길에 진흙탕이 있는 걸 보고, 선혜동자는 곧 입었던 사슴가죽 옷을 벗어 진흙탕에 깔고 그것도 부족하자 머리를 풀어 진흙 위를 덮고, 엎드려 부처님을 우러러 보며 사뢰었다.
'부처님, 진흙을 밟지 마시고 부디 제 머리털과 몸을 마치 마니구슬의 판자로 된 다리를 밟는다 생각하시고 지나가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저에게 영원한 이익이 되고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며 지극한 마음으로 큰 행원을 일으켰다.
이 때에 연등부처님께서 선혜행자를 향하여 찬탄하여 말씀하셨다. '오, 장하다 선혜야, 그대의 보리심은 갸륵하구나. 그대는 과거 오랫동안 여러 생애를 두고 수행을 쌓았고, 몸과 목숨을 바쳐가며 남을 위해 애를 썼으며, 욕망을 버리고 자비로운 행을 닦아 왔다. 이 지극한 공덕으로 오는 세상에 기필코 부처가 되리니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 부르리라.' 이렇게 선혜행자를 찬탄하며 수기(授記)를 내리셨다. 수기란 부처님이 보살과 불제자 수행인들에게 다음 어느 세상에 성불하리란 것을 낱낱이 예언하시는 교설이었던 것이다.
이 모습을 지켜 본 구리천녀는 선혜행자의 뜨거운 구도심(求道心)에 감동하
여 함께 엎드려 절하였다. 이 일이 연유가 되어 선혜행자는 뒤에 석가모니부처님이 되셨고, 구리천녀는 야소다라 비가 되었다.
이후 선혜행자는 10만 아승지겁을 지내면서 10바라밀을 수행하여 스물네분의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은 뒤 도솔천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때 이름이 '호명보살'이었다. 도솔천에서 4000년동안 천계의 중생들을 제도하다 입멸하신 후, 정반왕과 마야부인을 부모로 고르시어, 석가모니부처로 탄생하셨다.
그리고, 선혜동자가 일곱 송이의 꽃을 가진 구리천녀에게 결혼을 약속하고 두 송이는 구리천녀가, 다섯 송이는 선혜동자가 부처님께 함께 올렸기에 지금도 부처님 전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 신랑이 다섯 송이, 신부가 두 송이의 꽃을 부처님 전에 올리며 부처님을 받들고 가르침대로 살 것을 기약한다고 한다.
9년 면벽 세월을 보내던 달마 스님에게 신광이란 40대 승려가 찾아왔다. “법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다”며 품고 온 칼로 덜컥 자신의 왼팔을 잘라버린 신광에게 달마 스님은 “네 마음을 가져오라”는 말을 던졌다. 그 말 한마디에 신광은 평생을 붙잡고 살아온 불안을 씻은 듯 떨쳐버릴 수 있었다.
마음이라,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던가. 형상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것을 붙잡고 나는 왜 그리도 스스로를 할퀴었던가. 신광은 달마 스님에게 넙죽 엎드렸다. 달마 스님에서 시작한 선불교가 중국에 뿌리내리는 순간이었다. 신광은 바로 중국 선불교의 제2대 조사인 혜가(慧可, 487~593) 스님이다. ‘혜가’는 달마 스님이 내린 이름이다.
혜가 스님의 속성은 희(姬).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부근)에서 태어났다. 그가 출생한 시대는 중국이 남북조(南北朝)로 나뉜 복잡다단한 때였다. 온 나라가 전쟁에 휩싸여 있었고 크고 작은 나라들이 마치 물거품처럼 일어났다 사라졌다.
어려서부터 총명한 데다 용모가 수려해 부모의 자랑이던 그는 노장과 유학 사상을 깊이 공부했는데 특히 ‘시경’ ‘역경’에 정통했다 한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어지러운 세상살이에 염증을 느끼고 세속의 지식이 궁극적인 것이 아님을 깨달아 불문에 들어선다.
그가 출가한 곳은 뤄양 용문 향산사, 스승은 보정(寶靜) 선사였다. 신광의 학식과 인품, 덕목은 곧 널리 알려졌다. 마침내는 위나라의 국사(國師) 자리에까지 오르게 됐다. 국사란 왕을 보좌하며 국정을 함께 하는 승려다. 그는 문무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실에서 매달 설법을 했다. 그러나 정작 그의 내면은 치솟는 번뇌의 불길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달마 스님이 소림사에서 면벽수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기에 이른 것이다.
스님을 만나자마자 그가 물은 것은 “진리가 무엇입니까” 혹은 “불법이 무엇입니까” 하는 현학적 질문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제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이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솔직한 질문인가.
혜가 스님에게 불법은 삶과 유리된 것이 아니었으며, 그 질문에는 그러한 진정성과 순수성이 잘 묻어나 있다. 내게 부닥친 문제는 ‘지금 내가 불편하고 불안하다’는 것, 바로 그 실존의 문제라는 것을 이 질문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음이다.
이에 대한 달마 스님의 대답 또한 얼마나 절묘한가.
“편치 않다는 네 마음을 가지고 오라.”
그는 불교가 어떤 것이다, 이러이러하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방편이나 위안을 준 것이 아니라, 가장 본래적이고 근원적인 상대의 마음 자체를 적나라하게 파고들었다. 뒤이은 혜가의 “찾아도 찾을 수 없다”는 말은 단지 ‘마음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절망의 표현이 아니라, 마음의 본질을 이해한다는 자기 확신을 의미한다. 말 그대로 직지인심(直指人心)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는 내용이라 하여 ‘안심(安心)법문’이라 한다.
달마 스님의 말대로 선불교는 ‘마음’에 관한 종교다. 불안한 마음, 두려운 마음, 놀라는 마음, 기쁜 마음, 슬픈 마음, 노여운 마음. 그 수많은 마음에 대한 탐구가 바로 선불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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