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으로 불리던 옛 도읍지, 서안(西安)에 도착하자 '진시황병마용'을 본다는 설렘이
일었다. 중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최고의 역사유물이기도 했지만 사실 서안에 온 진짜 이유가 2005년 11월 중국 언론에 보도된 기사
때문이다.
기사는 진경원이라는 중국인이 "'병마용'은 진시황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진경원씨의 주장이 만약 사실이라면
세계적인 뉴스가 되겠지만 아직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니며 중국 학계 역시 진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기사
내용에 야릇한 흥미를 느꼈다. '홀로여행'을 기획하면서 서안에 반드시 가봐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진씨는 1974년
'병마용'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 건축전문가로서 진시황릉에 대한 관심과 전문가적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병마용'이 발견된
후 그 장소가 고대황릉이 대체로 남북방향인데 비해 '병마용'은 진시황릉 동쪽에 있고 풍수지리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곳에 진시황의 매장무덤이 있다는
점에 진씨는 최초의 의문을 품었다.
서안역에서 동쪽으로 버스로 약 1시간 30분 정도 가면 임동현에 도착한다. 여기서 진시황릉을
지나자마자 곧 '병마용' 박물관이 나타난다. 진시황 동상이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진시황의 동상은 3년 전 산동성 영성시에 있는, 신하
2명과 함께 서 있는 동상 모습과 유사하다. 영성시의 동상은 진시황이 천하통일 후 자신의 땅이 얼마나 넓은지 눈으로 확인하고자 가장 동쪽 땅인
영성에 이르러 세운 것으로 후대에 이를 관광상품화했을 터이다. 하여간, 진씨의 주장에 따르면 '병마용'은 고대의 '룰'과 달리 진시황릉의 동쪽
방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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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황의 병마용임을 기정사실로 하고 있는 동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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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명 |
| 버스에서 내려 15분 이상 걸어야 박물관 입구에 도착한다. 세계문화유산답게 주변 조경은 아주 청결하고 푸르렀다. 그런데 입장료가
무려 90위엔(약 1만2천원)이어서 놀랐다. 나중에 한 중국인에게 입장료가 비싸다고 투덜거렸으나 '병마용'의 역사적 의의를 모르고 하는 소리라는
핀잔을 먹었다. 중국 최초의 통일 '영웅'에 대한 자부심만 기억하면서 진시황의 중앙집권적 법치주의 아래 희생된 수많은 민중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는 중국 친구에게 인터넷으로 문제의 '기사'를 찾아 보여줬더니 좀 조용해지긴 했다.
'병마용' 관람은 주로 아래를 내려다 보는
방식이다. 무덤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웅장한 규모를 보여주기 위해서인 거 같다. 피사체는 높이 있어야 위대해 보이는 것 아닌가. '병마용'의
병사나 군마가 외소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적 피사체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중국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각양의 표정을 세밀하게 다
읽기는 조금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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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마용 1호 갱에 당당히 서 있는 병사들과 군마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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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명 |
| 병사들은 무겁게 눈을 내리감고 있으나 제각각의 표정은 살아있는 느낌이다. 그래도 당시 병사들의 머리 형태는 하나 같지 않은가.
표정이야 제각각이나 그 외양은 당시의 생활 또는 군사문화를 담고 있다.
1호 갱 왼쪽으로 돌아, 보무도 당당하게 맨 앞에 서 있는
병사들을 바라봤다. 모두 발판 위에 서서 정면을 향해 있지만, 일사분란한 군대의 모습은 아니다. 목이 없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한데, 떨어져
나간 목은 누구의 몫으로 사라져간 것일까.
병사들 뒤에 날씬한 군마가 질주를 멈춘 듯 서 있다. 군마들이 끌던 마차는 2호 갱에서
발견됐다고 알려져 있는데, 갱 속에서는 보지 못했다. 갱 옆의 한 박물관에 모형 형태로 비치되어 있다.
다시 진씨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궁금증을 품고 있던 진씨는 1976년 서안을 찾았다. 진씨는 서안의 박물관 담당자에게서 '병마용'이 진나라 통일 후 10여년 지난 후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아해했다.
병마용을 자세히 관찰한 진씨는 병사들의 복장 양식과 마차 바퀴가 진시황 시대의 그것이
아니라는 의심을 품었다. 진시황은 통일 후 중앙집권 통치를 위해 옷 색깔을 흑색으로 통일했는데, 출토된 모든 병사들의 옷 색깔은 전체적으로
빨강색과 녹색의 전투복에다 자주빛 남색의 바지 차림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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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정은 다 다르지만 머리스타일은 모두 동일한 병마용의 병사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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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명 |
| 이는
진시황의 엄명을 어긴 처사라 볼 수 있으며 따라서 '병마용'은 진시황 당시와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진씨는 판단했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의 주장대로 병사들의 옷이 검은 색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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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은 흘렀어도 붉은 빛을 그대로 간직한 병마용의 병사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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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명 |
| 진씨는
또 마차 바퀴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갱내를 조사한 결과, 마차의 바퀴 형태가 서로 다 달랐다. 진씨는 이 역시 '병마용'이 진시황과 무관하다는
증거라고 판단했다. 진시황은 통일 이전에 이미 진나라 영토 내에서 '차동궤(車同軌)' 바퀴가 아니면 통행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통일 후엔 모든 마차 바퀴를 하나로 동일하게 사용하도록 명령한 진시황이 어째서 자신의 무덤에 부하들 맘대로 바퀴를 만들도록 윤허했단
말인가. 진씨의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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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관에 별도로 전시되어 있는 병마용의 마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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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명 |
| 그건
그렇고, 병사들의 손동작이나 얼굴 표정 하나하나는 정말 살아있는 듯하다. 사방을 한 바퀴 돌면서 '병마용'의 주인에 대한 궁금증도 잊고 역사의
실체와 만나니 그 웅장함과 섬세함에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이 거대한 1호 갱 외에도 2, 3호 갱이 있고 아직 발굴되지 않은 것도 많다고
한다. 이 엄청난 상상력은 도대체 누구의 머리에서, 왜 나온 것일까.
3호 갱에서는 출토된 '병마용' 유물을 가깝게 볼 수 있다.
보존상태가 좋은 것 중 유리로 감싸놓은 것은 예술전시품처럼 아름답다. 진정 고대 중국인들은 훌륭한 예술가임에 틀림없다. 다만 진시황의 만리장성이
피정복민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 전리품인 것처럼, 주인이 누구인지와 무관하게 병마용은 '눈물의 예술'일 거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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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 속에 전시되어 있는 병마용의 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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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명 |
| 그런데
1, 2, 3호 갱을 다 보고 나오니 허전한 느낌도 든다. 수없이 많은 병사와 군마만큼이나 많은 감동을 기대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병마용' 박물관 내에는 상설전시관이 별도로 있다. 마침 당삼채(唐三彩) 전시가 있었지만 진시황과 무관한 8세기 유물이어서인지
필자는 그다지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한 전시공간에는 중국 지도자들의 방문사진이 잔뜩 있어서 짜증까지 난다. 사진 속에 있는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은 중국 지도자와 함께 '병마용' 무덤에 같이 묻히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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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과 중국지도자가 병마용에서 찍은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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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명 |
| 중국
지도자들이 세계 최강 미국 대통령을 무덤에 데려간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진씨의 문제의식은 병마용의 주인이 진시황으로 확정되는 과정에 중국
지도자이 관여돼 있다는 것.
진씨는 1974년 3월 24일 이 지역 농민이 밭을 갈다가 '병마용'을 발견한 뒤 고고학자들이 이
유물을 '진시황릉 건축의 일부분'이라고 너무 결정을 빨리 내렸다고 주장한다. 진씨는 도한 그해 5월께 '진시황릉에서 진나라 시대 무사들의 무덤이
출토됐다'고 보도한 <신화사>도 그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진씨에 따르면, 이 보도를 중시한 당시
모택동과 주은래 등 중국 지도자들이 국가문물국에 '병마용'을 보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시하자마자 중국사회과학원의 전문가단이 재빨리 현장을
조사한 후 주위에 진시황릉 외에는 대형 무덤이 없다는 이유를 근거로 '병마용'의 주인을 진시황으로 단정해버렸다는 것.
이에 대해
진씨는 왜 황릉과 멀리 떨어진 곳에 순장품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지 않았고 '병마용'에 대한 충분한 과학적 조사도 없이 결론이 내려졌다며
그 과정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진씨는 과학적이고 학술적이 아닌 정치적인 판단이 작용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진씨는 당시
문화대혁명의 막바지였던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을 중앙집권의 상징이던 진시황과 연계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를 실제 주도한 사람은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 문화부문을 장악하고 있던 강청(모택동의 부인)이라고 믿고 있다.
진씨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진씨는 자료를 수집해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중국사회과학원 간행물에 기고하기도 했으나 누구로부터도 동조받지 못했다.
1984년에는 스스로 조사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병마용'의 진짜 주인은 진시황 이전 시대에 재위한 진나라 소왕의 생모인 진 선태후(秦
宣太后)라고 주장했다.
진씨는 진 선태후가 '병마용' 출토지역과 지리적으로 아주 가까운 곳에 안장됐다고 역사 자료에 기록돼 있으며
<사기>에 따르면 진 선태후가 초나라 사람이었기에 '병마용'의 머리스타일과 옷 색깔 등이 '진나라'가 아닌 '초나라'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306년 진 소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섭정했던 선태후가 임종이 가까워지자 순장을 지시했으나 진소왕은
순장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아 사람들의 모양을 그대로 빚어 조각한 채 순총(殉俑)했다는 주장이다. 전리품을 가득 실은 마차를 통해 생모가 평생
돌아가고자 하던 고향인 초나라로 귀향하는 의미를 상징적으로만 담았다는 것.
진씨의 이런 주장은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잊혀졌다가
지난해말부터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역사는 역사답게 '무게'가 있어야 한다. 중국인들에게 최초의 통일국가의 '영웅'으로 묘사되는
진시황에겐 또 하나의 세계적 불가사의인 '만리장성'이 있다. '병마용'의 진짜 주인이 진짜 주인이 진시황이 아니라 다른 사람인 것으로
확정되더라도 진시황은 아쉬울(?) 게 없지 않은가.
13억 중국인 중 한 사람일 뿐인 진씨가 평생을 바쳐 노력한 것이 진정
'진실'에 가까운 것인지는 역사만이 알 것이다. 사실 '병마용'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 역시 진시황의 망령(?)에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서안의 '병마용'을 보고 흥분한 것은 기원전의 역사도 현대의 역사와 잇닿아 있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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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비 내리는 병마용의 외부전경이 산뜻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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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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