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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태극기 투쟁사

보리숭이 2005. 9. 13. 23:13
 
 나라를 빼앗긴 민족은 제 나라의 국기도 제대로 그릴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선열은 몰래 태극기를 그렸으며, 몰래 그려진 태극기를 중심으로 광복의 열정을 불태웠다. 민족은 태극기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다.
    독립문의 태극기 - 자주 독립 국가임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파리의 개선문을 본 딴 독립문에는 태극기가 좌우 양편에 돌에 새겨져 있다. 이 태극기의 모양은 독립 신문의 태극기와 같다. 지금의 태극기와 비교해 보면 상하가 뒤집어 져 있는 모양이며, 음양 태극양의의 소용돌이가 매우 역동적인 것을 알 수 있다.
         
    항일 독립 운동 태극기 : 1900년경 만들어진 국기로서 일제시대 일본에 빼앗겼다가 1962년 한일문화 협정체결후 1967년 4월 국내에 반입된 태극기
    1900년대의 태극기 : 고종황제 시절 광무9년 정삼품 통정대부 벼슬을 지냈던 종로구 홍지동에 사는 박영민씨의 조부 박기준씨께서 사용하던 국기
    <제작연대 : 1900-1905년, 실물크기 : 정사각형 80cm>
    1907년 [불원복(不遠復) 태극기] : 전남 구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 고광순이 일본군과 싸울 때 사용한 태극기이다(1906). 그는 굳은 신념으로 "멀지 않아 국권을 회복한다" 는 글자를 이 태극기에 써 넣었다.
    1919년 삼일 운동 때 경북 영덕에서 사용된 김세영의 태극기
    1919년 삼일운동 때의 남상락 태극기
    1919년 평양 숭실 학교 태극기 :  삼일운동 이틀 전에 평양의 숭실학교 조만식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반드시 너의 손으로 태극기를 올려야 한다." 이 말씀에 따라 학생 김건이 동료들과 함께 제작하여 1919년 3월 1일 평양 숭실학교 교정에 이 태극기를 높이 내걸었다. 이 태극기는 이후 숭실학교의 마포삼열(모페트)학장 선생님이 몰래 1년 동안 보관하여 오다가 이후, 미국의 아들에게 보내어져 보관되다가 1974년 숭실대학교로 기증되었다.
    1919 태극기를 인쇄하기 위한 목각판 -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어내기 위하여 만든 목각판. 이렇게 인쇄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김구 선생님의 성함이 새겨진 태극기 :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1941년 3월 16일 안창호의 부인인 이혜련 여사 에게 보낸 친필서명 태극기. "망국의 서러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정력.인력.물력을 광복군에게 바쳐 강노 말세인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조국의 광복을 완성하자" 는 말을 어디에서나 한국인을 만나는 데로 전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  광복군 이름이 새겨진 태극기  : 1945년 중국 방부에 있던 광복군이 광복에 대한 소감과 이름을 기록한 태극기. - 4괘의 배치는 이괘와 감괘의 위치가 지금과 바뀌어 있고, 태극 음양의 머리꼬리의 소용돌이도 바뀌어 있다.
 
    [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 직원 일동 사진의 태극기 :1940년 12월 26일 서안(西安)에서 찍은 [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 직원 일동 사진. 대일 공작 추진을 위해 한 덜 전인 11월 29일 [광복군 총사령부]는 전방 전선인 서안으로 옮겨 왔다. 총사령관 대리는 황학수 장군이었다. 이청천 총사령과 이범석 참모장은 중경에 남아 중국 군사위와 군사협의를 진행했다.
 
    1943년 삼일절 경축 전시공채에서의 태극기 : 1943년 호눌룰루 [한·미 전시공채위원회]는 삼일절 경축 전시공채 발매를 개시하고 '동경폭격을 위한 비행기 구입을 도웁시다."는 선전지를 살포했다. (이때의 태극기는 건곤리감 4괘배치는 현재와 같으나, 음양태극은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상해 임시 정부 요인상과 독립 선언서에 새겨진 태극기
    김구 선생님, 안중근의사와 태극기
    이봉창 열사, 윤봉길 의사와 태극기
  


 
가져온 곳: [..]  글쓴이: 너와집나그네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