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순례

‘비운의 왕비’ 전설 간직한 영암사지 문화답사

보리숭이 2006. 5. 11. 22:21

  합천 황매산 영암사지(사적 제131호)를 발굴한 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단장 심봉근) 발굴팀은 2002년 10월 30일 “영암사지는 현재 사찰의 초석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등 통일신라시대의 완벽한 가람배치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어 사찰 변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발굴팀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영암사는 통일신라,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조계종(8세기경)천태종(11세기)사찰로 변모하면서 증개축을 거듭해 지금까지 알려진 규모보다 3배 정도 더 큰 당시 전국 5대 사찰 중 하나였다고 밝혔다.

 

  또 금당지와 회랑지가 동서 대칭의 정방형인데 반해 이번에 발굴된 하단부의 건축물은 서로 비대칭으로 배치된 점도 확인했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영암사에는 아름다운 산세를 배경으로 구름다리가 놓여졌는데 그 아름다움을 구경하고자 나라의 왕비가 방문하였다.그런데 왕비가 구름다리를 건널 때 다리가 끊어져 왕비가 죽고 말았다.진노한 왕은 영암사에 불을 지르도록 명했는데 그 불이 3년간이나 꺼지지 않고 탔다는 전설이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지금 사지내에 남아있는 우수한 조각의 석조물이나 발굴당시에 발견된 금동여래입상, 그리고 사지의 규모등으로 볼 때 영암사는 유서 깊은 고찰이었음이 분명하지만 영암사라는 절 이름은 주민들 사이에 구전되어 오던 것이고, 문헌에는 제대로 전하는 것이 없어 영암사의 내력을 자세히 알 길이 없다. 다만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탁본으로 남아 전하는 적연국사 자광지 탑비명에 고려국 가수현 영암사라고 하는 절 이름이 나타나고 있는데 가수현은 삼가현의 옛 이름이므로 이 절이 고려 때 부터 영암사라고 불리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조의 기록인 삼가 현읍지에 보면 이 절이 위치하고 있는 황매산에 몽계사, 묵방사, 보암사, 사나사(일명 부도사)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며 지도를 보면 지금의 영암사지 위치에 보암사구지라는 표시가 있어 영암사는 조선조에 와서는 보암사라고도 불리었던 것으로 생각된다.[영암사(지)의 안내문의거]

 

 

  영암사터에는 금당지, 서금당지, 중문지등의 건물터와 삼층 석탑, 쌍사자 석등, 귀부, 석조등의 석조물이 남아있고, 1984년에 있었던 발굴에서는 통일신라시대로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각종 와당들이 발견되었다. 2001년 8월 보수공사가 완료된 축대 모습이 보인다.

 

  1999년도 제2차 발굴작업에서 나타난 영암사지의 터만 봐도 그 규모가 얼마만 했는지 짐작을 하고도 남는다.

 

  영암사의 가람배치는 황매산을 등에 지고 동서 일직선상의 3단 석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암사지에 요사채로 보이는 건물에 영암사라는 현판이 있다.

 

  

  영암사 터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에 복원한 화강암재 삼층 석탑(보물 제480호)이다. 높은 2중 기단의 몸돌은 1층에 비해 2층과 3층이 아주 낮은 편이다. 지붕돌은 비교적 앏고 평평하며, 아래 부분에는 4단의 주름이 잡혀있다. 몸돌의 비례가 정형을 벗어나 있으나 전체적 균형을 잃은 것은 아니고 각 부분의 구성도 간결하여 소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법주사의 쌍사자석등(국보 5호), 광양 중흥산성의 쌍사자석등(국보 103호)의 전통을 이어받은 영암사 쌍사자석등(보물 제 353호)은 그것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절묘한 석축 때문에 더욱 제 빛을 발하고 있다.

  

  석등을 받치고 있는 석축 양옆의 돌계단은 통돌을 무지개 모양으로 깎아 여섯 단의 디딤돌을 발뒤꿈치가 허공에 뜬 채로 조심스럽게, 그리하여 경건한 자세로 오르게끔 했다

  

  화강암 통돌을 깎아 두 마리의 사자가 석등을 받치고 있는데 다리와 다리 사이, 팔뚝과 팔뚝 사이는 돌을 뚫어 공허(空虛)공간을 만들었다. 그로 인해 입체감과 사실성이 뚜렷하고 사방 어디에서나 쌍사자의 몸짓을 읽을 수 있다.

 

  

 이 쌍사자 석등을 1933년 경에 일본인들이 밤에 반출한 것을 면민들이 탈환하여 가회면사무소에 보관하다가 1959년에 절터에 암자를 세우고 옮긴 것이라 한다. 불을 밝혀 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위에는 지붕돌로 덮고, 아래는 3단 구성의 받침을 두었다.

  

  4개의 창이 난 화사석에는 4면에 두터운 돌을 새김의 사천왕상이 베풀어져 있다. 쌍사자로 된 중간받침 이외의 모든 부분은 8각으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시대의 특색을 보이고 있다. 1단의 받침돌에는 아래를 향한 연꽃잎이 두텁게 조각되었고, 8각면에는 동물모양이 조각되었다. 2단의 쌍사자는 꼬리를 치켜든 모습으로 위를 떠받치고 있는데, 다리의 근육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힘찬 모습이다. 3단의 받침돌에는 위로 향한 연꽃잎이 두텁게 조각되어 있다.

 

  영암사터 금당지

 

 

  

  금당 계단의 난간은 가릉빈가(극락정토에 산다는 상상의 새)를 날개 달린 여인의 어여쁜 춤사위 모양으로 장식했다.

 

  

 불단 기초석에는 팔부중상(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신장)을 정교하게 조각했다.

  

 금당의 석단에는 4면에 모두 여덟 마리의 사자를 실감나게 돋을새김하였다.

 

 

 

 

  

 조사당터 양옆에는 한쌍의 비석의 좌대인 거북이 모양의 귀부(보물 제489호)가 있다. 이 역시 하대 신라와 고려 전기를 대표할 명품이다. 그 중 하나가 적연국사 비석받침이고 또 하나는 이 절을 창건한 스님의 것이 분명하다.

  

  명당터에 자리하고 있는 귀부는 동서 한짝을 이루고 있다. 동쪽 거북모양의 비석받침은 용머리에 목을 곧바로 세운 힘찬모습이다. 서쪽 거북모양의 비석받침은 크기도 작고 움츠린 목에 등도 평평한 편이다. 암수 한쌍을 표현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거북등에는 육각의 귀갑문이 있고, 비신을 괴었던 비좌 주위에는 아름다운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특히 입에 여의주를 물고 용머리 형상으로 직각으로 치켜든 모습은 비범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2기 모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나, 이러한 차이에서 동쪽의 비석받침이 다소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영암사지 귀부 안내문에서)

 

 

 

  

 

  현재 영암사지 우측에는 새로운 영암사 극락보전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찰의 위치는 영암사지 터 쪽이 좋아 보이나 그 자리에 위치할 수 없는 까닭에 옆에 세운 것 같다.

 

 

 

 

 

 

 

 

 

 

  수련이 극락보전 한 켠에 모아 길러지고 있다.

 

  그 옆에 올챙이가 모여 있는데 왜 올챙이를 키우고 있는지..

  

 

600년 수령의 느티나무

 

영암사지터를 뒤로 하며

 

현재의 새로운 극락보전와 좌측의 영암사지터를 한 눈에 본다.

 

 

  자운영 재배를 통하여 지력증진을 통한 화학비료 사용량 절감으로 고품질·친환경농업 실천하고 인공이 스며들지 않은 아름다운 농촌경관

 

 역시 먹거리가 있어야..

 

  합천댐 쪽에서 본 장승이 너무 야하다.

 

 저 먼 곳에 보이는 것이 합천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