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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제 식민지 교육의 풍경

보리숭이 2005. 9. 13. 23:07
[지상전시회] 일제 식민지 교육의 풍경
광복 60주년 기념 교육자료전, 8.10~9.19 까지 독립기념관
  이정희(hee8861) 기자   
해방 60년을 넘기고도 우리는 청산하지 못한 일제 잔재에 허덕이고 있다. 또한 일본은 급속도로 우경화의 나락에 빠져들고 있다.

ⓒ2005 독립기념관
왜 아직도 우리 땅에는 친일의 헛소리가 들리고 있는 것일까? 왜 아직도 일본은 역사왜곡이나 영토분쟁으로 동아시아 전체의 골칫거리를 자처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이념들이 아직도 이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전시회가 있어 눈길을 끈다. 바로 광복 60주년 기념 교육자료 전시회 <식민지 교육의 풍경>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1910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일제가 자행한 식민지 교육의 풍경 속에서 무너져간 우리의 의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회는 독립기념관 제7전시실에서 8월 10일부터 9월 19일까지 '서원대학교 한국교육자료 박물관' 주최로 열리고 있다. 여기에서는 일제강점기 교육정책과 교과서, 교육자료, 학생 생활자료 등과 같은 식민지교육의 풍경을 엿볼 수 있는 자료 300여점이 전시되고 있다.

허물어지는 대한제국, 등장하는 식민지 교육의 뿌리 천황칙어

전시관 입구 초입에서 구한말 허물어지는 대한제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을 만나게 된다. 합방을 3년 앞둔 1907년 7월 고종황제는 제위를 순종에게 물려주고 태황제로 덕수궁에 거주하게 된다. 이 무렵 매국노 송병준을 비롯한 대한제국 대신들의 기념사진 오른쪽 끝에 반쯤 잘려나간 평상복 차림의 고종황제가 등장한다.

▲ 황태자 이은과 대한제국 관리들, 오른쪽 빨간 반원안에 평상복 차림의 고종황제가 보인다
ⓒ2005 서원대교육박물관
이는 곧 기울어가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는 한 장의 사진이다. 이후 일제의 동양 문화협회라는 단체는 1933년 이런 사진을 활용하여 일본국민의 필독서로 유명한 '개국문화80년사'를 편찬하게 된다. 일본 천황의 경우 사진의 직접촬영조차도 금지하던 당시로서는 조선 황제에 대한 모독 행위였다.

"짐이 생각건대 나의 선조들이 나라를 세운지 심히 오래 되었고 덕을 세움이 매우 두터운지라 나의 신하와 백성이 매우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워 수많은 자가 한마음으로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이룸은 이것은 우리나라 국체의 훌륭한 특징이니 교육의 연원도 또한 실로 여기에 있도다…."

1890년 발표된 '천황'의 교육칙어의 일부 내용이다. 이것은 한일합방 후인 1912년 조선총독부에게 전달되어 식민지 교육이념의 뿌리가 되었다.

이때부터 세뇌된 이념의 망령들이 지금까지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이후 식민지 조선의 교육풍경은 온통 천황의 우상화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되고 식민화를 완성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된다.

▲ 심상소학국사회도(尋常小學國史繪圖) 하권, 동경, 학습사, 1935 - '남대문 근처에서 한일합방에 환희하는 한일백성들' 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2005 서원대교육박물관

더욱 노골화 되는 천황의 우상화와 군국주의 교육

전시장 중간에는 일제가 식민지 학생들에게 '천황'을 신으로 받들게 하기 위한 우상화 자료들과,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을 미화하고 학생들을 동원하기위해 자행한 갖가지 세뇌교육의 집요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정리되어 있다.

▲ 교과서 삽화 - 학교에서의 신사참배
ⓒ2005 서원대교육박물관
1930년대 후반 이후는 일제의 대외침략전쟁이 더욱 노골화 되는 시기이다. 이와 때를 맞추어 식민지 조선의 교육풍경 또한 갈수록 군국주의 교육으로 강화되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태평양 전쟁이후 극에 달하게 된다.

이 당시 일제는 일본어와 수신교육에 큰 비중을 두고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 이념을 확장시켜 나갔다. 그러나 그에 머물지 않고 역사, 지리는 물론이고 심지어 음악, 미술, 조선어 교육을 통해서도 철저히 군국주의 이념을 주입시켜 나갔다.

식민지시대에 우리말은 국어가 아닌 조선어가 되고, 우리글은 한글이 아닌 언문(諺文:속된글)으로 불렸다.

또한 수신시간이 되면 교육칙어를 낭독하였고 중간에 언제라도 '텐노헤이카(천황폐하)'라는 말만 나오면 학생들은 듣는 즉시 차려 자세를 취해야 했다. 이렇게 일제는 황국신민교육을 강화해 나갔다.

또한 1937년 중일전을이 일으킨 이후에는 군국주의 교육이 한층 강화되었으며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에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져 완전한 전시 교육체제로 바뀜에 따라 모든 과목에 전투기, 군인, 탱크 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심지어 체조와 운동시간까지도 예비군인 육성을 위한 내용으로 채워지게 된다. 또한 국민총동원체제의 이념 주입을 위하여 국체명징(천황중심의 국가체제를 분명히 하는 일), 내선일체(일본과 조선의 일체화), 인고단련(어려움을 참고 단련함)을 강조하는 '황국신민의 서사'를 항상 제창하고 선서하도록 하였다.

▲ 초등조선어독본 제2권 1940, 우리나라 국기는 태극기가 아니라 일장기로 바뀌었다. '곡기'는 국기(國旗)의 일본식 발음이다.
ⓒ2005 서원대교육박물관

▲ 샘본 1년 상, 1942 - 숫자공부도 탱크 전투기 세는 것으로 시켰다.
ⓒ2005 서원대교육박물관

황국신민에게 베푸는 은총, 징병과 정신대

다음으로 이 전시장에는 친일파에 대한 기억과 끌려간 조선의 여인과 청년들에 대한 가슴 아픈 사연을 되새기게 하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 노천명의 시가 실린 <매일신보>의 사진순보 화보, 1944, 12
ⓒ2005 서원대교육박물관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후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원병 형태로 학생들을 동원하였으나 태평양 전쟁 말기 1944년부터는 징병제로 바꾸어 20만 명가량을 강제로 동원하게 된다.

이 무렵 노천명 시인은 1944년 매일신보에 아래와 같이 가미가제 특공대를 찬양하는 군신송이라는 시를 지어 발표하기도 했다.

이 아침에도 대일본특공대는
남방 거친 파도위에
혜성 모양 장엄하게 떨어졌으리

싸움하는 나라의 거리다운
네거리를 지나며
12월 하늘을 우러러 본다

어뢰를 안고 몸으로
적기(敵機)를 부순 용사들의 얼굴이
하늘가에 핀다
성좌처럼 솟는다


이 당시 정신대의 선발은 대개 교장들이 교사들에게 해외파견 근로정신대원의 선발을 명하였으며 명을 받은 일부 교사들은 서울 지역의 경우 '지원방식'으로 대상자를 모집하였으며 지방의 경우는 가난하고 체격이 좋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지명방식'을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당시 교사들은 11~12세의 소녀들에게 일본에 가면 한국에서는 들어가기 어려운 상급학교에 진학시켜준다거나 배불리 먹고 영화관에 갈 수 있다는 등으로 회유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들 근로정신대 가운데 일부가 시모노세키 등에서 종군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갔던 것이다.

▲ 전남 구례군 광의면의 여자 정신대원 모습, 이들은 모두 현재 초등학교 수준인 11-12세 정도의 여학생들로 보인다.
ⓒ2005 서원대교육박물관

▲ 일본군의 패전 후 미군에 의해 출입금지구역(keep out/ off limit)으로 표시된 일본군 위안소. 전면에 벗어놓은 조선여자 고무신이 보인다.
ⓒ2005 서원대교육박물관
이번 전시회는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식민지교육자료 전시회로 평가 받고 있다. 뜻 깊은 해방 60주년, 아이들 손잡고 쉽고 제대로 된 우리역사 전시회를 만나봄도 좋을 듯하다.
 
                                                                                             <출처> 오마이뉴스

 
가져온 곳: [..]  글쓴이: 너와집나그네 바로 가기