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백제의 흔적

[스크랩] 고구려 장군총의 신비로운 숫자와 경천(敬天)사상

보리숭이 2007. 4. 5. 15:08

 

고구려 장군총의 신비로운 숫자와 敬天사상

 

 

중국의 집안, 즉 국내성이라고 이름한 고구려의 옛도읍지에 가면 동방의 피라밋이라고 불리는《장군총(將軍塚)》이 있다.

청나라 말기에 청나라의 봉금정책을 무시하고 생계를 위해 지금의 집안 일대로 들어온 중국인들과 한반도를 넘어 중국에 들어온 조선인들이 무덤이 웅위로움을 보고 어떤 변관을 진수하던 장군의 무덤인 줄 알고 《장군총》 혹은 《장군분(將軍墳)》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동방의 피라밋으로 불리는 장군총. 그 거연한 모습에 무수한 신비로움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북으로는 룡산을 등에 업고 서로는 대우산과 이웃하고 동남으로는 압록강이 흐르고 앞에는 드넓은 개활지에 호태왕비(광개토왕비)와 호태왕릉을 마주하고 있으며 멀리 고구려의 도성인 국내성(집안시)를 바라보고 있는 장군총, 좋은 지세를 탔을 뿐이 아니라 기세 또한 웅장하다.

사서들은 고구려가 28대에 걸쳐 705년간이나 그 사직을 이어왔다고 한다. 28대에 705, 중원땅의 한 왕조의 2~300년 역사에 비하면 너무나도 긴 역사시기이다. 하기에 고구려의 역사는 중원의 서한왕조부터 당나라에 이른다. 따라서 아직은 고구려시기 고서들이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구려의 역사는 물론 700여년 간 수많은 교체를 겪었던 중원 왕조들의 사서기록에 널려있는 편단을들 주어 모아 연구하고 있는 상황이며 앞으로 소개하게 될 호태왕비의 기록을 중요한 근거로 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고구려 왕조의 18대에 걸친 임금들의 18기의 무덤이 집안 주위에 있는 퉁고우(洞溝)무덤군에 널려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 장군총은 가장 잘 보존된 무덤이라고 한다.

장군총은 정밀하게 깎은 화강암으로 축조했는데 무덤은 거의 정방형 모양을 하고 있으며 한 변의 길이가 31.58m, 지상에 모두 7층의 계단이 있어 22층의 돌로 쌓고 안에는 흙과 자갈을 이겨 다져 넣은 구조로 되어 있으며 무덤의 높이는 12.4m, 모두 1100여개의 돌로 축조되어 있다고 한다.

묘실은 3번째 계단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묘실의 문은 5번째 계단에 나 있으며 230도의 서남방향을 향해 있다. 묘실은 길이와 너비가 각기 5m, 높이가 5.5m, 묘실의 바닥에는 크기가 같지 않은 두개의 돌침대가 놓여 있으며 묘실의 천정은 통 돌로 덮였는데 무게가 약 50t가량 된다고 한다. 묘실 정상의 한 변의 길이는 13.2m~13.7m로 변 마다 20여개의 구멍이 뚫려 있으며 전에는 난간혹은 묘실 위에 건축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석을 쌓고 안에 자갈을 다져 넣어 축조했음으로 자체 중량의 장력(張力)으로 벽이 겉으로 밀고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한 면에 10여 톤씩 되는 바위 3개씩 받쳐놓았는데 지금 하나는 없어지고 11개가 있다.

장군총을 축조한 거석들과 벽을 받쳐놓은 거석은 모두 22km밖의 채석장에서 운반해온 것인데, 1500여년 전, 운반도구와 기중기술이 낙후한 고구려 시대에 이처럼 방대한 공정을 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인들의 비상한 지혜와 건축, 운반기술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20대 장수왕의 릉묘로 알려진 장군총 남쪽 60m되는 곳에서 배수구를 발견한 것으로 보아 장군총 주위에는 너른 릉원과 묘역(墓域)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장군총의 동북쪽에는 동남에서 서북으로 자리 잡은 무덤군이 있었고, 서남 200m되는 곳에는 제사유적지가 있는데 면적은 5hta나 된다.

실로 거대하고 웅장하다. 그 밖에 어떻게 다른 표현을 할 수 가 없다.

 

고구려인들의 경천(敬天)사상

왕도의 기운이 서서히 어리는 국내성, 그 동북쪽에 거연히 솟아있는 장군총, 2천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지각운동도 많이 겪었겠지만 여전히 숭엄한 모습을 변하지 않고 있는 장군총, 그것이 말해주는 것은 고구려인들의 지혜와 7백여년을 이어온 사직의 역사뿐이 아니다. 장군총은 그것보다는 고구려인들의 하늘을 우러르고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경천(경천)의 사상과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인본주의 사상이기도 하다.

 

 

장군총 묘실의 천정. 50여톤이나 되는 거석이라고 한다.

 

장군총은 방형계단식식실묘(方形階段式石室墓)이다. 산의 정상봉이 아닌 서서히 솟아오르기 시작한 산마루에 우뚝 솟아 있으나 하늘을 찌르는 그런 뾰족한 끝이 없이 무덤 위는 평평한 대()로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이집트의 추형(錐形)의 피라밋과는 다른 고구려 사람들의 경천사상에서 오는 겸허함이다.

뾰족함이 말하는 바는 탐구와 진취와 함께 방어와 공격이 그 주요 기능이다.내부 심령 깊이에서 오는 팽창에 따른 확장과 점유와 탐욕에서 오는 공격과 방어를 위한 데 있는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밋이 바로 그런 방어와 공격의 대표성적인 축조물이다. 이집트 피라밋에 어린 신화와 전설이 이런 것들을 잘 말해주고 있으며 《바로의 저주》와 같은 것들이 모두 이를 실증하고 있다. 알렉산터의 확장과 무덤에 진입한 자에 대한 바로의 저주 역시 이를 잘 말해주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장군총은 그것이 아니다.

장군총은 7층의 계단으로 되어 있고 무덤 맨 위는 평평한 대()이다.

평면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대로 평안함이요 평화요 겸허함이다.

뾰족함이 말해주는 것이 공격과 방어와 진취라면 평면이 말해주는 것은 평안과 접수와 겸허함이요, 자기의 실력에 바탕을 둔 듬직함이다.

하늘의 기를 받고 하늘의 뜻과 하늘의 순리를 따라서 행하는 것, 그리고 하늘의 아들(天之子)로서 죽은 다음에도 하늘의 뜻을 따르는 그런 경천애민(敬天愛民)과 겸허의 마음가짐인 것이다.

고구려와 고구려의 시조 주몽왕이 북부여 탈출 전설, 그리고 주몽왕의 탄생설화들은 모두 고구려 왕족의 도통을 하늘의 아들로 말하고 있다.

주몽 탄생설화에서 주몽의 어머니 유화(柳花)는 하백(河伯, 강의 신)의 딸이다. 유화와 훤화(萱花), 노화(蘆花)  세 자매가 압녹수(鴨綠水. 일설에는 지금의 송화강이라고 한다. 어쩌면 송화강으로 봄이 그럴 듯 하다. 사서의 기록과 고고학의 연구에 따르면 지금 길림성 중부의 길림시(吉林市)에 바로 부여국의 도읍지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압녹수를 송화강으로 봄직하다.)가에서 노는 데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가 인간세상을 두루 운유하다가 이들 세 자매 가운데서 유화가 가장 예쁜 것을 보고 유화와 사랑을 맺게 되고, 유화가 임신한 다음에 해모수는 하늘나라로 떠나버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자기의 허락도 없이 다른 남자와 사랑을 맺고 임신을 한데 대로한 하백, 거기다 이제 하늘로 돌아간 해모수가 다시 오지 않자 남편도 없이 아이를 낳게 된 유화, 이에 대로한 하백은 유화를 압록수에 유배를 보내버린다.

 

장군총을 받친 거석들. 한면에 3개, 4면 총 12개, 지금은 한개가 일어져 11개만 남았다고 한다.

거석 하나의 무게가 10톤 정도 된다고 한다.

 

 

  압록수에서 고기를 잡아 먹으며 살아가던 유화는 어렵을 나온 부여왕을 만나게 되고, 결국 부여국에서 아들 주몽을 낳게 된다.

이렇게 서자(庶子)로 태어난 주몽이 왕자 대소(帶素) 등의 모살(謀殺)을 피해 도주하다가 강이 가로막았을 때도 주몽은 물에 채찍질을 하면서 자기가 천제의 후손인데 물속의 짐생들은 다리를 놓으라고 호령하자 거북과 자라들이 떠오르며 다리를 놓는다.

이처럼 고구려는 그 왕통(王統)을 하늘에 잇고 있다. 그만큼 그들은 하늘에 대해 겸허하고 하늘의 의사를 따르고 하늘로부터 그 뜻을 우러러 받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하늘에 대해 경천의 마음만 가질 뿐 공격의 자세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하기에 고구려의 옛 무덤들은 하나 같이 끝이 하늘을 향해 뾰족한 것이 없다. 모두다 정상 부위는 4면 추형의 뾰족한 부분을 자른 제형 모양으로 믿믿한 평면을 이루고 있다. 장군무덤이 그럴 뿐이 아니라 퉁고우(洞溝)무덤군에 있는 고구려 귀족무덤군이나 호태왕릉 모두가 다 그렇다.

이런 무덤이나 축조물이 사람들에게 주는 첫번째 인상은 바로 평안함과 안전함, 그리고 듬직함과 묵중함이다.

 

장군총은 과연 무덤이었던가?

장군총은 과연 무덤이었던가?

학자들은 장군총을 고구려 20대 장수왕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일부에서는 장수왕 14년에 평양성으로 천도(遷都)를 했는데 장수왕 무덤일 수가 있느냐고 질의를 하고 있지만 장군총을 장수왕의 무덤으로 보는 것이 거의 정설로 되어 있는게 사실이다.

하다면 장군총은 과연 무덤이었던가?

우리는 십여년 전의 일도 때로는 기록이 근거로 남아 있어도 그 기록의 진실여부와 정확여부에 의문부호를 다는 경우가 많다. 하다면 1500여년 전의 장군총이 장수왕의 무덤이라는 데 한 번 물음표를 걸어놓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닌 상 싶다.

장군총은 무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첫째, 오회분(+)은 땅 밑으로 일정한 정도로 파고 들어가 시체를 안치하는 석상(石床)이 놓여 있지만, 장군총은 그렇지 않다.

장군총과 오회분5호무덤을 잠깐 비교하면 금방 답이 나온다.

오회분은 벽화무덤인데 땅으로 깊이 들어가는 용도[甬道]가 있고 일정한 깊이에 들어가서 시체를 모시는 묘실과 석상(石床)이 있는데, 다시 말하면 음양 사상의 이념에서 사망자는 음()에 속하기에 땅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음양학설에서 밝은 것, 드러난 것, 명확한 것, 위에 있는 것, 살아 있는 것은 양에 속하고 어두운 것, 감추어진 것, 명확하지 않은 것, 아래 있는 것, 죽은 것은 음에 속한다는 것은 거의 다가 아는 이치이다.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 역시 그가 왕공귀족이든 죽으면 모두 저승으로 가게 되고 따라서 음에 속하게 되기에 물론 땅 밑으로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풍수설에서는 묘자리를  음택(陰宅)이라고 하기도 하는 것이다.

 

 

 

장군총 묘실안의 석상(석상). 왼편의 것은 크고 오른편의 것은 작다. 작지만 큰 석상과 마찬가지로 옹근돌로 되어 있다. 이는 비록 신분은 다르지만 붕어한 임금과 같은 왕족의 혈통임을 말한다.

 

 

오회분이 바로 그 중 대표적인 무덤이다. 다시 말하면 겉은 그것이 계단식방형석분이든지 아니면 흙으로 덮은 무덤이든지 땅위에 솟아 있지만 묘실만은 모두 땅 속에 깊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오회분 5호무덤의 경우, 묘실은 석실로 되어 있는데 4면 벽과 천정에는 모두 벽화가 그려져 있고 높이는 약 5m되는데 묘실은 지면보다 3~4m 낮다. 158도의 동남방향으로 앉아 있고 묘실은 장방형으로 동서 4.37m, 남북 3.56m, 벽의 높이는 2.18m, 전체 묘실의 높이는 3.94m, 즉 다시 말하면 지하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장군총은 그렇지가 않다.

장군총은 그 묘실(墓室)이 땅 위에 있다. 적어도 땅 위에 2m가량 되는 곳에서분터 시작되어 약 4m되는 곳에 문이 나 있다.

장군총은 모두 7단계의 계단형석실묘이다.

장군총의 묘실은 땅에서 시작하여 쌓여지기 시작한 계단의 3번째 계단에서 시작된다. 그러다가 5번째 계단에 출구가 나타난다. 출구는 거의 정서(正西)방향으로 되어 있는데, 말하자면 장군총은 묘실이 땅 위에 있는 것이다.

?

장군총은 실상 무덤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군총은 무덤이 아니다.

장군총은 위에서 말했듯이 정밀하게 깎은 화강암으로 축조했는데 무덤은 거의 정방형 모양을 하고 있으며 한 변의 길이가 31.58m, 지상에 모두 7층의 계단이 있어 22층의 돌로 쌓고 안에는 흙과 자갈을 이겨 다져 넣은 구조로 되어 있으며 무덤의 높이는 12.4m, 모두 1100여개의 돌로 축조되어 있다

여기서 관건은 묘실이다. .

묘실은 3번째 계단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묘실의 문은 5번째 계단에 나 있으며 230도의 서남방향을 향해 있다. 묘실은 길이와 너비가 각기 5m, 높이가 5.5m, 묘실의 바닥에는 크기가 같지 않은 두개의 돌침대가 놓여 있으며 묘실의 천정은 바위로 덮였는데 무게가 약 50t가량 된다고 한다. 묘실 천정의 한 변의 길이는 13.2m~13.7m로 변 마다 20여개의 구멍이 뚫려 있으며 전에는 난간혹은 묘실 위에 건축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묘실이 바로 3번째 계단에서 시작되어 5번째 계단에서 끝나면서 서남으로 문이 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묘실 안에 석상(石床)은 크기가 같지 않은 두개가 놓여 있는 데 왼편의 것은 길이도 길고 너비도 넓으며 오른편의 것은 그보다 퍽 작은 것으로 놓여 있다.

그러나 오회분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묘실에 모두 석상이 3개 놓여 있는데 크기는 다 같다. 다만 가운데 석상은 옹근 돌로 되어 있고, 왼편의 석상은 머리쪽에 약 40cm가량 다른 돌로 이어져 있으며 오른 편의 것은 머리쪽에 다른 돌로 이어져 있을 뿐이 아니라 발 쪽에도 역시 약 60cm가량 다른 돌로 이어져 있다. 전체 석상의 크기는 같지 않지만 돌의 크기로가 아니라 옹근돌이 옳으냐 아니냐로 신분을 가렸던 것이다.

그러나 장군총 묘실 안의 석상은 둘 다 옹근돌인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은 것이다.

사서의 기록들에 따르면 고구려사람들은 장례를 후하게 치뤘다고 한다. 결혼 한 다음부터 감옷을 준비하고, 사람이 죽으면 우선 빈소(殯所) 3년간 모셨다가 다시 장례를 치른다고 한다. 물론 신분과 빈부에 따라 복상(服喪)하는 기일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것이 통례라고 한다.

국왕이 붕어하면 빈소를 어디에다 차릴 것인가? 물론 왕궁안에 차리기는 3년이라는 기일이 너무나도 길다. 방법은 밖에 차리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장군총은 무덤이라기보다 고구려가 국내성으로 천도한 다음에 국왕들이 붕어하면 모시는 빈소(殯所)로 봄직하다.

국왕이 붕어하면 우선 빈소(殯所, 지금의 장군총)에 모셨다가 기일이 차면 다시 묘소로 모신다.

다음은 장군총에는 벽화가 없는 것이다.

장천1호무덤이나 오회분 5호무덤에는 모두 벽화가 있다. 하지만 장군총에는 벽화가 없다. 장군총이 진정 장수왕의 무덤이라면 응당 벽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일반 귀족의 무덤에도 벽화가 있는데 장수왕의 무덤에 벽화가 없다는 것은 어딘가 불합리하다는 느낌이 들 지 않을 수 없다.

세번째로 석상이 많은 차잇점을 보이고 있다.

이는 오회분 5호무덤의 묘실에 있는 석상과 장군총 묘실에 있는 석상을 대조해도 알 수 있다. 앞에서 말했 듯이 오회분 5호무덤의 묘실에서 석상은 크기로 신분을 가른 것이 아니라 석상이 옹근 돌로 된 것인가 아닌가로, 그리고 돌 몇 조각으로 이루어 졌는가로 신분을 나누었지만 장군총은 석상의 크기가 둘이 서로 다르지만 둘 다 옹근 돌로 되어 있다. 왼편의 것은 크고 오른 편의 것은 작을 뿐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장군총 묘실의 석상크기는 함께 묘실에 모셔진 사망자의 신분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두 침대는 하나는 빈소에 모신 사망자, 즉 붕어한 왕의 시체를 모시는 침대(큰 석상)이고 다른 한 침대는 빈소에서 왕을 모시고 《수령(守靈)》하는 사람이 쓰는 석상(작은 석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왕은 왕이기에 큰 석상에 모시고, 《수령(守靈)》하는 사람은 그 수하의 사람이기에 작은 석상을 쓰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 누가《수령(守靈)》을 하는가? 우리들이 지금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아들이《수령(守靈)》을 하듯이 고구려의 왕이 붕어하면 물론 태자를 비롯한 아들이나 형제들이《수령(守靈)》했을 것이다. 정통 왕족의 혈통을 받았음으로 그는 두 쪼각 이상의 돌로 무어진 석상이 아니라 하나의 옹근 돌로 이루어진 석상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장군총은 왕이 붕어하면 모시는 빈소이다. 그리고 장군총 위에서 하늘에 제를 지내는 제단이다.

 

 

장군총의 곁무덤.

 

사람이 죽으면 저승으로 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고 옛날 사람들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또 그러는 사이, 사망자의 영혼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상태에서 떠돌아 다니는데 이 떠돌아 다니는 영혼이 안착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빈소인 것이다.

장군총의 묘실은 사실 상 음계(陰界)도 양계(陽界)도 아닌 그 중간지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음계가 아니라고 함은 그것아 땅 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요, 양계가 아니라고 함은 그것이《무덤》속에 있기 때문이다.

장군총이 장수왕의 무덤이 아니라 고구려에서 왕이 붕어하면 모시는 빈소라고 함은 또 한가지 다른 이유가 더 있다.

장군총은 위에서 말했 듯이 묘실이 세번째 계단에서 시작하여 다섯번째 계단에 이르러 문이 나져 있다.

이는 주역과 중원의 《구오지존(九五之尊)》의 설법과도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임금을 《구오지존(九五之尊)》이라고 했다. 임금을 《구오지존(九五之尊)》이라고 하는 데는 주역의 건괘(乾卦)와 관계된다.

《주역(周易)》의 첫번째 괘는《건()》괘이고 두번째 괘는《곤()》괘인데《건》과 《곤》은 각기 하늘과 땅을 상징한다. 하여 하늘과 땅을 아울러《건곤(乾坤)》이라고 한다. 《건》괘는 모두 6개의 양효(陽爻)로 되어 있다. 《건》괘를 주역에서는 《건; , , , (; , , , )》으로 해석하고 있다. 《건》은《건()》과 같은 뜻으로 부지런함, 건강함, 튼튼함, 건전함과 끊임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건》괘는 두개의 《건》괘가 중첩됨으로 변화무쌍한 우주의 이치를 말함과 아울러 가장 순수한 양과 최고의 《건()》을 말하며 이로써 하늘의 불변의 이치를 설명하기도 한다. 《원, , 리 정》은 하늘의 무한한 능력과 만물 창조의 위대한 근원을 말하며 그 법칙의 막히지 않음과 조화로운 보편적인 혜택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으며 기울어 짐이 없이 항상 공정하고 또 끊임없이 이어 집착함을 말하기도 한다.

《건》괘에서 9-5(《건)괘는 모두 여섯개의 양효로 구성되었는데 아래서 부터 다섯번째, 9-5는 바로 양효가 《양)의 위치에 있게 된 것이다.)에 대한 해석《비룡재천하니 이견대인이라(飛龍在天, 利見大人))라고 해석을 하고 있는 데 그 뜻인 즉 용이 적당한 때와 마춤한 곳에 있으니 하늘을 날으며 문한한 활동공간을 가지고 땅을 굽어보니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를 사람에 비하면 위엄을 갖추고 법도를 지키는 위인이 이미 통치자의 위치에 서 있음과 같은 것이다.

《주역》에서는 음과 양의 조화를 추구하고 있으며 《음()》은 음으로서 《음》이 있어야 할 자리에, 《양()》 역시 《양》으로서 《양》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것을 주장하고 있으며 《음》이 《양》의 자리를 차지하거나 《양》이 《음》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다 적중하지 못한 것으로 보며 좋지 않은 징조로 해석하고 있으며 또 가운데() 자리를 군자가 서야할 자리로 보고 있다.

그러나 9-5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양효가 바로 《양》의 위치, 즉 다섯번째 자리에 있게 되었다. 바로 임금의 위치인 것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임금은 《구오지존》이라고 했다.

 

 

 

장군총 묘실의 문은 다섯번째 계단에 나 있다. 그리고 묘실은 3번째 계단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는 주역 건괘의 9-3효(爻)와 9-5효에서 말하는 "95지존"이라는 말과 맞아떨어지며

장군총은 모두 7단계로 되어 있는 데 이는 주역에서 황제를 대표하는 건괘가

모두 7개의 괘상(卦象)으로 해설된 것과도 맞아 떨어진다.

 

 

《주역》은 첫번째 괘인 《건》괘의 세번째 양효, 9-3효에 대해 또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군자가 종일 건건하매 석척하고 역하면 무구하리라(君子終日乾乾, 夕剔若, 曆無咎. 군자는 온 종일 부지런하매 밤낮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근엄하고 빈틈없이 일을 하면 위험한 일이 없을 지니라).

말하자면 9-5는 왕의 자리라면 9-3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 덕성이 세상에 알려짐으로 위태로울 수도 있지만 이럴 수록 자기를 엄하게 단속하고 최선을 다해 덕성을 쌓고 만사에 근엄해야 실수가 없이 성공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장군총은 바로 이런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왕은 붕어(駕崩)했지만 그 영혼은 아직 갈 주소를 찾고 있는 중으로 산 사람들이 돌아가신 임금이 내세에도, 아니면 저승에 가서도 여전히 임금의 덕성을 쌓아 달라는 아름다운 기원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세상을 하직하고 저 세상으로 가는 임금이 《건》괘의 9-3에서 처럼 모든 일에 자기를 단속하고 장중하고 위엄있는 모습을 가져 덕을 쌓아 장차 9-5의 임금위에 오르라는 소박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기원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런 기원의 마음이 담겨져 있기에 장군총은 3번째 계단에서 묘실이 시작되어 다섯번째 계단에서 문(임금의 위에 오르는 문)이 나져 있는 것이다.

이로 볼 때 장군총은 장수왕의 무덤이라기보다 고구려 왕실에서 축조한 붕어한 왕의 빈소로 봄이 더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서기 372, 즉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벌써 불교가 고구려에 전파되어 들어왔다. 이로 볼 때 고구려와 중원은 주몽의 건국초기부터 많은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논어(論語)》에도 공자가 꿩의 몸에서 빼낸 화살을 보고 이는 숙신의 호실, 즉 싸리가지로 만든 화살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중원 즉 후세 고구려가 차지했던 지역의 교류가 없었다면 공자 역시 그 화살이 어느 지역에서 나는 화살인지를 몰랐을 것이다.

이로볼때 고구려 초기에 중원의《주역》과 음양학설을 얼마든지 접할 수 있으며 그것이 상장문화에 많이 담겨져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장군총의 신비로운 숫자들

장군총은 위에서 말했 듯이 되를 엎어 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 4면에 매 면마다 3개의 바위돌로 바쳐놓고 있으며 계단은 모두 7계단으로 되어 있으며 1100여개의 돌로 축조되어 있다.

사람들은 쩍 하면 이집트의 금자탑의 신비로움을 말하면서 숫자로 이러니 저러니 한다. 그런 식으로 하면 장군총도 얼마든지 무수한 신비로움을 내포하고 있다.

 장군총은 22, 1100여개의 돌로 쌓여져 있는데, 1144 22로 나누면 52, 일년 52개 주일을 말하고, 4개의 면으로 되었는데 이는 일년의 4계절, 한면에 바위 3개씩 받쳤는데, 모두 12, 이는 1 12개월을 말하고, 돌은 모두 22층으로 쌓여 있고, 계단은 7개 계단으로 되어 있다.여기서 7개 계단은7일 한주일과 맞먹으며, 22 7로 나누면 3.1428571이 나오는데 이는 원주률과 소수점아래 두자리수까지 같다. 그리고 돌은 모두 22개 층으로 쌓여져 있는데, 장군총을 쌓은 돌들은 모두 22km밖의 채석장에서 운반해온 것이다. 그리고 장군총의 밑변의 둘레길이는 31.58미터인데 이는 한달 31일과 거의 맞먹는다.

신비롭다고 함은 숫자의 우연한 합치요, 옛날 고구려 사람들은 주일 개념도 없었을 것인데 주일과 맞먹는 숫자가 나오는가 하면 km, 개념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층수와 운반거리가 같은 것이다. 사실, 숫자는 맞추기 나름이다. 알고 보면 별로 신비로울 것도 없지만 옛사람들의 지혜를 한 번 더 다른 방식으로 조명해보았을 뿐이다.

출처 : 사이버 중국 여행기
글쓴이 : 부여의 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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